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87
3부 102화 제4의 로마
1921년 4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지척의 아나톨리아에서는 그리스와 터키 간에 전쟁이 거세게 벌어지고 있었지만, 연합국이 통제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은 비교적 평온했다.
얼마 전, 대량의 피난민을 싣고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을 떠나 보스포루스 해협에 도착한 러시아 흑해함대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사령관 각하, 페레코프 지협의 방어선이 적군에 의해 돌파됐습니다.”
“이제는 정말 끝인가……. 결국 신성한 러시아를 소비에트에 넘겨주게 되는군.”
1921년 3월, 전성기에는 모스크바까지 위협했던 백군 남러시아군은 종말이 눈앞이었다.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으로 붉은 군대가 대부분 폴란드 전선에 집중된 사이, 크림반도에 웅거하던 ‘검은 남작’ 브랑겔 장군의 부대는 남부 우크라이나로 진격하여 최후의 저항에 나섰다.
하지만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 문턱에서 참패한 후, 소비에트 정부는 ‘세계혁명’을 연기하고 내전 종식에 중점을 뒀다.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여전히 폴란드와 전쟁은 지속됐지만, 폴란드군을 상대로는 수세로 전환하고 유럽 최후의 백군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백군은 크림반도로 연결되는 페레코프 지협에 방어선을 설치했지만, 적군의 압도적인 물량 앞에 결국 방어선이 뚫리고야 말았다.
“전군, 콘스탄티노플로 퇴각한다. 민간인도 피난을 원하는 이는 모두 태우도록 한다.”
바다 앞까지 몰린 백군에게 그나마 다행인 건, 지상에서는 패퇴했지만, 해군 총사령관인 콜차크 제독의 지휘를 받는 흑해함대를 장악하고 있는 덕에 여전히 제해권은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함 3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0척, 잠수함 4척, 포함 5척, 지원함 18척, 수송선 20척, 기타 소형선박 60척으로 구성된 흑해함대는 대규모 철수 작전에 돌입했다.
백군의 마지막 동맹인 프랑스 지중해함대도 철수 작전을 지원했다.
“소비에트의 지배를 피해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배에 탑시다!”
6만여 명의 백군 병사들, 소비에트 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10만여 명의 백계 민간인들이 흑해함대에 올라탔다.
의외로 철수는 공황상태 없이 차분하게 진행됐다. 급박하게 철수가 진행됐던 노보로시스크 퇴각과 달리, 브랑겔과 콜차크는 진작부터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질서 있는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패배자가 아니다.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당당하게 머리를 치켜들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난다.”
브랑겔 장군의 사령부가 마지막으로 승선하면서, 유럽 최후의 백군은 크림반도를 떠났다.
‘이렇게 러시아를 떠나게 되는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겠군.’
백군 군의관 미하일 불가코프(Mikhail Bulgakov) 대위는 씁쓸한 기분으로 멀어져 가는 육지를 바라봤다.
‘두 번 다시 전쟁 같은 건 끼어들지 않겠다. 이젠 문학에만 인생을 바쳐야지.’
의사이자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대전쟁과 내전을 체험했던 불가코프는 이제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그는 문학으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싶었다.
훗날 위대한 작가로 이름을 떨치게 될 불가코프의 나이는 이때 서른이었다.
귀족과 장교, 지주와 자본가 외에도 상당한 수의 예술가와 지식인들도 소비에트 치하를 피해 탈출했으니, 이들은 거대한 ‘백계 러시아 디아스포라’를 형성했다.
‘패배자로서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됐구나.’
흑해함대의 승조원 중에는 젊은 동양인 소위도 있었으니, 파벨 페트로비치 초이, 혹은 최성학(崔聲學)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바로 연해주 고려인의 대부 표트르 세묘노비치 초이, 최재형의 차남이었다.
1918년 고려인 최초로 페트로그라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던 파벨은, 대전쟁의 종전에 이어 내전이 발발하자 선택을 해야 했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은 대부분 중상류층 출신으로 백군을 지지했으나, 파벨 자신은 소수민족 출신으로서 민족평등을 외치는 신생 소비에트 정부의 혁명에 더 공감했다. 하지만 백계 시베리아 정부에 참여한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결국 백군에 가담했다.
작년에 고려인과 극동 출신 육군 장병들이 한국 정부의 주선으로 모두 연해주로 이동한 후에도, 파벨은 계속 흑해함대에 복무했다.
“파벨 페트로비치 초이, 소위의 부친은 연해주의 실력자라고 들었는데, 맞나?”
파벨은 콜차크 제독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극도로 긴장한 채로 사령실에 들어갔다. 해군 총사령관이 일개 소위를 불렀다는 것 자체가 긴장되는 일이었다.
“제 부친께서는 사업가이자 러시아의 충성스러운 국민입니다, 각하.”
“차르에게 훈장을 수여 받았고, 시베리아 정부의 재무차관이었잖나. 그 정도면 실력자지.”
“예 그렇습니다, 각하.”
“한국 황제와도 오래전부터 절친한 사이고.”
“한국 황제 폐하에 대해선 부친으로부터 종종 말씀을 들었습니다.”
콜차크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파벨에게도 한 가치를 줬다. 파벨은 제독의 선물에 황송해하며 받았다.
“소위, 우리 함대의 목적지가 어딘지 아나?”
“콘스탄티노플로 알고 있습니다, 각하.”
“일단은 그렇지.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지는 아닐세.”
콜차크는 사령실에 걸린 지도에서 동쪽 끝을 가리켰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일세. 작년에 극동 출신 장병들을 돌려보낸 이유도 그렇다네. 우리는 연해주를 거점으로 삼아 극동에서 계속 투쟁을 이어 나갈 거야.”
순간 파벨의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우리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려면 여러 나라의 도움이 필요해.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한국. 우린 다방면으로 협력을 요청할 거야. 특히 극동에서 투쟁을 이어 가려면 한국의 협력이 중요하지. 귀관의 부친께서도 연해주의 한국계 주민을 대표해 한국 황제께 지원을 요청해 줬으면 하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는 즉시 부친께 전보를 보내도록.”
파벨은 고향 땅까지 내전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았지만,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소위가 대장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는 부친이 현명한 판단을 하리라 믿으며, 제독을 향해 거수경례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백군 지도부는 크림반도에서 퇴각하면서도, 탈출과 해외망명이 목표가 아니었다.
“세바스토폴이 함락됐으니, 이제 블라디보스토크가 정말로 마지막 희망이 되었소.”
“아직 백군 운동이 실패한 건 아닙니다. 우리에겐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가 남아 있습니다.”
육군의 브랑겔과 해군의 콜차크 모두 소비에트에 대한 투쟁을 저버리지 않았으므로, 병력과 함대를 온전한 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고 싶어 했다.
극동 3주는 명목상 신생 국가인 극동 공화국으로 독립하였지만, 그중에서도 한국군과 일본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연해주는 여전히 백군 잔당과 백계 지지자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당시 발트함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극동을 향해 기나긴 항해에 들어갔듯, 이번에는 흑해함대가 세바스토폴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대장정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었다.
* * *
이른바 ‘콜차크 함대’라 불리는 유럽 백군 최후의 잔당은, 보스포루스 해상에 대기했다.
명목상의 지배자인 오스만 제국이든, 콘스탄티노플과 해협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연합국 통제위원회든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16만의 피난민 행렬에 난색을 표했다.
“저들을 대체 어디에 두겠다는 거요? 16만이나 되는 이들을 먹일 식량은 어쩌고?”
“일단 흑해함대는 프랑스 공화국이 보호하는 걸로 하겠소. 빠른 시일 내로 퇴거를 유도하지요.”
프랑스가 함대의 ‘보호’를 선언하면서, 일단 병사와 피난민들은 갈리폴리에 주둔지를 설치하고 다음 목적지를 물색했다.
6만의 군인들은 3개 군단으로 재편되어 주둔했고, 사령부는 해상의 전함에서 머무르며 지휘체계를 유지했다.
대부분의 피난민은 갈리폴리에 잔류했지만, 원하는 이들은 망명을 허용했다. 일부는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프랑스 등지로 떠났다.
“이 위대한 도시를 해방자가 아닌 망명자로서 오게 되다니, 유감스러운 일이군.”
정교회의 정통성에 집착하는 백군 지휘부는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가 집전하는 부활절 예배에 참석했다.
‘제2의 로마’ 콘스탄티노플을 계승한, ‘제3의 로마’ 모스크바를 자처하는 러시아제국은, 오래전부터 콘스탄티노플 해방을 국가적 과제로 설정했다.
10여 차례에 걸친 러시아-튀르크 전쟁, 최근 대전쟁의 주된 목적도 콘스탄티노플 해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해방자가 아닌 망명자로서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제3의 로마 모스크바는 ‘무신론자-적그리스도’에 의해 점령됐다.
“우리는 콘스탄티노플을 해방하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모스크바를 무신론자들에게 넘겨줬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만은 반드시 지켜 내고, 러시아의 정통을 이어 나갈 것이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제4의 로마’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하고 싶다고요? 안 됩니다. 대영제국은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백군 사령부의, 계획에 영국이 특히 난색을 표했다.
작년만 해도 지중해함대를 파견하여 백군의 철수와 황족들의 망명을 돕기도 했으나, 소비에트 적군이 내전에서 승기를 잡자 백군을 버리는 패로 인식했다. 세바스토폴 철수작전에 협력한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러시아 함대가 러시아 항구로 이동하겠다는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거긴 이미 극동 공화국이라는 별개의 국가가 생겼잖습니까?”
“세계의 공인을 받지 못한 자칭 국가일 뿐이지요!”
“아, 아무튼 우리는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귀측의 항해 계획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하려면 필연적으로 영국이 통제하는 수에즈 운하와 인도, 말라카 해협을 지나야 하는데, 영국이 반대하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저들이 극동에서 계속 투쟁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항해를 허용해 주시오!”
극렬 반소비에트 간섭파인 육군장관 처칠은 흑해함대의 항해를 허용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백군을 버리기로 한 로이드조지 내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비에트가 지급을 거부한 러시아 외채를 일부라도 전함으로 돌려받으면 좋지 않겠소?”
“흠,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요.”
영국과 프랑스는 온전한 흑해함대에 눈독을 들였다.
특히 흑해함대 기함인 ‘볼랴(Volia, 자유)’호는 본래 제정의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급 전함 알렉산드르 3세로, 1917년에 인도된 최신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다.
1번함인 임페라트리차 마리야는 독일 해군과 교전 중 탄약고 폭발로 침몰했지만, 2번함 ‘예카테리나 벨리카야(예카테리나 대제)’와 볼랴로 개명한 3번함 알렉산드르 3세는 여러 전투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백군 함대의 일부가 되었다.
흑해함대의 또 다른 전함인 게오르기 포베도노세츠(Georgii Pobedonosets)는 포템킨 반란에도 연루될 만큼 오래된 구형 전함이지만, 볼랴와 예카테리나는 연합국 입장에서도 탐이 나는 최신전함이었다.
“전우라고 할 때는 언제고, 전함을 압류하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러시아는 프랑스와 영국에 막대한 채무를 빚졌습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부정했지만, 전러시아 임시정부는 채무승계를 인정했지요. 채무를 갚을 방법이 사라졌으니, 전함이라도 갚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확보한 제정의 금괴 중 일부로 변제하지 않았습니까? 전함은 반소 투쟁의 상징인데, 결코 넘겨주지 않을 겁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함 분할 계획이 귀에 들어가자, 백군 사령부는 결사반대했다. 이들에게 있어 함대는 최후의 희망이었다.
브랑겔이 영국과 프랑스의 요구에 맞서 드러눕는 동안, 콜차크는 해협통제위원회 한국대표 안중근 부장을 만나러 갔다.
“안 장군, 우리는 러시아의 전우인 한국을 믿습니다. 우리는 독일과 함께 맞서 싸웠고, 볼셰비키와도 싸웠습니다. 우리가 극동에서 투쟁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작년에 귀국이 극동 출신 장병들을 돌려보낸 이유도, 연해주를 최후 투쟁지로 삼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연합국이 계획을 반대하는 입장이라…….”
안중근은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본심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후 항전을 부르짖는 ‘전우’를 저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본국에서는 내전에 더 이상 개입하지 말라고 훈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극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귀국이 나서 주면 됩니다. 항행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든 성사시키겠습니다. 귀국 군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니, 항구만 열어 주면 됩니다.”
“제독, 소관도 어떻게든 돕고 싶은 입장입니다만, 우리 정부는 소비에트 정부와 협정을 맺고 극동 공화국을 실질적으로 승인했습니다. 대규모 백군 부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보낸다면, 그건 조약 위반이 됩니다.”
안중근이 어렵다는 입장을 거듭 보이자, 예상하고 있었던 콜차크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전러시아 임시정부는 귀국을 믿고 대량의 금괴를 보냈습니다. 그 금괴는 투쟁 자금입니다. 설마 금만 받고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대량의 금괴라니, 안중근으로선 금시초문이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소관은 처음 듣습니다.”
“본국에 문의해 보십시오. 귀국 황제 폐하께선 알고 계실 겁니다.”
* * *
1916년, 대전 중에 독일군의 진격을 우려한 러시아제국 정부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은행 금보유고를 동부의 카잔으로 이송했다.
전쟁과 혁명으로 휘청거릴 때도, 러시아제국의 금보유고는 500톤이 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종전 이후, 내전이 발발했다. 동부전선 백군은 적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진격을 보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금을 다시 모스크바로 이전할 틈도 없이, 백군은 카잔을 점령하고 500톤의 금괴를 확보했다.
금괴를 확보한 전러시아 임시정부 총리 스톨리핀은 크게 기뻐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안전한 이르쿠츠크로 이전시켰다.
연합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제정의 채무승계를 약속했던 임시정부는, 내전이 급한 상황이라 채무상환 대신 금괴를 담보로 무기와 군수품을 구입하는 데 주력했다.
막대한 양의 금괴가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한국의 은행으로 향했다. 하지만 담보로 내주는 금괴에 비해 돌아오는 무기는 소수에 불과했다. 각국이 ‘채무 변제용’으로 집어삼키기 일쑤였다.
1920년 5월, 이르쿠츠크를 점령한 소비에트 정부는 금괴 회수에 나섰다. 회수된 금괴는 약 300톤. 나머지 200톤의 행방은 묘연했다.
“아무리 백군 정부가 돈을 흥청망청 썼다고 해도, 그 짧은 기간 동안 200톤이나 썼다는 게 말이 되나! 어디다 은닉한 게 틀림없다. 러시아 인민의 고혈을 쥐어짜서 얻은 금괴를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소비에트 정부는 사라진 금괴를 찾아 추적에 나섰다. 그런데 포로가 된 백군 장성이나 관료도 그 행방을 몰랐다.
주변국에 은닉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한국 모두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러시아제국의 막대한 금보유고, 무려 200톤이나 되는 금괴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