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70
3부 85화 황태자의 고백
대리청정을 맡게 된 이후, 이진은 법궁(法宮)인 경복궁에서 집무를 수행했다. 군주에 준하는 예우로, 소조에 대한 예우였다.
이선은 황성 경운궁과 서경 흥경궁을 오가면서 지냈다. 황성에 있을 때 거처하는 곳이 경운궁이었다.
즉, 태상황은 창덕궁에, 황제는 경운궁에, 황태자는 경복궁에 거처했다.
“대조께옵서 금일 저녁 경운궁에서 함께 만찬을 하자고 전하셨습니다.”
“아,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게.”
국무회의를 마친 이진에게 궁내부 관리가 이선의 말을 전했다.
이선이 황성에 머물 때는, 이진이 자식 된 도리로 매일 경운궁으로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다.
“정무로 바쁠 터인데 번거롭게 매일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올 필요 없다. 시간될 때 같이 식사나 하자꾸나.”
이선은 정무를 봐야 하는 소조를 배려해서 문안을 최소화했다.
대신 종종 만찬을 함께 했는데, 이때 이선은 주로 이진과 정세에 대한 문답을 나누며 통치교육을 이어 나갔다.
이진은 오늘 저녁도 일전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달이 아름답게 떠오른 가을밤, 경운궁 석조전.
만찬에는 이선과 이진만 착석했다. 시중을 드는 궁내부 시종만이 시립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 국무는 어떠하였는가.”
“예, 전국 15도에서 올라온 장계를 살폈습니다. 삼남에서는 곧 추수철을 앞두고 있어…….”
부자는 식사를 하며 정무에 대해 논의했다.
대리청정을 맡으며 이진은 새삼스레 부친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외교와 군사의 일은 제하고, 순전히 내치만 맡아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전국에서 올라와서 결재해야 하는 장계가 매일 쌓였다.
그나마 올해부터는 국무총리가 상당한 권한을 이행 받고, 각 부처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어, 이진이 하는 일은 국무회의에서 부처 간의 의견을 조율하고 결재하는 역할이었다.
그럼에도 업무는 과중하였으니, 이진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만기친람하는 전제군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부황처럼 탁월한 명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제군주의 어려움은, 무엇보다 매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하고, 결단이 국가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그 엄청난 무게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이진은 도저히 부친처럼 국가를 성공으로만 이끌 자신이 들지 않았다.
대리청정을 하면서도 느끼는 압박감이 굉장한데, 도대체 부친은 그동안 어떻게 중압감을 견뎌 냈는지 궁금했다.
“네가 소조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다하고 있어서 나는 기쁘구나.”
“화, 황공하옵니다.”
이진은 언제나 이선을 비교대상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진은 성실하고 유능했다.
근대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로서 충실히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특별히 흠잡을 데도 없었다.
“혹여 나와 비교해서 네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시대와 너의 시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선은 아들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이선이 처음 통치를 맡게 되었을 때는 약소국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했고, 큰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갔다.
대한제국은 이제 지역강국을 넘어 열강의 문턱에 진입했다. 인구도 경제규모도 크게 성장했다. 그만큼 확인해야 할 일도 엄청나게 많아졌고, 관료조직도 팽창했으며, 갈등 구조도 다양해졌다.
이제 한 사람의 만기친람은 불가능했다. 부처 간의 분업화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이선도 임무 분담을 택한 것이었다. 자신은 외치에 전념하고, 소조와 내각 대신들에게 내치의 다양한 역할을 맡겼다.
“너는 나처럼 무거운 짐을 질 필요가 없다. 나는 네가 짊어질 짐의 무게를 덜어 내고 싶구나.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선의 격려에 이진은 내심 뭉클했다.
예전만 해도 자신의 능력이 위대한 부황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고 여겨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려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를 뿐만 아니라 후계자를 배려하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전제군주는 막연히 즐거운 자리가 아니었다. 전제군주가 입헌군주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 막강한 권력이 주어진 만큼 더 큰 의무가 주어지며, 만약 실패한다면 모든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 한다는 것을 이진은 깨닫게 됐다.
차르와 카이저가 그러했듯이, 국가가 실패했을 때 전제군주는 모든 책임을 지고 옥좌에서 내려와야 한다. 최악의 경우 비참한 최후도 각오해야 했다.
국가를 위해서도, 후계자를 위해서도,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함께 술이라도 한잔 마시자꾸나. 좋은 술을 준비했다.
“예, 폐하.”
만찬을 마친 후, 이선과 이진은 서재로 이동해 술을 마셨다.
궁내부 시종도 물러나게 해서, 부자만의 오붓한 술자리였다.
완전히 서양식으로 꾸며진 서재에는 은은한 음악소리가 흘렀다. 식사 후에 와인을 마시며 축음기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건 이선의 취미였다.
젊은 이진도 감탄할 만큼의 ‘모던’함이었지만, 21세기의 기억이 있는 이선으로선 이정도가 최대한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TV, 컴퓨터, 핸드폰, 인터넷도 없는 시대라 이정도가 최신이지. 라디오는 이제 막 보급되고 있고. 나는 어림도 없고, 진이 노인이 되면 경험할 수 있으려나.’
당시 최신 기술은 라디오였다. 미국에서 처음 라디오가 개발되자, 이선은 재빨리 계약을 맺어 라디오 기술을 확보했다.
1920년 이해에 세계 최초의 상업 라디오 방송국이 미국에 설립되었고,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도 방송국 개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앞으로 네가 살아갈 시대는 엄청난 변혁이 일어날 게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진보가 있을 거야.”
“지난 40년을 능가하는 진보가 올 수 있단 말씀이시옵니까?”
당대 한국인의 눈에는 지난 40년도 천지개벽이었다. 1880년의 조선 한성과 1920년의 대한제국 황성은 완전히 다른 별천지였다.
“그럼. 40년 뒤라면 인간이 지구를 벗어나 우주에도 날아갈 걸.”
“하하, 우주에 말이옵니까. 프랑스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가 생각나는군요.”
이선은 원역사에서 인간이 처음 우주에 나간 게 1961년 유리 가가린이니 기억을 토대로 말한 거지만, 이진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쥘 베른 소설 말이냐? 대포를 쏴서 달에 간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정말로 인간이 달에 도달할 날도 머지않았다. 50년 뒤라면 가능하겠지. 나는 무리겠지만, 너는 살아서 그 때를 볼 수도 있겠구나.”
원역사에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도달한 게 1969년이니, 이선의 자식 세대는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차체에 로켓 기술을 확보해서 대한이 직접 우주 경쟁에 나설 수 있다면 좋은 일이고. 내 치세에는 불가능해도 진의 치세에는 가능할 수 있지. 치올코프스키는 지금 러시아에 있으려나?’
로켓 개발과 우주 비행의 세계적 선구자인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Konstantin E. Tsiolkovsky).
1857년생인 치올코프스키는 낙후한 러시아제국에서는 기인(奇人) 취급 받았지만, 기술혁신을 열망하던 소비에트 정권에서는 오히려 중용되어 훗날 소련의 우주 개발에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이제 네 인생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듯하다. 태상황께 말씀드렸다시피 올해 안에는 국혼을 추진할까 한다마는, 내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하문하시옵소서.”
“혼인은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즉, 네 의견이 어떤지 듣고 싶구나.”
“황태자의 국혼은 국가의 일인데, 어찌 제 의견을 앞세우겠습니까. 부황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진이 여전히 속내를 감추며 말하자, 이선은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국가의 일이라, 물론 국익 중요하지. 하지만 국혼으로 국운이 좌지우지될 정도로 대한이 허약한 나라는 아니다.”
이선은 와인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관혼상제(冠婚喪祭), 그중에서도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하였으니, 혼례라는 건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뭐, 그런 규범은 다 제쳐두더라도, 결국 네가 아내와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 일이다. 내가 네 인생을 대신 살아 주는 게 아닐진대, 어찌 내 뜻만으로 네 혼처를 정하겠느냐? 네 뜻이 가장 중요하다.”
이진은 부친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조선 왕실의 법도로 보나, 20세기 초의 규범으로 보나, 혼처는 부모가 정해 주는 게 마땅했다.
‘부황께서는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거지? 이미 청국 숙친왕의 딸로 혼처가 정해진 게 아니었나? 애초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혼하는 이가 몇 명이나 된단 말인가.’
“그래, 내 말이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 왕가의 법도로 보나 관례로 보나 혼례는 부모가 정해 주는 거였으니. 근데 난 굳이 그럴 생각 없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관례를 고집할 이유가 없지.”
“하오나, 폐하께서는 이미 청국 숙친왕의 10녀인 김현사 양을 황태자비로 염두에 두고 계신 게 아닌지…….”
“그랬었지.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국혼을 청한 것도, 확정된 것도 아니다. 암묵적인 논의였을 뿐.”
이선은 굳이 청국 공주와의 결혼이 국익에 얼마나 도움 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말 안 해도 이진도 알고 있을 터이고, 새삼 압박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도 알겠지만 일본 측에서 국혼을 청해 왔지.”
이진도 일본에서 국혼을 청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다이쇼 천황이 자신을 좋게 봐 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일본이 국혼을 제안하리라곤 생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청국이 됐건, 일본이 됐건, 혹은 국내에서 간택령을 내리건.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 나는 네 의견을 듣고 싶다. 솔직히 말해 보거라.”
‘모후께서 부황이 하문하실 일이 있으면 솔직히 답하라고 한 게 이거였구나.’
부친이 거듭 의견을 묻는데 답을 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뿐더러, 모친으로부터 귀띔을 들은 이진은 솔직히 답하기로 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신도 청국을 형제지국으로 깊이 생각합니다마는, 국혼의 격식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대한의 황태자로서, 황제 폐하의 적장자입니다. 숙친왕이 청국의 실력자라고는 하나 방계 황족이요, 현사 양의 외가가 명문이라고는 하나 서녀입니다. 단순히 제 자신과 현사 양의 문제가 아니라, 왕조 500년 역사상 최초의 왕가 간 결합이 아니겠습니까. 대한의 국격을 위해서도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황후의 의견과 대동소이했다. 이선은 아영이 했던 말이 장남의 의견을 전한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일본 황가의 국혼도 맞지 않겠군. 그쪽도 방계 친왕가니까. 마사코 양은 적장녀이기는 하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그러하옵니다. 왕가 간의 혼인이 법도인 서양 왕실에서도 귀천상혼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군주의 아들은 군주의 딸과 결혼해야 격에 맞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다마는, 서양도 왕자라고 해서 꼭 공주하고만 결혼하는 건 아니다. 방계 왕족까지는 충분히 허용이 되지. 군주의 자식으로만 한정한다면, 너무 조건이 까다롭구나. 청 황제의 동생인 공주는 너무 어리고, 일본 천황에게는 아예 공주가 없지 않느냐. 애초에 조선에서도 사대부 여식을 중전으로 간택했는데, 이를 귀천상혼이라 할 수 있느냐?”
이선은 아버지도 아닌 아들이 혼인의 격을 따지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대한제국 황태자이자 미래의 황제로서 자부심이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답답할 정도로 보수적인 아이는 아닌데.’
“솔직히 말해 보거라. 현사 양이나 마사코 양이 혼처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냐?”
“그건 아니옵니다. 만나 보니 현사 양은 총명한 분이고, 일본 황가에서 추천한 마사코 양도 충분히 좋은 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현사 양은 만나 본 횟수가 손에 꼽고, 마사코 양은 사진으로만 본 게 전부니, 뭐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 과연 그렇구나.”
애초에 이진으로선 인상비평만 남길 수밖에 없었다. 이선은 이해했다.
“그럼 네게 시간을 더 줘야겠구나. 더 차분히 시간을 갖고 알아 가면 되겠지. 국혼이 당장 진행되지 않더라도, 태상황께선 이해해 주실 게다.”
“예, 알겠습니다.”
이진은 순순히 승낙했지만, 이선은 여전히 아들이 본심을 다 밝히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그래, 오늘은 참 좋은 날이구나. 근래 술이 이토록 달고 맛있는 날도 없었다. 너도 한잔 받거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선은 이진을 채근하지 않고, 계속 술을 권했다.
도수가 높은 포트와인이 들어가자, 이선에 비해 주량이 적은 이진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너에게 정말로 궁금한 게 있다.”
“하문하시옵소서, 폐하.”
“네 나이 스물넷이다. 한창 청춘이지. 여인에 대하여 연모의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느냐?”
순간, 와인을 마시던 이진은 당황해서 쏟을 뻔했다.
“화, 황공하옵니다.”
“괜찮다. 내 너에게 이런 질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미안할 따름이다. 의친왕이라면 다를 터인데.”
이진의 나이 스물넷, 이 시대 기준으론 이미 혼인을 치르고 아버지가 되고도 남을 나이였다. 관례상 왕세자들은 열다섯이면 합방을 치르지 않았던가.
장차 자식을 얻어야할 황태자가 완전히 숙맥이면 왕가 입장에서도 곤란한 일이었다. 순친왕 이척이 세자 시절, 성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아 왕실에서도 얼마나 곤란했던가.
이선은 의친왕 이강에게 부탁하여, 이진이 당장 혼례는 올리지 않더라도 ‘어른의 세계’에 대해 배우도록 했다.
주색잡기라면 왕실 최고인 한량 이강은 흔쾌히 조카에게 이런 저런 기회를 마련해 줬다.
“태자 전하, 아니 진아. 오늘은 숙질로서 이야기하자.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조선의 유교문화가 쓸데없이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고 있는 것뿐이다. 물론 이 숙부처럼 되라는 건 아니다. 태자로서의 의무만 생각하지 말고 때로는 본능에 충실해지라는 의미다.”
사복을 입고 숙부를 따라 얼떨결에 최고급 요정의 기생과 밤을 보내기도 하고, 서양인들이 가는 클럽에 가서 모 외교관의 여식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 물론 황태자와 밤을 보냈다는 건 엄격한 비밀이었다.
매사 진지한 이진이라지만, 숙맥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쾌락은 잠시뿐이었다. 숙부 이강이 왜 그토록 여색에 탐닉하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긴, 숙부는 능력에 비해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으니까. 그에 비하면 황태자인 나는 여색 따위에 탐닉하면 안 되지.’
냉정히 말해서, 이진은 살아오면서 여인에 대한 연모니 사랑이니 하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 통치자에게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그나마 이진이 특별하게 생각하는 타티야나에게 느끼는 감정도 사랑이라기보다는, 공주로 태어나 몰락한 안타까운 운명에 대한 동정과, 아픈 동생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태도에 대한 호감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대제국의 공주이자, 유럽 왕실에서도 손꼽히는 미모에 대한 선망도 있었다.
하지만 부친에게 ‘제국을 계승할 제가 사랑 같은 걸 왜 한단 말입니까?’ 이런 대답 따윈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 부친은 ‘오, 너는 정말 냉철한 황제감이로구나.’라고 답하기보다는, 인간미가 없다고 실망할 것 같았다. 그 냉철한 부친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지 않았던가?
“저도 사내일진데, 어찌 이 나이가 되도록 여인에 대한 연모의 감정 한번 없었겠습니까?”
“과연 그렇구나. 그래, 그 여인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이선이 반갑게 웃으면서 화답하자, 이진은 자신이 역시 답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술기운이 올라 용기가 생긴 이진은 목소리를 높였다.
“소자는 오래전부터, 타티야나 공주를 연모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