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96
3부 111화 마지막 임무
광무 25년 가을, 이선은 뜻밖의 칙령을 내렸다.
「전조(前朝, 고려)의 경효대왕(공민왕)은 무너져 가는 나라를 되살리려고 노력한 군주였다. 경효왕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 태조께서 어찌 천명을 계승하여 나라를 창업하실 수 있었겠는가? 실로 경효왕은 고려의 마지막 명군이었다.
또한 노국대장공주는 그 출신이 원나라였으나, 지아비와 백성을 사랑함에 있어 고려의 그 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지극하였으며, 원나라의 침략과 반란으로부터 왕을 보호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한 국모의 표본이다.
경효왕의 훙서 547년을 맞이하여, 새삼 경탄하는 마음이 생긴다. 개성의 현릉(玄陵, 공민왕릉)과 정릉(正陵, 노국공주)에 크게 제사를 지내고 높이 받들도록 하라.」
조선왕조는 고려에게서 선위를 받아 개창한 왕조로, 왕조 초기만 해도 고려의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하였으나, 공민왕만은 유독 높이 예우를 받았다.
조선이 편찬한 공식사서인 고려사에서 공민왕의 평은 호평보다 혹평이 더 많지만, 조선의 종묘에 유일하게 사당이 세워져 제사를 올린 이가 공민왕이었고, 도처에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많이 세워졌다.
태조 이성계를 발탁해 출셋길을 열어 주었고, 이성계 자신도 공민왕에게는 충성했던 만큼, 조선에서는 공민왕을 고려의 사실상 마지막 임금으로 경의를 표했다.
공민왕을 기린다는 이선의 명은 새삼스러워 보였으나, 이상한 건 아니었다.
「비운의 군주 공민왕과 원나라에서 온 노국대장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아, 기대하시라!」
이미 대중들 사이에서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에 대한 로맨스가 근대소설과 연극으로 각색되어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즉, ‘사극’의 시초였다.
이 당시 신기술인 무성영화와 변사의 설명이 결합된 영화는 새로운 장르로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 낸 ‘사극’ 장르가 인기였다.
“새로 나온 공민왕과 노국공주 봤어?”
“봤지, 난 두 번이나 봤어.”
“겨우 두 번? 난 네 번 봤는데.”
“자랑이다. 돈 벌어서 다 영화표 값으로 쓸 거냐?”
“대한의 문화인이라면 영화를 봐야지.”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려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전조에서 후삼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한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로 점점 올라갔고, 1918년 고려 왕조 건국 1천 년을 맞이해 개성에서는 대대적인 기념식이 열렸다.
전조 고려에 대한 금기가 모두 풀리면서, 고려는 대중에게 가깝게 접근했다.
아무리 역사적 평가가 자유로워졌다고 해도, 여전히 대한제국이 조선의 연장선인 이상 선대왕에 대해서는 학자나 창작자들에게 다루기가 까다로웠고, 이미 망했지만 비교적 가까운 시대인 고려만큼 다루기 좋은 시대가 없었다.
특히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유명한 로맨스이니만큼, 대중에게 친숙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했다.
공민왕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개혁을 위해 분투하다 암살당한 비운의 군주, 즉 운만 좋았더라면 광무제 이선처럼 국가를 중흥할 수 있었던 유능한 군주로 미화되었다.
공민왕 역을 맡은 청년 배우 나운규(羅雲奎)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가는 곳마다 환호성이 쏟아졌다. 영화란 막 등장한 개념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영화와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했고, 나운규는 마치 공민왕의 현신처럼 떠받들어졌다.
“우린 고려에 대해서 너무나 몰랐습니다. 정말 위대합니다, 선생!”
“와아아아!”
노국공주는 외국 출신으로서 남편과 고려를 위해 헌신한, 사랑과 자애로움이 넘치는 현명한 왕비로 그려졌다.
특이하게도 광무 25년도판 영화는 러시아와 부랴트몽골의 혼혈인 백계 러시아 여인이 캐스팅되어 노국공주 역할을 맡았다. 무성영화라서 언어가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몽골인 같으면서도 서양인 같은 이국적인 용모의 여주인공을 향해서도 환호가 쏟아졌다.
“꼭 노국공주가 살아 돌아온 거 같네. 노국공주도 저 배우처럼 미인이었겠지?”
“그러니 공민왕이 그토록 아낀 게 아니겠나?”
“노국공주처럼 외국인으로서 고려를 사랑한 사람도 없을 거야.”
“결혼하면 외국인이 아닌 거지. 이미 고려 사람인 거지.”
“아, 그렇군. 어디서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에 뼈를 묻느냐가 중요한 거지.”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근래 노국공주의 미화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은근한 영향이 있었다.
몽골 출신으로 고려를 위해 헌신한 노국공주는 다민족제국으로 변모해 가는 대한제국의 모범적 여성상으로서 손색이 없었고, 현대 대한제국에서는 영친왕비 이서아의 선례로 여겨졌다.
“그래, 영친왕비 전하를 보라고. 비록 노서아 출신이지만 한국 사람보다 더 충실하시지 않으신가.”
“암, 한국 사람이시지. 단지 피부가 하얗고 눈이 파랗다는 게 다른 거지.”
“그리고 미인이시고 말이야.”
“후, 영친왕 전하가 부럽네 그려.”
“예끼, 이 사람. 말조심하라고.”
“아니, 부럽다고 말도 못하나.”
“하긴 부럽기는 해. 사진을 보니 왜 왕실의 전례를 깨고 서양 여인과 결혼했는지 이유를 알겠더라니까.”
“서양 여인은 동양의 예법을 무시할 줄 알았는데, 이토록 충실히 잘 따르실 줄은.”
처음에 느꼈던 거부감과 달리, 점차 한국인들은 영친왕비 이서아를 칭송하며 높이 평가했다.
제국주의 시대, 한국인의 정서에는 서양에 대한 동경과 함께 반감이 교차하고 있었는데, 영친왕비는 서양적인 외모와 동양적인 성품을 지닌 훌륭한 여인으로 표상되었다.
기실 그건 타고난 성품이라기보다는 한국에 적응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대중의 눈에 비치는 건 훌륭한 여인상이었다.
“노서아 공주님들도 그렇게 성품이 훌륭하다고 하지 않나.”
“아아, 보통 효녀가 아니라더군. 늘 선황제의 초상화를 품고 애도한다던데.”
“7월에 선황제가 붕어하신 지 2주 년이 되어 삼년상이 끝났는데, 여전히 상복을 입고 애도한다더군.”
“아, 서양인이라고 효도를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게 우리의 편견이었네.”
“노국공주를 보라고. 몽골 출신이지만 누구보다 훌륭한 지어미가 아니었는가.”
“음, 그렇지. 노서아도 노국이니 노국공주려나.”
“허, 그거 말 되는구만.”
로마노프 공주들이 한국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노국공주(魯國公主)와 노서아(露西亞) 공주의 발음 유사성을 따 노국공주라고 지칭하는 이들도 있었다.
‘흠, 대중문화가 프로파간다에 가장 유용하다니까. 20세기는 역시 대중문화의 시대지.’
공민왕-노국공주 이야기는 이진과 타티야나의 국혼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노국공주 배역에 러시아-부랴트 혼혈을 쓴 이유도, 표면적으로는 몽골인 배우를 쓴다는 고증이라지만 자연스럽게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이선은 막 태동한 20세기의 대중문화, 특히 영화의 저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였다.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도 영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이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건 소비에트 러시아였다. 문맹자가 절대다수인 러시아의 특수성을 감안해, 소비에트는 사회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해 열차를 타고 다니며 전파했다. 프로파간다 영화란 측면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가장 선진적이었다.
소비에트와 지향점은 명백히 다르긴 하지만, 이선도 영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영화는 대한제국의 새로운 국책산업이 될 예정이었다.
‘음, 선대왕에 대한 묵시적 금기도 풀게 해야겠어. 창작이 자기검열 받지 않고 자유로워야 좋은 작품이 나오지.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시기의 사극을 만들어야지.’
이미 대한제국과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심은 높았으니 굳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프로파간다 영화를 제작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선은 왕조 초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 제작을 후원했다.
‘태종과 세종의 선례를 따라 선위한다. 왕조를 안정시키고 완벽한 후계자를 만들기 위한 인간 태종 이방원의 고뇌. 음, 이거 좋다.’
이선은 슬슬 선위를 고려에 두고 있었다. 원래 그의 계획이 1919년경에 선위하는 것이었으니, 예정보다 뒤로 미뤄진 것이었다.
이선은 태종과 세종의 전례를 따라 선위할 생각이었고, 근래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서와 소설들이 잇달아 나오는 건 왕조 초기의 전성시대를 미화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 이선의 속내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었다.
‘드디어 만주를 넘어 연해주까지 대한의 세력권으로 만들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를 막는 두 개의 장벽을 세운 거지. 이제 좀 안심할 수 있게 됐어.’
극동 공화국을 소비에트와 대한제국-청국 사이의 완충국으로 삼으려 했던 이선의 계획은, 극동이 모스크바의 괴뢰라는 가능성이 커 보이자 바로 변경되었다. 때마침 터진 니콜라옙스크 사건을 명분 삼아 연해주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고, 미국과 일본의 묵인과 지원까지 받았다.
이로 인해 소비에트 러시아와는 불구대천의 적이 된 셈이었으나, 애초에 세계혁명을 꿈꾸는 공산주의 국가와 동양의 패권을 원하는 제국이 영원한 평화공존을 누릴 수 없었다.
청국과 아무르라는 두 개의 위성국, 만주와 연해주라는 두 개의 장벽을 건설한 이선은 만족했다.
‘이제 국내문제는 소조, 정부, 의회에 대부분 맡겨도 되겠어. 나는 당분간 군사와 외교에만 집중한다.’
대리청정 체제에서도 이선은 내정의 대부분을 소조에 맡기고, 자신은 군사와 외교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선위를 하려는 이유는, 자신의 생전에 입헌군주제를 확실히 정착하려는 목적이 컸다. 이선의 권위가 너무나도 절대적이라서, 그가 황제로 존재하는 이상 입헌군주제는 이룰 수가 없었다.
이선은 태종의 선례를 따라 상황으로서 병권과 외교를 맡는 ‘과도기’를 거쳐, 정세가 만족스럽게 안정되면 이조차도 새 황제와 정부에게 넘기고 자신은 은퇴하여 배후의 조언가로 남을 생각이었다.
‘모처럼 평화를 되찾았으니, 이제 때가 됐다. 국혼과 선위를 모두 추진한다.’
형식상 만 2년의 국상 기간에는 국혼과도 같은 경사는 피해야 했다. 태황제의 유언이 있었으므로 국혼을 시행해도 상관없겠지만, 최소 1주기는 지난 후에 하는 게 모양새가 좋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시동을 걸어야 했다.
* * *
11월의 어느 날, 이선은 주청 고등판무관 김옥균을 평양 흥경궁으로 불러들였다.
“오랜만이오, 고균. 건강은 좀 어떻소?”
“덕분에 평안합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옥체 강녕하신지요?”
김옥균은 올 초에 태황제의 국상에만 참여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나야 늘 똑같지. 자, 한잔합시다. 아, 국상 기간에 술 마신다고 탓하지 마시오.”
“저도 삼년상 기간에 술 마시고 다 했습니다.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하하.”
“고균이야 원래 유교의 형식을 싫어하는 풍운아였으니까.”
“폐하께서도 그러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동지가 된 거지.”
어느덧 만으로도 70세가 된 김옥균은 노쇠함이 눈에 보였다. 예전의 청년 혁명가 김옥균의 모습은,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만 남아 있었다.
“만주가 안정되어 다행이오. 경과 우사(김규식)의 공이 컸소.”
“신은 그저 폐하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고등판무관 김옥균은 전임자 이완용과 달리, 온건하고 유화적인 자세로 만주를 통제했다.
표면적인 주권자인 청 조정을 앞세워 간접지배하고, 각 부처의 한국인 ‘고문관’들을 통해 실질적인 통제력을 높였다.
범중화주의 조직은 이완용 암살을 계기로 철저히 뿌리 뽑혔고, 만주는 산발적인 테러도 없이 안정되었다.
만주인들의 반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으나, 청국을 적으로 여기는 중화민국이나 소비에트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하는 상황에 비하면 한국은 차악이었기에 불만을 삼켰다.
“만주의 범중화주의자들은 큰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다만 근래 문제는 사회주의 세력입니다. 사회주의는 범중화주의보다 더 영향력이 큽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아시아에선 일시적으로 후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코민테른은 중국을 넘어 만주와 몽골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만주나 몽골에는 유의미한 노동계급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뭐, 아시아에서는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전략이 더 효과적이니까.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인 중국이 공산주의에 혹할 만도 하지. 마찬가지로 만주와 몽골도 대한의 반식민지 처지니까. 그러니 더욱 만주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하는 거요. 가난과 불평등, 억압 뒤에 사회주의가 성장하는 거니까.”
“예, 만주의 관리들에게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선은 단기간에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성장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일부 지식인의 전위정당에 머물러 있는 단계였다.
하지만 불평등과 불만이 심화된다면, 얼마든지 폭발적으로 성장할 여지가 있었다. 사전에 예방해야 했다.
“만주와 연해주는 대한의 완충지대이자 이익선으로서 중요한 두 축이오. 나는 이를 결합으로 확실히 묶기를 원하오.”
“국혼을 이름이시옵니까? 하오나 더 이상 청국 황실과의 국혼은…….”
“태자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지만, 짐에게는 자녀가 더 있지. 국혼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소.”
이선은 한국 황실과 청국 황실의 인적 결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선통제 부의나 그 동생 부걸(아이신기오로 푸제)을 사윗감으로 생각했다.
“아무튼 오늘 짐이 원훈인 경과 특별히 의논하고 싶은 바가 있어 불렀소.”
“예, 하명하시옵소서.”
이선의 차분한 설명을 듣던 김옥균의 표정이 점차 복잡해졌다.
“폐하, 감히 아뢰옵건데, 이건 차마 신하로서 받들 수가 없는…….”
“나도 아오. 그러기에 고균에게 부탁하는 거요. 경은 나의 원훈이자 오랜 동지니까.”
이선은 자신의 40년 동지이자 고굉인 김옥균에게, 두 가지 중대한 임무를 맡길 예정이었다.
어쩌면 광무 연간에 이선이 내리는 마지막 임무, 늙은 김옥균이 마지막으로 맡을 임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균만은 나를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오. 나를 도와주겠소?”
김옥균은 정색하며 고개를 숙였다.
“임오년에 처음 충성을 맹세한 이래, 폐하께서는 언제나 제 주군이셨습니다. 신 옥균, 삼가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맙소. 역시 경은 내 40년 동지요.”
이선은 술이 가득 찬 잔을 들어 김옥균의 잔과 건배했다. 그리고 새삼 추억에 잠겼다.
‘어느덧 임오년 이후 40년이로구나. 실로 긴 세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