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95
3부 110화 융화
광무 25년(1921) 가을, 대한제국 황성.
라흐마니노프의 동아시아 공연은 연해주에 이어 황성, 상해, 도쿄에서 이뤄졌다.
한국에서 서양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황제 이선이 음악애호가인 덕에 상류층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고 황실 군악대를 이끈 독일인 프란츠 에카르트는 은퇴 후에도 한국에 잔류하여 음악인들을 양성했고, 이들이 1세대 한국 관현악단을 이끌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연장인 정동 협률사(協律社)에는 서양식 콘서트홀도 생겼고, 피아니스트와 관현악단의 공연도 이뤄졌다.
「全美를 强打한 最高의 피아니스트! S. 라흐마니노프氏 來韓! 大韓의 마니아여, 기대하시라!」
미국 망명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보다 피아니스트로서 더 명성을 떨쳤고,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했다.
라흐마니노프의 방한은 개항 이래 가장 유명한 해외 음악인의 공연이었고, 표는 삽시간에 매진되었다.
공연은 성황리에 이뤄졌다. 예전에는 재한 서양인이 주관객이었다면, 이제는 한국의 청년들이 주관객이었다. 이들은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라흐마니노프는 대중 공연 외에도, 자신을 초청한 황제 이선과 망명 중인 로마노프 대공들을 위하여 경운궁 석조전에서 비공개 연주회를 했다.
이선 부부와 자녀들, 이강 부부, 이영 부부, 로마노프 대공들이 관객으로 참석했다.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라니. 감개무량하구만.’
이선은 음악애호가로서 이 순간이 감개무량했다.
물론 1884년에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차이콥스키가 지휘하는 음악을, 1896년에 방문했을 때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지휘하는 음악을 직접 들은 바 있었다. 1907년에 방문했을 때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를 들은 바 있었으니, 완전히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장 음악가가 초청에 응하여 한국을 방문하고, 자신을 위하여 특별히 공연하는 건 행복한 경험이었다.
“정말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14년 전에 선생의 연주를 처음 들을 때부터 서울로 초청하고 싶었는데, 마침내 소원을 이뤘군요.”
“영광입니다, 폐하. 제 음악을 먼 나라라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좋아해 주니 기쁩니다.”
이선은 라흐마니노프와 악수를 했다. 198cm의 장신에 피아니스트 역사상 큰 손으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답게, 악수하는 손이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다.
라흐마니노프 입장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동양의 황제가 자신의 팬이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꼭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훌륭한 연주에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음악이 세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어서 기쁠 따름이에요.”
“감사합니다, 전하.”
로마노프 대공들도 찬사를 보냈다. 이들은 특별히 라흐마니노프의 팬은 아니었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러시아 음악가가 특별히 자신들이 있는 곳을 방문해서 공연을 하니 기뻤다. 황실을 위한 특별한 연주회는 ‘좋았던 옛날’을 떠올리게 했다.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짐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해주에 이주할 생각은 없는 겁니까.”
“제안은 감사드리오나, 전 이미 미국에서 몇 년 치 공연일정과 음반계약이 잡혀 있습니다. 극동 음악계는 프로코피예프 씨가 잘 이끌어 줄 겁니다.”
이선은 재정적인 면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했지만, 이미 미국에서 성공한 라흐마니노프는 연해주에 잔류할 생각이 없었다. 이선은 못내 아쉬웠지만, 본인의 판단을 존중했다.
“그래도 제 조국은 여전히 러시아입니다. 극동지역 방문은 처음입니다만, 블라디보스토크는 어딘지 페테르부르크를 떠올리게 합니다. 종종 찾아오겠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태평양만 건너면 되니까요.”
“그렇지요.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는 길에 꼭 서울도 들려 주시길. 짐은 언제든 고대하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폐하께서 러시아 예술가들을 위해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후원도 아끼지 않으시니, 저도 그들의 일원으로서 감사드립니다.”
“짐이 어릴 적부터 서양 예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선은 웃으면서 자신의 문화적 포부를 드러냈다.
“짐은 동서양이 융화된 제국을 원합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도 살아남기 위해 급진적인 서구화를 추진했지만, 본질적으로 동양 국가입니다. 구습은 폐기해야겠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은 계승해야겠지요. 그 토대 위에서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동안 국가적 필요성에 의해 엘리트 중심으로 제도, 경제, 군대, 기술을 흡수하는 데 집중해 왔다면, 이제는 우리 국민이 서양 문화를 향유하길 원합니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 망명자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지요.”
본격적인 서양 문화 도입은 일종의 자신감 표현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먹고 살기’ 위해, ‘제국주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즉 ‘부국강병’을 위해, ‘열강의 끄트머리에 서기’ 위해, 조선-한국은 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급진적인 서구화 정책으로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수입해 왔지만, 이는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선과 개화당 지도부는 최고 엘리트로서 자신의 취향을 누리며 살았지만, 문화를 육성하고 향유할 심리적 여유는 없었다.
근대화 40년, 이제 대한제국은 부국강병을 달성했다. 열강의 반열에 섰다. 정치경제적 안정과 국가적 자부심은 문화를 둘러볼 여유를 생기게 만들었다.
20세기 초는 아직 서양이 압도적인 우위를 누리도 시대였으므로, 대중문화든 상층문화든 서양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한국은 근대 서양의 문화 발전 궤도를 따라갔다.
본격적으로 고고학 탐사에 나서고, 유물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건설하고, 대중에게 공개했다.
전통 문화를 재발견하고, 육성했다.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고, 애호했다. 대중이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한국만의 근대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핵심은 ‘융화(融和)’였다. 고전과 근대의 융화, 전통과 혁신의 융화, 농촌과 도시의 융화, 동양과 서양의 융화, 국가와 세계의 융화.
대한제국은 단일민족을 지향하는 국민국가에서, 점차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용하는 제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를 상징하는 게, 1920년대 무렵 부쩍 늘어난 재한 외국인의 존재였고, 로마노프 대공들로 상징되는 망명자들이었다.
‘연해주가 우리의 보호 하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제 발표할 때가 됐구나.’
융화의 극치는, 이선이 구상하는 이진과 타티야나의 국혼으로 완성될 터였다.
* * *
정동 아관(러시아 대사관).
니콜라이 2세의 다섯 자녀, 로마노프 대공들의 안식처가 된 아관을 중심으로 백계 러시아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연해주에 아무르 정권이 성립되면서, 부족한 인구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의 귀환을 요청했고, 대부분은 연해주로 향했다.
하지만 여전히 안전을 우려하는 이들은 한국에 잔류했다. 한국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은 학자, 기술자, 예술가 등은 잔류를 택했다.
로마노프 왕가의 망명자들도 한국에 남았다. 특히 5남매는 한국에서 보내 줄 생각도 없었고, 그들도 당분간 한국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여긴 우리가 살던 곳에서 너무 멀지 않느냐? 얘들아, 나를 따라 덴마크로 갈 생각은 없느냐? 덴마크 왕실도 너희들의 망명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단다.”
현 로마노프 왕가의 최고 어른, 알렉산드르 3세의 황후이자 니콜라이 2세의 모후인 황태후 마리야 표도로브나(덴마크의 다그마르)가 한국을 방문했다.
혁명 이후, 자식 손자들과 떨어지게 된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크림반도에 머무르다가 영국 군함을 타고 친정인 덴마크로 망명했다.
도저히 아들 니콜라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황태후는, 손자손녀들이 한국의 보호를 받으며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황태후는 한국 정부에 손자손녀들의 덴마크행을 요청했으나 정중한 거절을 당했고, 결국 자신이 직접 늙은 몸을 이끌고 한국까지 오게 되었다.
“한국 황제 폐하는 저희의 은인이에요. 그분의 뜻을 따라 한국에 있어야 합니다.”
“내 어찌 모르겠니. 그분은 니콜라이의 은인이기도 하고, 또 너희들의 은인이지. 실로 우리 왕가의 수호자시다. 하지만 너희는 러시아인이고 유럽인이기도 하다. 아시아에서 적응하면서 살 수 있겠느냐? 너희가 부활절에, 이교도처럼 엎드려 울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다. 여기 문화가 그렇다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너흰 유럽인이자 기독교도란 말이다. 이러다 너희가 정체성을 잃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는구나.”
늙은 황태후는 문화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아무리 한국이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지만, 근본은 동양 유교 국가였다. 같은 유럽 문화권인 덴마크에 비교한다면 심리적으로 머나먼 나라였다.
“할머니, 연해주가 정통 러시아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어요. 연해주 군부의 핵심 인물인 디테히리스 장군은 제정복고파고요. 브랑겔 장군과 콜차크 제독도 제정복고에 부정적이지 않아요. 그러니 연해주에서 가까운 한국에 있어야 해요. 아무르 정부는 한국의 지원이 있어야 버틸 수 있어요.”
올가는 전러시아 임시정부에 ‘시민’으로서 충성을 맹세한 바 있었으나, 정세의 전환을 보고 제정복고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디테히리스 장군은 제정복고가 가능하다는 암시를 주었다. 아무르 임시정부와 의회의 주류는 공화국을 지향했지만, 군부는 제정을 더 선호했다. 물론 과거와 달리, 차르는 국가의 상징으로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을 터였다.
“그럼 알렉세이를 황위에 추대한단 말이냐?”
“합법적인 계승자는 알료샤죠. 다만 알료샤의 건강이 좋지 못하니, 그런 무거운 의무는 맡기고 싶지 않아요.”
“그럼 누굴 내세운단 말이냐?”
“계승서열로는 키릴 대공이죠. 키릴 당숙도 얼마 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셨어요.”
니콜라이 2세가 암살당하고, 퇴위한 마지막 차르 미하일 2세도 소비에트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소식이 끊긴 상황이었다. 생사불명이었지만, 내전이 격화되었을 때 사망했을 가능성이 컸다.
계승서열상 가장 높은 건 전 황태자 알렉세이, 그리고 니콜라이 2세와 미하일 2세의 사촌인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이었다.
“키릴은 안 된다! 혁명이 터졌을 때, 키릴이 붉은 리본을 달고 부화뇌동했던 걸 잊었느냐? 제가 무슨 프랑스 혁명기의 오를레앙 공작(필리프 평등공)인 것마냥 굴었지. 만약 복고가 된다면 무조건 알렉세이여야지, 무슨 키릴이란 말이냐?”
자유주의적 입헌군주제를 수용할 의사가 있는 키릴은 진보적인 인사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내심 제정복고의 야심을 품고 망명지인 독일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키릴은 해군 장교 출신으로 콜차크와 친분이 있었고, 이선도 진작부터 키릴을 좋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황실의 보수적 인사들, 특히 니콜라이 2세와 가까운 사람들은 키릴을 싫어했다. 이들의 시각에서 볼 때 ‘붉은 리본을 달고 혁명가들에게 아부한’ 키릴은 배신자였다. 키릴이 차르가 되고 싶어서 혁명가들에게 굴복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알료샤는 아프잖아요. 군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거예요.”
“올가 네가 있지 않느냐? 오직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의 후손만이 차르가 될 자격이 있다. 네가 차르의 맏이 아니더냐. 알료샤가 차르가 되고 네가 대리하면 되지 않겠니.”
“황위계승법에 여대공은 그럴 권리가 없다는 걸 잘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거야 바꾸면 되지. 예카테리나 대제도 여성의 몸으로 제국을 다스리셨다. 하물며 그 입헌군주의 역할도 못 하겠느냐? 내가 도와주마.”
황태후가 맏손녀를 지목하자, 올가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카테리나 2세 이후로 계승법 변경으로 여성의 왕위계승은 허용되지 않았다.
“할머니, 아직 너무 일러요. 복고가 결정된 것도 아니고요.”
“일단 미리 황실의 서열정리부터 해 두자는 거다. 지금도 당주는 필요하니까. 키릴이 당주의 자리를 노린다니, 어림도 없다!”
“이제 아시겠죠? 그래서 더욱 저희가 한국에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 그렇구나.”
사실 다른 자매들은 물론이요, 올가도 황위에 욕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미 망한 제국이었고, 복고한다 한들 야심가의 허수아비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올가는 알렉세이가 황실의 정통성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가는 차르의 맏이로서 강한 의무감을 지녔고, 점차 허울뿐이더라도 제정복고를 이루는 게 몰락한 황실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그래서 타냐와 한국 황태자 전하의 혼인이 이뤄질 거예요.”
“세상에, 그럴 수가 있나. 어찌 러시아의 공주가 동양 이교도 왕실에 시집을 갈 수 있단 말이냐? 아무리 우리가 망했다지만,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 같구나.”
이진과 타티야나의 국혼 계획에 대해 들은 마리야 황태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할머니, 시대가 변했어요. 우린 어떤 처지라도 받아들여야 해요. 한국 황제 폐하가 아니었으면 우린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고,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겠죠.”
“그거야 그렇다만, 결혼은 다른 문제 아니냐. 타냐 너는 이 결혼에 동의한단 말이냐?”
“예, 할머니. 제가 동의했습니다.”
타티야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후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성격의 둘째 손녀가 이번에도 순종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반대는 한국 내에서 더 클 거예요. 우린 왕가 간의 결합이 흔한 일이지만, 한국에선 아예 전례가 없는 일이니까요.”
“난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모두가 반대할 그런 결혼을 왜 한단 말이냐? 한국 황제가 우리의 은인이라서?”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한국은 동양의 떠오르는 강국이고, 우리를 보호해 주고 정통 러시아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해요. 그런 나라의 황태자께서 타냐를 좋아하는데, 이 결혼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한국이 연해주를 보호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황실의 처가를 누가 무시할 수 있겠어요. 아, 물론 타냐가 동의한 일이에요. 저는 절대 사랑하는 동생에게 강요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올가는 국혼이 제국과 가문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동생만 내세울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5촌 드미트리 대공과 결혼하여 승계를 대비할 생각이었다.
언니의 말에, 타티야나는 모처럼 자기 의견을 뚜렷하게 냈다.
“저도 동의해요. 이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극동에, 한국에 융화하는 길이에요. 이를 위해선 전 한국인이 될 수 있어요.”
타티야나는 이미 결심했다. 대한제국의 황태자비, 미래의 황후로 한국에 융화되어 살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