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68
3부 83화 후계자 양성
내무부가 주도하는 개혁에, 관료조직은 물론이요 연립정부 내에서도 반발이 터져 나왔다.
개화당 지도부는 본질적으로 엘리트 관료 출신이고,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관료집단에 더 가까웠다. 이들이 보기에 안창호와 김구의 개혁은 선출직 정치인의 명백한 월권이었다.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사례를 볼 때, 관료조직을 한 번 길들이긴 해야 합니다. 신민당이 하는 걸 시금석으로 지켜보시지요.”
의외로 이 문제에 유화적인 건 외무대신 이승만이었다.
‘행정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우드로 윌슨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승만으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정치학자였던 윌슨은 ≪행정의 연구(1887)≫에서 행정인은 ‘효율적 목표달성추구, 능률성, 효율성’을 모색하지만, 정치인은 ‘국가목표설정과 민주성확보’를 추구하는 과정으로 행정과 정치를 구분하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정치행정이원론이다.
윌슨은 행정 영역을 정치에서 독립시켜 정치적으로 중립인 공무원이 실적에 따라 임용, 승진하도록 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대선에서 승리하면 집권 정당이 모든 직책을 나눠 먹는 미국의 엽관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론이었지만, 정치와 행정이 일원화되어 있었던 대한제국의 현실에도 밀접한 측면이 있었다.
“우남, 이건 개화당의 최대 기반인 관료에 대한 배신일세.”
“개화당이 곧 관료고, 관료가 곧 개화당이라는 인식은 우리의 당리당략을 위해서 좋을지는 몰라도, 국가의 입장에서는 결코 좋지 않습니다.”
기실 신민당에 너무 양보한다는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화당 지도부가 내무부를 신민당에게 내준 이유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개화당이라고 인식하는 관료들은 결코 신민당 대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관료는 어떤 정부가 되었건 복종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당리당략을 따지는 건 이승만도 그 누구보다 뒤지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윌슨의 제자임을 강조해 왔다. 윌슨의 행정학 이론을 국내에 수입한 것도 정치학자 이승만이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관료 편을 들면, 뭐가 되나? 표리부동하다는 평가나 듣겠지. 개화당 내에서 정당정치의 화신으로서 선출직 정치인을 대표해야 한다.’
개화당 신진 세력을 대표하는 이승만은, 자신이 어떤 정치적 입장을 잡아야 하는지 계산했다.
‘집권 개화당에 있어야 권좌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래서 신민당이 아닌 개화당에 입당했지. 그런데 기존 노선을 고수하면 차별성이 없다. 개화당의 혁신을 이끌 지도자. 보수파와 개혁파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지도자.’
대리청정 중인 소조 이진은, 이승만의 말을 듣고 만족감을 표명했다.
“옳은 말이군요. 관료는 오직 황제 폐하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지, 특정 정파에 치우쳐져서는 안 됩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진은 개화당만이 국가를 위한 당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존경하는 부친이 초기 개화당의 지도자였고, 부친과 함께 국가를 이끌어 온 게 개화당이었다. 개화당은 곧 이선의 당이었다.
하지만 이선이 주도한 박영효 일파의 숙청과 일련의 헌정 개혁을 보면서, 이진의 생각은 달라졌다.
‘부황께서는 개화당 일당 지배를 원치 않으시는구나. 하긴, 개화당이 너무 오만해졌어. 부황의 권위에 도전하려 한다면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지.’
이진은 부친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했다.
직접 물어보고 답을 구하면 가장 좋은 방법일 터였다. 이선은 아들이 묻는데 ‘그것도 모르느냐?’라고 타박할 아버지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된다면 나를 믿고 대리청정까지 맡긴 부황이 어찌 생각하시겠는가? 답은 해 주시더라도 속으론 실망하실 터. 아직 부족하다고. 내 스스로 판단해서 부황의 뜻을 가늠해야지. 결코 부황을 실망시키게 할 수는 없다.’
이진은 세계적 추세, 이선의 정책을 염두에 두고 대리청정을 이어 나갔다.
‘부황은 대전쟁 이후의 변화상을 보시고, 민의에 의해 선출되는 정부를 선호하신다. 국가권력이 국민을 탄압하는 걸 원치 않으신다. 음, 그리고…….’
이선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관료조직의 개화당 지향성 탈피와 정치적 중립을 원했다. 선출된 행정부가 관료를 확실히 통제해야 했다.
과거 1880년대 개화 초기에 무능하고 부패한 관료조직을 쓸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관료조직은 확연히 유능하고 청렴했지만, 여전히 관존민비라는 특권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분제가 혁파된 만민평등의 시대에 관료의 엘리트주의가 심화된 것이다.
‘특히 경찰개혁은 시급한 일이지.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해? 도대체 국민을 얼마나 천하게 여기면 발포라는 선택지를 쉽게 택하나. 어깨에 들어간 힘부터 빼야 한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이선이 경찰 조직을 갈아엎고 싹 일신하는 것도 가능했다.
경찰뿐만 아니라, 군부와 관료를 대상으로 해도 마찬가지였다.
불만이야 있겠지만, 황제의 권력과 권위에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선은 그리 쉬운 선택지를 택하지 않았다.
모든 걸 황제가 마음대로 주무르는 형태의 정치는 이제 지양되어야 했다.
정치세력 간의 대립과 타협,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 그리고 이를 추인하는 젊고 혁신적인 새로운 군주.
이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입헌군주제의 미래상이었다.
보수파는 황제가 개입해 안창호와 김구의 ‘월권’을 막아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내무대신이 9월 의거 기념제에 참석해 정부를 대표해 연설을 한 것도 부적절하다는 상소가 쏟아졌다.
이에 대한 이선의 답변은 분명했다.
「비답(批答)한다. 작년 9월에 먼저 탑골공원을 방문하여 추모를 한 이는 바로 짐과 소조다. 근간 내무대신의 행보가 잘못되었다고 여긴다면, 짐을 먼저 비판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짐은 내무부의 개혁 조치가 시의적절하다고 여긴다. 짐이 임명한 정부요,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다. 이는 곧 짐과 국민의 뜻이니, 함부로 월권 운운하지 말고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라.」
이선이 명백한 의사를 보임에 따라, 황제의 충신인 총리 이상설과 개화당 지도부는 어심을 따르기로 했다. 보수파는 입을 다물었다.
내무부의 개혁은 힘을 얻었다. 안창호는 김구에게 경찰 개혁을 맡기고, 자신은 노동문제 개선을 위해 본격적인 추진에 나섰다.
‘뭐, 만약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면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겠지만. 내가 안 시켜도 도산과 백범이 잘하고 있잖아? 내 명령 없이 알아서 개혁하는 정부라니, 이 얼마나 바람직한가.’
이선은 안창호와 김구가 추진하는 개혁에 공감했다. 자신의 지시 없이 스스로 개혁하는 정부를 지켜보는 것도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잘하고 있어. 후속 세대를 이끌 정치인을 발굴하고 양성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군.’
신한청년당을 이끄는 여운형과 조소앙의 행보도 이선은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은 군소정당에 머물러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장차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컸다.
‘임오년 이래 근 40년인가. 오래 했다.’
이선은 새삼 자신이 국가를 위해 오랫동안 집정했으며, 나이가 늙었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광무 24년 9월 8일.
이날은 태상황의 탄일인 만수성절이었다.
69세 탄일을 맞이한 태상황을 위하여, 창덕궁에서 축연이 열렸다.
이선과 황족들은 창덕궁에 모여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태상황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주위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은 태상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황상도 건강하시오.”
‘만무수강’이란 기원이 무색할 정도로, 근래 태상황의 건강은 좋지 못했다.
몇 달 전 태상황은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빠른 치료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뇌졸중 초기 증세로 의심되었다.
회복된 후에도 걷기조차 불편해했고, 주위의 부축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었다. 인지능력도 확연히 떨어져 있었다.
근대화가 진행되며 대한제국의 의료 수준은 일취월장했지만, 20세기 초라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뇌졸중을 방지하고 완치하는 방법은 없었다.
당장 최고 선진국이라는 미국만 봐도, 윌슨 대통령이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어 사실상 직무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중풍(中風)인듯하니 오래 살기는 힘들성싶소.”
“태상황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태상황은 죽음에 초연한 듯 허허 웃었다.
“내년이면 나도 칠순이오. 이만하면 살 만큼 살았지. 열성조(列聖朝)를 생각해 보시오. 나처럼 오래 산 선대왕도 드물지 않소.”
의학이 발전됐다 하더라도, 환갑을 살면 장수했다는 말을 듣는 시대였다. 칠순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하물며 조선 군주의 평균 수명은 약 47세. 태상황은 의례적으로 장수하고 있었다. 83세까지 장수한 영조와 74세에 붕어(崩御)한 태조 고황제 다음으로 장수한 군주였다.
원역사에서는 1919년에 이미 붕어하여 고종이라는 시호가 올라갔겠지만, 역사의 변화는 대한제국의 운명뿐만 아니라 ‘고종’의 운명도 바꿔 버렸다.
일찌감치 권력을 빼앗겨 허수아비가 되었고, 퇴위한 후에는 체념하여 한가로이 삶을 누리며 평안한 만년을 보냈다.
수십 년간 격무를 거듭하여 건강을 해치고 있는 이선과 비교하면, 건강이란 측면에선 바람직했다.
“내년 만수성절도 건강히 맞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내년은 고희(古稀)이시니 특별히 준비하겠습니다. 옥체 강녕한 모습으로 맞이해 주시길 바라옵니다.”
이선의 만수무강 기원에, 태상황이 손을 맞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황상.”
부자(父子)라지만 나이는 불과 16살 차. 아버지라기보다는 맏형이나 삼촌에 더 가까운 나이였다.
이선 본인도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우다시피 하며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조부 대원군에게 부친으로서의 감정을 느꼈지, 태상황은 군주일지언정 부친일 수 없었다.
태상황에게 있어 대원군은 위협적인 부친이었고, 이선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아들이었다. 결국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한때는 정적으로서 의심하고, 불신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었다. 어느덧 긴 시간이 지나자, 분노와 미움의 감정은 다 사라지고, 결국 피할 수 없는 혈연으로서의 끈끈한 관계가 남았다.
기실 그들 부자는 외모만 봐도 거의 닮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자라고 인식도 못 할 터였다.
문득 태상황은 옛일을 떠올렸다.
열여섯 살, 여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던 시절.
소년 임금은 ‘흰 피부의 아름다운 용모, 큰 키에 날씬한 몸매’를 지닌 연상의 궁인 이씨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 이선은, 자라면서 모친을 닮아 빼어난 용모에 큰 체격을 지녔다.
겨우 열일곱에 아비가 되었음에도, 자식의 탄생이 얼마나 기뻤던가. 오랜만에 태어난 왕자 아기씨에게, 종친은 물론이요 나라 전체가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임금은 섭정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는 부친 대원군과 맞서 싸워야 했고, 왕비 민씨와 처가는 강력한 힘이 되어 주었다.
대원군이 총애하고, 왕비가 미워하는 장남 완화군은 결국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떠나가 버렸다. 황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청국으로 갔다가, 더 먼 나라로 떠났다고 한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먼 나라에서라도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임오년, 마침내 대원군이 반란군을 이끌고 궁궐을 닥친 바로 그 무렵, 뜻밖에도 장남이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아들은, 대원군과 손을 잡고 자신의 권력을 빼앗았다.
그 후 38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황상은 500년 왕조의 중흥을 이뤄 냈소. 대한의 국위가 사방을 떨치고 있으니, 참으로 감격할 따름이오. 내가 이렇게 훌륭한 군주를 아들로 뒀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소?”
단순히 해 본 소리가 아니었다. 태상황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어쩌면 후대에서는, 내 최고의 업적을 광무제 이선을 낳은 것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르지.”
“태상황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이선이 무안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지간한 찬사는 웃어넘기는 이선이지만, 부친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민망했다.
“이제는 대원왕의 마음도 조금 이해가 되오. 훌륭한 후계자를 얻는다는 건, 왕조의 대업이자 국가 중흥의 길이니. 대원왕은 내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고, 황상은 만족했던 게지. 전에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이해가 되오.”
“…….”
“나는 황상이 내 후계자가 되어 자랑스럽소. 황상에게도 태자, 대리청정을 함에도 부족함이 없는 총명하고 훤칠한 후계자가 있으니 얼마나 자랑스럽겠소.”
찬사가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이진은 고개를 숙이며 황송해했다.
“태상황 폐하, 황공한 말씀입니다. 소손은 어리석어 부황의 가르침을 오래토록 받아야 합니다.”
“허허, 겸손하기는. 내 너의 그런 면도 좋게 본다마는.”
너털웃음을 터드리던 태상황은, 화제를 전환했다.
“이처럼 황실의 후계자란 참으로 중요하오. 진의 나이 스물넷이니, 후계자를 얻기엔 충분한 나이가 아니오? 왜 아직도 국혼을 치르지 않는지 모르겠소. 속히 국혼을 올리시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기 전에 증손자를 보고 싶구려.”
황실의 큰 어른 입장으로선 당연한 말이었다.
이선이 무려 29세가 되어야 혼례를 올린 사례가 있긴 하지만, 대개 조선의 왕세자나 왕족은 15세 이전이면 혼례를 올렸다.
조혼을 금지하는 대한제국 민법상 남성은 20세 이상은 되어야 결혼한다지만, 이진은 이미 스물을 넘겨 스물넷이나 되었다.
‘흠, 그래. 국혼이라고 하니까 진을 결혼시켜야 하는데……. 희도 과년(瓜年)한데 오라비 결혼하기 전에 절대 안 한다고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올해 안에 순차적으로 진행해야겠다.’
이선이 황태자 국혼의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이런저런 사정을 따져서 그만큼 미뤄졌지만, 결국 결단은 내려져야 했다. 이미 후보군은 정해 둔 터였다.
“태상황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마땅히 금년 안으로 황태자의 국혼을 거행하겠습니다.”
“오오,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시오. 내 마침내 마지막 소원을 이루게 되었구려.”
“실로 황실의 홍복입니다. 축하하오, 태자!”
태상황은 크게 기뻐하며 만족해했고, 태황후와 황실 어른들도 축하를 보냈다.
그 순간, 미소 짓고 있는 이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는 걸 눈치채고 있는 건, 오직 그의 모친인 황후 김아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