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60
3부 75화 바다에서 바다까지
과연 대한제국 대외정보체계의 보고는 정확했다.
같은 날, 1920년 6월 21일 바르샤바.
폴란드 제2공화국의 국가원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집정 시몬 페틀류랴( Symon Petliura) 간에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1. 폴란드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지지한다.
2.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국경은 즈브루흐(Zbruch)강으로 한다.
3. 우크라이나는 즈브루흐강 서안의 갈리치아(할리치나)와 볼히니하(볼린)을 폴란드에 할양한다.
4.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단독강화하지 않는다.
…….
양국의 영토를 조정함과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적으로 하는 군사동맹이 체결됐다.
국경은 폴란드에 극히 유리하게 결정되어, 우크라이나인이 상당수 거주하는 지역도 폴란드에 할양되었다. 정치, 경제, 군사 전 영역에서 우크라이나가 폴란드에 종속되는 형태에 가까웠다.
우크라이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소비에트 적군과 남러시아 백군에게 잇달아 패배하며, 소수의 병력만 서부로 퇴각한 우크라이나 정부 입장에선 폴란드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키예프를 향한 총공세는 25일에 시작됩니다. 반드시 침략자 러시아를 무찌르고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지켜 내겠소.”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동맹으로서 해방을 위해 함께 싸우겠습니다.”
지난 1년간, 폴란드는 프랑스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으며 착실하게 군사력을 키워 오고 있었다. 군복부터 소총, 항공기와 전차에 이르기까지 신생 폴란드군은 ‘동유럽의 프랑스군’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폴란드의 대외전략이 프랑스에 종속되는 일은 없었다. 적군에 맞서 백군과의 협조를 원하는 프랑스와 달리, 피우수트스키는 백군의 몰락을 내버려 뒀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대러시아주의자인 백군이 승리하는 게 더 유감스러웠다. 폴란드는 연합국에도 비밀리에 소비에트와 임시 휴전을 맺고 전쟁을 준비했다.
1920년 6월. 백군의 패배가 임박해 보이자, 마침내 폴란드는 칼을 뽑아 들었다.
“폴란드 애국자 동지들이여! 누대의 숙적 러시아, 지금도 폴란드를 향해 침략의 칼을 갈고 있는 러시아를 무찌르고, 폴란드의 영광을 재건하자!”
“폴란드 만세! 피우수트스키 원수 만세!”
피우수트스키는 소비에트 적군을 무찌르고, 우크라이나를 ‘독립’시키기로 약속했다.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재건을 추구하는 피우수트스키는, 연방의 고토(故土)인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서 잘라 내어 폴란드가 주도하는 연맹의 일원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폴란드군 9개 보병사단, 2개 기병사단, 우크라이나군 3개 보병사단이 6월 25일 국경을 넘어 키예프(키이우)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우크라이나 독립전쟁’, 혹은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의 전면전 돌입이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
어떠한 외적들이 우리를 침략해도,
우리는 손에 든 칼로 되찾으리.
전진하라, 전진하라 돔브로프스키여,
이탈리아에서 폴란드까지,
그대의 지도 아래서,
우리 국민들은 단결하리!」
우크라이나 평원에 폴란드 국가가 울려 퍼졌다. 18세기 폴란드 분할 이래, 폴란드군이 우크라이나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전진! 전진! 키예프를 향해 진격하라!”
“기병대, 돌격!”
“폴란드 만세!”
폴란드가 자랑하는 기병대는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기병의 전술적 생명이 다한 서부전선과 달리, 면적이 광활한 동부전선에서는 여전히 기병의 역할이 중요했다.
폴란드 기병사단은 단숨에 적군의 전선을 뚫고 돌파했다.
“적군의 방어가 이토록 허술하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하! 자칭 노농적군은 오합지졸이었군그래.”
폴란드군은 적군의 허점을 찔렀다. 적군의 대부분이 남러시아 백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돈-쿠반 전선에 집중되어 있을 때, 폴란드군은 우크라이나 중부를 타격했다.
폴란드군의 병력은 적군에 비하면 많지 않았지만, 훈련과 장비의 질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공격에 나선 폴란드군은 대전쟁 참전 용사들로 구성되었고,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아 무장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공여된 FT-17 경전차와 전투기는 압도적인 위력을 보였다.
적군은 연합국의 지원을 받는 백군과 달리 최신무기를 보유하지 못했고, 전투기가 하늘에 뜨면 적군 보병들은 혼비백산했다.
“우크라이나 평원은 전차의 성능을 시험하기에 아주 좋군요.”
“전차의 수가 좀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폴란드군 소장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Edward Rydz-Śmigły)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 출신으로, 34세의 나이로 신생 폴란드군 야전군 사령관이 되었다.
프랑스는 병력을 파병하는 대신 폴 앙리(Paul Prosper Henrys) 장군이 이끄는 400여명의 장교단을 군사고문단으로 보내, 폴란드군의 조직과 병참에 대해 조언했다.
리츠시미그위의 곁에는 유독 키가 껑충 큰 장교가 서 있었는데, 그는 바로 프랑스 군사고문단의 일원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위였다.
원역사에서 드골은 베르됭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이했지만, 변화한 역사는 그의 운명도 바꾸어 버렸다.
1916년 드골 중위는 동부전선에 파견되었고, 1918년 페트로그라드 방어전에서도 활약했다.
이때 드골은 FT-17 경전차가 역공을 주도하는 데 큰 감명을 받았고, 초기 기갑부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20년 시점에서 기갑전이란 개념은 생소하기 짝이 없었고, 드골의 주장은 종전 이후 군축에 들어간 프랑스군 상부에 먹혀들지 않았지만, 동부전선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폴란드군에서는 관심을 보였다.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기갑부대의 진가를 한번 실험해 보시지요.”
“전차를 보병 지원용도가 아닌 독립 부대로 구성한단 말이오?”
“참호전이 진행됐던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전선에서는 기갑부대의 독립 편성이 더 유용할 것입니다.”
전차를 자체 생산할 능력은 없고, 전적으로 프랑스에 공여를 받은 폴란드였다. 전차부대의 사용법도 프랑스에게 의존해야 했다.
드골은 보수적인 프랑스군 상부를 대신해 피우수트스키에게 직접 건의했다. 우크라이나 평원은 그의 새로운 군사적 이상을 시험해 볼 절호의 기회였다.
기갑전이란 개념에 대해 생소한 피우스트스키지만, 본래 혁명가였던 그에게 드골의 아이디어는 ‘혁명적으로’ 느껴졌다.
“러시아 놈들이 혼비백산하는 꼴을 볼 수 있다면, 뭐든 좋소.”
피우수트스키는 독립 전차부대의 창설을 승인했다. 제1기병사단 산하에 FT-17 경전차 200대로 구성된 기갑부대가 편성되었다.
“고맙습니다, 대사. 대사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피우수트스키 원수를 설득하기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별말씀을요.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될 만한 일이라면 추진하는 게 마땅하지요.”
1920년 초 드골의 제안을 피우수트스키에게 연결해 준 건, 초대 주폴란드 한국 대사 이위종이었다.
이선은 폴란드 방문 당시 군사지원을 약속했었다. 이에 한국군도 폴란드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했고, 조성환(曺成煥) 참장이 이끄는 30여명의 장교단이 폴란드군에 협조했다.
그런데 프랑스 군사고문단은 한국 군사고문단을 몇 수 아래로 여기며 견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초대 주폴란드 대사로 부임한 이위종은 본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출신임을 살려 프랑스군 장교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대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 프랑스군보다 뛰어난 군대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대한제국은 여러분과 함께 전선에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이위종은 프랑스군 장교단을 한껏 치켜세우는 한편, 이선의 친서를 전하며 피우수트스키의 신임을 받았다.
프랑스 군사고문단에 대한 이위종의 보고를 받은 이선은 기억에 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드골 대위와 특별한 친분’을 맺으라고 명했다.
이위종 덕에 자신의 이상을 펼쳐 볼 기회를 확보한 드골은, 한국군 군사고문단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남러시아전선 관전무관을 역임하여 전선을 드나들며, 적군에 대해 누구보다 밝은 김광서 부령과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
기병장교 출신인 김광서도 대전쟁 파병 이후 전차의 활약에 매료되어 있었고, 두 장교는 국적을 초월하여 의기투합하였다.
“기갑부대의 진격이 생각보다 더 빠르군요.”
“기갑부대의 출현에 적군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있습니다.”
전투기의 공습, 기갑부대의 공격, 뒤를 이은 기병대의 돌격과 보병대의 진격.
드골의 이상대로 신생 폴란드군은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손발이 맞지 않아 부대 별로 돌진하고, 전선이 돌출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저 독일군이었으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적이 노농적군이라 그나마 다행인 셈이군요.”
하지만 상대는 더 당황했다. 남서전선을 맡은 적군 제12군은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폴란드군의 빠른 진격에, 공황 상태에 빠져 퇴각했다.
“저기 키예프 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저 붉은 짐승들을 몰아내자!”
“폴란드 만세!”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7월 7일,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군은 키예프에 진입했다.
키예프 방어를 맡은 적군 제12군은, 도시를 포기하고 동쪽 하리코프 방향으로 퇴각했다.
개전 2주도 채 되지 않았다. 폴란드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너무나도 빠른 승리였다.
“승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폴란드 독수리, 우크라이나 평원에 날다!”
“세계혁명을 부르짖던 볼셰비키, 혼비백산하여 퇴각!”
“러시아 침략자의 심장에 비수를 꽂다! 독립 2년 만에 거둔 쾌거!”
“승리의 지도자 피우수트스키 원수 만세!”
폴란드 정부와 언론은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공세를 결정한 피우수트스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신속한 승리에, 폴란드인들은 도취되고 말았다.
“바다에서 바다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재건!”
폴란드가 내건 구호, ‘바다에서 바다까지(Międzymorze/Intermarium),’ 즉 ‘발트해에서 흑해까지’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 * *
「대한의 우방 파란군, 과격파 적군을 무찌르다!」
「자유의 수호자, 파란(波蘭) 만세!」
「본지 특보! 주파란 군사고문단장 조성환 장군, 전쟁 상황에 대한 분석!」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대한제국에서도 폴란드의 승리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작년에 황제 이선이 폴란드에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한국에서도 폴란드를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났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 대부분은 폴란드란 나라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나마 아는 사람들도 ‘정동 파란양’의 모국 정도로만 알 뿐이었다.
“폴란드의 승리를 위하여!”
“폴란드 만세!”
‘정동 파란양’의 사저에서는 승전 축하 파티가 열렸다. 주한 폴란드 대사와 소수의 주한 폴란드인들이 모여 승리를 축하했다.
승전 분위기 속에서 파티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평양에서 온 이선도 늦게나마 참석했다.
초대 주한 폴란드 대사인 바츠와프 시에로셰프스키는, 1903년 한국 방문 이후 이선과 마르가리타를 모델로 한 소설을 써서 폴란드에서 유명해진 작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한국과 폴란드 수교 이후 시에로셰프스키는 초대 주한대사로 부임했다.
「비스와 강과 바르타 강을 건너서
우리는 폴란드인이 되리라.
보나파르트가 우리에게
승리의 방법을 보여 주었도다!」
폴란드인들은 흥겹게 국가 1절에 이어 2절을 불렀다. 2절에 등장하는 보나파르트는 물론 나폴레옹으로, 폴란드 국가는 본래 프랑스군에 복무한 돔브르스키 장군 휘하 폴란드군단의 군가이기도 했다.
“19세기에 나폴레옹이 있었더라면, 20세기에는 한국 황제 폐하가 계십니다. 우리 폴란드인들은 30년 전만해도 약소국이었던 한국이 오늘날 열강으로 떠오른 걸 보면서 큰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원, 과찬이시오. 폴란드 국민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기쁘긴 합니다만.”
외교적 수사라고는 하지만, 폴란드 제2공화국은 대한제국을 모델로 삼고 있었다.
중국에 종속되어있던 제후국에서, 고토를 수복하고 열강의 반열까지.
러시아에 종속되어 있던 식민지에서, 고토를 수복하고 강대국으로 부활하려는 폴란드의 모델로 이보다 더 적절한 나라는 없었다.
기실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바라보는 관점은, 한국이 만주를 바라보는 관점과 매우 유사했다.
한민족이 마지막으로 만주를 점유한 발해로부터 1천년 만에 다시 나아갔다면, 폴란드는 불과 200년 전까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었으니, 오히려 ‘고토’에 대한 열망은 이들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만주인을 ‘형제민족’이자 중국으로부터의 ‘보호대상’으로 여기듯, 폴란드인도 우크라이나인을 형제민족이자 러시아로부터의 보호대상으로 여겼다.
당사자 입장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만주가 중국의 지배를 받는 것보단 형제민족 한국의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않은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것보단 형제민족 폴란드의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않은가?’
이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폴레옹에게 마리아 발레프스카가 있었듯, 황제 폐하께는 파니 얀코프스카가 있지 않겠습니까?”
“과한 말씀이세요. 저는 그분이 아니고, 폐하께서도 나폴레옹이 아닙니다.”
마르가리타는 정색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폴란드 국내에서 자신을 나폴레옹의 애인 발레프스카와 비교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로선 심히 부담스러운 비유였다.
“대사가 방금 뭐라고 했소?”
“농담이에요. 별말 아니었습니다.”
폴란드어를 하지 못하는 이선으로선, 고유명사만 듣고 대충 무슨 말을 했으리라고 짐작만 했다.
“나폴레옹과 마리아 발레프스카라고 한 거 같은데.”
“……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 이야기 맞습니다.”
“하하! 뭐, 심히 부담스럽긴 한데 이젠 익숙해질 때가 됐지. 그러려니 합시다.”
“예, 그래야지요.”
폴란드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 우울해 보였던 마르가리타지만, 오늘은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승전이 그리도 기쁘오?”
“기쁘다마다요. 조국 폴란드가 숙적 러시아를 격파했는데.”
“근데 당신은 한때 국제사회주의자 아니었소? 지금 보니 열성적인 폴란드 민족주의자구려.”
이선이 웃으면서 농담조로 말하자, 의외로 마르가리타는 정색했다.
“피우수트스키 원수가 그러지 않았나요? 사회주의라는 붉은 기차를 탔지만, 독립이라는 역에서 내렸다고.”
“과연.”
이선은 미소를 지었다. 결국 애국심이 이념을 능가하고 있었다.
“폴란드의 우방인 대한제국이 동부에서 적군에게 일격을 날려 주기를, 모든 폴란드인이 고대하고 있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원수부와 함께 고려해 보지요.”
시에로셰프스키의 말에 이선이 화답했다.
폴란드는 극동에 주둔하는 한국군이 동쪽에서 공세를 벌이리라 생각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동쪽으로 일격을 가해, 폴란드군과 함께 동서에서 러시아를 격퇴하리라 기대했다.
서양인 관측자들도 대개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폴레옹에게 발레프스카가 있듯이, 이선에게는 얀코프스카가 있지 않은가?
‘?? 내가 왜??’
하지만 이선은 냉철했다. 사랑은 사랑이고 전쟁은 전쟁이었다. 나폴레옹도 명분은 폴란드 독립을 내걸었지만, 개인적 감정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게 아니었다.
‘그 나폴레옹조차도 러시아의 진흙탕에 빠져 몰락하지 않았던가? 러시아 침공은 절대 하면 안 될 일이야. 하물며 시베리아 같은 진흙탕은 말할 것도 없지.’
이선은 폴란드의 승리를 확신하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패퇴했다지만,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이선도 폴란드의 선전을 기원했다.
폴란드의 공세를 틈타, 소비에트가 극동에서 더욱 유화적으로 나선다면 충분히 국익을 쟁취할 수 있었으니.
이선의 관심사는 오직 대한제국의 국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