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81
3부 96화 태상황의 유언장
겨울의 늦은 밤,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갔다.
대조전 앞에 도착한 이선은 가장 먼저 아우 이척이 눈에 띄었다. 창덕궁 바로 옆의 창경궁에 거주하는 이척은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왔다.
“순친왕, 태상황의 환후는 어떠신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척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태상황의 장성한 네 아들 중, 유일한 효자인 이척이었다. 이강이나 이영은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갈등이 있었다. 매일 창덕궁에 들러 문안인사를 하는 것도 이척의 몫이었다.
이선은 태자에서 물러난 이척을 배려해 창경궁을 순친왕부로 하사했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영국에 다녀온 후 정원과 식물을 가꾸는 취미를 갖게 된 아우를 위해, 창경궁에 서양식 정원과 식물원도 만들어 주었다.
이척은 창경궁에 거주하며 태상황을 지척에서 모셨다. 이미 작년부터 태상황의 건강에 이상신호가 있었으나, 갑자기 쓰러지니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뇌일혈(腦溢血)로 추정되옵니다.”
곁에 있던 태의원 전의(典醫)가 이척을 대신해 병명을 아뢰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흔히 중풍이라고 불렀지만, 정확히는 뇌 내부의 혈관이 터져 출혈이 발생하는 뇌출혈 혹은 뇌일혈이었다.
잠시 후, 오랫동안 황실 주치의로 있는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 박사가 진단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박사, 태상황의 환후는 어떻소?”
“Gehirnblutung, 즉 뇌출혈입니다.”
“옥체는 어떠하신지?”
“왼쪽 팔에 마비가 왔고 경련이 심합니다.”
“그럼 차도는…….”
분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독일인답게 직설적인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태상황께서는, 이미 작년부터 뇌출혈의 전조증상을 보이셨습니다. 이번에는 치명적입니다. 회복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이전 세기와 비교하면 비약적으로 의학이 발전했다고는 하나, 이 시대에 뇌출혈이라면 소생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살아남아도, 반신불수가 되거나 언어능력 상실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군요. 알겠소.”
이선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역사보다 2년 더 살고 있다지만, 태상황의 건강이 아주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60대가 되도록 별다른 지병 없이 살았다지만, 만성고혈압 증세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초한 측면이 있었다.
태상황 이형은 미식가였다. 다양한 궁중음식이 태상황을 위해 준비되었다. 태상황은 특히 고단백 고지방의 육류를 좋아했다.
서양 문화를 선호하는 이답게, 태상황이 커피를 즐기는 건 유명했다. 근데 단순히 커피만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와플, 아이스크림, 팥빙수 등 새로 들어온 단 디저트를 좋아했다.
살찌는 음식을 즐기면서도, 늙은 태상황은 운동 같은 건 일체 하지 않았다. 기실 운동을 즐기는 이선이 예외적이지, 역사를 따져 봐도 조선의 군주치고 운동을 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태상황은 자연스레 배가 불룩 나온 비만체형이 되었고, 마지막 체중 검사 때에는 73kg에 달했다. 키가 153cm의 단신이니 심각한 비만이었다.
태상황이 작년에 고혈압과 뇌출혈 증상을 보이자, 분쉬와 의료진은 수차례 체중감량과 식이요법을 제안했지만, 태상황은 웃어넘겼다.
「내 나이 곧 일흔이니, 살 만큼 살았소. 선대왕께서도 일흔을 넘기신 분은 드물다오. 이미 살 만큼 살았는데, 이제 와서 식습관을 바꿔서 뭘 어쩌겠소? 가는 날까지 즐겁게 살다 가리다.」
태상황은 좋게 말하면 달관한 상태였다.
역대 조선의 군주 중 일흔 이상 장수한 이는 태조(74세)와 영조(83세)를 제외하면 없었다. 이미 역대 세 번째의 장수였다.
이미 자신은 과분하게 오래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별다른 여한도 없었다.
이제 유일한 소망은, 여태 혼례를 치르지 않은 장손이 결혼하고 후손을 봐서 사직의 대통을 잇는 걸 보는 건데, 그때까지 못 산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역대 선대왕 중 살아서 증손자까지 본 전례도 없었다.
퇴위한 지 어언 24년, 아니 임오년 이후 권력을 상실한 시기로 따지면 근 40년이었다.
이제 삶에 대한 집착도 없었고, 갈 때가 되면 가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선은 대조전 안으로 들어갔다. 태의원 시의(侍醫)가 황제를 보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이선은 손을 내저으며 환자를 살피라고 했다.
태상황은 거듭 경련을 일으키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선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아버지, 결국 이렇게 가시는 겁니까.’
이선에게 있어 이형은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선대왕이었다. 자신보다 16살 많은 이형이 아버지 역할을 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어릴 적에 총애했다고는 하지만, 이선에게는 기억조차 없었다. 이선이 커 가면서 깨달은 건, 이형은 부친이기 전에 임금이라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이선의 아버지 역할을 했던 건 오히려 조부인 흥선대원군이었다. 이선이 가족으로서 애정을 느꼈던 이도 대원군이지 임금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민씨와 손을 잡은 이상, 이형과 이선은 결국 정적(政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이선은 미래의 기억까지 얻게 되었으니, 더욱더 거리가 멀어질 뿐이었다.
임오년에 대원군과 이선이 권력을 탈취하면서, 정말로 3대에 걸친 정적이 되었다.
‘권력에는 부모 형제도 없다는 걸 배웠지.’
이하응이 자신이 임금으로 세운 아들 이재황(이형)에게 배신감을 느꼈듯이, 이형도 장남 이선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이형이 이하응을 정적으로서 거북하게 여겼듯, 이선도 이형을 정적으로서 거북하게 여겼다.
유교국가의 군주로서 부친을 적대하는 건, 유교의 최고규범인 효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을 뿐이었다.
독립전쟁 당시에 있었던 ‘대군주 밀서 사건’은 이선에게도 충격이었다. 이형은 군주의 권위가 국가의 안위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전근대적 군주였다. 근대국민국가의 왕좌에 있어서는 안 될 군주였다.
결국 이선은 대원군과 개화당, 정부와 군부의 지지를 받으며 부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렸다. 형식으로는 선위라지만, 실질적으로는 퇴위를 강요했다.
이때 부자관계는 최악에 이른 상태였다.
‘그나마 조부님 덕에 파국까지는 가지 않은 건가.’
광무 2년(1898)에 대원군이 서거하기 직전, 이하응은 아들과 기나긴 악연을 던져 버리고 화해했다.
대원군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날 때 유언으로 어떤 말을 남겼는지 몰라도, 이후부터는 이형이 이선을 대함에 있어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군주 이형이 아닌 자연인 이형, 황제의 부친으로서 살아간다면 이선도 얼마든지 효성을 다할 의사가 있었다.
여전히 이형에게는 34년간 재위한 군주로서의 정통성이 남아 있었고, 대한제국 황제가 되었다 할지라도 조선의 왕위를 계승한 이선이 부왕의 권위를 침해하는 건 스스로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이선은 권력을 내놓고 물러난 부왕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주었다.
태상황으로 존숭하여 높이 받들고, 창덕궁을 아름답게 꾸미고, 태상황의 서양문물 취향에 맞춰 다양한 선물도 바쳤다. 이선을 제외하고, 대한제국 최초의 자동차 소유주도 태상황이었다.
문명개화의 혜택을 가장 먼저 누린 이가 바로 태상황이었다.
‘그토록 열망하던 권력을 상실한 지 수십 년. 그래도 망국의 군주로 기록된 역사와 비교하면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국가와 왕조를 치욕적인 멸망으로 몰아넣은 망국의 군주에서,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화를 달성하고 열강으로 올라서는 걸 지켜봤다.
일제의 독살 여부가 의심되는 원역사와 달리, 황제의 부친인 태상황이라는 영광스러운 지위에서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
이 세계의 역사에서는, 망국의 군주가 아닌 위대한 황제를 낳은 조선 26대 군주로서 기억될 것이다.
1월 20일 하루 종일, 태상황은 의식 불명 상태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황족과 종친들로 창덕궁은 분주했다. 황태후 김씨와 황후 김아영, 순친왕 이척과 정혜공주가 대조전에 늘 있으면서 환후를 살폈다. 태상황과 불편한 관계였던 의친왕 이강과 영친왕 이영도 시립하며 부황의 쾌유를 기원했다.
이선과 이진도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에서 머무르며 국사를 살폈다.
“태상황께서 속히 깨어나셔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음, 그리되어야 할 터인데…….”
소생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은 그렇게 나왔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궁내부 직원이 달려왔다.
“폐하! 태상황께서 의식을 찾으셨습니다! 폐하를 급히 찾고 계십니다.”
“오오, 그런가? 알겠네. 내 즉시 가지. 소조는 계속 국사를 맡도록 하라. 급한 일이 있으면 즉시 부르도록 하겠다.”
“예, 폐하.”
이선은 부랴부랴 대조전으로 향했다. 때마침 대조전 밖으로 나온 황태후에게 예를 표하고, 태상황의 환후를 물었다.
“낭보를 듣고 달려왔습니다. 태상황의 환후는 어떠십니까?”
“아직 말씀은 하지 못하십니다. 성상을 급히 찾고 계십니다.”
이선은 대조전 안으로 들어갔다. 태상황은 의식을 되찾긴 했으나 반신불수에 언어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노인은 힘겹게 오른손을 들어 이선과 이척 외에는 모두 물러나게 했다.
“어어……, 으으, 어으으…….”
언어능력을 상실한 태상황은 오른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부왕을 지근거리에 모시던 이척은 그 손짓을 이해했다.
이척은 서책 장서 사이에 놓여 있던 보자기를 이선에게 전했다.
“이게 무언가?”
“태상황께서 유사시 폐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지금 풀러 봐도 되겠습니까?”
이선이 부친을 향해 돌아보자, 태상황은 그렇다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보자기를 풀자 금등(金鐙)과 열쇠가 나왔다. 열쇠로 금등을 열자, 어필(御筆) 문서가 나왔다.
내용을 읽어 보니, 태상황의 친필이 적힌 유언장이었다.
‘이미 죽음을 예고하고 계셨던 건가.’
작년에 뇌졸중 전조증상이 오면서, 태상황도 죽음을 대비할 필요를 느꼈다. 태상황은 유언장을 작성하여 금등에 봉하고, 오직 이척에게만 그 위치를 알려 주었다.
「내가 재위에 올라 34년, 열성조의 유업을 받들어 국가를 중흥하려 하였으나, 무능하고 부덕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 열성조께서 보우하사, 천만 다행스럽게도 나의 장남 선이 국가의 중흥을 이끌게 되었다. 만청을 무찔러 자주독립을 이뤄 내고,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칭제건원하기에 이르렀으니, 실로 국가의 경사이자 왕실의 홍복이다.
한(漢)의 중흥을 이끈 광무제가 있었다면, 우리 대한에도 만대에 갈 왕업을 닦은 광무제가 있으니, 위대한 군주를 아들로 둔 내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 24년이 흘러 내 나이 고희를 바라보게 되었다. 두보가 이르길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하였고, 내 나이가 칠십이 되니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도다. 열성조 중 고희를 넘기신 이가 드무니, 참으로 왕좌의 짐이 무겁다 할 것이다.
내가 붕(崩)하면 장례는 간소히 치르라. 국가의 중대사가 많으니, 허례(虛禮)로 낭비할 이유가 없다. 왕조의 전례를 따르되, 굳이 황제의 예를 갖추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태자 진의 국혼이 급하니, 설령 국상(國喪) 기간이라 하여도 개의치 말고 국혼을 진행하도록 하라.
국상이라 하여 국경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예년과 마찬가지로 계천기원절, 건원경절, 개국기원절 행사를 성대히 치름으로써 우리 왕조와 대한의 권위를 만방에 빛나도록 하라. ……」
첫 번째 문서는 공식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의 유언장이었다.
관례적이든 진심이든, 태상황은 장남에게 제국의 영광을 돌렸다.
관례적으로 국상 기간에는 왕실에서도 상복을 입고 경사는 피했으나, 개의치 말고 태자의 혼례를 추진하라는 명이었다.
국상을 성대히 할 필요가 없고, 차라리 그 돈을 아껴서 국경일을 크게 기념하라는 권유였다. 황제의 권위를 중시하는 이다운 선택이었다.
「선은 보아라. 내 공적으로는 너와 군왕과 신하였고, 선위 후에는 상황과 황제였지만, 사적으로는 우리는 부자가 된다. 나는 네 부친으로서 네게 몇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한다.
황태후는 아직 젊으니, 홀로 남게 될 기간이 길 것이다. 현숙한 이니 황실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겠지만, 네가 아들로서 황태후를 극진히 모시리라 믿는다.
황귀비는 네가 친자로서 잘 모시고 있으니, 내가 따로 부탁할 일은 없겠다.
순친왕 척은 본래 왕세자였으나, 그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내게 지극히 효성을 다하였다. 내 적통은 네가 계승하게 되었으나, 내가 죽은 후에는 척이 창덕궁에서 머무르도록 허락해 주길 바란다.
의친왕 강은 어릴 적부터 궁 밖에서 자라, 내가 애정을 주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엇나간 게 아닌지 걱정이다. 다행히 네가 강과 친밀하니, 강이 친왕으로서 책무를 다하도록 해 주길 바란다.
영친왕 영은 어릴 적부터 내가 크게 아꼈으나, 구주로 떠난 후에는 거의 보지 못하였다. 아라사 여인과 혼례를 올려 왕실의 존엄에 누를 끼쳤으나, 이 또한 세상이 바뀐 탓이니 어찌하랴? 영의 아들이 비록 혼혈이라고는 하나 영친왕가를 계승하도록 배려해 주길 바란다.
정혜공주는 막내로, 나와 황태후를 가장 가까이 모셨던 아이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재가를 권하여 좋은 집안의 사내를 부마로 삼기를 바란다.
진은 내 장손으로, 왕조의 대통을 이을 적장자이기도 하다. 내가 진의 혼례를 보지 못한 게 유일한 한이다. 진이 속히 혼례를 치르고 후손을 얻기를 바란다. 청국이나 일본과 국혼이 오고 간다고 들었는데, 내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면 전례를 따라 대한의 명문가 사대부 여식과 혼례를 올리는 게 옳다고 본다. 하지만 황실의 좌장은 너이니, 네가 국익에 필요하다면 뜻대로 하여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굳건한 왕통을 세우는 것이다. …….」
두 번째 유언장은 태상황이 아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남기는 비공개적이고 개인적인 유언장이었다.
「…… 민씨는 비록 폐비되었다고는 하나, 내게 있어는 오랜 세월 동안 지어미였다. 네가 비빈(妃嬪)의 예로 다시 장례를 치러 줘서 감사할 따름이다. 그 장자인 척이 제사를 잇고, 척의 자식이 없으니 양자를 들여서라도 제사는 끊이지 않게 해 주길 바란다.」
대원군이 서거하기 전 이선에게 유언을 하였듯, 충주에 가매장되었던 폐비 민씨는 대원군 사후에 정식으로 양주에 이장하여 비빈의 예로 매장되었다.
죽은 이는 더 이상 정적이라 할 수 없었으니, 이선은 이장하면서 민씨에게 시호를 내려 황귀비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했다. 무엇보다 적자인 이척을 배려한 조치였다.
「지금부터 말하는 바는 광무 2년, 무술년에 대원왕께서 훙(薨)하실 때의 일이다. 대원왕께서 내게 이르시길…….」
태상황이 남긴 세 번째 유언장은, 이선이 짐작하지 못하였던 내용이었다.
유언장을 읽는 이선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