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71
3부 86화 이선의 결단
‘…….’
이선은 내심 놀랐으나, 잠자코 아들의 반응을 곱씹어 봤다.
이진의 얼굴은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속마음을 드러내서 그런 것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진은 진작부터 타티야나가 좋다는 반응을 보이긴 했었다. 3년 전에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도, 타티야나와 약혼하고 싶어 했다고 이영이 보고한 바 있었다.
그래서 타티야나에 대한 이진의 마음을 물어본 게 아니었던가?
「오직 친족과도 같은 친애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혹여 타국 왕실과의 통혼이 러시아 황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소자는 대한의 황태자인데 러시아 황실과 혼인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답했었다. 이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고려를 따져 본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선은 말을 덧붙였다.
「네가 정녕 마음이 있다면, 나는 네 뜻을 존중해 줄 생각이다.」
이는 이선의 진심이었다.
자식이 결혼을 원하는 여인이 있다면, 강제로 그 뜻을 꺾고 정략결혼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러시아 공주든, 미국 배우든, 국내 평민 여식, 아니 설령 신분이 낮은 예기(藝妓)라 해도 상관없었다.
만약 그 혼인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이선이 자신의 권위로 해결해 줄 생각이었다.
‘종친이나 사대부가 반대해도 상관없다. 혼인만큼은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당사자 의견이 중요하지, 누구 의견이 중요한가?’
문제는 이진의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타티야나가 좋다는 건지, 아니면 술김에 해 본 소리인지 알아봐야 했다.
“그래, 그렇구나. 언제부터 공주를 좋아하게 되었느냐?”
“예? 아, 7년 전에 처음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부터이옵니다.”
“그래? 근데 분명히 재작년에 이야기했을 때에는 친족과도 같은 친애하는 마음뿐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뀐 게로구나. 아니면 내게 말하기가 곤란했거나.”
부친의 말을 들은 이진은 아차 싶었다.
‘이래서야 부황께 한 입으로 두말한 셈이 아닌가. 거짓말했다고 할 수는 없지.’
“그, 그것이……. 공주가 망명한 이후에 부쩍 감정적으로 교류할 일이 많아진 건 사실입니다. 하오나 소신은 대한의 황태자인데, 제 개인의 감정을 앞세울 수 있겠습니까. 설령 감정이 있다 할지라도, 감히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이진의 솔직한 심리는, 사랑이나 연모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경과 야망에 더 가까웠다.
‘제국의 황후로는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로마노프 왕가의 공주가 더 적합하지.’
어차피 외국인과 결혼을 해야 한다면, 이진은 로마노프의 공주를 택하고 싶었다.
평상시라면 러시아에서도 종교 문제로 허락하지 않을 일이나, 지금 그녀는 망명자 신세가 아닌가. 개종을 요구할 의무도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정통 러시아를 수복할 수는 없겠지만, 대한이나 만주에 제2의 러시아를 건설할 수도 있겠지.’
가련한 처지에 놓인 그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국가 차원의 배려를 할 수는 없어도, 황실 차원에서는 배려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품격으로 보나, 성품으로 보나, 미모로 보나 그녀만 한 여인을 보지 못했지. 청 황실이든 일본 황실이든 따라갈 수 있겠나.’
4자매 중에서 누가 되든 상관없는 건 아니고, 이진의 관심사는 단연 동갑내기 타티야나였다.
모두가 막내 알렉세이를 위해 노력했지만, 타티야나는 유독 헌신적이었다.
전장으로 떠난 올가를 대신해서 가장 노릇을 하면서, 타티야나는 아픈 남동생과 힘들어하는 여동생들을 보살폈다. 늘 성실하고 헌신적이었다.
‘동양적 의미에서 봐도 훌륭한 국모의 상이 아닌가?’
이진은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렸지만, 결국 스스로 고개를 젓고야 말았다.
설령 감정이 있다한들, 어차피 국혼은 감정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황실은 물론이고, 국민적 여론도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이진은 숙부 이영의 사례를 떠올렸다. 러시아 귀족 여인과 결혼한 일로 사실상 황실에서 파문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통성 있는 적자로서 계승권에서 멀어지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숙부는 친왕이기에 가능했지. 나는 국본이라 엄연히 상황이 다르다. 책잡힐 행동은 일절 하면 안 돼.’
존경해 마지않는 부황의 사례도 떠올렸다. 부황도 외국 여인을 사랑했다지만, 군주로서 결혼은 단념하지 않았던가.
‘부황도 그럴 진데, 어찌 내가 사사로운 마음으로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랴?’
그런데 부친의 반응은 실로 뜻밖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마음이 그렇다면, 잘 알겠다. 앞으로의 일은 내가 나서 해결할 터이니, 너는 염려하지 말거라.”
“……예?”
“국혼이라 해도, 네가 하는 결혼이다. 무엇보다 네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원하는 여인과 혼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 주마.”
이선은 오해하고 있었다.
아들이 진작부터 타티야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태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감히 드러낼 수 없었다고.
‘진은 언제나 국본으로서의 의무를 중시했기 때문에, 감히 말조차 꺼낼 수 없었겠지.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끓였겠는가. 이제라도 솔직해져서 다행이다.’
이선은 아들을 위해서 국혼의 방향을 바꿀 생각이었다.
“폐, 폐하! 아, 아니되옵니다. 어, 어찌 러시아 공주를 대한의 황태자비로 들일 수 있겠습니까? 황실과 정부는 물론이요, 국민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옵니다.”
뭔가 심각한 일이 커지고 있다고 직감한 이진은 손을 내저었다. ‘모범생’을 자처하고 있는 이진으로선 자신의 혼인 문제로 ‘사고’를 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누가 봐도 무리수였다.
‘녀석, 또 저러는구나. 그럼 국가를 위해서 희생만 할 생각이란 말이냐? 시대가 달라졌는데, 내 자식에게만큼은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지 않겠다.’
이선은 이진이 또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국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려 하는 것이라 오해했다.
“물론 어려운 일이 많겠지. 하지만 네 마음을 알게 된 이상, 나는 국익이나 법도를 강요하지 않겠다. 이제부터는 내게 맡기고, 너는 차분히 기다리거라.”
* * *
이선은 즉각 전략 수정에 나섰다.
‘청국과의 국혼은 다른 방법으로도 추진할 수 있다. 숙친왕의 자녀는 많고, 내게도 미혼의 자식이 다섯이나 더 있으니까.’
숙친왕 입장에서는 한국 태자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지 못하면 반발이 크겠지만, 대안은 있었다.
이선에게는 정친왕 이안과 예친왕 이은도 있었다. 물론 장남이 아닌 아들의 혼례는 더 자유롭게 해 줄 생각이었으므로, 정략결혼이 싫다면 선택지를 자유롭게 해 줄 생각이었다.
‘마리야가 안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안의 마음은 어찌 되지? 연상에 외국 공주지만 뭐 어때. 한 집안과 겹사돈인 건 모양새가 곤란할 수 있겠지만, 왕실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은은 열다섯이니 혼례를 이야기하기엔 이르지만, 은과 숙친왕의 다른 여식과 이어지는 방법도 있고. 그것도 그 녀석에게 달린 일이지만. 뭐, 정 안되면 종친 중에서 추진해도 되고. 현사에게는 태자 대신에 훌륭한 남편감을 소개시켜 줘야겠지.’
이선은 어떻게든 청 황실과는 혈연적 관계를 맺을 생각이었다.
‘그래, 선통제 부의도 열다섯이었지? 장차 우리 공주와 혼인해서 사위로 만들어도 괜찮겠군. 그래, 그게 좀 더 나을 수도 있어. 일본의 국혼 제안은 정중히 거절하면 되겠고.’
여러 생각을 이어 나가던 이선은,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명분, 명분은 만들기 마련이지. 역사적 전례를 따져 보자. 태종 대왕께서 명 황실과 국혼을 추진하려고 했던 전례가 있지 않은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한은 고려의 정통을 계승했고, 러시아는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했으니, 그 둘이 마침내 500년 만에 연합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아니, 그건 무리수인가.’
외국 공주와의 국혼 추진만 따져도 태종이 세자 이제(양녕대군)를 영락제의 공주와 혼사를 추진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고, 실제 성사는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결혼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한과 러시아가 겹치는 게 고려-몽골 말고 뭐가 있지? 아, 발해가 있나. 연해주는 옛 발해 영토였으니. 북방 정통주의자들은 좋아하지 않을까? 이들에게 여론을 조성하라고 할까?’
기존의 조선 역사관이 ‘삼한-신라-고려-조선’에서 역사적 정통성을 찾았다면, 민족주의 발흥과 북방사관의 득세는 ‘고구려-발해-고려-조선(대한)’으로 민족적 정통성을 찾았다.
북방사관은 중화로부터의 계승성을 찾는 유학자들과 달리 만주와 몽골, 더 나아가 유라시아 초원에서 연결성을 찾았고, 이들 입장에서는 러시아도 범(凡)유라시아 세계의 일부였다.
‘러시아 과학자와 예술가들을 끌어모으는 자석이 되면 좋겠는데.’
이선은 극동 러시아의 안정을 원했다. 원역사에서는 볼셰비키 정권을 피해 유럽과 미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러시아계 과학자와 예술가들의 피난처로 극동이 되길 바랐다. 그럼 ‘극동의 보호자’인 대한제국이 이들을 초빙할 수 있었다.
이미 일부 왕당파 인사들은 차르의 자녀들이 망명한 한국과 만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반동적 귀족들이 주류였지만, 러시아 망명자들의 피난처로 각광받으면 지식 엘리트도 뒤따를 가능성이 충분했다.
지식 엘리트들을 흡수할 수 있다면, 대한제국은 한층 더 진일보할 것이다.
‘소비에트에서는 반발하겠지만, 어차피 황실 인사들은 잊힌 존재나 다름없으니.’
내전에서는 적군의 승리가 눈앞이었다. 로마노프 황족들은 처형당하거나 대부분 추방당했다. 제정복고 가능성은 희박했고, 소비에트 정부도 해외로 떠난 황족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국혼을 토대로 전러시아의 소유권을 주장할 일이 없는 이상, 소비에트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할 터였다.
‘혈우병 문제는, 음, 혈우병이 꼭 발현하리란 법은 없지. 내 기억에 아마 올가와 타티야나는 혈우병 유전자 보인자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로마노프 가문으로 이어진 혈우병이었다. 혈우병은 모계로 유전되는 것이니만큼, 혼인에 가장 치명적인 문제였다.
이선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21세기에서 본 논문에 따르면, 사후 유전자 검식 결과 아나스타샤만이 혈우병 보인자였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확실한지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그 논문에 따르면 타티야나는 보인자가 아니었다.
‘그럼 슬슬 운을 떠볼까……. 적당한 황족에게 중재를 서 달라고 하는 게 좋겠군.’
* * *
한편, 차기 대한제국 황태자비로 고려되고 있는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여대공은 이 상황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진이 자신을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국혼을 추진한다고는 더더욱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타냐, 황태자 전하가 타냐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응? 무슨 뜻이야?”
“당연히 남자와 여자로서의 의미지.”
연애에 관심이 많은 꿈 많은 소녀 마리야는, 이진이 타티야나에게 유독 호의를 보이는 게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넌 매번 쓸데없는 상상이나 하는구나. 황태자 전하는 점잖은 분이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으실 거야.”
“아니, 왜? 황태자 전하가 타냐를 좋아하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야?”
“농담이 지나치구나. 보호자로서 우리를 돕는 분에게 그런 생각을 품으면 되겠니?”
“알았어, 알았어. 타냐는 너무 진지해.”
4자매 중에서도 가장 미녀로 손꼽히는 타티야나지만, 성격은 유독 수동적이고 둔감했다.
러시아에서도 적갈색 머리의 빼어난 외모로 워낙 인기가 좋았고, 그녀 자신도 남자들이 따르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본인이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혁명 전에 세르비아 왕태자 알렉산다르와 혼사가 오고 간 적도 있었으나, 타티야나는 주저하다가 결국 혁명이 터져서 없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여전히 알렉산다르는 타티야나에게 호감이 남아 있는 듯, 작년에 유럽 왕가 중 유일하게 5남매의 망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한 바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신세를 지고 있는 5남매로서는 정중히 거절했다. 동아시아에서 베오그라드까지 가는 길이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테러 위협은 유럽이 한국보다도 더 컸다.
‘대한제국이 세르비아보다 더 강한 나라고, 또 부황과 한국 황제 폐하는 친우셨으니까. 여기에 있는 게 더 안전하고 도움이 될 거야.’
물론 타티야나의 나이도 어느덧 만으로 스물셋,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매의 안위, 특히 알렉세이의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결혼, 특히 왕족과의 결혼은 상상도 안 하고 있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 조약으로 극동 공화국 수립이 확정되면서, 한국군과 백군 잔존세력은 모두 연해주로 퇴각했다.
한국이 보호를 천명한 백군 잔존세력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모여들었다.
1919년 이래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었고, 올해 5월 미군이 완전 철수한 후에도 한국군과 일본군은 계속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았다.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만큼은 정통 러시아 최후의 보루로 지켜야 한다.”
백계 망명자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몰려들면서, 이곳은 백군 최후의 희망이 되었다.
백군 간호사로 복무했던 올가 여대공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올랴, 한국 정부에서 네 안전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청진으로 가길 권했어. 한국군이 널 호위할 거야.”
“아니, 난 떠나지 않을 거예요.”
올가의 5촌 당숙이자 동료인 드미트리 대공은 올가가 한국으로 귀환하길 원한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극동 공화국이 수립되면, 이곳의 통제도 장담할 수 없어. 여긴 동지들에게 맡기고,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나는 러시아인이고, 차르의 맏이로서 정통 러시아를 위해 마지막까지 동포들과 함께할 의무가 있어요.”
조국에 막중한 의무감을 갖고 있는 올가는 거듭 거부했다.
드미트리는 한숨을 내쉬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론을 전했다.
“아니, 네가 돌아가야 해. 너는 차르의 장녀이자, 5남매의 맏이잖아. 즉, 네가 가장이라고. 가장으로서 동생의 결혼 문제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지.”
“동생의 결혼이라뇨? 디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올가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동생의 결혼이라니, 대체 누굴 말하는 건가?
“평양으로부터 전언을 받았어. 타냐가 한국 황실과 혼인을 하면 어떻겠냐고 타진이 들어왔다는데.”
“타냐와 한국 황실이요? 그럼 이안 왕자를 말하는 건가요?
올가는 정말로 뜻밖이었다. 마리야와 아나스타샤가 이안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알았지만, 그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혼사가 오고 간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올가는 내심 기뻐하다가 문득 이상했다.
왜 마리야도 아닌 타티야나란 말인가?
“아니, 한국 황태자와 타냐라고 하더군.”
“뭐, 뭐라고요?”
올가는 진정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체 자신이 없었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