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79
3부 94화 쇼팽 에튀드 혁명
소비에트 적군의 폴란드 공세에 직면하여, 신생국가 폴란드는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피우수트스키 원수는 반대파, 특히 우익 민족민주당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대(對)소비에트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건 우익이 아니라 좌익 폴란드 사회당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재건하여 관용적인 다민족 연방공화국을 세우자는 사회당과 달리, 민족민주당은 폴란드 단일민족국가를 원했다.
“처음부터 우크라이나 공세는 망상이었소! 시대착오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재건하겠다고 이 사달을 낸 게 아니오!”
“이러다 바르샤바를 내주면 끝장입니다. 원수의 거수기나 다름없는 내각은 총사퇴하고, 속히 러시아와 평화협상에 나서야 합니다!”
“평화협상을 하더라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 해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평화협상을 하자는 건 러시아의 속국이 되자는 거나 다름없소!”
결국 정치적 책임을 지고 내각은 총사퇴했으나, 피우수트스키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사회당은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중도 농민당에 정권을 넘기고, 전쟁 지속을 당부했다.
농민당 신임 총리 비토스는 폴란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향해 총동원령을 내렸다.
123년 만에 되찾은 독립이 다시 짓밟힐 위기에 처하자, 폴란드 전역이 애국주의로 단결했다.
단기간에 10만 명의 자원자가 바르샤바를 지키기 위해 군대에 지원했고, 여성들도 대거 민방위군으로 입대하여 비전투 영역에서 활약했다.
“동포들이여, 군대로 가자!”
“침략자를 무찌르고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자!”
소비에트 정부의 명백한 오류였다. 이들은 백군과의 내전에서 그랬듯이,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가 진격하면 노동자와 농민이 ‘해방군’으로 맞이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폴란드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이 적군의 침략에 맞서 격렬한 저항에 나섰다.
폴란드인들은 적군을 1794년, 1831년, 1863년에 폴란드의 독립을 가혹하게 짓밟았던 제정러시아군의 후예라고 인식했다.
본래 러시아 지배에 대한 악감정에다, 대부분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인 폴란드 국민에게 있어 소비에트 정권은 악의 총본산이나 다름없었다.
주민의 환영이든 현지 징발이든 어떻게든 보급을 충당할 수 있었던 러시아 전역(戰域)과 달리, 폴란드에서는 청야전술에 직면했다.
폴란드군은 후퇴하면서 철도를 파괴했고, 군수품을 적군에게 넘겨주느니 불태웠다. 농민들은 유격대가 되어 적군의 후방을 위협했다. 마치 과거 프랑스의 침략에 직면했던 러시아가 그랬듯이.
“이런저런 방해가 있었지만, 영웅적인 붉은 군대의 진격을 막을 길은 없다. 소비에트 정부는 올해가 가기 전에 바르샤바를 해방시키고, 폴란드 전역을 승리로 이끌기를 원한다. 백비군 도당처럼 폴란드군도 궤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동지들, 새해는 독일 국경에서 맞이하자!”
“우라! 우라! 우라!”
국민적인 저항에 직면하긴 했지만, 12월 초순에 적군 북서전선군은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바르샤바에서 머지않은 비스와(비스툴라)강 건너편까지 도달했다.
거듭된 승리에 적군 지도부도 도취되어 있었다. 내전 이래 모든 전선에서 승리만을 거듭해 온 27세의 젊은 명장, ‘붉은 나폴레옹’ 투하쳅스키는 총공세 5일 내에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폴란드군을 섬멸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바르샤바 전투에 즉시 동원될 북서전선군의 병력은 약 17만. 수도 방위에 나선 폴란드군의 병력도 그에 못지않았음에도, 폴란드군은 와해 직전이라고 생각했다.
“적의 북부전선이 무너지고 있다. 북쪽에서 파고들어 바르샤바를 포위하여 점령한다.”
적군은 폴란드군의 방어가 특히 취약해 보이는 북부전선에 공세를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적이 전선 간의 공백을 파고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남부의 균열을 파고들려면 폴란드군에 대규모 예비대가 있어야 하는데, 패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바르샤바를 향해 깊숙이 치고 들어간 북서전선군과 남서전선군 사이의 공백, 심지어 북서전선군이 담당한 전역에서도 전선이 지나치게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었으나, 적군 지휘부는 바르샤바의 신속한 점령에 집착하여 위험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여기에 북서전선군 사령관 투하쳅스키와 남서전선군 사령관 예고로프 간의 경쟁심리가 양군의 협조에 발목을 잡고 있었다.
투하쳅스키가 바르샤바 점령에 집착하는 것처럼, 남서전선군도 그에 맞춰 리보프(르비우)와 루블린을 점령하여 폴란드 남부를 제패할 계획이었다.
그동안 적군의 신속한 진격에 기여한 제1기병군 사령관 세묜 부됸니(Semyon Budyonny)도 양 전선의 균열을 메우기는커녕, 남부 점령을 목표로 독자적인 작전에 나섰다.
거듭된 승리가 만들어 낸 오만과 편견이었다.
“적군이 북부전선에 공세를 집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계속 그렇게 하라고.”
피우수트스키와 폴란드군 참모본부는 바르샤바, 아니 폴란드의 명운을 판돈으로 삼아 거대한 도박을 하고 있었다.
북부전선에서 폴란드군의 패주는 유인작전이었다. 적군이 북쪽을 향해 전선을 계속 벌리는 동안, 폴란드군 돌격대가 남쪽의 균열을 파고들어 기동전으로 북서전선군의 후방을 역으로 포위하는 전략이었다.
바르샤바 방위군의 수는 약 14만. 이 중에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최후의 예비대이자 기동전을 맡길 ‘충격군’으로 편성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역공이 실패하면, 모든 전선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 작전만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외다.”
프랑스 군사고문단장 막심 베이강(Maxime Weygand) 장군은 계획의 위험성에 우려했다. 포슈 원수의 참모장이었던 베이강은 대전쟁의 승리자였다. 베이강이 보기에 폴란드군도 프랑스군이 마른 강에서 그랬듯이 비스와강에서 참호를 파고 방어에 집중해야 했다.
1개 사단 정원이 4-5천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패주를 거듭하다 겨우 재편성한 군대가 결정적인 역공을 성공하리라는 기대가 되지 않았다.
“장군의 조언은 고맙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프랑스군 병력입니다. 앞으로 몇 개 사단이나 보내 줄 수 있습니까?”
“…….”
피우수트스키의 질문에 베이강은 입을 다물었다. 프랑스군은 직접 병력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병력을 못 보내 준다면 무기라도 제때 도달하길 바랍니다. 폴란드가 무너지면 다음은 유럽 전역이 위태롭습니다.”
프랑스군의 군수지원은 단치히 항을 통해 이뤄졌는데, 단치히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독일인들은 노골적으로 사보타주에 나섰다. 항만과 철도에서 노동자 파업이 이어졌다.
독일 정부는 연합국의 압력에 소비에트 러시아와 손을 잡지는 못했지만, 폴란드와 대규모 영토분쟁 중인 독일은 내심 이 기회에 폴란드의 붕괴를 원하고 있었다.
그나마 폴란드가 체코슬로바키아와 영토분쟁을 종료하면서, 체코 정부는 국경을 개방했다. 연합국과 함께 러시아 내전에 개입했었던 체코도 소비에트 적군이 폴란드를 점령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도나우 연방은 패전국으로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지만, 폴란드의 전통적인 우방인 헝가리가 지원에 나섰다. 헝가리는 연합국의 군사 제한을 받는 상황임에도, 빈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1개 기병군단 병력을 파병해 남부전선의 방어를 돕도록 했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바르샤바 전투에 투입될 병력은 오직 폴란드군뿐이었다. 각국 외교관도 떠난 상황에서, 바르샤바는 고립무원에 처했다.
“대한제국은 거리상의 문제로 인해 귀국을 직접 도울 수 있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다른 측면에서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 그게 무엇입니까?”
주폴란드 한국대사 이위종과 군사고문단장 조성환 참장은 피우수트스키에게 한국 정부의 친서를 전달했다.
“아니, 이건……!”
친서를 받아든 피우수트스키는 깜짝 놀랐다. 의례적인 외교 문건이 아니라, 소비에트 정부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군사 동향에 대한 정보였다.
“놀라운 정보입니다. 이걸 대체 어디서 얻은 겁니까?”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정부와 군부는 혁명 이전부터 러시아에 방대한 정보망을 운영한 바 있습니다. 모스크바에도 우리 정보원이 있습니다. 귀국 정부와 이 극비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모스크바는 유럽 혁명에 대한 집착으로 적군 지도부에 신속한 ‘폴란드 해방’을 닦달하고 있다.
이에 적군은 연말까지 바르샤바와 폴란드 전역을 제패하기 위해 공세일변도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적군 지휘부는 바르샤바의 군사적·정치적 상징성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독일 국경에 신속하게 도달하기 위해 북부전선에 집중하고 있다. ……」
한국이 건네준 정보는 피우수트스키로 하여금 군사적 도박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었다.
적군은 바르샤바 점령과 북부전선의 돌파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고, 폴란드군은 돌출부를 상대로 기동하여 역으로 적의 후방을 포위할 것이다.
“고맙소,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로 귀중하고도 핵심적인 정보입니다.”
“폴란드가 유럽에서 소비에트의 적화를 막는 최전선 보루이듯, 대한제국도 아시아에서 적화를 막는 보루입니다. 세계의 운명을 위하여, 우리는 귀국이 반드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폴란드 공화국은 귀국의 우의를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피우수트스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국 대표단과 힘차게 악수를 했다.
한국이 소비에트 정부와 단독 협상을 해서 극동전선에서 빠져나온 데 실망했었지만,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중요한 정보였다.
한국이 넘겨준 정보는 승리를 향한 초석이 될 터였다.
1920년 12월 12일, 바르샤바 전투가 개시되었다.
적군의 공세는 바르샤바 전면에 집중되었으나, 북방으로는 비스와강 하류의 토룬(Torun)까지 이어졌다. 북쪽으로 우회하여 폴란드군을 포위섬멸하고 바르샤바를 점령하려는 전략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우리의 조국을 피로써 지키자!”
북부전선을 맡고 있는 제5군 사령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Władysław Sikorski) 장군은 적군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버텨 내고 있었다. 바르샤바를 지키는 1군과 북부전선의 5군이 버텨 주는 동안 대반격이 준비되었다.
「동포들이여! 우리의 조국, 고향, 신앙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러시아 제국주의는 붉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우리의 독립을 다시 빼앗으려 합니다. 적색 제국주의자들은 과거 차르 정권이 그랬듯이 우리에게 노예의 멍에를 씌울 것입니다. 저들의 노예였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웁시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폴란드는 다시는 사라지지 않으리!」
피우수트스키는 직접 충격군인 제4군을 맡아 반격 작전을 이끌었다.
자신이 전사를 할 경우를 대비해서, 정부와 군부의 후계자를 지명하는 유서까지 써둔 상태였다.
그만큼 필사적이었고,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모두 이 반격에 걸고 있었다.
“이 전투에 폴란드, 아니 유럽의 운명이 달렸다!”
“전군 돌격! 폴란드 만세!”
12월 15일, 폴란드 충격군은 바르샤바 남동부에서 적군의 균열을 파고들었다.
적군 북서전선군의 남쪽 측면 150km에 병력이 2개 사단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방어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폴란드군에 남아 있는 소수의 기계화 부대 절반이 배치되어, 전차와 장갑열차가 반격을 이끌었다.
폴란드 충격군 5개 사단은 적군의 측면을 무너트리고, 불과 36시간 만에 70km를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초기 전격전의 양상을 보일 정도로 빠른 진격이었다.
충격군은 북서전선군의 후방에 도달했고, 적군의 전열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남부에서의 공세가 성공했다! 전군, 반격하라!”
북부전선에서 힘겹게 버티던 시코르스키의 5군도 반격에 나섰다.
그동안 예비대로 아껴 두었던 기계화 부대가 반격의 선봉에 섰다. 폴란드군의 전차와 장갑열차는 적군의 북부를 포위하는 기동에 나섰다. 기계화 부대는 북부전선에서도 하루에 30km를 진격했다.
거대한 양익포위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대로 가면 전멸이다. 신속히 후퇴하라!”
전선 후방에 있던 투하쳅스키와 지휘부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적군의 통신체계는 흐트러져 있었고, 폴란드 통신부대의 전파방해로 제대로 정보가 전달되지도 못했다.
북서전선군의 각 군단은 조율되지 않은 독자적인 공세에 나섰다가 각개격파당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2월 하순까지 바르샤바 전역에서 적군은 전면적인 퇴각을 했으나,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적군의 전사자는 약 2만, 포로는 8만 5천에 달했다. 3만여 명은 폴란드군의 추격을 피해 동프로이센 국경으로 도주하여 독일에 억류되었다. 수많은 야포와 기관총도 폴란드군에 노획되었다.
문자 그대로 북서전선군이 소멸해 버린 것이었다.
북부에서 패배하자, 남서전선군도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군의 격렬한 반격에 직면하여 퇴각했다.
“폴란드군은 모범적인 반격전과 기동전의 선례를 보여 줬습니다. 특히 기갑부대의 활약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르샤바 전투의 전훈을 익히면, 향후 전쟁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군사고문관 드골 소령과 한국 군사고문관 김광서 부령은 바르샤바 전투를 지켜보며, 새로운 전쟁의 양상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폴란드군의 기동전은 초기 기계화 부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빠른 진격으로 적군을 와해시키고 포위망을 형성했다.
이 초보적인 형태의 ‘전격전’은, 드골과 김광서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들은 각자 조국으로 귀환하여 기갑부대와 기동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군제개혁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스와 강의 기적!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다!”
12월 25일, 폴란드군 참모본부는 폴란드 전역에서의 승리를 선언했다.
멸망의 위기에 놓였다가 기적적으로 전세를 뒤집자, 폴란드인들은 때마침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하느님의 기적’이 발생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물론, 피우수트스키의 뚝심과 폴란드군의 분전이 만들어 낸 승리였다. 위기의 순간에 결정적인 승리를 이끈 피우수트스키의 명망은 하늘을 찌르기에 이르렀다.
피우수트스키는 다시 정부의 주도권을 잡았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향한 거듭된 전쟁을 선언했다.
“민스크와 키예프를 완전히 해방시킬 때까지, 폴란드의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1921년 1월, 폴란드군은 다시 네만 강을 건너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향해 반격을 개시했다.
바르샤바 시내에 폴란드의 국민 음악가 프레데리크 쇼팽의 에튀드 10-12번 ‘혁명’이 울려 퍼졌다.
1830년 폴란드 11월 혁명이 러시아군에 의해 실패하고, 바르샤바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에 쇼팽이 분노를 담아 작곡한 곡이었다.
그로부터 90년 뒤, 쇼팽의 후예들은 이번에는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독립을 지켜 냈다.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원대한 ‘세계혁명’ 계획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