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78
3부 93화 세계혁명
1920년 말, 독일 베를린.
정치적 혼란, 경제적 위기, 외교적 압박이 패전국 독일을 짓눌렀다.
독일 공화국 체제를 부정하는 극좌와 극우는 거듭 봉기와 쿠데타 음모를 꾸몄고, 연합국의 과도한 배상금 압박으로 독일의 위기는 가중되었다. 특히 극우는 실패한 1919년 쿠데타 이후에도 거듭 음모를 꾸미다 적발되어 공화국의 주적 1호가 되었다.
1919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압승하여 연립 정부를 수립한 사회민주당-중앙당-민주당 연합, 즉 ‘바이마르 연합’은 안정적인 정부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독일 전역의 들끓는 요구에 1920년 가을 예정보다 빠른 2회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독일 정치의 양극화는 총선거 결과로 분명히 드러났다.
「사회민주당, 107석으로 추락! 중앙당과 민주당도 대거 의석 상실! 바이마르 연합 붕괴!」
「좌익 독립사회민주당, 93석으로 약진! 노동계급에 대한 사회민주당의 정치적 지배를 위협하다!」
「우익 국가인민당, 71석으로 증가! 원내 제3당!」
사회민주당은 가까스로 제1당을 유지했지만, 사민당에서 분리해 나간 급진좌파 독립사민당과 노동계급 지지표를 양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강경한 민족주의 우익 국가인민당의 약진은 11월 혁명 이후 붕괴 위기에 놓였던 독일 우파가 재결집했을 의미했다.
중도정당인 중앙당과 민주당의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어, 원내 5당과 6당으로 밀려나기에 이르렀다.
“연합국 놈들이 싫고, 러시아 놈들도 싫지만, 미친 전쟁을 일으켜 청년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프로이센 융커와 우익 놈들은 더 싫다.”
현시점에서, 독일 국민의 대부분은 파멸적인 전쟁과 패망에 책임이 있는 우익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주의회 선거에서도,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프로이센주에서 사회민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좌익세가 가장 강력한 작센주에서는 독립사민당이 제1당으로 떠오르는 일도 발생했다.
“유권자의 다수는 독일의 급격한 변혁에 투표했다. 연합국과 반동세력의 눈치를 보는 사민당 지도부는 노동계급의 요구를 외면하지 말라!”
“사민당은 우익과 관계를 끊어라! 노동계급은 사회민주주의 정부를 원한다!”
지난 선거만 해도 ‘혁명적인 야당’에 만족했던 독립사민당이, 정부에 참여할 의사를 분명히 드러냈다.
1당인 사민당 입장에서는 연립정부를 수립하려면 결국 독립사민당과 손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과반을 확보하기 위해 중도좌파인 민주당과도 여전히 연합을 유지했다.
역사의 변화, 특히 러시아 혁명의 변화로 인해, 1919년 1월의 ‘스파르타쿠스 봉기’와 5월의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없었다.
급진좌파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살아남았고, 혁명적 야당으로 공화국 체제에 합류했다. 사민당 주류와 급진좌파 간에 피를 튀는 분열이 없었으므로, 연립정부가 가능했다.
결국 사회민주당-독립사회민주당-민주당 연립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전보다 한층 좌경화된 연립정부가 등장했다.
“대중의 다수는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선거와 의회를 통한 합법적인 혁명이 가능해진 게 아닌가?”
노동계급은 좌파 연립정부의 수립에 환호를 보냈다.
그 가능성은, 반대로 우익에게는 공포와도 가까운 것이었다.
“큰일이네. 이러다가 정말로 독일이 빨갱이 세상이 되겠군.”
“군부 일각에서 어설프게 쿠데타나 모의하다가 상황을 더 악화시킨 거 아니오!”
“아니, 그럼 빨갱이들을 때려잡으려면 프로이센 군대 말고 선택의 여지가 있소?”
“군대의 다수가 공화국을 지지하는 판국에 뭔 수로! 병사의 지지 없이 장교단만으로 쿠데타 일으킬 거요?”
“이게 다 유대인 놈들의 음모요! 극좌파는 죄다 유대인이잖아! 두고 보시오, 러시아 다음에는 독일에서 유대인이 집권하고 말 테니.”
국가인민당이 약진했다고는 하지만, 공화국 체제에서 우익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독일도 러시아 꼴이 나는 게 아닌지 우려했다.
독일이 통일한 지 꼭 50년,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탄압받았던 사회주의 세력이 독일 역사상 이렇게 강력했던 적이 없었다.
사회민주당 주류는 여전히 러시아처럼 급진적인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독립사민당은 러시아하고는 다른 평화적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제시했다.
“부르주아지의 튼튼한 요새인 의회선거에 뛰어들어, 폭풍처럼 요새를 향해 들이쳐야 합니다. 우리는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며, 선거는 우리를 튼튼하게 만들 방법입니다!”
좌익인 독립사민당 내에서도 극좌파의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지만, 러시아 볼셰비키와는 명백히 다른 노선을 제시했다.
「러시아는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중앙위원회에 의한 권위적 통치를 행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자기 해방이 아니면 안 된다. 사회주의는 오직 민중의 지지 위에서 이룩될 것이다.」
내전이라는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소비에트 러시아의 권위적·중앙집권적 모델과는 다른 민중적 사회주의의 발전 가능성이 독일에서 엿보였다.
* * *
러시아, 모스크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거듭된 낭보에 만족감을 느꼈다.
「백군 잔당, 반혁명의 마지막 보루인 크림반도로 다시 숨어들다!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 최후의 일격을 준비 중!」
「키예프 탈환! 폴란드 침략자와 우크라이나 괴뢰정권, 리보프로 퇴각!」
「민스크 탈환! 바르샤바로 가는 길이 열리다! 폴란드에 노동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자!」
소비에트 정부 기관지인 「프라우다」에서는 연일 승전보를 쏟아 냈다.
7월만 해도 폴란드-우크라이나군의 공세는 키예프(키이우)를 수복하고 우크라이나 전역을 위협했지만, 8월부터 붉은 군대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붉은 군대는 압도적인 물량으로 폴란드군을 압도했다. 폴란드군의 주력이 우크라이나에 묶여 있는 동안, ‘붉은 나폴레옹’ 투하쳅스키가 이끄는 서부전선군은 핀스크 습지대를 돌파하여 폴란드 본토를 직격했다.
벨라루스 전선의 패배로 인해 폴란드군은 부랴부랴 우크라이나에서 민족학적 의미의 폴란드 본토로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붉은 군대는 폴란드 본토를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소비에트 정부는 결단의 순간에 이르렀다.
「독일에 사회민주주의 연립정부 수립 – 독일 혁명의 가능성이 보인다!」
독일 공화국을 주도하는 좌익 인사들은 러시아식 혁명에 반대했지만, 어찌 됐건 인터내셔널의 옛 동지들이 선거에서 대승했으므로 모스크바는 독일에 혁명이 임박했다고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울리야노프와 트로츠키를 비롯한 러시아 국제사회주의자들은 독일 혁명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생존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세계 혁명으로 가는 길이라 확신했으므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러시아와 독일을 갈라놓는 유일한 장애물은 폴란드뿐이다. 폴란드를 쓰러트리고 독일로 진격한다.”
“폴란드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하고, 독일 국경까지 진격하여 독일 혁명을 돕는다.”
“1920년이 가기 전에 폴란드를 제압하고, 1921년에는 독일에 혁명을 완수하자!”
소비에트는 전례 없는 낙관론에 취해 있었다. 이들은 정말로 독일과 유럽에 혁명이 임박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를 가로막는 방해물은 ‘서방 제국주의 앞잡이’ 폴란드뿐이었다.
“폴란드인들의 애국심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소비에트가 아무리 노동자 농민의 해방을 부르짖는다 한들, 폴란드인의 눈에 붉은 군대는 그들을 100년 넘게 억압했던 차르 군대의 후신으로 보일 겁니다. 폴란드 혁명은 불가능합니다. 지금까지 분열되었던 폴란드 정계는 단결해서 붉은 군대와 맞서 싸울 겁니다.”
러시아 혁명에는 적지 않은 폴란드 출신 혁명가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폴란드가 손쉽게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부의 통치를 받아들이라는 러시아인 지도부의 계획에 비관적이었다.
“유럽 혁명이 임박했는데, 그깟 민족주의적 대의가 뭐가 중요하단 말이오!”
인민위원협의회 의장(정부수반) 울리야노프가 폴란드 공세를 주도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하며 민족문제를 연구한 울리야노프는, 다른 정파에 배신자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러시아로부터의 폴란드 독립을 옹호했다. 민족문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계급 환원론자’라는 비난까지 퍼부은 바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교리상 러시아와 다른 발전된 산업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했다. 유럽 최고의 공업국이자 마르크스의 조국인 독일에 혁명에 임박했다는 믿음을 얻게 되자, 울리야노프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거대한 도박을 선택했다.
「독일 혁명이 임박했다, 동지들! 독일의 노동계급은 붉은 군대의 진격을 환영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12월 31일 이전까지 바르샤바를 해방시키고 포메른 회랑으로 진격하라!」
소비에트 정부는 붉은 군대에 신속한 진격을 명령했다. 1921년을 유럽 혁명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포부였다.
“1917년 4월 혁명, 차르전제정권 타도! 1918년 대전쟁 승리! 1919년 소비에트 정부 수립! 1920년 폴란드 해방! 1921년에는 독일 혁명!”
“바르샤바와 베를린에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립이 머지않았습니다! 다음은 빈과 부다페스트가 뒤따를 것이고, 그다음은 파리와 런던이 될 것입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만세!”
‘군대의 총검으로 유럽 혁명을 촉발’시키겠다는 건 어딜 봐도 노동계급의 혁명이라는 사회주의적 이상에 일치하지 않았지만, ‘세계혁명’의 대의 앞에 그런 이상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극동 공화국 동지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국군과 일본군은 여전히 연해주를 점거한 채 철수를 미적거리고 있으며, 백군 잔당과 반동 세력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결집하고 있습니다.”
“유럽 혁명이 임박했는데 극동 문제가 뭐가 중요하단 말이오? 마음껏 날뛰라고 하시오. 일단 유럽 문제부터 해결하고 봅시다.”
“서울에서 온 극비정보입니다. 백계 망명자로 위장한 우리 동지의 정보에 따르면, 한국 황태자와 로마노프 여대공의 국혼이 추진되고 있다 합니다. 이건 동양 역사상 전례 없는 일로,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한국군이 로마노프 잔당을 내세워 극동에 괴뢰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가 아니겠습니까?”
대한제국 국민보다 소비에트 정부가 이진과 타티야나의 국혼 추진을 먼저 파악하는 기이한 상황이었다. 반대로 이선이 러시아 정부보다 먼저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결국 정보력을 얼마나 잘 운용하느냐의 문제였다.
“아니, 우리가 애송이 황족들 소꿉장난까지 신경 써야 한단 말이오? 왕가 간에 결혼하는 게 뭐가 대수란 말이오? 한국 황제가 니콜라이 로마노프와 친우였으니 그럴 수도 있고, 아님 한국 황태자가 제 아비 닮아서 백인 여성 취향인가 보지.”
울리야노프는 국혼 추진에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설령 정치적 의미가 있다한들, 이미 영향력이 소멸된 거나 다름없는 로마노프 왕가가 뭘 어쩌겠소? 망명지에서 황제 놀음이나 하겠지. 한국이 극동에서 괴뢰정권을 수립하려 한다면 명백히 조약 위반이오. 만약 조약을 위반한다면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하지만 그건 유럽에서 혁명이 성공한 이후의 일이오. 지금은 오직 유럽, 유럽에만 집중할 때입니다!”
이미 유럽 혁명에 모든 판돈을 건 소비에트 정부는, 관심사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극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알 바 아니었다.
“혁명! 독일혁명! 유럽혁명! 세계혁명!”
“아, 혁명하고 싶다! 혁명 만세!”
국제사회주의자들에게 ‘세계혁명’이란 마치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임박했다는 예측에 이르렀으니, 마치 재림예수와 천년왕국을 맞이하는 기독교 종말론자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소비에트 러시아는 그야말로 행복한 단꿈의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 * *
192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
소비에트 적군이 비스와강 너머 머지않은 지점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내는 공황상태였다.
바르샤바 주재 외교관들은 공관을 철수하고 포즈난으로 이전할 준비를 했다.
“폴란드 독립이 겨우 2년 만에 실패로 끝날 줄이야.”
“역시 폴란드는 허상에 가까운 가상국가였군.”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참으로 얄밉게도, 영국이 폴란드를 저버리려고 들었다. 로이드조지 내각의 외무장관 커즌 경은 소비에트 정부에 극히 유리한 국경 형태로 휴전조약을 제의했다. 이른바 ‘커즌 라인(Curzon Line)’이었다.
하지만 승리가 임박했다고 믿는 소비에트 정부는 휴전 제안을 거부했다. 이들의 목표는 폴란드를 넘어 독일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대로 폴란드가 적화(赤化)된다면 다음은 독일이다! 정녕 유럽대륙의 적화를 지켜만 보고 있을 생각인가?”
독일과 러시아가 손을 잡는 사태를 두려워하는 프랑스는 폴란드를 굳건히 지지하기로 했다. 프랑스는 단치히(그단스크) 항구와 포메른 회랑을 통해 폴란드에 대한 군사지원을 이어나갔고, 프랑스 군사고문단은 바르샤바에 계속 잔류했다.
연합국 최고위원회는 거듭 독일을 압박하여, 폴란드에 영토를 빼앗겨 불만을 품고 있는 독일이 러시아와 손을 잡는 일이 없도록 했다.
“대한은 우방을 저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폴란드의 민족자결과 독립을 지지하며, 소비에트의 적화 야욕에 반대한다.”
주폴란드 한국대사관과 대한제국 군사고문단도 위험을 감수하고 바르샤바에 잔류했다.
이는 단순히 신생국가와의 의리 때문은 아니었다.
“이는 남의 일이 아니다. 만약 러시아가 승리해 폴란드를 넘어 독일까지 진격해서, 정말로 독일-러시아 동맹이 실현된다고 치자. 그럼 역사상 유례없이 강력한 사회주의 블록이 탄생하는 것이다. 강력해진 러시아는 언젠가 아시아 문제에 다시 개입할 것이고, 그리되면 대한의 안보가 위태롭다.”
지금은 일시적인 약세로 인해 아시아에서 수세로 나선 러시아지만, 궁극적으로 세계혁명을 지향하는 만큼 유럽 문제가 해결되면 아시아로 재진출하려 할 것이다.
만약 그리 된다면, 아시아에서 대(對)러시아 최전선에 있는 대한제국과 가장 먼저 충돌하게 될 것이다.
「독일에 좌익 연립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들은 명백히 러시아와는 다른 노선을 천명했으나, 독일을 향한 모스크바의 혁명 공세는 더 거세질 것입니다.
소비에트는 유럽 혁명, 특히 독일 혁명에 국가의 사활을 걸고 있으므로, 유럽을 향한 적군의 공세는 더욱 맹렬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서방 연합국은 독일 혁명을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독일과 러시아의 동맹 가능성도 무조건 차단하려들 겁니다.
폴란드의 정세가 위태로우나, 폴란드군은 여전히 주력을 갖추고 있으며, 123년 만에 되찾은 독립을 수호하겠다는 폴란드인들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합니다. 결코 호락호락 무너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 모스크바는 당분간 아시아 문제는 신경 쓰지 않고 유럽 문제에 집중하리라 생각합니다. 극동 공화국을 완충국으로 두어도 만족할 것입니다.」
러시아와 사회주의 전문가인 주독대사 조한민은 제국익문사를 통해 방대한 정보망을 갖고 있었고, 소비에트의 대응을 예상하는 전문을 황제 이선에게 보냈다.
「대사의 분석에 동의한다. 광무 25년(1921), 아니 그 이후 유럽 정세를 결정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전황을 더욱 자세히 확보하고, 폴란드의 패전에 대비하여 대책을 세워야 한다.
우리의 우방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대한도 이대로 폴란드가 몰락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반드시 폴란드가 전황을 뒤엎도록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짐은 폴란드 주재 군사고문단을 통해 승리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