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84
3부 99화 삼년상
“아이고, 아이고…….”
매일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씩 궐내에서는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 이선을 필두로, 태자와 친왕들도 부복하여 곡을 했다.
이선은 고종 태황제의 장남이자 왕통을 계승한 상주(喪主)로서, 원칙적으로 삼년상을 치를 의무가 있었다.
유교는 제사를 중시하고, 특히 성리학을 국시로 내건 조선에서는 더욱 그랬다. 조선시대에 삼년상이 일반화됐고, 성리학 질서가 강화된 후기로 갈수록 더욱 보편화되었다.
대상(大祥)을 마칠 때까지 햇수로 3년, 만 2년간 삼년상을 치른다. 유교적 원칙상 부모를 잃은 자식, 특히 상주는 ‘죄인’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극도의 금욕을 필요로 한다.
대상을 끝낸 후에도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야, 비로소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다.
27개월 간 극도의 금욕을 강조하다보니, 혹독한 삼년상을 치르다 상주가 죽는 경우까지 있었다.
물론, 조선에도 융통성이 존재했다. 군주에게 사대부와 똑같은 예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통치와 삼년상을 동시에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려시대부터 군주에게는 1일을 1개월로 간주하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를 적용하여, 25일 만에 탈상을 마치고 27일 차에 상복인 참최복(斬衰服)을 벗는다. 이후에는 흰색 곤룡포를 입었다.
다만 그 후에도, 삼년상 기간인 만 2년간은 심상(心喪)이라 하여 효성과 금욕을 원칙으로 했다.
성리학 국가이니만큼, 역대 군주 중에 삼년상을 치르려 한 사례도 있었다.
그 전례는 태종이 시작하였으니, 태조 승하 후 백관은 고려의 전례를 따라 이일역월제를 주장했지만, 태종은 삼년상을 치르겠다고 고집했다. 본래 태종은 유학자 출신으로서, 장남이 아닌데도 모친의 삼년상을 행했다.
삼년상 기간 동안 태종은 신하들의 권유에도 육식을 금하고, 의정부와 세자(양녕대군)에게 정사의 일부를 맡겼다.
하지만 정치 9단 태종이 단순히 유교적 명분론 때문에 태조의 삼년상을 강행한 게 아니었다. 정변을 일으켜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왕위를 계승했기에, 자신이 태조의 왕통을 계승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정치적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삼년상 기간에도 선위쇼와 막후정치를 통해 처남 민무구 형제를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삼년상은 태종의 왕권을 절대화하는 과정이었다.
태종은 자신의 후손들에게는 굳이 삼년상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사후 세종이 삼년상으로 건강을 해칠까 봐, ‘주상(세종)은 고기 없이는 식사를 들지 못하니 상중에도 고기를 드시라 하라’고 특별히 유명을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효심 깊은 세종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함에도 삼년상 기간에는 심상하여 육식을 가능한 자제했다. 태종의 삼년상으로 인해 왕조의 전례가 만들어진 것이다.
문종과 인종처럼 지극한 효성으로 삼년상을 지내려다 건강을 해쳐 요절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삼년상 치르다 승하한 인종 이후에는 그런 극단적인 사례가 없었으나, 유교적 질서의 정점에 있었던 조선의 군주는 사대부와 백성의 모범이 되기 위해 삼년상을 원칙으로 했다.
군주는 심상 기간에도 육식하고 성생활도 다 했다지만, 공식적으로는 심상을 했다. 국상 기간에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의도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돌겠네, 진짜.’
이일역월제를 따라 27일 만에 참최복은 벗었으나, 이선은 원칙적으로 매일 두 차례 울면서 곡을 하고, 음력 초하루와 보름마다 삭망전(朔望奠)이라 하여 간단한 제사를 지내야 했다.
무엇보다 심상 기간에는 육식과 음주를 자제해야 했으니, 이선에게는 이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지금까지 유교적 군주로서 행하는 의례를 대부분 아우인 순친왕 이척에게 맡기고 회피했던 이선이지만, 상주로서의 의무까지 피해 갈 순 없었다.
단순히 장남이라서가 아니라, 왕통을 계승했기 때문에 정통성의 문제였다. 이선도 태종과 같은 비정상적 방법으로 왕위를 계승했기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물론 이선은 압도적인 업적을 확립했고, 개화정책에 부정적인 보수 유림이라 할지라도 감히 정통성을 운운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유교국가 조선의 왕통을 계승한 대한제국 황제로서 유교적 의무를 완전히 저버릴 순 없었다.
「살아 계실 때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정성을 다하면 된다. 삼년상을 치르다 상주가 죽는다면, 이야말로 부모에게 최악의 불효가 아니겠는가?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기를 바라겠는가?
삼년상을 행하고자 하는 효성을 어찌 모르겠느냐마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충효(忠孝)에서 어찌 충은 배제하랴? 짐은 충량한 신민에게 명하노니, 삼년상을 심상으로 대체하여 생업에 차질 없이 종사함으로써 국가에 충성하라.」
이선은 문명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삼년상을 심상으로 대체하라는 칙령을 내린 바 있었다.
근대화된 삶을 살아가는 도시에는 점차 삼년상이 사라져 갔지만, 향촌 사대부에게는 여전히 삼년상이 대세였다. 그렇다고 완전히 금지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긁어 부스럼이었다.
전국적인 단발령도 유림의 반발이 적지 않았는데, 그래도 상투를 틀고 싶은 이에게는 대신 ‘위생세’를 적용하여 세금을 받아 냈다. 대부분 지방 사대부인 단발 반대파들은 세금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상투를 틀었고, 이는 한동안 국가 재정에도 쏠쏠했다. 시대가 흘러갈수록 점차 단발이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삼년상한다고 세금을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명분이 없었다.
“신자(臣子)된 자로서 어찌 군부(君父)의 붕어에 의무를 다하지 않겠는가?”
유림 중에는 신하로서 삼년상을 행하는 이도 있었다. 조선 최후의 거유(巨儒, 대유학자)로 숭상받는 간재 전우(田愚)가 80대의 고령에도 삼년상을 치르기 시작했다.
전우는 최익현(崔益鉉), 유인석(柳麟錫)과 함께 최후의 성리학자로서 개화 정책에 저항해 왔다.
그나마 최익현은 이선의 설득을 받아들여, 중추원 의관을 지내면서 보수 유림의 대한제국 제도권 진입을 꾀했다.
북벌이 성공하면서, 보수 유림들조차도 대부분은 문명개화 정책이 옳았다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유인석과 전우는 끝까지 회유되지 않았다. 최익현과 유인석 사후에는 전우가 최후의 유림으로 남았다. 전우를 따르는 제자가 3천 명이 넘을 정도였다.
“전우는 구태의연한 옛 도리만 알지, 군주에게 충성은 모르는 편벽한 자입니다. 성상께서 명하신 문명개화의 시책에 끝까지 반대하니, 불충의 죄를 물어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개화당, 특히 강경파인 박영효는 전우를 거슬러 했고, 대한제국 초기에 전우를 잡아들여 제거하려 했다.
“비록 방향은 다르다고 하나, 짐은 그의 충심을 부정하지 않는다. 정부 시책을 거부한다 하여 어찌 함부로 벌하겠는가?”
이선은 거절했다. 그 자신도 보수 유림을 시대에 뒤떨어진 낙오자처럼 생각했지만, 굳이 처벌할 생각도 없었다. 이선은 반대파를 순교자로 만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시대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계급이었다.
오히려 권좌의 정점에 올랐던 박영효가 결국 실각하였으니, 이선은 이념 그 자체보다는 권력을 어찌 사용하는지를 더 중시했다.
‘영감탱이, 상주도 아니면서 왜 삼년상 타령이냐. 상주인 내가 먼저 삼년상을 중단하면 모양새가 뭐가 되겠나?’
50일 차에 발인을 마치는 대로 삼년상을 끝내려 했던 이선으로선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난 격이었다.
「어찌 국조의 전례를 따르지 아니하시고, 불과 50일 만에 국상을 마치려 하십니까?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발인까지는 5개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김윤식과 그 무리는 제국의 새로운 예법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이는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본디 황제의 붕어는 7개월, 제후의 훙서는 5개월이라 하였습니다. 오히려 황제의 예법으로는 7개월이 되어야 타당합니다. 50일은 49제 운운하는 불교와 같은 이단의 무리에서나 따를 일입니다.」
전우와 삼남의 유림들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태황제를 50일 만에 발인하여 능묘에 천전(遷奠)한 걸 비판했다. 빈전도감을 이끌며 국장을 간소화한 김윤식에 대한 탄핵도 쏟아졌다.
이는 고종의 붕어를 계기로 이선이 조선의 유교적 이념을 완전히 묻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 전우는 80세의 고령에 그 힘든 삼년상을 시작하였으니,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는 의미였다.
「…… 내가 붕(崩)하면 장례는 간소히 치르라. 국가의 중대사가 많으니, 허례(虛禮)로 낭비할 이유가 없다. 왕조의 전례를 따르되, 굳이 황제의 예를 갖추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
이선은 굳이 자신이 나서 논쟁할 것도 없이, 태황제의 유교(遺敎)를 발표하여 간소한 장례를 정당화했다.
“이는 선황의 뜻이다. 짐은 자식 된 도리로 마땅히 선황의 뜻을 따르고자 한다.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라.”
엄밀히 말하면 장례를 간소히 하라고 했지, 왕조의 전례를 따르라고 했으므로 유교적 예법을 따르지 말란 말은 아니었지만, 이선은 태황제의 유언을 명분으로 삼아 간소화를 정당화했다.
“간혹 짐이 태황제를 홀대한다는 말이 들리는데, 짐의 사후에도 마찬가지다. 짐의 장례는 더 간소히 할 것이다.”
‘개화를 40년이나 했는데도, 아직도 유학이 이토록 지배적이란 말인가. 역시 500년 세월은 어쩔 수가 없군. 하긴 역성혁명이 일어난 것도 아니요, 대한이 조선을 계승했는데 당연한 수순인가. 대한민국처럼 전쟁으로 사회제도가 완전히 뒤바뀐 것도 아니니.’
이선은 태황제 사후에 전국이 흰색 상복으로 물드는 걸 보고 내심 놀랐다. 고종이 퇴위한 지 24년이요, 사실상 잊혀진 군주였다.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 군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자발적인 추모와 애도의 분위기가 형성됐다. 황성으로 상경하여 애도하는 이가 수십만에 이르렀고, 전국적으로 흰색 물결이 넘실거렸다.
이는 고종이라는 개인이 아닌, 신민이 붕어한 황제에게 바치는 애도의 표현이었다.
‘이러다 내가 죽으면 수백만이 난리 나겠네.’
광무제 이선의 권위와 명망은 고종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전통적인 유교적 충군사상에다, 근대적 민족주의 교육이 더해지고, 황제의 위대한 업적이 하루가 멀다고 학교와 언론을 통해 쏟아지니 황제 숭배는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선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열광적인 충성의 분위기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만약 곧 자신이 죽는다고 가정하면, 뒤따라 순사(殉死)하겠다고 나서는 이도 적지 않을 것 같고, 전국에 수백만, 아니 수천만이 울며 애통해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상주인 이진이 받을 압박감은 지금 이선이 받는 압박감과 비교도 안 될 터였다.
‘이거 진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겠구만. 안 되겠어, 이쯤에서 내가 새로운 전례를 만들어야지.’
이선은 대한제국의 새로운 예식 절차를 총망라한 ≪대한예전(大韓禮典)≫의 편찬에 나섰다.
칭제건원 직후인 광무 2년(1898)에 대한예전이 완성되긴 했으나, 이선이 읽어 보니 마치 ‘중화제국’을 한반도에 옮긴 것 같아 공식 간행하진 않았다.
당시 대한예전 편찬을 주도했던 총리 김홍집과 대신들도 본질적으로 유학자였으므로, 대한제국이 만청을 대신해 ‘대중화의 정통’을 계승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선은 광무 2년의 대한예전을 장서각에 보관하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신흥 관료들에게 명해 새로운 예전의 편찬에 나섰다. 예전이 완성되기 전에 태황제가 붕어하여 첫 적용은 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간소화된 예식 절차를 확립할 계획이었다.
“앞으로 조속곡전은 홍릉에 전화로 하겠다. 이는 태황제께서도 국상에 행하셨던 바이다.”
1890년, 법적 모후인 신정왕후 조대비가 승하했다. 문명개화 정책으로 한성에 처음 전화가 설치되자, 모후의 승하를 슬퍼하던 고종은 능묘의 혼전(魂殿)에 전화기를 설치하여 매일 두 차례 전화를 걸어 곡했다.
절차는 능참봉이 전화를 받아 수화기를 혼전의 신위를 대면, 내관이 고종의 입 가까이 수화기를 연결하고 엎드려 절하며 곡했다.
근대화가 만들어 낸 기이한 풍경이긴 했지만, 전통과 근대를 절충하려던 시도였다.
선황의 전례를 따라 선황에게 곡하겠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곡은 나 혼자 할 터이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이선은 발인 이후에는 매일 두 차례 전화선이 연결된 홍릉에 전화를 걸어, 곡하는 대신 조용히 묵념하며 망자에게 예를 표했다.
원칙적으로 매일 해야 하는 조속곡전은 해결했지만, 이제 문제는 2년간 해야 할 심상이었다.
‘진짜 돌아 버리겠네. 이러다 삼년상 치르다 스트레스로 죽겠다.’
발인하는 50일 동안 금주하고 육식을 자제한 이선은 슬슬 금단증상이 와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태종은 이걸 어떻게 2년을 참은 거냐? 하여튼 진짜 독한 사람이야. 본인 정통성 문제 해결하겠다고 이런 전례를 만들어서 500년을 두고두고 고생하게 하네.’
얼마 전 선위 교서에서도 태종과 세종의 선례를 따르겠다고 했듯이, 역대 선대왕 중에서도 태종과 세종을 특히 숭상해왔던 이선이었다.
하지만 태종이 심상도 아닌 삼년상을 하면서, 왕조의 전례가 되어 버린 삼년상만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결국 이선은, 지금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에 나섰다.
「황제 폐하, 황공하옵게도 와병(臥病)!」
갑작스러운 황제의 와병 소식에, 전국의 여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든 국민은 황제 폐하의 와병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전국에 황제 폐하의 성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원이 쏟아져.」
「궁내부, 황제 폐하의 와병 소식은 과장된 것이라 밝혀. 단지 국상을 치르면서 성상의 피로가 누적되었을 뿐이니 국민은 걱정하지 말라고 발표.」
「황공하옵게도 황제 폐하의 와병 소식을 들으니, 신하된 자로서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성상께서는 지난 수십 년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촌음을 아끼지 않고 만기친람하시며 격무를 거듭해 오셨다. 그런데 국상의 막중한 의무까지 수행하시게 되었으니, 어찌 옥체가 감당하실 수 있겠는가?」
황제가 삼년상의 의무를 다하다 건강이 악화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면서, 애도 일색이었던 국민 사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궁내부가 공식 발표를 내서 와병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자, 오히려 우려는 더욱 커져 갔다.
태자 이진과 황족들, 총리 이상설과 대신들은 이선을 향해 청원했다.
“폐하, 고기를 드시옵소서. 무엇보다 시급한 건 폐하의 환후를 돌보는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오. 짐이 상주인데, 어찌 심상 중에 고기를 먹을 수 있겠소?”
그렇게 말하는 이선의 얼굴은 초췌하고 안색이 나빴다.
“폐하의 용안을 보니 신등은 더욱더 걱정이 되옵니다. 속히 수라에 고기반찬을 올려 드시옵소서.”
“대한은 조선을 계승하였소. 열성조의 왕통을 계승한 짐이 오랜 전통을 깨트릴 수는 없는 일이오.”
이선이 엄숙한 어조로 말하자, 신하들은 더욱 간곡히 청원했다.
“폐하, 태황제께 지극히 효성을 바치는 폐하의 성심을 신등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오나 폐하께선 곧 국가이십니다. 폐하의 옥체 평안하심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전례를 살펴도, 선대왕께서 심상 기간에 반드시 금욕을 지키신 건 아닙니다!”
“대한이 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건 명백한 사실이오나, 제국의 예법이 반드시 같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문명개화로 이미 세태가 크게 바뀌었거늘, 어찌 옛 예법만을 따르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대한제국 초기와 달리, 문명개화파가 절대다수인 관료들은 삼년상의 고집에 반대했다.
이선이 못 이기겠다는 듯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원, 경들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짐이 고기를 들도록 하리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