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73
3부 88화 하늘과 땅의 지배자
광무 24년 10월 하순.
10월 18일부터 31일까지, 한국령 연길도 훈춘 일대에서 대한제국군의 동계군사훈련이 시행되었다.
동계군사훈련 자체는 연례적으로 있는 일이었으나, 올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다.
장소는 예년의 요동도 일대에서 연길도로 변경됐고, 참여 규모도 연해주 파병군을 포함해 대거 늘어났으며, 대원수 즉 황제 이선이 직접 참관할 예정이었다.
황제가 동북방 연길도까지 방문해 군사훈련을 참관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이선은 평양에서 거행된 독립전쟁 승전 기념행사를 참관한 후, 즉시 연길도로 향했다.
“기존의 군사훈련이 가상적국 1호인 중화민국 북양정권을 겨냥한 것이었다면…….”
“훈춘에서 옛 러시아령, 즉 극동 공화국과는 지척이니, 이는 명백하게 소비에트 러시아를 겨냥한 훈련이지요.”
대전쟁을 거치며 진일보한 대한제국군의 성과를 확인함과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향한 무력시위이기도 했다.
「극동 공화국이 모스크바로부터 독립된 민주공화국으로 존재하는 이상 국체를 존중한다. 좌익이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아도 인정한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괴뢰가 되는 건 결코 용인하지 않겠다.」
대한제국군의 대규모 훈련은 이와 같은 의미를 암시하고 있었다.
이선은 외교적 해법을 선호했지만, 그렇다고 군사력 강화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황제가 훈춘에 도착하자, 열렬한 만세소리가 쏟아졌다. 연길도, 속칭 ‘북간도’의 주민들은 대부분 조선에서 이주해온 농민들이었다. 소수의 만주족과 한족 주민들은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한국인이 되었거나, 청국령으로 재이주를 택해야 했다.
“대원수 폐하, 광무 24년도 대한국군 동계군사훈련 개시를 삼가 보고합니다!”
“장병의 노고가 많다. 참모총장은 짐의 명을 받들어 동계군사훈련을 시행하라.”
참모총장 노백린 대장과 야전군 사령관 홍범도 대장이 동계군사훈련을 주관했다.
원수부 산하 참모국에서 독립하여 별도의 참모본부가 수립된 후, 군령권도 원수부에서 참모본부로 이관되었다.
프로이센 모델을 따른 참모본부는 최고의 엘리트 장교단이 근무했다. 예컨대 군사훈련의 실무진중 한 사람인 참모본부 작전국장 홍사익 부령은 국군 창설 이래 최고의 참모장교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올해 동계군사훈련에는 함경도와 연길도 일대에 주둔하는 3군단(5·7·9사단)과 신설 5군단(15·17·19사단)의 일부가 참여했다.
3군단은 대전쟁기 구주파병군에서 주력으로 파병된 부대로,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베테랑 부대였다.
대전쟁기 후반에 20개 상비사단 체제를 갖추면서 창설된 5군단은 연해주에 파병된 병력이었다.
즉, 러시아 주둔 경험이 있는 이들 부대가 훈련의 주력이라는 건 명백히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는 상황이었다.
“참모총장이 공들여온 병과가 마침내 빛을 보겠군.”
“대원수 폐하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선과 노백린은 망원경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북방의 창공에서 전투기와 폭격기 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관이로군.”
대한육군항공대 제1항공단이 하늘을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미래에는 땅과 바다를 넘어 하늘도 주된 전장이 되겠지. 대한은 육군과 해군에서는 모두 후발주자였지만, 공군력만큼은 선두주자가 될 수 있소.”
“실로 그러하옵니다.”
노백린은 대한제국 장성들, 아니 당대 세계적으로 봐도 드문 공군력 강화론자였다.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을 처음 참관한 이래, 대전쟁을 경험하면서 그는 열렬한 공군력 신봉자가 되었다.
「다가올 전쟁에서는 제공권, 항공력의 우세가 승리로 이끌 것이다. 특히 폭격기는 적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 전략적 우세를 가져올 중요한 수단이다.」
한국은 라이트 형제의 기술력을 흡수하면서 처음 항공 산업에 발을 딛게 되었다.
군용 전투기-폭격기의 개발과 실전 투입은 대전쟁기에 크게 진일보했다.
대한제국이 자체 개발한 광무 복엽 전투기는 칭다오 전투와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러시아제 일리야 무로메츠 폭격기는 연합군 최고의 성능을 보였고, 한국은 기술이전을 받아 생산에 나섰다.
“오, 저게 일무를 개량한 신형 폭격기인가.”
“예, 생산을 마치고 초도비행입니다.”
한국에서는 일리야 무로메츠라는 명칭을 부르기 어려워했으므로 축약하여 ‘일무(一武)’라고 불렀는데, 1920년에는 일무를 개량한 S-28, 가칭 ‘이무(二武)’가 등장했다.
일리야 무로메츠와 S-28의 개발자, 이고르 이바노비치 시고르스키(Igor Ivanovich Sikorsky)는 바로 지금 이선의 곁에 서 있었다.
“이고르 이바노비치의 공로가 큽니다.”
“황제 폐하와 한국 정부에서 전적인 지원을 해 준 덕입니다.”
시고르스키는 세계 최초의 4발 폭격기 일리야 무로메츠를 비롯한 각종 군용기의 개발로 명성을 떨쳤고,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친히 훈장을 수여했다.
신생 공화국 정부에서도 우대를 받았으나, 대전쟁 종전 이후 내전이 터지면서 시고르스키의 운명은 불투명해졌다.
‘차르의 친구’ 시고르스키는 볼셰비키에게 위험분자로 인식되었고, 자연히 소비에트 통치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내전 중인 러시아에서는 항공기 설계자로서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하지만 대전쟁의 종전은 항공기 수요를 급감시켰고, 시고르스키는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떠날 생각을 했다. 그때 파리를 방문하고 있던 이선이 직접 시고르스키를 영입했다.
“폐하, 저는 군용기만을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제 목표는 제가 만든 비행기가 수많은 사람을 태우고 대륙과 대륙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겁니다.”
“나는 선생의 구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항공산업이야말로 20세기의 꽃이 되리라 확신하지요. 꼭 군용기만을 개발하려고 초빙하는 게 아닙니다. 한국을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를 잇는 항공 중심지로 육성하기 위함입니다.”
항공산업이 막 걸음마를 뗀 이 시점에서 들으면 허황되기 짝이 없는 구상인데도, 이선은 그보다 더 한 구상으로 받아쳤다.
신흥공업국가 한국의 공업화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하면 한참 떨어졌지만, 잠재력은 충만했다. 특히 라이트 형제부터 시작된 한국 황제의 항공기 사랑은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시고르스키는 이선의 구상에 흥미를 느끼고 함께 한국으로 들어왔고, 바로 군무부와 상공부의 국장급 고문으로 임명되어 상당한 재량권을 받았다.
‘시고르스키가 더 빨리 헬리콥터를 개발할 수 있도록 팍팍 지원해 줘야지.’
러시아계 이민자 시고르스키는 원역사에서 현대적 헬리콥터의 시초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제는 한국에서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다양한 비행기 개발에 착수했다.
라이트 형제가 처음 기술을 전수하고, 대전쟁으로 실전 기술이 진일보하고, 이선이 처칠과 합의하여 영국으로부터 최신 전투기 기술을 도입하고, 시고르스키가 영입되면서 대한제국의 항공 기술을 아시아의 최첨단이자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다.
「비행기야말로 진보와 미래의 상징이니, 이를 선도적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군비축소를 외치는 신민당의 안창호도, 공군력 강화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군비축소는 비대해진 육군을 감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기술적 진보를 적극 찬성하는 진보주의자 안창호로선 공군력 강화에 동의했다.
원내에서 가장 급진파인 신한청년당을 이끄는 여운형도 기술적 진보에 열광한다는 점에선 같았으니, 항공산업 육성과 공군력 강화는 여야를 막론하고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어 버렸다.
“폴란드와 러시아의 전쟁을 참관하고 있는 김광서 부령의 보고에 따르면, 전투기와 전차의 조합은 적의 방어를 허물고 쾌속으로 진격하기에 탁월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합니다. 이에 향후 대한국군도 이러한 방향으로 접근해 보고자 하며…….”
대전쟁에 이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우크라이나 전선의 전훈은 한국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이선과 클레망소의 합의에 따라 FT-17 경전차의 수입과 한국 생산이 이뤄졌고, 대한제국은 1920년부터 전차로 편성된 기갑부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1920년은 광무 24년이었으므로, FT-17이란 명칭 대신 ‘24형 전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앞으로 전투기와 전차의 조합이 전쟁의 양상을 바꿀 것이라 확신한다.”
동계군사훈련에 투입된 대한제국 최초의 기갑부대는, 적군으로 상정된 부대의 방어선을 유유히 돌파하여 작전목표에 도달했다.
‘음, 이건 영국과 프랑스에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도 되겠군.’
처칠과 클레망소가 한국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건, 한국이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전쟁에 동참하리라 믿고 한 투자였다.
그런데 정작 한국은 하얼빈 조약을 통해 소비에트와의 전쟁에서 빠져나왔다.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는 배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그쪽 정치적 상황도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로이드조지 내각은 백군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고, 소비에트 국경 봉쇄도 해제했다. 이무렵 로이드조지의 관심은 그리스-터키 전쟁에 쏠려 있었다. 자연히 강경한 반소파인 처칠의 입지도 약해졌다.
클레망소가 총리에서 물러난 후 취임한 알렉상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은 전향한 사회주의자로, 국내정치에서는 진보적 정책을 취하더라도 대소 정책에는 강경하게 나갔다. 러시아에 맞서는 폴란드의 최대 후원자는 여전히 프랑스였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도 내전에 직접 개입하기는 꺼렸고, 1920년 하반기에 이르면 대소 간섭정책이 명백히 실패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한국의 국력으로는 아직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기엔 이르다. 미군도 극동에서 철수한 마당에 러시아와 상대하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 지금은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한국의 시간벌기는 성공했다. 1920년 10월 시점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강요할 나라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이전한 기술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921년이면 러시아와 전쟁을 할 군사력이 갖춰질 수 있다. 만약 소비에트 러시아가 극동에 개입한다면, 대한은 즉시 전쟁에 돌입하겠다. 러시아 국경에서 개시한 동계군사훈련은 이를 위한 대비다.」
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호언장담했지만, 1921년이 되면 이들도 전쟁을 원치 않을 것이다.
“광무 24년도 동계군사훈련에서 혁혁한 성과를 보인 장교들에게 훈장을 수여한다.”
동계군사훈련 마지막 날, 이선은 선별된 장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야전군 사령관 홍범도가 황제에게 장교들을 소개했다.
“19사단 돌격대대를 지휘한 김좌진 부령입니다.”
“부령! 김좌진!”
연해주 파병부대에서 온 김좌진이 최고의 돌격부대를 이끈 성과로 황제 앞에 섰다.
이선은 자응장(紫鷹章) 2등을 김좌진의 군복에 달아 주고, 씩 웃으면서 격려했다.
“귀관이 구주대전에서 맹활약했다던 그 김좌진이로군. 귀관의 용전분투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네.”
“영광입니다! 삼가 대원수 폐하께 경례합니다!”
김좌진은 이선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비록 내심 이선의 대소 유화정책을 반대하고 있을지라도, 김좌진은 군인으로서 대원수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
계급 순대로 훈장을 수여하던 이선은, 가장 젊은 장교 앞에 섰다.
“소대별 각개전투훈련에서 가장 탁월한 지휘를 보인 소대장 이범석 참위입니다.”
“참위! 이범석!”
안경을 쓴 젊은 장교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 육군무관학교 수석으로 졸업한 그 장교 아닌가? 짐이 졸업식에서 직접 표창한 기억이 나는데.”
“그렇습니다, 폐하. 육군무관학교 34기 수석 졸업생입니다.”
“유능한 생도가 유능한 지휘관이 되었군. 앞으로 국군의 미래가 밝네. 계속 정진하도록.”
“영광입니다! 삼가 대원수 폐하께 경례합니다!”
올해 스물한 살인 이범석(李範錫)은 육군무관학교 창설 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졸업하여 임관했다.
지금까지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김광서와 홍사익을 뛰어넘는 성적이라, 장교 임관 때부터 이범석은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황제가 친히 표창장을 수여할 정도였다.
‘음, 그러고 보니 지금은 원래 청산리 전투가 있었던 시기로군. 공교롭게도 김좌진과 이범석이 군인으로 활약하다니. 역사의 우연인가, 필연인가.’
원역사에서는 1920년 10월에, 훈춘에서 멀지 않은 북간도 안도현 일대에서 청산리 전투가 있었다.
압도적인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지형을 이용해 적을 격퇴하고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한, 독립전쟁에서 최고의 승리로 평가받는 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던 홍범도와 김좌진, 이범석이 공교롭게도 대한제국군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역사의 필연이라면 필연이었다.
우국충정과 야망으로 가득 찬 청년이 군문으로 향하고, 단연 돋보이는 능력을 보이는 건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이선은 자신이 이끌어 낸 역사적 변화에 새삼 만족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분투하던 독립군 지휘관이, 자주적으로 국가를 지키는 국군의 중추가 된다는 건 바람직한 역사의 변화가 아닌가.’
물론, 역사가 변화한 이상 청년장교들의 가슴 속에는 조국 해방이 아닌 다른 이상(理想)이 생겼다.
대한제국이 주도하는 동양의 질서. 만주와 연해주로의 팽창. 고구려-발해의 뒤를 잇는 북방 제패 재현.
동양 천지(天地), 하늘과 땅의 지배자 대한제국.
그 선봉에는 대한제국군이 있었다. 군사훈련기간 동안 북간도의 하늘과 땅을 뒤덮은 항공기와 전차가 이를 상징하고 있었다.
동계군사훈련을 마친 후, 이선은 바로 서경 평양부로 귀환하지 않고 두만강 남쪽 청진을 들렸다.
명목상의 이유는 청진 인근의 주을온천을 들려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청진의 노비나, 즉 얀코프스키의 영지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친히 찾아 주시다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요 근래는 못 들렸지만, 따뜻한 온천뿐만 아니라 얀코프스키 가문의 환대가 늘 기억에 남았소.”
이선은 마르가리타의 5촌 조카이기도 한 유리 얀코프스키와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귀빈께서는 평안히 계신지?”
“예, 황제 폐하께서 당도하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비나에 머물던 올가 여대공은, 한국 황제가 곧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몸단장을 했다.
평복 차림이 아닌, 러시아제국 여대공으로서 예복과 훈장을 단 모습으로 이선의 앞에 나타났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께 삼가 문후를 여쭙니다.”
올가는 드레스를 양손으로 잡고 허리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반갑소,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간호사로서 전선에서도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소식은 들었소. 짐도 경의를 표하고 싶군요.”
역시 대원수 정복 차림인 이선은 정중하게 화답했다.
의례적인 대화가 오고 간 후, 이선은 방문 목적을 밝혔다.
“짐은 오늘, 대한제국 황실의 당주로서, 로마노프 황가의 당주 역할을 대리하고 있는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을 만나기 위해 왔소.”
“예, 저 또한 폐하와의 회견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이 당시 명문가의 결혼이라 함은 가문의 당주끼리 논의하는 바였고, 왕실 간의 국혼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본래는 니콜라이 2세가 당주 역할을 했어야 하나 이미 고인이 되었고, 후계자인 알렉세이 대공이 맡아야 했으나 병약한 몸으로 인해 나설 수가 없었다.
차르의 맏이인 올가 여대공이 당주 역할을 대리했고, 이선의 상대역이 되었다.
“그래, 그렇다면 짐이 제안한 국혼의 답변을 들을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