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86
3부 101화 아관파천
경운궁에 인접한 황성부 정동(貞洞)은 주한 대사관이 모여 있어, 서양인이 세운 학교, 병원, 교회, 호텔 등이 건축되어 외국 문물이 들어오던 일종의 관문이었다.
재한 서양인 커뮤니티가 정동에 형성되고, ‘문명개화’를 선호하는 한국인들도 정동을 드나들었다.
완연히 서양풍인 정동은 한창 근대화가 진행 중인 황성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공간이었다.
정동에서도 높은 지대 위에 세워진 주한 러시아 대사관, ‘아관(俄館)’은 웅장한 르네상스식 양옥이었다. 지대가 높다 보니 황성 시내를 조망할 수 있었고, 시내에서 봐도 쉽게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일본 공사관(현 대사관)이 임오군란 이후 방어하기 쉬운 남산 일대로 옮겼듯이, 아관이 정동의 높은 지대에 건축된 것도 유사시에 대비해서였다.
경사로(傾斜路) 올라오는 길을 차단하면 쉽게 접근할 수 없었고, 유사시 건물 지하의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
한때 대한제국-러시아 우호의 상징이었던 아관은 한-소 단교로 일시적으로 비워졌다가, 광무 24년(1920) 가을부터 로마노프 황실의 망명지로 쓰였다.
한국인들은 러시아 황실이 아관으로 파천하였다 하여, ‘아관파천(俄館播遷)’이란 표현을 썼다.
“여기가 이제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야. 한국 황제 폐하의 배려로 특별히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
니콜라이 2세의 다섯 자녀는 아관에 거주했다.
외국 황실의 한국 망명은 유례가 없었던 일이라, 한국인과 외국인을 막론하고 세관의 수많은 관심의 시선이 아관으로 향했으나, 이들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극히 드물었다.
한국군 근위대가 아관 주변을 철통같이 경호했고, 아관으로 오르는 길은 오직 허가받은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
로마노프 5남매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딱 한 번, 황태자 이진의 천추경절 축연이었다. 점잖은 황태자가 타티야나 여대공과 파트너가 되어 춤을 췄다는 건 재한 서양인들 사이에서 꽤 흥밋거리가 되었으나, 국혼이 논의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이후에도 5남매는 종종 경운궁을 방문했다.
도시계획 이후 경운궁과 경희궁은 홍교(虹橋, 무지개다리)로 연결되었는데, 바로 아관 옆을 지나갔다. 5남매는 본래 한국 황실만 사용할 수 있는 홍교를 통해 경운궁을 갈 수 있었고,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독실한 정교회 신자인 5남매를 배려해서, 일요일마다 정동 ‘성 니콜라오스(니콜라이) 성당’을 방문해 예배하게 했다. 성당이 애초에 주한 러시아 외교관들을 위해 지어진 만큼 아관과 지척에 있어, 오직 예배만 참석하고 속히 돌아갈 뿐이었다.
“대공 전하! 타임스 특파원입니다! 한국 생활은 어떠십니까? 앞으로의 계획은요? 부디 한 말씀만!”
간혹 특종을 잡고 싶은 기자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대공들을 향해 달려드는 경우가 있었지만, 로마노프 황실의 호위를 맡은 근위대는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물러나시오!”
“이 나라에는 언론 자유도 없습니까?”
“테러 방지를 위한 부득이한 제한이니 양해 바랍니다.”
이처럼 언론과도 철저히 차단되었던 망명자들인데, 뜻밖에도 《제국신문》과 특별 인터뷰를 했다.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와 함께 한국 4대 신문인 제국신문은 이름과 달리 중류층 이하의 민중 및 부녀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신문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겠다는 취지였다.
개화당에서 인수한 후 관영이나 다름없는 독립신문, 영국계 자본으로 설립되어 가장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대한매일신보와 달리, 한국인이 세운 대표적인 민영언론인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은 대중성을 지향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다.
제국신문의 경쟁자인 황성신문이 ‘아녀자들이나 읽는 암신문’이라고 폄훼할 정도로, 제국신문은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얘, 너 어제 제국신문 읽었니?”
“아라사 공주님들 특집호 말이지? 봤지!”
“읽으면서 눈물이 나오더라. 금지옥엽이신 공주님들이, 혁명으로 쫓겨나서 온갖 고생 끝에 한국까지 오시다니.”
“정말 너무 감동했어. 대제국의 공주님들인데도 굉장히 소탈하시더라. 서로 우애가 얼마나 깊던지.”
“공주님들은 몸이 편찮으신 아라사 황태자 전하에게 지극정성이더라.”
“돌아가신 부모님을 늘 생각하고, 아픈 동생을 돌보고, 이런 거 보면 우리 한국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가 않아.”
“영친왕비 전하도 아라사 사람인데 한국 사람이 다 되셨잖아. 태어난 곳이 어디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며 사느냐가 중요한 거지.”
“맞아. 그렇게 현명하고 아름다운 분이 대한 황실에 있다니, 믿겨 지지가 않아.”
“아라사 공주님들이 대한에 온 것도 믿겨 지지 않지.”
“응, 계속 대한에 계시면 좋겠다. 아라사뿐만 아니라 구주(歐洲, 유럽)도 혁명으로 위험하다잖아?”
로마노프 여대공들과 인터뷰를 한 제국신문 특집호는 공전의 판매고를 올렸다. 3쇄, 4쇄도 금방 팔려나가 본사 윤전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제국신문의 주 독자층인 교육받은 젊은 신여성들은 공주들의 인터뷰에 열광했다.
문명개화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아름다운 서양 제국의 공주’라는 타이틀 자체에 환상을 가졌을뿐더러, 인터뷰에서 드러난 공주들의 인간적인 모습은 호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아아, 그리하여 대제국의 후계자였던 대공 전하와 네 명의 금지옥엽 공주님들은 사랑하는 부모님인 황제 부처와 이별하고 영영 조국을 떠나게 되고 만 것이었다.”
청년들은 국민교육의 영향으로 국문(한글)을 깨쳤으나, 중장년 세대에는 여전히 문맹이 많았다. 문맹자들에게 돈을 받고 신문을 읽어 주는 변사(辯士)가 있었는데, 고전소설을 읽어 주던 전기수(傳奇叟)처럼 감정을 불어넣어 각색하여 낭독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뵙지 못하게 되었으리라곤 누가 알았으랴? 과격파의 흉수에 아라사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는 시해되고 말았으니, 신민이 군주를 시해한 참람한 일이도다! 아, 그런데 저들의 흉수는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도 모자라 그 후예에까지 이어졌으니!”
“저런 죽일 놈들!”
“공주님들 불쌍해서 어떡해!”
“그러나 걱정 마시라! 우리 황제 폐하께서 특전대를 보내,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친우의 자녀들을 구하여 대한으로 무사히 모시었다. 대한 황실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된 이 고귀한 손님들은, 두 번의 겨울과 봄을 맞이하면서 서서히 마음에 꽃이 피기 시작했도다.”
“암, 역시 우리 대한은 의리의 나라지!”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대중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문이라기보단 마치 고전소설을 듣는 청자들 같았다.
“머나먼 타국에서도, 네 명의 공주님들은 몸이 아픈 대공 전하를 위해 극진히 헌신하며 우애를 다하며, 시해당한 부모님을 하루도 잊지 않으며 늘 어진(御眞)을 품고 있으니, 효성과 우애가 어찌 우리 대한만의 법도로 하랴?”
“맞소, 서양이라 한들 사람은 다르지 않구려.”
“참으로 훌륭한 분들이셔.”
“대한으로 오시게 돼서 정말 천만다행이야.”
민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로마노프 5남매를 향한 동정론이 일었다.
‘황제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남 – 반란으로 국가가 무너짐 – 황제가 시해당하고 목숨까지 위협받음 – 구원자의 등장으로 탈출에 성공’이라는 서사 자체가 고전소설의 성격에 꼭 들어맞았고, 특히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에서 유행했던 소설과 흡사한 측면이 있어 한국인들은 쉽게 공감을 했다.
“에이, 뭐 사정은 딱하긴 하지만 우리 국민이 이렇게까지 열광할 일인가.”
“제국신문이 무슨 의도로 특집기사를 냈는지 모르겠구려.”
“신문 팔아먹을 의도겠지. 의도는 달성했구려.”
“솔직히 러시아 황실은 망할 만해서 망한 거지. 민심을 잃었으니 자연히 천명도 잃은 게 아닌가.”
“대한의 덕으로 망명했으면 예전처럼 조용히 사는 게 그들에게도 나을 텐데. 왜 이렇게 주목을 받으려 하는 건지 모르겠소.”
“대한의 힘을 빌려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어림도 없는 소리지. 감정으로 전쟁하나.”
지식인층에선 갑작스럽게 번지는 로마노프 동정론에 냉소하는 이들이 적잖았다. 지식인들은 제정 말기의 난맥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청년층에선 러시아 혁명에 대해 긍정적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아라사 역적들이 흉악하긴 하구나. 군주를 폐위한다 한들 어찌 시역(弑逆)까지 한단 말이냐?”
“참으로 무군무부한 자들입니다.”
보수적인 유림 계층에선 망명자들보다는 황제가 시해당했다는 사실 자체에 분개했다.
애초에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러시아는 머나먼 남의 나라나 다름없었다. 대중적으로 동정론이 크게 일기는 했으나, 가십거리에 더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1921년 4월 3일 일요일은 동방교회 부활절로(서방교회는 3월 27일),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기독교 최대 축일이었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한국의 명절인 한식(寒食)이 이틀 뒤였다. 한식에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벌초하는 등, 성묘(省墓)의 시기였다. 즉, 조상을 기린다는 측면에서 한국 예법상 중요한 명절이었다.
이선과 황족들도 이틀 뒤에 태황제의 홍릉을 성묘할 예정이었다.
단, 한식은 공휴일이 아닌 평일이었고, 일반 백성들은 평일에 쉴 수 없으므로, 일요일인 3일에 성묘행렬이 절정에 달했다.
바로 이날, 성 니콜라오스 성당 앞에서는 특별한 예식이 준비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정통 신앙의 수호자 로마노프 황실도 제3의 로마인 모스크바에서 반드시 부활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 니콜라오스 성당의 부활절 예배에는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들이 모여들었고, 단연 주목을 받는 이들은 OTMAA 5남매였다.
공교롭게도 성당에 봉헌된 성 니콜라오스는 니콜라이와 같은 이름으로, 1921년 부활절은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추모 열기로 가득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무능하고 나약한 암군, 국민을 나락으로 몰아 버린 폭군으로 기억되는 니콜라이였지만, 해외 정교회와 왕당파 망명자들 사이에서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정통 신앙의 수호자로 기려졌다.
부활절 예배가 끝난 후, 성당 앞에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초상화가 놓인 단이 설치됐다.
정교회 예식에선 전례를 찾아보지 못한 일이라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는데, 추모예배에 참석한 영친왕 이영과 영친왕비 이서아가 먼저 초상화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조의를 표했다.
그 직후,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알렉세이를 제외하고, 네 공주는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서아가 먼저 북쪽을 향해 통곡하자, 이윽고 5남매도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실로 기이한 풍경이었다. 소복을 입은 영친왕비, 검은색 상복을 입은 러시아 공주들이 무릎을 꿇고 북쪽을 향해 곡을 하고 있었다.
예식에 초대받은 기자들은 이 기이한 풍경을 반드시 담아야겠다는 듯, 사전에 금지된 사진 플래시는 터뜨리지 못해도 빠르게 적기 시작했다.
“올랴,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거 우상숭배 아니야?”
“입 다물어, 나스챠. 타냐를 위해서라도 시키는 대로 해.”
생전 처음 하는 곡(哭)에 넷째 아나스타샤가 불평하자, 장녀 올가는 허벅지를 쿡 찌르며 입을 다물게 했다.
사실 5남매 모두 부활절에 공개적으로 곡을 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독실한 정교회 신자인 이들로서는 곡을 하는 행위가 우상숭배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었다.
“조상을 기리는 게 어찌 우상숭배일 수 있겠어요? 앞으로 한국에 살아가려면 제일 먼저 익혀야 하는 게 유교 예법이에요. 한국인들은 충성과 효도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깁니다. 대공 전하께서 니콜라이 2세 폐하를 기리는 건 충성과 효도에 모두 부합되니, 한국인들도 놀라워할 겁니다.”
이선의 지시를 받은 이서아가 대공들을 설득해 부활절에 곡을 하도록 했다. 다들 심리적 저항을 느꼈지만, 타티야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앞으로 한국인으로 살아가려면 필요한 절차겠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부모님을 기릴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하여 부활절 예배가 끝난 후에 유교식으로 곡을 한다는 기이한 예식이 준비된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은 기이하다 못해 황당한 기분이었지만, 한국인들은 진심으로 큰 감명을 받았다.
「광무 25년 4월 3일, 기독교의 부활절이자 대한의 한식을 맞이한 날, 정동의 아라사 성당 앞에서는 특별한 예식이 있었다.
아라사 선황(先皇) 폐하와 선후(先后) 폐하의 어진을 모신 자리에, 대공과 공주들은 북쪽을 향해 곡을 하며 애도했다.
그분들이 외치는 비통한 목소리, 슬픈 얼굴, 큰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은,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애통한 마음이 전해졌다.
아, 자녀이자 신하로서 선황을 향해 충효를 다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세상에, 이렇게 효성스러울 수가! 아라사 공주들이 이토록 효녀였다니, 미처 몰랐어요.”
“돌아가신 부모님의 어진을 늘 가슴에 안고, 북쪽을 향해 곡을 하며 애도하다니……. 우리 조선 사람들 못지않게 끔찍이 효도를 다하는구려.”
“성묘를 하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이니, 얼마나 애가 끓겠어요.”
“참으로 충신, 효자이자 열녀로세. 서양인이라고 해서 효성이 부족하리란 건 편견이었어.”
「아라사 공주 전하께서 이르시길,
‘대한 태황제 폐하의 국상을 보고 한국 황제 폐하와 국민의 크나큰 효도와 충성을 체감했다. 비록 문화는 다르다고는 하나, 우리는 한국에서 살아가니 한국식 예법으로 돌아가신 선황을 기리는 게 아름다운 일이라 여겨졌다. 마침 며칠 뒤가 한국에서는 조상을 기리는 날이라 들었다. 그리하여 이런 특별한 예식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타티야나의 인터뷰가 담은 후속 보도가 나오자, 한국인들은 더욱 열광했다.
“호오, 아라사 공주가 한식을 알고 유교 예법으로 선황을 기리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감개무량하군. 대중화를 계승한 대한의 예의가 아라사 황실조차 감화시킨 것인가!”
“왕화(王化)가 대한을 넘어 아라사까지 이르다니, 이 또한 황제 폐하의 성덕(聖德)이 아니겠는가!”
“크도다, 왕화의 덕이여!”
남의 일처럼 여겼던 보수적 유림조차, 로마노프 황실이 행한 유교식 애도에 열광했다.
모스크바가 정교회를 계승해 제3의 로마를 자처하듯, 유림은 조선-대한제국이 만청-중화민국을 대신해 중화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눈에는 중화의 예의가 대한을 통해 러시아까지 전파된 것이었으니, ‘예의’의 세계화이자 유교 문명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아관파천’이 만들어 낸, 실로 기이한 문화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