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53
3부 68화 아시아-태평양의 미래
대한제국의 정치적 진보는 이웃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한창인 일본에서는 부러움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에서는 보통선거권을 부여하고, 국민투표에 의해 정부가 선출되었다!”
“분명 헌법도 일본이 먼저 제정하고, 선거도 일본이 먼저 시작했는데, 어찌 정치적 발전의 속도는 한국보다 훨씬 느리단 말인가?”
“정부는 속히 국민에게 보통선거권을 허용하라!”
한국의 총선거가 시행될 무렵, 공교롭게도 일본에서도 중의원 총선이 있었다.
1890년 최초의 선거에서는 인구의 1% 정도만 투표할 수 있었던 일본도, 이 무렵에는 신해혁명과 한국의 변화에 자극을 받아 투표권이 확대되었다. 남성 인구의 약 20%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신속한 변화에 비하면 뒤떨어져 보였다.
“우리 당이 이번 총선거에서 승리하면, 반드시 보통선거 개혁을 하겠습니다!”
여당 입헌정우회, 야당 헌정회와 입헌국민당은 경쟁적으로 보통선거권 공약을 했다.
입헌국민당 총재인 이누카이 쓰요시나 헌정회 간사장인 ‘헌정의 신’ 오자키 유키오는 원래 보통선거를 지지하는 입장이니 그렇다 쳐도, 헌정회 총재 가토 다키아키나 입헌정우회 총재이자 총리대신 하라 다카시는 본심이 아니었다.
“입헌정치! 정치혁신! 책임내각제 성립! 노동조합 공인! 해군 확장!”
외무대신으로서 중국에 13개조 요구를 강요했던 가토는 국내외의 거센 비판을 받고 실각한 후 민간 정치인이 되었는데, 골수 친영파답게 영국식 정당책임내각제를 지향했다.
즉,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대내적으로는 자유주의’라는 시대정신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일본 국민의 정치적 성숙은 아직 이르다. 주체성 없는 우민들에게 투표권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특히 민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은 위험하고 경박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세계의 대세가 그러하니…….”
‘쌀 소동’ 이후 일본 최초의 정당 주도 내각을 성립시킨 ‘평민재상’ 하라 다카시.
원로의 정치적 개입을 완전히 차단하고, 군부를 제압해 문민통제의 기틀을 마련하며, 고등교육 예산 증대, 선거권을 확대하는 등 다방면의 개혁을 시행했지만, 보수적 자유주의자답게 즉각적인 보통선거권 부여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한국발 개혁의 여파는 하라와 입헌정우회도 보통선거를 고려하게 되었다. 하라 자신도 일전에 주한공사를 지내며 이선과 친분을 맺은 바 있으며, 일본 내 지한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제14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입헌정우회 압승! 전체 464석 중 과반이 넘는 278석!」
일본 국민은 여당인 입헌정우회에 힘을 실어 줬다.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보통선거를 공약으로 내건 상황에서, 보수주의자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도 가장 힘이 있는 여당에 몰표를 던져준 것이었다.
“정말 보통선거권 개혁을 실시하실 겁니까?”
“국민과의 약속이니 지켜야지.”
“이토 공작께서 즉각적인 보통선거권 개혁에 우려를 표하셨습니다.”
“아니, 그 영감탱이는 팔순이나 되고선 아직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우려는 알겠으니 정양이나 잘하시라고 전하게.”
역사의 변화로 나이 80까지 장수 중인 이토 히로부미는 전직 총리이자 입헌정우회 창설자로서 보통선거권 개혁에 반대했으나, 이미 원로의 정치적 개입을 차단한 하라는 무시했다.
하라의 정치적 후견인인 사이온지 긴모치도 보통선거권에는 미온적이었으나, 선거에서 승리한 하라는 즉각 개혁에 착수했다.
“야당이 압박해서 보통선거권 개혁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우리가 주도하는 모양새가 낫다.”
여당 입헌정우회, 야당 헌정회와 입헌국민당이 모두 보통선거권 개혁에 동의함에 따라, 보통선거법 제정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다이쇼 9년(1920) 6월 10일, 중의원은 다수의 의결로 보통선거법 제정을 확정했다.
절차상 귀족원 및 추밀원의 재가와 천황의 승인을 필요로 했지만, 중의원의 가결로 사실상 확정되었다.
일본 국적을 지닌 만 25세 이상의 성년 남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차기 총선부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단 투표권은 ‘내지(內地)’에 한정되어, 식민지 대만과 가라후토(사할린)은 대상이 아니었다.
“보통선거 확립!”
“민본주의 만세!”
“다이쇼 데모크라시 만세!”
1880년대부터 논의되었던 보통선거가 마침내 확립되자, 민권파들은 크게 기뻐했다.
“보통선거 쟁취는 국민의 오랜 투쟁의 결과지만, 여당이 받아들인 건 역시…….”
“뭐, 보수적인 정치가들도 러시아 혁명과 한국의 변화에 자극을 받은 건 분명한 사실이지.”
“과연 일본은 동양의 영국이요, 한국은 동양의 프랑스로다.”
“동아에 자유의 서광이 비치는구나!”
원 역사보다 5년 빠른 개혁이었다. 이는 다분히 변화한 역사, 특히 대한제국의 개혁 영향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동양의 선두주자라는 자부심이 있었으나, 한참 뒤떨어져 보였던 것처럼 보였던 조선이 어느새 일본을 따라잡더니, 마침내 정치 분야에 있어서 일본을 앞지르기 시작하자 큰 자극을 받았다.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개혁은 동아시아의 역사도 변화시켰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도 변화한 역사의 수혜자라 할 수 있었다.
“동양의 영국을 자처하려면, 세계를 주름잡는 함대를 건설해야겠지요?”
“옳소! 새로운 8·8 함대 건설!”
“해군 예산을 증대합시다.”
러일전쟁 이후 몰락한 일본 육군과 달리, 해군은 상승일로를 달렸다. 해군 출신 총리를 배출하고, 국가 정치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해군 수뇌부는 새로운 입헌정치에도 빠르게 적응했고, 하라의 요구대로 문민 총리가 유사시 육·해군 대신을 겸직할 수 있는 개혁에도 동의했다.
육군은 문민통제에 격렬히 반발했지만, 입헌정치의 한 축이 된 해군은 흔쾌히 동의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해군은 문민통제에 응한 대가로, 원하는 대로 예산을 확보했다.
여야 모두 해군 예산의 확장에는 반대가 없었으니, 숙원인 8·8 함대의 건설에 나섰다.
보통선거법이 제정될 무렵, 새로운 해군예산도 중의원을 통과했다.
“에, 내년도 예산은 15억 8천만 엔으로 증가합니다. 이의 없지요?”
“찬성합니다!”
“제국국방방침 개정에 의거, 건함 정책을 실시합니다. 전함 8척과 순양전함 8척, 8개년 계획으로 초기 예산 5억 5천만 엔을 배정합니다.”
“찬성! 대일본제국 만세!”
일본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최신형 전함 8척과 순양전함 8척 건조를 골자로 하는 8·8 함대 계획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전함과 순양전함만을 건조할 수는 없으니, 순양함, 구축함, 호위함, 어뢰정, 기타 등등을 포함하면 무려 103척을 필요로 했다.
기존의 함대, 구형 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도 예비대로 남겨 두었다. 영국과 미국의 뒤를 잇는 세계 3위의 해군력 구상이었다.
“근데 이래서야 당분간 국가 예산의 3할은 들어갈 터인데요? 아무리 호황이라지만, 호황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젠 유럽의 전쟁도 끝났는데.”
“신성한 제국의 국방을 위해서 돈이 문제입니까! 해군력의 우위야말로 섬나라 일본의 국력입니다!”
“육군 예산 깎으면 되지. 거 자꾸 육군이 시베리아 파병하자고 헛소리하는데, 육군 좋으라고 파병하나? 러시아 문제는 한국이 알아서 하라고 하시오.”
“옳소! 우리는 이제 태평양으로 진출해야 합니다. 미국 태평양함대를 능가하는 해군력을 건설합시다!”
북수남진, 대양진출 정책을 취한 일본제국의 목표는 남양군도-태평양이었다.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거함거포주의에 도취된 일본 해군은, 대형 함정 건조를 밀어붙였다.
아무리 ‘대전경기’라는 유례없는 전시 대호황으로 일본의 부가 크게 증대했다지만, 1920년이 되면 전시 특수는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초기 계획이라지만 국가 예산의 3할을 투입한다는 건 현실적인 입장에서 보면 무리수였고, 일본 정부도 인지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쓰시마 해전에서 압승을 거두고 대전쟁기 지중해에서도 활약한 해군은 적극적인 프로파간다를 펼쳤고, 국민적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전함! 더 많은 전함!”
“황국 일본의 국위는 전함으로 상징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군 예산은 확보하라!”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해군력 증대는 상충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졌다.
카이저 빌헬름 2세의 건함정책이 독일 국민, 특히 부르주아지와 중산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것처럼, 일본도 국민적 열광을 보냈다.
역사가 변화했다고 해서 일본 제국의 야욕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단지 방향이 대륙에서 대양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 * *
일본의 건함정책을 본 대한제국, 특히 이선의 반응은-.
“열심히 많이 건조하길 바랍니다. 일본 해군의 확장은 대한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니, 하하!”
대한제국은 대륙에 투사할 육군력 확대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건함경쟁에 뛰어들 생각도 없었다.
신임 참모총장에 취임한 노백린은 해군력의 열세를 공군력의 확장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한국 내에서 최고 공군 전문가로 통하는 노백린은, 이선이 처칠과 밀약한 대로 영국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한국형 전투기의 개발에 나섰다.
현재의 한국으로선 일본의 해군력 증대가 즉각적인 위협이 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이 위협을 느끼겠지. 이대로 가면, 역사대로 해군 군축회의 열자고 하겠지? 영국도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영일동맹에 매진하지 않을 거고. 장차 일본이 미국과 대립한다면, 대한이 미국과 손잡을 여지는 더 커지겠지.’
일본 정부나 해군 수뇌부는 현실감각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감히 미국에 맞설 생각은 없었으나, 일본의 가상적국 1호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미국 역시 일본의 태평양 진출에 불쾌한 반응을 보였고, 미국의 가상적국으로 일본이 떠오르고 있었다.
1920년 현재 미일관계는 아직 우호적이었으나, 상대에 대한 경계는 커져 가고 있었다.
“미합중국 192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레너드 우드를 선출합니다!”
“우드! 우드!”
1920년 6월 12일,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전 참모총장, 전 동부전선군 사령관 레너드 우드(Leonard Wood) 장군이 선출되었다.
대전쟁에서 우드보다 더 많은 전공을 세운 유럽 파병군 사령관 퍼싱 장군도 은근히 대통령 출마를 기대했다가, 공화당 내에서 우드가 우세를 잡자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역사의 변화는 1920년 공화당 대선 후보를 하딩이 아닌 우드를 선출하게 했다.
원역사에서도 우드가 1위를 달리다가, 공화당내 여러 계파들의 대립으로 지독한 교착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전혀 대선후보로 고려되지 않았던 워런 하딩(Warren Harding)이 파벌 간의 타협으로 선출되었다.
변화한 역사는 ‘동부전선의 승리자’ 우드를 무난히 대선후보로 선출하게 하였다.
“감사합니다, 공화당 동지 여러분! 대책 없는 윌슨의 이상주의를 몰아내고, 미합중국을 정상으로 되돌리겠습니다! 세계질서의 수호자, 자유의 수호자 미합중국 만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진보당’ 계파를 이어받은 우드는, 전통적인 고립주의와 윌슨의 이상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세계질서 개입주의자였다.
남북전쟁의 영웅 그랜트 장군 이래 50년 만에, 유력한 군인 출신 대통령 후보였다.
“우드 장군이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고? 그럼 공화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어도 상관없겠군.”
이선도 윌슨 앞에서는 그의 뜻대로 세계가 만들어질 거라고 극찬했지만, 윌슨의 임기는 어차피 1921년 초까지였다.
베르사유 조약 승인과 국제연맹 창설에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 윌슨은, 상원 다수당인 민주당과 공화당내 시어도어 루스벨트 계파의 지지를 받아 가까스로 조약 승인과 국제연맹 가입을 통과시켰다.
미국의 베르사유 조약 승인과 국제연맹 가입은 역사의 중대한 변화였다.
이는 미국이 원역사보다 더 적은 희생을 내고 더 큰 승리를 거둔 덕분이었다.
그 결과 1918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한 석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상원 다수당을 차지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계파와 정치적으로 타협하여 고립주의자들을 누르고 국제연맹 가입을 이뤄 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윌슨은 민주당 내 고립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고, 그나마도 뇌출혈로 인한 건강 악화로 심각한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었다.
1920년 미국은 수정헌법으로 여성에 참정권을 부여했고, 유권자 수는 두 배로 늘어났다. 새로 투표권을 받은 여성들은 민주당보다 공화당을 선호했다.
20세기 초만 해도, 링컨을 계승한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훨씬 진보적인 정당이었다. 남부를 제외한 전미에서 공화당이 우세했다.
즉, 1920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재창출에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평가받는 얼굴마담 하딩보다야, 군인 출신일지라도 우드가 훨씬 낫겠지.’
동부전선 사령관을 지내면서 아시아-태평양의 중요성을 깨달은 우드는, 과도하게 성장하고 있는 일본의 해군력을 억제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며, 중국 시장에 안정적으로 접근하길 원했다.
한국은 미국의 파트너가 되겠다고 계속 어필했고, 우드도 동부전선에서 함께 싸운 ‘전우’ 한국을 높이 평가했다.
“외무대신은 윌슨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게 아쉽겠군.”
“아닙니다, 폐하. 원래 미국은 주기적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나라 아니겠습니까? 백악관의 주인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대한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게 중요한 일이지요.”
미합중국 대통령 윌슨의 제자라는 걸 강조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높인 이승만 입장에서, 이대로 윌슨이 정권재창출에 실패해 물러나는 게 아쉽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 앞에서 아쉬움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진작부터 자신에게 기대하는 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었다. 누가 집권하든 이승만은 미국 전문가로서 자리매김해야 했다.
“좋은 말이군. 현재 우리의 적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지만, 언젠가 일본과 결별할 지도 모르네. 어제의 동지였던 러시아가 오늘의 적이 된 것처럼, 오늘의 동지인 일본이 내일의 적이 될지 모르지. 그러니 대한에 미국은 더욱 중요하네. 러시아와 일본을 모두 견제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니까.”
“과연 그렇습니다. 신은 폐하의 놀라운 식견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현재 대한제국 내에서, 장차 일본과 대립하리라고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한영일동맹이 지속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선의 예상은 달랐다. 원역사에서 곧 영일동맹이 종료되듯, 한영일동맹의 수명도 다해가고 있었다.
한국의 새로운 파트너는 단연코 미국이 되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고립주의자 대신에 개입주의자가 차기 대통령에 유력하다는 건 다행이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야심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대미외교에 특화된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만약 내 손발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려 한다면, 김규식이란 대안이 있으니 언제든 교체하면 되고. 1920년대의 외교는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맡겨야지.’
이승만은 결코 ‘손발’로 만족할 수 없고, 자신이 ‘머리’가 되어야만 만족할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선에게 필요한 건, 자신을 대체할 머리가 아니었다. 머지않아 자신은 은퇴할 터이니 결국 머리를 필요로 하겠지만, 유능하지만 독선적인 야심가보다는 성실하고 포용력 있는 민주주의자를 새로운 시대의 머리로 원했다.
이선은 차기 지도자로 고려되는 이승만과 김규식, 안창호와 김구, 여운형과 조소앙의 행보를 차분히 지켜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