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47
3부 62화 한만 협화(韓滿協和)
하얼빈 사건에 대해 호전적인 여론과 달리, 대한제국 정부는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했다.
신임 총리이자 외무대신을 일시 겸직하고 있는 이상설은, 정부 내에서도 자유주의 온건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현시점에서 내각에 시급한 과제는 국내 정치개혁의 완수였다.
“얼마 전에 체결된 3차 한청 조약을 기조로 하되, 청 황실과 만주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존중하여 온건한 대외정책을 채택합시다.”
“군부나 여론 일각에서 만족하겠습니까?”
“만주가 대한의 사활이 걸려 있는 이익지대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단지 시간의 문제인 것이지요. 고 충문공(이완용)은 너무 서두르다 자신의 목숨까지 빼앗기게 된 겁니다. 대한의 만주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청국과 세계에 각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정부의 온건 기조에 이선도 공감했다. 그 역시 하얼빈 사건을 만주 장악의 호재로 활용하고 있지만,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 생각은 없었다.
“만주를 확고하게 대한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 만주와 대한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걸, 만주인들이 완전히 받아들이는 날까지, 확고한 협화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이선은 고등판무관으로 고위급 인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외교 경력이 많으며, 열강과의 관계도 가깝고, 만주에 대한 이해가 높고 청 황실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후보였다.
“노신(老臣)이 고등판무관으로서 만주에 가고자 하옵니다.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뜻밖에도 은퇴한 김옥균이 만주행을 자처했다.
이선은 난색을 표했다.
“경의 춘추가 곧 일흔이오. 더욱이 건강도 좋지 못하거늘. 하물며 겨울철인데, 어찌 추위가 매서운 만주로 가려고 하오?”
“비록 늙은 몸이 약하다고는 하나, 대임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선은 거듭 만류했다.
“고균, 흉도(凶徒)가 자백한 말을 보지 않았소? 저들은 첫째로는 짐, 둘째로는 고균을 적으로 지목하고 있소. 경을 하르빈에 보내지 않았기에 천만다행으로 흉수를 피할 수 있었거늘. 이번에 보내면 필히 암살하려고 덤벼들 것이오. 허락할 수 없소.”
“바로 그렇기에 신이 가야 하는 바이옵니다. 저들이 신을 삼화주의 사기꾼으로 칭했다던데, 사기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보여 줘야 합니다. 흉도의 체포로 소위 범중화주의·아시아주의 조직은 모조리 쓸려 나갔으니, 치안의 걱정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김옥균은 거듭 자신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순히 늙은 신하의 객기가 아니었다.
“금릉위가 미국으로 떠났으니, 원훈은 두 번 다시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구당(유길준)은 생애 마지막으로 저술에 집중하고 있고, 송재(서재필)도 당분간 해외에 머물며 외교에 힘쓰기로 했습니다. 이제 노신만이 남았습니다. 노신이 마지막으로 성상의 고굉이 되어, 만주에서 성상께서 원하시는 바를 얻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노신의 마지막 사명이 될 것입니다.”
“짐 역시 외교와 행정 경력이 풍부한 고위급 인사를 만주에 보내려 했소.”
“혹시 염두에 두신 인물이 있으십니까?”
“송재가 곧 파리에서 돌아오니, 그에게 맡기려고 했었소. 송재는 외교 경력이 풍부하고, 서양 열강, 특히 미국과의 관계가 두터우니까. 우남(이승만)에게 보좌를 맡기고.”
이선이 서재필과 이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자, 김옥균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송재는 훌륭한 외교관입니다. 하지만 만주에서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송재와 우남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미국 유학파들은 철저하게 서구화되었습니다. 만주와 청 황실에 대해서도 존중보다는 경멸의 감정이 훨씬 강할 겁니다. 우월의식과 경멸감으로는 절대 만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김옥균은 무릎을 꿇으며 거듭 요청했다.
“폐하! 부디 노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대한과 만주 사이의 협화, 청국 내부의 협화를 위해 신의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설령 이국에서 생애를 마친다고 해도, 한만의 협화를 이루고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선은 오랜 동지의 진심을 이해했다. 김옥균은 이대로 뒷방 늙은이로 사라지는 것보단, 만주에서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고 죽기를 원했다.
대한의 북방 진출과 삼화주의라는 젊은 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마지막 자리를 원하고 있었다.
“경의 뜻이 정 그렇다면, 좋소. 단 조건이 있소.”
“하명하시옵소서.”
“첫째,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면 즉시 사임하시오. 둘째, 또다시 암살기도가 있다면, 짐은 부득이하게 경을 소환할 수밖에 없소. 셋째, 고등판무관으로서 임기는 3년이오. 3년 뒤면 경도 일흔둘이니, 그때는 정말로 쉬어야지. 3년 안에 협화의 기틀을 만들어 주시오.”
이선은 김옥균의 능력과 진심을 믿었기에, 업무에 대한 구체적인 조건을 내걸진 않았다. 대신 안전과 건강을 당부하자, 김옥균이 눈물을 글썽이며 답했다.
“지엄한 황명을 삼가 받드옵니다.”
이선은 김옥균을 일으켜 세우고, 굳건하게 악수를 나눴다. 군신이라기보다는 동지의 예였다.
“경의 마지막 사명을 믿고 맡기겠소.”
“예, 반드시 대한과 만주의 협화를 이뤄 내겠습니다.”
* * *
1919년 12월, 김옥균은 신임 주청 고등판무관으로서 만주로 향했다.
총리까지 지낸 원훈이 맡기에는 격이 낮지 않느냐, 위험하지 않느냐는 일각의 우려도 있었지만, 김옥균은 개의치 않았다.
김옥균이 부관으로 선택한 이는 김규식이었다. 파리강화회의의 한국 실무자로, 한국 외교가의 떠오르는 총아였다. 일전에 우르가 주재 영사로 재직하며 몽골어도 구사할 줄 알았다.
김옥균은 김규식에게 만주어를 익혀 두라고 명을 내렸다.
“만주어는 만주인들조차 별로 구사하지 않는 소수언어입니다만…….”
“몽골어나 만주어나 문자가 같지 않나. 귀관의 뛰어난 언어 능력이라면 금방 배우리라 생각하네.”
김규식은 한국 외교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언어 능력자로, 무려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라틴어·일본어·중국어·몽골어 등 8개국어를 할 줄 알았다. 이제 김규식의 외국어 목록에 만주어도 들어갈 예정이었다.
“변발호복으로 만주인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시대는 끝났네. 앞으로 만주 지배층에서는 인위적으로라도 만주어를 쓰게 만들어야 할 거야. 우리는 새로운 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하네. 만주는 중국과 별개의 국가이자 민족이라는 걸 확실히 확립시켜야 하네.”
“예, 알겠습니다.”
“서두를 필요 없네. 어차피 만주에 사는 기성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대청 황제를 섬기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신민이자 농민이야. 대한에서 봐서 알 수 있듯이, 토지 문제를 해결해 주면 농민들의 충성심은 확보할 수 있네. 중화민국의 혼란과 비참함을 보면 말할 것도 없겠지.”
한국은 만주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한족 대부분을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빈농 출신으로, 중국인이라는 민족 정체성보다는 농민이자 대청 신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 혼란에 빠진 중국에 비해 확연히 유리한 농민의 처지는, 이들이 청국에 충성을 바칠 요인이 충분했다.
“문제는 먹물 먹은 젊은 친구들이지. 교육정책부터 철저하게 뜯어고치자고. 대전쟁의 선전정책도 아주 유용했지. 이를 모범으로 삼아, 만주에 확고한 협화 모델을 만드세.”
김옥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영국-이집트 모델 혹은 미국-필리핀 모델이었다.
명목상 오스만의 신하였던 이집트 태수의 주권을 영국이 표면적으로는 존중하고, 1922년에는 왕국으로 독립도 약속했다. 물론 실질적으로 내정과 경제, 외교와 군사 전 영역에서 영국인 고문들이 장악했다.
필리핀 공화국은 원역사와 달리 독립을 유지하고 있으나, 친미 괴뢰정권이 수립되어 미국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를 문명화의 이름으로 정당화했고, 필리핀이 발전을 이뤄 내어 1930년대가 되면 완전한 자주권을 돌려주리라고 약속했다.
파리에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직접 경험한 김규식이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도나우 연방 모델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가 동등한 연방을 구성하고 열강의 독립보장을 받은 것처럼, 대청국도 만주-몽골-신강-티베트가 동등한 연방을 구성하고 한국의 독립보장을 받는다.
도나우 연방이 유지되는 대신 독일과의 통합이 법적으로 영원히 금지되었듯이, 대청국도 중국과의 통합이 영원히 금지되어야 할 터였다.
“정책은 표면적으로 세련되어야 합니다. 과거와 같은 제국주의 정책이 아니라, 새로운 국제질서에 부응한다는 형태로 말이지요.”
“옳은 말이네.”
김규식 본인의 속내를 말하자면, 그는 대한제국의 국익을 위해 노력하는 외교관이지만 동시에 반(反)제국주의자였다.
파리에서 너무나도 많은 열강의 위선을 본 김규식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옛 스승인 윌슨에게도 실망했다. 본인도 제국주의 국가 대열에 합류한 한국 외교관이라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을 뿐이었다.
“나는 중국의 압제로부터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고 근대화를 이룩한 한국만은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한국도 어쩔 수 없는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이군요.”
파리 리츠 호텔에서 만난 안남(베트남) 유학생은 김규식에게 한탄의 말을 내뱉었다.
유학자 가문 출신으로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을 지닌 그 유학생은 한국 황제의 열렬한 신봉자로서, 일부러 이선이 묵게 된 리츠 호텔의 요리사로 취직할 정도였다. 하지만 황제에게 직접 안남 독립의 대의를 전달하려던 시도는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혔다.
실랑이 과정에서 김규식이 베트남 유학생의 서한을 접수했고, 그와 친분을 갖게 되었다.
“대한은 이제 막 열강의 문턱에 섰을 뿐입니다. 서양의 지지를 받지 않고서는 국익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는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우방입니다. 다만 한국인들은 안남의 처지를 진심으로 동정합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진정으로 독립을 되찾게 되는 날이 올 겁니다.”
“귀국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으로 가는 안남 유학생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요. 약소국이었던 한국이 어찌 그렇게 강해졌는지 알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렇지요. 응우옌 선생도 한국에 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강의 배움을 익혀 보십시오. 내가 외무부 장학금을 알선해 드리지요.”
김규식은 젊은 베트남 유학생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에게서 마치 자신의 10년 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김규식 자신도 독립을 위해 이런 이들과 함께 손을 잡았을 것이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남의 독립이니까요. 앞으로 제가 걷는 길은 모두 안남 독립에 기여하는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지요.”
‘애국’이라는 가명을 지니고 있는 29세의 청년 응우옌아이꾸옥(阮愛國)은 김규식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 젊은 애국적 민족주의자의 또 다른 가명은 호치민(胡志明)이다.
김규식은 문득 베트남 청년 애국지사가 생각났다. 한국을 향한 아시아의 희망을 지금으로선 외면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양 열강과 똑같이 착취자로서만 아시아를 대하면 안 될 일이었다. 한국은 아시아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바로 그렇기에, 한국의 새로운 만주 정책은 세계에 모범이 될 협화 정책이 되어야 했다.
“한국인이 만주인의 지배자로서 군림하면 안 되네. 한국인과 만주인, 몽골인은 형제 민족이라는 걸 끊임없이 강조해야 하네. 더 나아가 일본인과 중국인도 우리의 형제가 될 수 있겠지. 우리는 아시아 제민족의 맏형으로서 형제들을 보살피고 이끌어야 하네.”
김옥균은 자신보다 꼭 30년 어린 김규식의 이상주의를 이해했다. 그 자신도 젊었을 때 그런 이상을 품지 않았던가. 비록 지금은 늙었지만, 여전히 가슴 한 가닥에 아시아의 단결이라는 이상이 남아 있었다.
콜록, 콜록, 콜록.
김옥균이 문득 마른기침을 쏟아 내자, 김규식이 걱정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대감?”
“아, 괜찮네. 확실히 만주가 춥긴 춥구만. 금방 적응할 테니 걱정 마시게.”
“꼭 진찰을 받으십시오. 제 처남이 만주에서 병원을 하고 있습니다.”
“아, 김필순 선생이 자네 처남이지. 잘 알지. 페스트 방역의 공로자 아닌가.”
“예, 특히 폐가 제 처남의 주 전공입니다.”
김규식은 만주 폐페스트 방역의 공로자인 김필순의 누이와 결혼했다.
의사 처남을 둔 덕인지, 김규식은 김옥균의 폐에 문제가 있다는 걸 짐작했다.
“하하, 알겠네. 꼭 찾아가서 진찰을 받지. 선생의 진찰을 받으면 깨끗이 나을지도.”
김옥균은 일부러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자신이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리라곤 이미 짐작하는 바였다.
단지 주군이 내린 명령, 조속히 한만 협화의 기틀을 쌓으라는 명을 완수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
‘늙은 몸이 그때까지만 버텨 주면 된다.’
성경 황궁에서 선통제를 알현한 김옥균은 외국 신하의 예로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외신(外臣) 옥균은 대청의 고등판무관으로서, 대청 황실을 확고히 받들고, 대청의 주권을 지키며, 영토의 보전을 확립하겠습니다.”
“경에 대한 짐의 기대가 큽니다. 경이 한국에서 경장을 이끌었듯, 부디 짐을 도와 대청의 경장을 도와주십시오.”
“기필코 그리하겠습니다. 외신의 마지막 충정은 오직 만주를 향할 뿐입니다.”
김옥균은 대전에서 물러날 때도 뒷걸음질로 나섰다. 14살인 선통제 부의는 김옥균에게 손자뻘이었지만, 그 지극한 예법은 마치 주군인 대한제국 황제를 대하는 것 같았다.
“김 공이 직접 오게 되어 기쁨과 동시에 송구한 일입니다. 이완용 공이 그렇게 가 버렸으니…….”
청국의 실력자인 숙친왕 산기는 김옥균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숙친왕이 새삼 이완용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자, 김옥균이 미소를 지었다.
“숙친왕 전하. 비록 양국 간에 일시적으로 불행한 일이 있었다지만, 크게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대청은 대한의 형제국이요, 한인과 만주인은 형제민족입니다. 형제의 의는 사소한 일로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대청의 경장을 위해 힘쓸 뿐입니다.”
“과연 그렇지요. 앞으로 폐하를 도와 잘 부탁드립니다.”
김옥균은 친한파이자 확고한 만주 부활주의자인 숙친왕 산기와 손잡고, 한족에 상당히 동화되어 버린 만주족의 민족성을 ‘되살리는’ 정책을 추구했다.
만주에 사는 한족들 역시, 대청국의 신민으로서 만주족과 같은 ‘만주국민’이라는 별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강유위가 부르짖는 ‘보황’이 다시금 강조되었다.
“대한과 대청이 하나의 가문으로 이어진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이 있겠습니까? 일전에 제가 말씀드린 국혼 문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나야 환영할 일이지요. 그런데 정녕 귀국에서 괜찮은 겁니까? 황태자 전하는 장차 황제가 되실 분인데, 내 여식들은 친왕의 딸이니…….”
올해 54세인 숙친왕 산기는 1명의 정비, 5명의 후실을 통해 무려 21남 17녀를 두었다.
청 황족들 중에선 깨어있는 인물인 산기는 아들딸 막론하고 근대적 교육을 시켰다. 예컨대 장남의 경우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관직에 올라 아버지를 보좌하고 있었다.
숱하게 많은 자식은 아들딸 가리지 않고 유학을 보냈고, 행선지도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한국으로 다양했다.
“대청 황제 폐하께선 연소하신 데다 그 누이도 어리시니, 국혼의 대상으로 고려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친왕의 영애들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소만.”
아무래도 지리적 특성상 가까운 일본과 한국에 유학이 집중됐는데, 특히 근래 들어서 한국과 관계가 두터워지면서 서울로 유학 보낸 자식도 여럿이었다.
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 아들도 있었고, 여자대학에 입학한 딸도 있었다.
바로 그 딸이 한국 황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한만 양국의 협화는 인적 결합으로 완성될 겁니다. 황실의 결합만큼 더 상징적인 게 있겠습니까? 곧 대한 황제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