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52
3부 67화 정당정치의 시대
이승만이 안창호와의 협상 결과를 보고하자, 개화당 내부의 의견이 갈렸다.
“법무부는 그렇다 쳐도, 내무부를 내놓으라고? 내무부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모르나?”
“아니까 요구하는 거지요. 신민당은 행정, 인사, 경찰, 노동 문제에 손을 대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요! 내무, 외무, 탁지, 군무 4부는 절대 내줘선 안 됩니다!”
“차라리 진보당과 협상하시지요? 진보당에 운을 한 번 띄워 보니, 신민당만큼 많이 요구하지 않을 태도입니다.”
“지역도당에서 전봉준이나 손병희의 입각을 원치 않을 터인데요?”
“골치 아프게 따질 거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권력을 나눠야 합니까? 원래대로 돌아가서, 무소속 21명 받아들여 단독 과반으로 가지요!”
“권력을 나눠서 비효율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리수를 두더라도 단독정부로 가는 게 낫습니다.”
개화당뿐만 아니라 정당 정치가 익숙하지 않은 대부분의 한국인은, ‘연립정부’나 ‘권력 분점’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이상설이 입을 열었다.
“개화당 동지들. 왜 국민이 우리에게 1당은 허용했지만 예전처럼 과반은 불허했겠소이까? 야당과 연정하여 협치를 하라는 의미외다. 또한 성상께서, 왜 예전처럼 총리와 대신들을 지명하지 않으시고, 정당 간의 협상을 통해 내각을 선출하라 하시겠소이까? 정녕 여러분은 어심이 짐작되지 않는단 말이오?”
“…….”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성상께서는 보통선거를 실시한 김에, 정당정치와 연립정부가 잘 돌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으신 게요.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예전처럼 편리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우리는 신하된 도리로 군주의 뜻을 따라야 하고, 정치인으로서 민의를 존중해야 하오. 그게 우리가 연정과 협치를 해야 할 이유요. 나는 신민당의 요구를 받아들이겠소.”
이상설의 논리적인 설득에 개화당 지도부도 결국 연정의 전권을 총리에게 위임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남, 자네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난 내무부와 주요 부처 몇 개를 넘겨준다고 해서 개화당의 지배력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물론입니다, 각하. 지난 36년 간, 관료는 곧 개화당과 일치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각료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서, 모든 관료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 건 아니지요.”
이상설은 이선의 충신이자 근대적 정치인임 동시에, 현실정치가였다.
과연 황제의 뜻을 받들고 민의를 존중하기 위해, 야당과 연정을 수립하여 요직을 넘겨줄 준비는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권력의 절반을 넘겨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관료 조직은 일반적으로 복지부동에 가깝고, 대한제국의 경우에는 개화당이 지난 36년간 근대화를 이끌어 왔기에, 관료의 개화당 지향성은 당연했다. 부처 상부는 신민당이 차지해도, 실무에 잔뼈가 굵은 관료들은 내심 개화당의 편을 들 터였다.
“저도 그걸 알기에 도산에게 내무부를 내줄 수 있다고 암시했습니다.”
“그래, 역시 우남의 정무감각은 뛰어나군. 머리 굳은 정치가들하고는 달라. 자네는 앞으로 외무대신으로서 대조와 정부를 연결하는 고리이자, 개화당과 신민당을 이어 주는 다리가 되길 바라네.”
“예, 각하. 성상과 국가를 위하여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이승만은 겸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면서도,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며 윌슨의 제자로 명성을 떨치고,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에 이어, 정당정치의 화신으로 자리매김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최고 권력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이승만의 목적이 권력 그 자체였다면, 그의 협조자이자 미래의 라이벌인 안창호에게 있어 권력은 수단이었다.
국가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선 권력은 필수였고, 그러기 위해서라면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개화당과의 협상을 통해, 주요 각료직을 확보했습니다. 내무부와 법무부는 확정됐고, 추가로 몇몇 부처도 입각 가능할 듯합니다.”
“오오! 그 개화당이 이렇게까지 양보하다니.”
“도산의 협상력이 뛰어난 덕이지. 훌륭하네, 도산!”
“과찬이십니다. 투표로 증명된 민의가 연정을 의무로 만들었고, 성상께서 개화당을 억제하여 단독정부 출범을 막으신 덕이지요.”
“암, 암. 성상의 덕이요, 국민의 지지 덕이지.”
오랜 야당 생활을 해 온 신민당 원로들은 연립정부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만족했다.
“도산이 신민당을 대표해 왔고, 협상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니, 내무부에는 도산이 입각하도록 합시다. 동지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신민당 중진 이동녕(李東寧)의 추천에 안창호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내무대신을 맡기엔 제가 너무 경험이 부족합니다. 마땅히 관직 경험이 있으신 분이 맡으셔야지요. 탁지부 재무관을 역임하신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님이 더 적합합니다. 저는 그 밑에서 국장 자리를 수행하면 충분합니다.”
안창호의 겸손은 빈말이 아니었다.
내무대신은 요직이었고, 내각 서열도 높았다. 젊고 관직 경험이 일천한 안창호가 대신을 맡으면, 개화당은 물론이고 야당에서도 불평이 나올 수 있었다. 안창호는 내무부 산하 노동국을 맡아 노동자 처우 개선에 앞장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원, 경험이 부족한 건 채우면 그만이네. 도산 자네는 신민당의 상징이야. 자네가 내무부의 개혁을 진두지휘해야 하네. 우리 늙은이들은 명예직을 맡아도 충분하네.”
신민당 최고 원로 이상재도 안창호의 입각을 권했다. 70대의 이상재는 최초의 주미 외교관이자 개혁운동가로서, 믿음직한 후속세대들이 나타났다는 데 기쁠 따름이었다.
“도산이 내무부를 맡아 주게. 이는 총재로서의 명령이기도 하네.”
총재 박은식과 부총재 양기탁도 안창호에게 입각을 거듭 권유했다.
이미 원로들 사이에서는 안창호를 내각 내 신민당의 대표자이자 차기 지도자로 합의한 터였다.
“여러 선생님들의 중론이 그러하시다면, 소생은 마땅히 따르겠습니다.”
“음, 그래야지. 백범.”
“예, 총재님.”
박은식은 백범 김구(金九)를 지목했다.
본래 본명이 김창수인 김구는, 1919년 9월 의거 이후 자신의 이름을 ‘구(九)’로 개명했다.
대한국 민본주의의 기원이 1919년 9월 의거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상기시키는 개명이었다.
“도산의 능력과 인품은 부족함이 없으나, 사람이 너무 점잖아서 걱정이네. 백범의 그 단호함으로 도산과 함께 내무부를 맡아 주게.”
대신은 자신을 보좌할 정무차관을 임명할 수 있었고, 신민당은 안창호의 보좌역으로 김구를 추천했다.
“이 백범(白凡)은 아호처럼 어리석은 자입니다. 내무부의 문지기만 해도 족합니다.”
김구는 겸손한 자세로 사양의 뜻을 보였다.
신민당 황해도당위원장인 김구는 당내에서도 독특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동시에 국가 코포라티즘 성향을 보였다.
모든 국민은 단결해야 했다. 국민의 단결을 방해하는, 출신이나 자산에 의한 차별은 사라져야 했다.
“원, 지나친 겸손은 당치 않네. 개혁을 추진하려면 뚝심과 단호함이 있어야 해. 그런 점에서 신민당에 자네만한 사람이 없네. 도산의 생각은 어떤가?”
“저야 백범 선생이 함께 일을 한다면 바라던 바이지요.”
“여러 선생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불초 김구가 감히 대임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김구는 내무차관 자리를 받아들였다.
안창호가 김구에게 기대하는 바는, 내무부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상대가 될 치안국·경무청(경찰)의 전면적인 개혁이었다.
4월말, 마침내 개화당과 신민당의 연정 협상이 완료되었다.
절차상 대리청정 중인 소조의 승인, 의회로부터의 표결과 선출, 국가원수인 황제의 최종 재가가 남아 있었으나, 사실상 확정된 상태였다.
“민의에 의해 선출된 정당이 합의에 도달해 내각을 선출하게 되었으니 기쁠 따름이오. 대조를 대리하는 소조로서 개화당과 신민당에 조각(組閣)을 명하는 바이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사실 이진은 이러한 절차가 이해되지 않았다.
‘예전처럼 황제가 총리와 내각을 지명하면 될 일을, 왜 이토록 지루한 협상 절차를 거쳐야 한단 말인가? 황제가 가장 유능한 신료들을 임명하면 되는 일 아닌가? 다행히 이번에는 괜찮았지만, 장차 정치꾼들이 밀실 야합으로 자리를 나눠 먹으면 어떡할 건가?’
이진은 동양, 아니 이 시대에 서구를 제외한 대부분 나라의 지도자가 그러했듯 정당정치에 부정적이었다.
당장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지녔다는 독일 공화국만 해도 정당이 난립하여 혼란을 거듭하지 않는가?
“대한의 정치 발전, 민의 확대, 민권 신장을 위해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정치가 필요하다. 러시아와 독일이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귀족과 군부의 득세로 이어졌고, 결국 혁명이라는 귀결로 이어지지 않았느냐. 소조는 명심하여라. 장차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국가는 영국이다.”
이선은 아들의 속내를 눈치채고, 의문점을 풀어 주었다.
1920년대야말로 정당정치를 실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대전쟁의 종전 이후 보통선거권은 세계적 추세가 됐고, 한국의 민권의식이 크게 함양됐으며, 세계 각국은 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민의를 따라야 했다.
역사가 바뀌었기에 어찌 될지 모르지만, 만약 1930년대에 대공황의 시대가 도래한다면, 정당정치는 실험할 틈도 없이 폭풍우에 휘말릴 것이다. 10년 동안 착실히 준비해서 기틀을 닦아 놔야 했다.
“소자는 대조의 깊은 뜻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진은 부황의 뜻이라면 모두 따를 용의가 있었다.
설령 자신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위대한 지도자인 부황이 절대적으로 옳으리라.
* * *
광무 24년 5월 5일.
제5회 총선거 결과에 따른, 제8대 총리 이상설의 조각 발표가 있었다.
5월부터 총리의 명칭은 ‘내각총리대신’에서 ‘국무총리대신(國務總理大臣)’으로 변경되었다.
국무총리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국무를 대표하는 대신으로 공인된 것이었다.
보통 원로가 임명되는 명예직이었던 참정대신은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개명되어, 연정 소수당을 상징하는 2인자인 부총리 겸 정무장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터였다.
국무총리대신 이상설 (50세, 개화당)
내각의정대신 박은식 (62세, 신민당)
외무대신 이승만 (46세, 개화당)
내무대신 안창호 (43세, 신민당)
탁지대신 이시영 (53세, 개화당)
군무대신 이동휘 (48세, 군부)
법무대신 홍 진 (44세, 신민당)
학무대신 오세창 (57세, 개화당)
농림대신 이동녕 (52세, 신민당)
상공대신 이승훈 (56세, 신민당)
교통대신 신규식 (42세, 개화당)
내각총서(총리 비서실장) 이종호(36세, 개화당)
내무협판 겸 치안국장 김구(45세, 신민당)
원수부 참모총장 노백린 (46세, 군부)
기타 등등 ……
“민의원과 중추원, 의회의 절대다수 찬성으로 새 내각이 출범되었음을 알립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제국 역사상 최초의 정당내각은 의회에서 무난히 선출되었다.
개화당과 신민당은 당연히 전원 찬성표를 던졌고, 무소속도 대부분 찬성했다. 야당인 진보당과 신한청년당도 무조건 반대하지 않았다.
개화당은 신민당에게 9개 부처 중 4개를 내주는 통 큰 양보를 했다.
각종 개혁을 주도할 내무부와 법무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지만 산업 정책을 추진할 농림부와 상공부.
입각한 인사 중 박은식과 이동녕은 신민당의 지도부요, 이승훈은 평안도 신흥 상공인을 대표하여 입각했고, 홍진은 개혁적인 법관 출신이고, 안창호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너무 양보했다는 개화당 내부의 불만도 없지 않았으나, 군부와 관료 조직의 지지를 받는 개화당 지도부로서는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완전히 소외됐군.”
“역시 개화당 놈들은 우릴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거요.”
연정에서 배제된 진보당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의석수가 50석으로 대약진했음에도, 개화당은 여전히 그들을 상종 못 할 ‘천것들’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신민당도 ‘천것들’이 많다지만, 서양에서 선호하는 ‘부르주아지’ 정당 아닌가?
“우린 이미 이번 선거를 통해 대약진했소. 다음 선거에서 자력으로 정권을 잡을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개화당과의 연정은 불가능해도, 만약 우리가 1당이 되면 신민당도 우리가 내미는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거요.”
진보당 지도자인 손병희와 전봉준은 후일을 기약했다. 60세인 손병희, 66세인 전봉준 모두 나이가 적지 않았다. 이제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농민의 당이라는 별칭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농민이 반드시 진보당에 투표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도 드러났고. 지금처럼 천도교 교세에 의존해서도 안 됩니다. 유림, 불교, 기독교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종교색은 빼야 합니다.”
“음, 그렇다면 어디서 당세를 확장할 수 있겠소?”
“도시로 진출해야 합니다. 지식인과 노동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당을 만들어야지요.”
“신한청년당과 손을 잡아야 한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노농 선거연대 정도가 아니라 합당까지 추진해야 합니다. 이제 농민당이 아니라 노농당(勞農黨)이 되어야 합니다. 몽양과 소앙은 충분히 우리를 대신해서 새로운 진보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봉준은 자신의 후계자로 진보당 내부가 아닌, 외부의 여운형과 조소앙에서 찾았다.
점점 노쇠화 되고, 구시대의 목가적인 농촌 유토피아 상에 갇혀 있는 진보당 지도부가 아니라, 새로운 산업사회에 맞는 노동자-농민-지식인의 지도자.
빼어난 연설가인 대중정치인 여운형, 탁월한 삼균주의 이론가인 조소앙은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지만 충분히 미래의 지도자로서 자격이 보였다.
“당 내 반발이 적지 않을 터인데요.”
“우리도 늙었어요. 언제까지 녹두(전봉준)고 의암(손병희)입니까. 이제 우리 늙은이들의 시대가 지났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4년 뒤에는, 이 젊은이들이 진보의 상징이 되어 총선에 나가야 합니다.”
전봉준의 진심어린 설득에, 손병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신민당도 도산 안창호라는 청년들의 우상을 발굴해서 저기까지 오른 게 아니겠소. 이제 몽양이 새로운 우상으로 떠오르고 있지. 신한청년당이 외치는 삼균주의는 진보당의 주장과 닿는 측면이 있으니, 연대를 준비해 봅시다.”
“예. 좋은 날을 잡아서, 제가 몽양을 만나 보지요.”
내각 선출 결과를 받아 든 이선은 기쁜 마음으로 최종 재가를 했다. 젊고 참신한 내각이었다.
‘음, 독립운동가 올스타 같군. 대부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이 아닌가.’
입각한 인사들 절대다수가 능력이 검증된 인사들이자, 공교롭게도 원역사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역사가 바뀌었으니 이런 긍정적인 효과도 있군. 하긴,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충분히 국가를 이끌 자리에 오르고도 남을 사람들이지. 앞으로가 더욱 기대가 되는군!’
이선은 새삼 감개무량했다.
국권피탈과 식민화로 인해 가능성이 빼앗겼던 사람들이, 식민지 ‘조센징’이라고 모욕당하고 기회가 박탈당할 필요 없이, 정당한 자신의 몫을 되찾고 있었다.
앞으로 더욱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꽃피우게 되리라.
이선 자신이 뿌린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마침내 거목으로 자라나, 꽃을 피우고 결실을 빚고 있었다.
바야흐로 민본주의와 정당정치의 시대, 국민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