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62
3부 77화 통제와 지배
“이러한 중대한 외교적 논의에, 대한의 외교를 대표하는 외무대신이 빠진다는 건 절차상 하자가 큽니다. 국무회의에서 먼저 논의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흥경궁에서 결정하고 내각에 통보하다니요?”
김규식이 대소 협상 전권대표로 임명되자, 외무대신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대조께서 소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시긴 했으나, 외교와 군사만은 대조가 전담한다고 하시지 않았소. 대조께서 외무부를 대신해 외교 사절을 결정하여 파견한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과거엔 그랬을지 모르나, 지금은 명백한 입헌군주제 정당내각 아닙니까. 대조께서도 내각을 존중해 주셔야지, 일방적 통보라니요.”
이승만은 절차를 문제 삼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자신이 협상에서 배제되는 상황이었다.
“외무대신, 잠시 따로 봅시다.”
총리 이상설은 이승만을 별도로 불렀다.
“대조께서 소조와 내겐 미리 말씀을 주셨네. 이번 협상에서 우남은 한발 물러서는 게 좋겠네.”
“아니, 어째서입니까? 제가 사회당 밀사 무리와 다퉜다는 이유 때문입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무례함을 징계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대조께서는 우남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시나, 러시아와의 협상은 우사가 더 적격이라고 보고 계시네. 협상이 종료되면, 자네는 일본과 미국을 방문해서 완충국에 대한 승인을 맡아 주도록 하게.”
요컨대 대소 협상은 김규식에게 전담하고, 협상의 결과를 미국과 일본에 승인받는 역할을 이승만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총리대신, 이건 단순히 협상을 우사가 맡느냐 제가 맡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사는 저 믿지 못할 소비에트 무리에게 너무 온건합니다. 저는 파리에서 직접 봤습니다. 트로츠키의 연설도 여러 번 봤지요. 말은 정말 잘합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이 제국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나라들과 진지하게 외교협상을 할 것 같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우사도 파리에 있었네.”
“우사는 아시아 식민지 문제에 공감해서 소비에트에 유화적으로 변한 겁니다! 저들은 세계혁명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폴란드와의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극동으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완충국이라지만 선거를 통해 사회민주당을 집권시키고, 민의에 따라 합병한다고 하겠지요. 어디까지나 시간벌기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이승만의 열변에 이상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막으라고 협상하는 게 아닌가? 왜 외교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나? 러시아 침공은 불가능해. 일본이 러시아 상대로 얼마나 고전했는지 보지 않았나? 하물며 그건 러시아령도 아닌 만주에서 싸웠을 때도 그랬네. 시베리아는 거대한 늪이나 다름없어. 군무대신 이동휘 장군도 방어전이라면 모를까 침공은 회의적으로 보고 있네.”
“꼭 전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지금 이 상태로 굳히면 된다는 거지요. 자바이칼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연해주, 최대 아무르까지 국군이 주둔하고, 백군 잔당과 재러 한인을 내세워 신정부를 세우면 됩니다. 그리고 대한이 보호하는 것이지요. 만주처럼 말입니다. 굳이 소비에트와 협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국내정치에서는 개혁파인 이상설도 국제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었다.
소비에트를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기는 했으나, 황제에 충성심이 강한 근왕주의자였으므로 황제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성상께서는 근 40년간 외교적 승리를 거듭해 오셨네. 이번에도 성상께서 옳으시리라 생각하네. 단순히 신하된 도리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나 역시 외무부에 오래 있었던 외교관이자 총리로서 내리는 판단일세. 절차상의 문제는, 시일이 지날수록 성상께서 내각을 존중해 주시리라 믿네.”
“…… 알겠습니다.”
총리의 결정이 내려진 이상, 외무대신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진 역시 내심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협상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백군이 만들어 서방이 인용하는 프로파간다를 주로 접하고 있는 이진의 눈에 소비에트는 무정부, 무질서, 유혈과 광기의 화신이었다.
이번에는 납득하기 어려웠으나, 이진은 부황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했기에 뜻을 따랐다.
이선은 마치 이진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태자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협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외교로 마무리 져야 한다. 국가를 위해서 전쟁을 두려워해선 안 되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최후의 선택일 뿐이다. 너는 장차 국군 통수권자가 될 거다. 정부에서 결정하더라도, 최종 결정권은 네게 주어지겠지.”
이선은 아들의 어깨를 잡으며 강조했다.
“전쟁은 절대로 계획되지 않는다. 러일전쟁, 구주대전(세계대전)의 사례를 보았듯이 단기전을 계획했던 나라치고 성공한 사례가 없다. 대한이 몇 번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국력을 과신하는 자들이 많은데, 단지 상대인 청국이 약했을 뿐이다. 근래 독일군을 격파한 일도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 이긴 게 아니다.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승리한 것이다.”
“예, 그러하옵니다.”
“대한은 총력전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총력전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지금은 약하고 혼란에 빠져 있지만, 러시아와 같은 나라와 전쟁하려면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선이 전쟁을 최대한 회피하고 협상에 나선 건 국익을 위해서였지만, 아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오면, 근래 폴란드는 어찌하여 러시아를 공격하는 위험한 전쟁을 시작한 것인지요?”
“좋은 질문이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123년 지배에 원한이 크지. 우리가 청국에 느꼈던 감정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원한이 깊다. 그리고, 폴란드에 있어 우크라이나는 대한의 만주와도 같다. 민족감정이든, 국가이익이든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서 분리할 필요가 있는 거지. 대한이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고 보호하듯이 말이다.”
이선은 언제나 전쟁을 회피하는 쪽은 아니었다. 단호하게 맞설 때는 맞서야 했다.
“만약 러시아가 대한의 핵심 세력권인 만주를 침공해 온다면, 대한은 마땅히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방어전이 아니고 공격하는 입장이 되는 건 말할 것도 없지. 설령 이긴다 한들 그 손실은 가늠이 안 된다. 저들과 누대의 원한을 쌓느니, 우리의 힘이 강해지고 저들의 힘이 약해졌을 때 협상하는 게 낫다.”
전쟁은 도박, 그것도 위험이 너무나도 큰 도박이고, 원역사의 일본제국처럼 도박에 중독되면 결국 파멸로의 길일 뿐이다.
일본제국의 결말을 아는 이선으로선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소자, 부황의 깊은 뜻을 알겠사옵니다. 금일의 가르침은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음, 그래. 네게는 대한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걸 명심하여라.”
“예, 폐하.”
이진이 평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에 체류 중인 니콜라이 2세의 자녀들이 만나기를 청했다.
“그래, 그분들은 서경(평양)에서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계시는가?”
말을 전하러 온 이는 정친왕 이안이었다. 이안은 5남매의 대리인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예, 소조의 지극한 배려 덕분에…….”
“내가 한 일이 뭐가 있겠느냐? 네 공로가 크지.”
“아니옵니다. 저는 그저 대조의 명을 따른 것뿐이지요.”
이진과 이안 형제는 모처럼의 재회에도 어색해 보였다. 이진은 황성에 있고 이안은 평상시 평양에 머물렀으므로, 올해 둘이 만난 건 원단(元旦)과 부친의 생일인 건원절뿐이었다.
어색함을 풀기 위해 이안이 화제를 돌렸다.
“황후 마마께서는 강녕하시옵니까?”
“아, 강녕하시다. 황후께서도 네 안부를 궁금해 하신다. 황성으로 종종 찾아뵙고 인사 드리거라.”
조선종법이든 황실전범이든 이안과 이라도 법적으로는 중전의 자식이었다.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네 모친……, 얀코프스카 여사께서는 평안하신가?”
이진은 가급적 마르가리타 이야기는 피했지만, 예의상 화답했다.
“예, 평안하십니다.”
“하긴, 평안하시겠구나.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독립에 이어, 러시아에 맞선 전쟁에도 연승하고 있으니. 아마 요 근래만큼 기쁘신 적도 없었을 게다. 얼마 전에도 폴란드 대사를 초청해 축연을 여셨다는데. 그분이 그렇게 기뻐하는 건 처음 본다.”
이복형의 말에 이안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동안 처신을 조심하던 마르가리타지만, 폴란드 애국자로서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모친이 기뻐하시니 너도 기쁘겠구나.”
“예, 그렇사옵니다.”
“그래. 소비에트 러시아는 네 모친의 적이기도 하며, 네가 보호하고 있는 대공들의 적이기도 하지. 너는 소비에트에 맞서 싸우고 싶겠구나.”
이안은 솔직히 어머니가 폴란드 사람인 이상,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기뻐하는데 싫어할 자식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깝게 지내는 망명자 남매들도 소비에트를 부모의 원수로 여기고 증오했으니, 이안은 그들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분노를 공유해야 했다.
남매가 이진에게 만나길 청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었다.
“저는 일개 친왕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나라의 일에 함부로 관여하겠습니까? 대조의 뜻과 소조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세상이 바뀌었다. 평범한 백성들도 정치에 대해 논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황제의 아들인 네가 어찌 일개 친왕에 지나지 않겠는가. 너는 러시아와 유럽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했던 만큼, 네 의견을 묻고 싶은 거다.”
이안은 재작년에 5남매를 구출하는 임무를 맡았고, 작년에는 어머니와 함께 폴란드를 방문하는 비공식 사절이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어리석어, 감히 소조께 의견을 개진할 능력이 못 됩니다. 이해해 주시옵소서.”
“하하. 내 명을 따른다더니, 형제간에 간단한 자문의 물음에도 응하지 않겠다는 게냐.”
‘그럼 질문을 명확하게 해 주시든가.’
물론 이안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이진에게 되물었다.
“제가 어리석어 하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래. 내가 너무 추상적으로 말했구나. 네가 직접 본 유럽은 어떠하였는가? 자유롭게 말하여라.”
“예, 제가 본 바로는…….”
이안은 자신의 주관적 의견은 배제한 채, 직접 보고 들었던 것만 간략하게 정리해서 전했다.
“흠, 그래. 폴란드가 러시아를 증오하는 건 알았지만, 대한에 그토록 우호적인 건 몰랐구나.”
“예, 유럽 여러 나라를 가 봤지만, 그토록 대한에 우호적인 나라는 처음이었습니다.”
“하하, 그거야 얀코프스카 여사와 네 덕이 아니겠느냐? 그러지 않고서야 폴란드인들이 대한을 알겠는가. 그건 대한국민도 마찬가지고. 폴란드가 실존했던 국가인지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었는데.”
분명 칭찬의 말이었지만, 냉소적인 이안의 귀에는 어째 비꼬는 말로 들렸다. 물론 내색하진 않았다.
“대조의 위명(威名)덕이지요. 대조께서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아니십니까.”
“그래, 참으로 그렇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튼 고맙다. 앞으로 내 종종 네게 자문을 구하겠으니, 너도 내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 보거라.”
“황공하옵니다, 전하.”
이진의 모범은 언제나 이선이었다.
부황이 의친왕이나 영친왕을 대하듯, 자질과 품성이 괜찮다 싶으면 이복동생에게도 황실의 일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비하면 이안을 대하는 자세도 한껏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안도 그렇게 느껴졌다. 여전히 조심하는 태도는 유지했지만.
5남매를 대표해 만나길 청원한 이는 타티야나였다.
본래 남매를 대표하던 장녀 올가는 극동 백군에서 간호사로 참전했고, 알렉세이도 이진을 만나길 희망했으나 혈우병이 악화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타티야나는 아나스타샤에게 알렉세이의 간호를 맡기고, 마리야와 함께 이진을 만났다.
“황태자 전하,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께서 만나길 원하신다면 반드시 응해야지요. 알렉세이 대공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전하를 만나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전해 달라 하였습니다.”
“저도 아쉽군요. 그럼 제가 문병을 갈까요?”
“감사합니다만, 알료샤가 쉬고 있어서……. 전하께서 서울로 돌아가시기 전에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상태가 안 좋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라는 걸, 이진은 짐작했다.
“속히 쾌유를 기원한다고 말씀 전해 주십시오.”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겠습니까? 저를 만나길 원하셨다고.”
“전하께 청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릴 처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태자 전하 말고는…….”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이진은 알렉세이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타티야나는 각오를 한 듯 고개를 숙이더니 말을 이었다.
“저희, 전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자녀들은, 로마노프 왕가의 망명자들을 대표하여, 대한제국 정부가 러시아를 참칭하고 있는 소비에트 무리와 협상을 중단해 주시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그건…….”
순간 이진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타티야나가 말을 잇지 못하자, 마리야가 이어받았다.
“물론 은혜를 입은 망명자 처지에 이런 청원을 드린다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운명을 맡길 수만은 없었습니다. 저희의 맏이인 올가 여대공은 정통 러시아군 간호사로서 종군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정통 러시아군이 소비에트의 압제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정녕 대한제국이 이들을 저버리시려 한단 말입니까?”
“저버리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망명자 사회에서는, 소비에트가 반혁명분자로 규정한 황족과 귀족, 장교들과 정치가들의 송환을 요구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한국이 소비에트와 협상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극동 지역 백군과 망명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제 극동 백군이 버틸 수 있는 길은 한국의 지원뿐이었다. 만약 한국이 소비에트와 협상한다면, 이들의 운명은 급전직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총영사관과 주 극동 한국군 사령부를 넘어, 대한제국 외무부를 향해 협상 중단을 요청하는 청원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러시아군은 대한과 함께 싸운 전우입니다. 대한제국은 절대로 전우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은 황실이 보호하고 있는 손님입니다. 감히 송환을 요구할 자도 없고, 요구한다한들 협상장을 박차고 나갈 것입니다.”
이진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진심으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전하, 저들은 저희 부모님을 재판도 없이 시해했습니다. 제정에서도 정치범은 정식재판을 받았습니다. 저희 증조부님을 시해한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도 재판받고 처형당하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인민의 뜻이라면서 자의적인 처형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어찌 저런 자들을 믿고 타협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적군은 잔혹했다. 니콜라이 2세 부부의 죽음은 소비에트 정부의 명령이 아니었지만, 그 외에도 자의적인 처형이 빈번했다. 내전이 시작되자, 반혁명에 연루된 황족들이 형식적인 재판만 받고 처형당했다.
하지만 백군도 그 못지않게, 때로는 그보다 더 잔혹했다. 특히 민중에 대한 학살은 백군이 더 심하면 심했지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군 프로파간다만을 접하는 망명자들로서는, 백군은 정통 러시아를 수호하는 정의의 군대요, 적군은 유혈의 악마 그 자체였다.
악마와 협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황께서 판단하시고 결정하신 일이 아닌가. 필요하다면, 국익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이겠지.’
“대단히 안타깝습니다만, 이는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신 사항입니다. 제가 도움을 드리지 못해 유감입니다. 다만 걱정은 놓으십시오. 여러분의 안전은 우리 황실이 책임지고 보호합니다.”
동정의 마음이 들었음에도, 이진은 거부했다. 부황의 결정이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타티야나와 마리야가 허리를 숙이고 애원했다.
“저희의 안전만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저희가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저희 자매가 한국 황실의 하녀가 되라고 해도 따르겠습니다. 부디 정통 러시아를 구해 주십시오! 우리를 구해 줄 수 있는 분은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