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67
3부 82화 민주적 통제
광무 24년 9월 1일.
황성 ‘9월 의거’ 1주년을 기념하여 파고다공원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시위를 주도했던 황성 소재 대학 연합학생회가 주도하는 행사였지만, 정치인들도 대거 참여했다.
노동계와 좌익이 주도했던 원산 추모제와 달리, 9월 의거 기념제에는 좌우 여야를 막론했다.
“친애하는 황성 시민 여러분, 학생 여러분! 9월 의거는 불의에 맞서 정의를 지키고자 한 투쟁이었습니다. 대한의 민본주의 진전에 의거가 기여한 바는 막대합니다. 마침내 보통선거가 쟁취되어, 진정으로 민의에 기초한 정부가 출범하였습니다. 정부는 민본주의를 새로운 국가적 과제로 삼고…….”
내무대신 안창호가 신정부를 대표해 기념 연설을 했다. 그는 원산 학살 이후 의회에서 격정적으로 정부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가두투쟁에 나섰으므로, 9월 의거의 촉발자 중 한 명이었다.
이를 상징하듯, 안창호의 연설을 듣기 위해 구름 같은 대열이 모여들었다.
“…… 정부는 최선을 다해 민본주의가 이 땅에 자리 잡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능동적인 시민으로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늘 가져 주기를 바랍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링컨이 말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가 영원할 수 있도록 우리는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민 만세!”
“와아아아!”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민 만세!”
만세 선창에 대중은 만세로 화답했다.
본래 열정적인 연설로 유명한 안창호지만, 오늘은 감정을 배제하고 밋밋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과거 재야 정치인이었던 시절과 달리, 정부를 대표하는 입장이 된 이상 사용하는 언어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안창호는 원산 추모제에도 참석하고 싶었으나, 정부와 당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
내무대신이라는 직위가 가진 상징성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정부는 이유야 어쨌건 ‘반정부 투쟁 기념제’에서 현직 내무대신이 연설하는 일 자체를 마뜩잖게 여겼으나, 안창호는 국민적 단합을 위해서라도 무소불위 권력기관의 상징인 내무부의 수장이 직접 연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무부의 변화는 곧 정부의 변화, 통치의 변화를 상징했다.
“내무대신이 정부를 대표해 연설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 정부가 황제 폐하의 정부이자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자리 아니겠습니까?”
국무회의에서 안창호와 잦은 마찰을 빚던 외무대신 이승만이 뜻밖에도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대외정책은 제국주의자인 이승만도, 민주주의가 세계적 대세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미국과 영국의 체제를 정치의 모범으로 여기는 이승만으로선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승만의 주도로 개화당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임에 따라, 원산에는 불참했던 개화당 의원들도 9월 의거 기념제에는 참석했다.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개화당 독재’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쳤으므로 껄끄러울 수 있는 일이나, 현재 개화당을 대표해 정부에 입각한 인사들이 바로 박영효와 팽창주의 우익을 끌어 내린 장본인들이었다.
“총리대신 이상설 공, 탁지대신 이시영 공이 원훈 탄핵을 주도하지 않았던가. 개화당의 선제적 혁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로는 황제 폐하의 성총을 받들고, 아래로는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당은 오직 개화당뿐.”
충성스럽고 유능한 관료이나 대중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이상설이나 이시영과 달리,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던 이승만은 대중정치의 필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보통선거 시대에 대중과 멀어지면 끝장이지. 엘리트주의 성향이 강했던 개화당이 대중주의적 입장을 보이면 기존 지지층이 실망하긴 할 터이다. 근데 어차피 그들은 개화당을 지지하게 되어 있어.’
근대화의 수혜자인 관료, 군인, 자본가, 지주는 개화당의 핵심 지지층이었다. 과거에는 이들의 지지만으로 개화당 1당 체제를 굳힐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선거 시대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다.
개화당에는 실로 유리한 점이 있었으니, 36년 집권의 결과 개화당이 곧 정부로 여겨진다는 점이었다. 근대화의 수혜를 입은 건 상공인과 자영농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개화당에 기꺼이 표를 던졌다.
도시 지식인과 사무직 노동자에서는 개화당에 반대하는 신호가 커지고 있었으니, 단적으로 드러난 게 9월 의거였다. 그러니 더욱 개혁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할 일이 끝도 없이 많군.”
내무부는 제도, 인사, 중앙행정, 지방행정, 공안, 위생, 소방, 사회, 노동 등 내정의 다양한 업무를 총괄하는 요직이었다.
박영효가 총리 재임 이전 내무대신으로 오래 재임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개화당 정부에서도 요직으로 생각했던 자리였다.
개화당이 요직인 내무부를 순순히 신민당, 그것도 가장 진보적인 안창호에게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다.
이 막강한 관료조직이 민간 정치인에게 느끼는 반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몽운동하던 서생이 대신 자리에 앉으니까, 세상만사가 다 계몽운동처럼 보이나. 잘 굴러가고 있는 체제를 왜 뒤흔든단 말인가?”
“어디 4년짜리 정치인이 국가의 백년대계를 흔들려고 해? 만주와 연해주는 대한의 이익선이다. 강력한 군사력만이 국익을 보위할 수 있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자들은 정치적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정치꾼들일 뿐이다. 황제 폐하께서 친히 임명한 관리들을 통제할 수 없다.”
관료들은 안창호뿐만 아니라 신민당, 아니 민간정치인에 반감을 느꼈다.
과거의 과거제를 대체한 고등고시를 합격한 신관료계급은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엘리트주의가 대단했다.
1894년에 과거제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신설된 고등고시가 핵심 관료 선발 시스템이 되었다.
고시 외에도 유능한 인재에 대한 천거로 황제의 임용하는 천거제도 유지되어, 주로 해외 유학을 마치고 고등관료로 특별임용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대표적으로 이승만과 김규식 같은 유학파가 있었다.
관리 임용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던 조선의 연장선인 데다, 가문과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선발되는 고등고시는 입신양명을 꿈꾸는 청년들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유교적 소양을 확인했던 과거와 달리 고시는 근대적 행정능력에 필요한 자질을 시험했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이들은 국가 공인 엘리트였다.
“개화당 대신들은 과거제가 됐건 천거제가 됐건 이미 능력이 검증된 분들이 아닌가. 하지만 신민당은 검증이 됐나? 서북민들과 개화에서 도태된 자들의 감정을 자극해서 권좌에 오른 정치꾼들 아닌가. 이런 자들의 지휘를 받으라고?”
“지금의 대한을 만든 건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국가를 혁신한 개화당과 관료들이야. 정치꾼 놈들이 뭘 안다고…….”
“아, 성상께서는 어찌하여 선동가 무리에게 정권의 일부를 맡기셨단 말인가? 성상께서 만기친람하시던 시절이 그립네.”
근대적 실적주의(Merit system)의 신봉자인 신관료계급은, 과거의 낡은 관료제를 혁신하고 국가의 중추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들에게 있어 국가는 곧 갑신경장 이래의 근대국가를 의미했고, 이를 주도한 건 개화당이었다.
이들이 존경해마지않는 황제나 개화당의 통치라면 기꺼이 충심으로 받들겠지만, ‘대중의 인기를 얻어 집권한 자들’이 통치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고등고시로 임용된 관료가 선거로 선출되는 정치가보다 훨씬 낫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에게, 안창호와 같은 대중 정치가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대신 자격이 없었다.
“대신 각하, 각하의 고상하신 계획에는 부처 일동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실무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운영되었던 전례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몇 달이 지나자, 안창호와 신민당 대신들도 관료들의 반감과 표리부동을 꿰뚫어 보게 되었다.
“군인들은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하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확실하게 의견 표명을 하니까. 하지만 이 관료란 작자들은 겉으로만 복종할 뿐, 뒤에서는 선출된 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복지부동한다.”
신민당 입장에선 오히려 군부가 더 대하기 편했다. 비록 군무대신 이동휘가 군부를 대표하는 입장이라 신민당의 개혁안이나 군비 축소에 제동을 걸고 있긴 했지만, 그 자신도 함경도 변방의 평민 출신이자 신흥 엘리트로서 개혁에 공감했다.
홍범도·이동휘·노백린·이갑·유동열 등으로 대표되는 군부 2세대의 중추는, 대개 서북지방 평민 출신이었다. 상대적으로 천시되었던 무관직의 신분이 급상승한 데다, 무엇보다 사관학교는 학비가 없었다. 개혁과 입신출세에 목마르던 서북 평민들에게 군대는 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서북 출신 신흥 엘리트인 군부 지도부는 역시 서북의 신흥 엘리트를 대표하는 신민당에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았고, 설령 신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근대적 군대의 창설자이자 대원수인 황제 이선에 대한 군부 지도부의 충성심은 절대적이었으니, 황제가 선출된 정부에 권력을 일부 양도했다면 이에 따르는 게 옳았다.
“저들은 지난 수십 년간 국가의 치안을 보위해 온 경찰을 적대한다. 도대체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단 말인가?”
민간 정치인에 가장 큰 반감을 느끼고 있는 관료조직은 단연코, 행정관료도 군부도 아닌 경찰이었다.
근대적 경찰 제도를 창설한 게 개화당이오, 그중에서도 박영효와 이규완이 중심역할을 했던 걸 생각하면, 이들의 실각 이후 경찰이 느끼는 반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민간 정치인이 강력히 규탄하는 원산 발포,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에 대한 탄압은 경찰로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은 국가를 보위한다. 국가의 적을 사전에 적발하여 제압하는 게 우리 의무다. 본래 국가의 적은 반동 유림 세력이었다. 이제는 좌익분자가 국가의 적이다.”
갑신경장 이후 개화에 반감을 느끼는 향촌 지주와 유림을 제압하기 위해, 개화당이 신속히 성립하여 전국에 확대한 이들이 바로 순검, 즉 경찰이었다.
탄압 일변도가 능사는 아니라, 개화에 부정적이지만 관직에 목말라하던 향촌 지배층에 오히려 경찰 간부나 진위대 지휘관 감투를 씌어 주고 정부에 충성하게 했다.
관직을 받게 된 이들은 기꺼이 개화당 정부에 충성했고, 개화에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이 몽둥이세례를 날리고 체포했다.
지방에서 무력을 독점한 경찰 조직의 확대로 개화당은 신속히 전국을 장악할 수 있었고, 무너져 가던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즉, 개화당의 권력 장악과 신속한 근대화에 경찰력이 행한 역할이 적지 않았다.
「관료 조직은 경쟁으로 돌아가는 법.」
지방 향촌사회에서 경찰의 힘이 너무 강해짐에 따라, 이선은 견제장치를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찰 간부는 향촌 지배층에서 중앙에서 온 신흥 관료로 서서히 대체되었다.
황제 직속 국가헌병대를 창설하여 벽지의 치안을 담당하게 했다. 개화 초기에 경찰이 휘두르던 사법권의 대부분도 삼권분립이 확립되면서 사법부로 이전되었다.
군부와 경찰, 사법부가 상호 견제하는 시스템이 확립되면서, 경찰의 힘은 확연히 꺾였다.
하지만, ‘옛날엔 호랑이였다면 지금은 순검이 제일 무섭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순검’이 작은 향촌사회에서 지닌 무소불위적 이미지가 금방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순검이 떴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못한 게 없어도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총칼을 찬 경찰은 유일하게 향촌의 무력을 독점했고, 전통적인 관존민비의 관념은 경찰의 권위를 더욱 막강하게 했다.
향촌의 하층 순검들은 대개 출세를 열망하던 지방 평민 출신이 다수를 이뤘는데, 이들이 오히려 중앙에서 온 간부보다 더 가혹할 때가 많았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건, 선출된 정부의 경찰 조직 통제입니다. 이는 확고한 의지와 뚝심을 가진 이만이 추진할 수 있습니다. 백범이야말로 최고의 적격자입니다.”
지방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했던 안창호와 김구는 경찰의 횡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이 그들의 개혁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강철의 의지를 가진 투박한 정치가, 김구는 신속히 경찰개혁에 나섰다.
차관급인 내무협판이 국장급인 치안국장까지 겸임한 건, 직접 경찰력을 장악하겠다는 의미였다.
“모든 경찰의 인사 재배치를 단행한다. 상피제를 확대해 고향과 인접한 곳에는 근무할 수 없다. 국민에게 민폐를 저지르는 경찰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한다. 공안처의 민간인 사찰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대신의 허락 없이는 일체 금지한다. 헌법이 보장한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짓밟는 경찰은 옷 벗을 각오를 하라. 모든 경찰은 황제 폐하께서 흠정하신 헌법의 가치를 높이 받들라.”
김구는 연일 강경한 조치를 발표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대신의 권한으로 대대적인 인사 재배치와 재교육이 이뤄졌다.
향촌사회에 총칼을 차고 군림하던 경찰들은 삽시간에 민중친화적인 조직으로 재편되어야 했다.
“아니, 40년 경찰 전통을 단 한순간에 파괴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제군은 민중의 지팡이다. 민중의 몽둥이가 아니다. 그런데도 원산 학살과도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 왜인가? 일부 경찰이 국민을 동등한 국민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에 반대하는 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사직하라.”
김구는 전국의 경찰 조직을 재편했다.
어떤 비난이 쏟아져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개혁 조치에 반대하는 자들은 정말로 사직 처리시켰다.
경찰은 결국 내무부 산하 조직이었고, 대놓고 맞서 싸운다면 그건 항명이었다. 상명하복을 당연히 여기는 관료조직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 역사상 가장 확실하게 재갈을 물리는 정치가가 나타난 것이다.
“김구 이 작자,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닙니까?”
“정무직으로 임명하는 협판이 대신을 보좌하라고 있는 거지, 기존 조직을 박살 내라고 있는 게 아닐 텐데?”
“내무대신, 대체 뭐 하는 겁니까! 왜 협판의 폭주를 방치하고 있는 겁니까?”
“폭주라니요, 경찰 조직의 수장으로서 지극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호라, 이제 보니 내무대신께서 명하신 게로구만.”
“갑신경장 이래 국내 치안을 책임져온 경찰 조직을 이런 식으로 박대해도 되는 겁니까?”
경찰 조직과 가까운 개화당에서 반발이 쏟아졌지만, 안창호와 김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간 경찰의 노고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경찰 조직의 일부는 관존민비의 악습에 물들어 있으며, 국민을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원산 발포가 이를 상징하고 있지요. 치안의 안정이라는 본원의 목표에 충실하고, 국민 친화적인 조직으로 재편하기 위하여 내무부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필요한 개혁이자, 세계관의 대립이었다.
원산 학살에서 드러난 경찰의 실책과 난맥이 너무나 명백했기에, 개혁은 반드시 필요했다.
또한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와 민간 정치인이, 선출되지 않은 관료보다 우위에 있음을 명확히 보여 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군대에 대한 문민통제, 관료조직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확립하기 위한 투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