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98
3부 113화 대국민 연설
광무 26년 4월 11일, 계천기원절.
1897년 대한제국 선포를 기념하는 계천기원절은 올해로 25주년을 맞이했다.
작년에는 태황제의 국상을 치른 직후라 조용히 넘어갔지만, 올해는 25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행사가 개최되었다.
아직도 국상 기간이라 열병식과 같은 대대적인 행사는 없었고,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아침, 이선은 대례복을 입고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오직 황제만이 행할 수 있는 의례였다.
의례를 마친 이선은 경운궁 중화전에서 종친과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고, 그날 오후 석조전에서 특별한 행사를 준비했다.
3월 1일, 아시아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인 황성 방송국이 개국했다.
이선은 라디오 기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라디오의 상업화가 이루어지자 신속히 방송국 설립을 명했다.
세계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 1906년이고, 미국에서 최초의 상업적 정규 방송국 개국이 1920년 11월이니, 그 차이는 채 2년도 되지 않았다. 일본도 아직 시범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호출 부호는 KOAB, 호출 명칭은 황성 방송국, 주파수 690㎑, 출력 1㎾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황성 방송국에서 인사드립니다.”
초기 방송은 국정 뉴스, 교양 정보, 황실 아악(雅樂)이나 판소리와 같은 전통 음악이 주가 되었다.
“대한늬우스에서 알려드립니다. 금일, 황제 폐하께옵서는 경운궁에서 주한 미국대사를 친견하시고, 한미수교 40주년을 맞이하여 양국의 우호가 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기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올해 있을 워싱턴 회의에서 세계평화의 신기원이 열리길 기대한다고 축원하셨습니다. …… 태자 전하께서는 근위사단 사령부를 방문하시어 불철주야 국가안보를 위해 노력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셨습니다. …… 총리대신 이상설 각하는 민의원에서 광무 26년도 추가경정 예산을 조속히 통과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의회는…….”
새로운 문물의 상징인 라디오는 상류층 사회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하지만 1922년 3월 시점에서 전국에 보급된 라디오는 약 2,500여 대에 지나지 않았다. 인구 1만 명당 하나 정도였다. 그만큼 라디오가 아직 희귀했고, 상류층의 유희에 가까웠다.
그런데 라디오 보급률을 급격히 올릴 특별한 계기가 생겼다.
바로 황제의 옥음(玉音) 방송이었다.
“황공하옵게도 황제 폐하께옵서 계천기원절을 맞이하여 친히 전 국민에 대하여 조서를 발표하시게 되었습니다.”
일반 국민이 군주의 ‘옥음’을 들을 기회는 전혀 없었다. 대한제국 시대에 이르러 전국 순행과 어진의 전국적 보급으로 군주의 외모를 모두 알게 되었지만, 목소리만큼은 국경일의 대중연설이 아니고서야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조차도 앞 열에서만 들을 수 있을 뿐,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황제가 계천기원절을 맞이하여 직접 라디오에서 옥음을 들려준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부랴부랴 라디오를 장만하는 이도 적지 않았고, 라디오에 있는 집이 개방하여 이웃들을 초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각지의 관청에서도 특별히 공간을 개방하여 확성기를 설치하고, 선착순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라디오를 들을 수 있게 하였다. 그 경쟁이 보통 치열한 게 아니었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기립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가 제창 후, 삼가 옥음(玉音, 군주의 목소리)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서북으로는 요동에서 동남으로는 부산에 이르기까지, 라디오를 듣고 있던 전국의 국민은 일제히 기립했다. 개중에는 관청의 어진을 향해 절하는 이도 있었다.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성수무강하사…….”
요동 헌병대 본부에서 방송을 청취하고 있던 박대붕 특무정교는 국가가 흘러나오자, 기립한 상태에서 어진을 향해 거수경례했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박대붕은 마치 황제를 직접 모습을 알현하듯, 정복을 입고 가슴에 훈장까지 달고 있었다. 바로 황제가 친히 달아 준 그 훈장이었다.
“아, 지금 말하면 되나?”
“예, 폐하.”
마이크를 앞에 둔 이선은 방송국 관계자의 사인이 떨어지자 대국민 담화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라디오로 국민과 소통한 영국의 조지 5세가 처음 대국민 방송을 한 게 1924년이니, 이선은 세계 최초로 대국민 방송을 한 군주로 기록될 터였다.
「친애하는 대한 국민 여러분! 충성스러운 국군 장병 여러분! 대한의 황제이자 대원수로서, 짐은 그대들에게 고하노라.」
“정말로 황제 폐하의 옥음이다!”
“와아아!”
“쉿, 조용히!”
라디오를 통해 생전 처음 듣는 황제의 옥음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환호했다. 황제의 연설을 듣기 위해 조용히 집중하라는 경고가 쏟아졌다.
「대한이 제국을 선포한 지, 짐이 황위에 오른 지 어언 25년이 되었다. 석조전에 올라 황성을 바라보며, 문득 40년 전 임오년의 풍경을 떠올리니, 황성의 놀라운 변화에 새삼 경탄할 따름이다.」
“이거 참 신통방통하구나. 기기에서 소리가 나오다니. 도대체 서양 기술의 기묘함이란. 만백성이 동시에 옥음을 듣다니, 하여튼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아마도 전국의 청취자 중 최연장자일, 올해로 88세의 원로대신 김윤식은 세상의 변화에 새삼 감탄했다.
전보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라웠던가. 단 몇 시간 만에 나라 반대편에서 소식이 전해졌다.
전화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라웠던가. 실시간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전보, 전화에 이어 라디오까지, 조선-한국의 진보는 지난 40년 사이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성상의 은덕이 아니겠는가!”
김윤식은 새삼 황제의 덕을 칭송했다. 나이 90이 가까워지며 가끔씩 기억이 오락가락할 때가 있지만, 국가와 관련된 일만큼은 똑똑히 기억했다.
늙은 대신은 과거의 조선을 떠올렸다. 1922년의 대한제국은 이선이 귀국해서 막 개혁에 나선 1882년의 조선과 완전히 다른 나라였다.
「40년 전의 조선은 세상을 향해 막 문을 연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였다. 세계라는 거대한 바다를 떠다니는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을 집어삼킬 폭풍우 앞에서, 국가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로부터 40년 동안, 대한은 변화했다. 부국강병, 식산흥업, 문명개화, 국토개발, 기술발전, 조국방위, 자주독립, 제국선포, 헌법반포, 만민평등, 북벌완수, 대전승전, 열강입국, 보통선거, 군민공치, 평화번영. 그동안의 변화를 단어로 줄이자니 너무나 간략하지만,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던가!」
황제의 담화를 듣고 있던 김옥균의 눈가가 문득 촉촉해졌다.
40년 전 처음 완화군의 포부를 들었을 때, 독립전쟁 승전 직후 장구한 ‘40년의 시대구상’을 들었을 때, 그 장대한 이상에 감격하면서도, 정말로 이룩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루어 냈다. 함께 조력했던 그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저, 이와 같은 변화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혹자는 말한다. 황제의 지도력, 황제를 보좌한 원훈과 문무백관의 유능함 덕이라고. 부정하지 않겠다. 짐과 짐의 신하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하나, 그 업적을 어찌 소수의 사람이 독점할 수 있겠는가?
김옥균은 문득 박영효의 말을 떠올렸다. 지난 세월의 성과는 황제와 개화당이 함께 이뤄 낸 일이라고. 제국의 2인자, 원훈 박영효에게 백성은 그저 지시하면 따르는 존재였다.
「대한의 변화는, 바로 그대들 국민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대들이 땀을 흘리며 이 땅을 풍족히 하며 새로운 문명을 건설했고, 그대들이 피를 흘리며 이 땅의 독립을 지켜 제국을 일으켜 세웠다. 짐은 명령했지만, 시행한 건 그대들 국민이다!
제국의 천명을 짐이 계승하였다고는 하나, 이는 하늘의 뜻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화(人和), 사람의 단결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제는 공훈을 국민에게 돌렸다. 김옥균은 새삼 감탄했다.
동양식 전제군주제에 익숙한 이들, 혹은 서양식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이들도, 황제가 종종 국민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군주가 백성을 귀히 여기는 건 아름다운 일이나, 통치자의 업적을 굳이 백성과 나눌 이유가 없었다. 청국 황제, 아니 ‘근대화된 국가’의 일본 천황이든 그렇게 하던가?
‘황제의 공로라고 자부해도 될 터인데, 국민의 공으로 돌리다니. 민심을 얻기 위해서? 아니, 이미 국민은 열렬히 황제를 받드는데 민심을 얻기 위해 그럴 필요가 어딨겠는가. 근래 국혼 문제로 일부의 반발이 있다고 한들, 여론의 대세하고는 상관없지.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건, 진실로 성심(聖心)이 그리 여기시기 때문이다.’
40년 동지인 김옥균은 이선의 진심을 알았다.
김옥균도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나, 개화사상과 불교의 평등사상에 눈을 뜨게 되면서, 신분제에 반감을 갖고 만민평등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통치만큼은 현명하고 유능한 엘리트가 통치해야 한다고 믿는 일종의 현능주의(賢能主意, meritocracy)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선은 달랐다. 아무리 서자라 해도 국왕의 아들로 태어난 금지옥엽 왕자, 신분의 정점에 있는 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등의식을 갖고 있었다. 천부인권, 국민의 권리에 대해 확신했다. 때가 되면 국민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만 국민의 의식이 깨일 때까지,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로 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 이선과 엘리트들이 인민주권을 대행하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대한의 놀라운 변화를 가리켜 코리안 미러클, 한국의 기적이란 표현을 쓴다. 가장 가난하고 나약해 보였던 나라가 불과 40년 만에 불가능해 보였던 변화를 이끌어 냈으니, 기적이라 칭할 법도 하다.
하지만 기적은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이 기적은 3천만 대한국민의 단결과 노력이 이뤄 낸 기적이다.
오늘만큼은 황제 만세가 아닌 대한국민 만세를 외쳐 주길 바란다. 짐은 기적을 이뤄 낸 그대들 국민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대한국민 만세!」
“대한국민 만세!”
라디오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다. 그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생전 처음 황제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황제가 국민에게 찬사를 보내며 경의를 표하니, ‘나라님의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성은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군주는 백성에게 덕을 베푸는 소박한 세계관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도 백성에게 공을 돌리는 광무제 이선은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짐은 위로는 열성조를 받들고, 아래로는 민의를 살펴,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려 왔다. 근래 새삼 선대왕의 사적을 살피니, 열성조를 숭앙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크도다, 왕화의 덕이여!”
“위대하도다, 임금됨이여! 높고 크도다, 이룩한 사업이여! 빛나도다, 문화의 아름다움이여!”
황제에 비판적이던 유림조차도, 논어 태백편을 인용해 찬사를 보냈다.
공자가 요임금에게 보내는 찬사로, 자신을 공자에 빗대어 은근히 높이는 태도도 있지만, 황제의 업적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뭐 어쩌니저쩌니해도, 성상께선 만청을 격퇴해 북벌을 완수하여 존주대의를 이룩했고, 칭제건원하시어 대한이 중화의 적통을 계승하였음을 만천하에 알리셨지. 서양 여인을 곤전(坤殿)에 들이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 공주가 효성이 깊고 현숙하니 실로 왕화로 이적(夷狄)을 감화시켰으며, 절사(絶嗣)한 왕조의 사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실로 천자(天子)의 도리이자 춘추대의일세.”
이선의 업적과 논리는 개신유림이 동조하게 했다. 이들은 끝내 옛 도리만을 고집하는 보수유림을 편벽하다고 비판하며, 황제의 뜻을 따를 것을 천명했다.
「올해는 태종대왕께서 붕어하신 지 꼭 500주기가 되는 해이다. 이에 문득 경모하는 마음이 들어, 태종실록을 다시 살펴보았다. 태종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재위한 지 지금 이미 18년이다. …… 이에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려고 한다. 아비가 아들에게 전위하는 것은 천하고금의 떳떳한 일이요, 신하들이 의논하여 간쟁(諫諍)할 수가 없는 일이다.」
갑자기 황제가 실록을 낭독하자 관리들이 술렁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가?”
“설마 또 선위를?”
「세종대왕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시니, 짐도 언제나 대왕의 사적을 따르고자 노력한다. 한데 태종대왕의 심모원려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세종대왕의 성세(盛世)가 있었겠는가?
짐은 태종대왕의 선례를 따라, 때가 되면 생전에 태자에게 선위하고자 한다. 어질고 현명한 후계자에게 대위를 맡기고, 물러나 한가로이 유람하며 오랜 지병을 달래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소조는 짐을 대리하여 청정하고 있으니, 지난 시간을 살펴보건대, 황제의 책무를 다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 아무쪼록 그대들 국민은 거국적으로 단결하여 제국을 지켜 나가고, 미래의 건설에 총력을 다하기를 바란다.
광무 26년 4월 11일, 대한국 황제.」
마침내 옥음방송이 끝나자, 석조전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옆방에 대기하고 있던 총리 이상설이 부리나케 이선을 찾았다.
“폐하, 선위는 아니되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음? 아니, 짐이 언제 당장 선위한다고 하였소? 생전에 태자에게 선위한다고 하였을 뿐이오.”
“아아, 그, 그렇습니까.”
이상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조아리자, 이선은 씩 웃었다.
“마음과 같아선 당장이라도 선위하고 싶지만, 국혼을 앞둔 태자에게 부담을 또 앉혀 주기는 싫구려. 지금 중요한 건 국혼이니까 말이오. 태자가 계속 청정하며 국정을 배워 나가고, 서른이 되면 선위할 생각이오. 그때면 짐도 환갑이 눈앞이니, 물러날 때가 되겠지.”
이선은 선위의 가능성을 제기하여, 혹여 국혼에 대하여 더 이상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는 길을 선제적으로 차단했다.
‘국혼 반대라고? 그래, 그럼 내가 선위하지. 아들의 뜻도 이룰 수 없는 아비가 황제 노릇 계속해서 무엇하랴? 차라리 평범한 아비로 돌아가 아들의 뜻을 이뤄 주고 싶다.’
선위 타령에는 이런 의미가 숨어 있었고, 그 의미를 파악한 총리가 잘 헤아려서 여론 단속에 나설 터였다.
“세상에 백성을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군주가 또 있을까?”
“없지, 없어. 우리 황제 폐하와 같은 분은 세상에 둘도 없네!”
최초의 대국민 연설에 국민 절대다수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지막에 선위를 암시하는 말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생전 선위의 가능성을 언급했을 뿐, 당장 있을 일은 아니니 염려하지 말라.’라고 발표했다.
국민은 황제의 연설에 경의와 자부심을 느꼈고, 크게 감격했다. 또한 새삼 황제가 국가에서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광무 26년 어느 봄날의 낮.
이선은 황후 김아영, 태자 이진과 예비며느리 타티야나와 함께 경운궁 정관헌에서 오찬을 했다.
“공주는 국혼 준비만 열심히 하여라. 다른 일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네가 현명히 극복해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 폐하. 감사합니다.”
이제 한국어를 곧잘 하게 된 타티야나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태자, 이제 너는 지아비가 된다. 평생의 반려와 함께하게 된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리라 생각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너와 평생을 함께할 아내를, 그리고 장차 네가 얻게 될 아이를, 네가 대표하게 될 국민을 행복하게 해 주길 바란다.”
“예, 폐하.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장성한 장남의 모습을 보면서, 이선은 새삼 자신이 늙었다는 걸 깨달았다.
“황후, 이제 우리 아들이 결혼한다니, 기쁘면서도 내가 참 늙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이토록 정정하시면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하, 정신적으로는 그렇구려. 호랑이 등을 타고 질주한 세월이 25년, 아니 40년이니까.”
이선은 눈을 감았다. 지난 세월이 새삼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어언 40년, 자신이 구상했던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스스로에게 놀랍게도, 대부분의 목표를 달성했다. 문득 이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제가 비록 어리석고 부족한 점이 많다고는 하나, 폐하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싶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명해 주십시오.”
이진의 말에 이선은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 어렸던 아들도 이제 다 컸다는 생각에, 이선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문득 풍경을 보니, 바야흐로 완연한 봄날이었다. 시대의 꽃을 피우고 있는 대한제국의 봄이었다. 이선은 이 봄을 만끽하고, 또 지키고 싶었다.
“그래, 고맙다. 그런데 아직 내가 할 일이 남아 있구나.”
대외적으로 열강으로 올라선 대한제국의 국제적 안보를 튼튼히 하고, 국내적으로 입헌군주제와 완전한 ‘국민의 시대’로의 이행까지, 이선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직 시대는, 광무제 이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 작가님의 3-1부 후기가 이어집니다 –
3부 113-1화 3-1부 후기
안녕하세요. 태사령입니다.
3부의 1막을 113화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플랫폼별로 연재 화수 차이가 있습니다만, 어느덧 700화에 이르렀습니다.
본래 2부 완결 예정이었던 걸 연장하여 3부에 이르렀으나, 원래 구상으로는 700화 즈음해서 완결할 예정이었습니다.
작중 이선이 추구하던 목표는 대부분 달성하였고, 이선이 선위하면서 완결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아직 회수하지 못한 복선도 있고, 독자님들의 반응도 여기서 끝내자니 아쉬울 것 같았습니다. 한 1,20화 더 쓴다고 완결될 것도 아닌 듯합니다.
다만 연재가 장기화되다보니 저도 조금 지쳐가고 있습니다. 3부 연재시에는 여러 번 아프기도 했고, 집안사정도 생겨서 연재에만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기도 했습니다.
이선과 대한제국의 이야기가 종반부에 이르러, 만족할 수 있는 대단원을 내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름 두 달 정도만 재충전의 기간을 갖고, 9월에 복귀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종막까지 최후의 이야기들이 예정되어 있으며, 3-2부를 끝으로 를 완결할 계획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지금까지 오랫동안 긴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독자 여러분의 덕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고 평안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태사령 드림
3부 113-2화 외전. 황제 폐하의 외교
광무 26년(1922) 3월 이선의 대국민 연설, 이른바 ‘옥음 방송’은 한국 역사상, 아니 세계사에 남을 사건이었다.
군주가 전국의 국민을 향해 라디오로 연설을 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선의 라디오 연설은 현대적 프로파간다의 효시라고 할 수 있었다. 이웃 나라인 일본과 청국은 물론이요, 입헌군주국의 시초이자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에서도 깜짝 놀랄 일이었다.
“거 참, 한국 황제가 대단하기는 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지.”
“BBC의 제안입니다만, 라디오 개국 기념으로 국왕 폐하께서도 라디오 연설을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오. 국가로 방송 시작하는 거지. God save the King이 브리튼, 아니 제국 전체에 울려 퍼지면 얼마나 좋겠소.”
바로 그해 1922년에 개국한 영국의 BBC 방송과 로이드조지 내각은 조지 5세에게 라디오 대국민 연설을 건의했다.
“짐은 영 내키지 않는군. 라디오는 오락이 아닌가? 군주가 어릿광대처럼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가?”
“이는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일입니다. 한국의 사례를 보면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조지 5세도, 한국 황제의 연설에 대해 듣고 나서는 생각을 바꿨다.
“알겠소. 그럼 올해 크리스마스에 대국민 연설을 하도록 하지.”
“폐하의 결단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20세기에 군주 노릇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오. 하긴. 유서 깊은 왕가들이 폐위되고, 볼셰비키와 파시스트가 날뛰는 시대에 필요하다면 어릿광대 노릇이라도 해야지.”
조지 5세는 진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듯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가, 문득 생각에 미치는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가 일본에 이어 한국도 방문할 예정이지.”
“예, 한국 황실이 정식으로 초청했습니다. 웨일스 공께서 5월에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웨일스 공, 즉 왕태자 에드워드는 아시아 순방 중이었다. 이집트, 인도, 시암(태국)과 중국을 거쳐 작년 일본 태자 히로히토의 영국 방문 답방 형식으로 일본을 방문한 후, 한국 황실의 초청으로 방한할 예정이었다.
“아, 그때쯤 한국 태자와 러시아 공주가 혼례를 한다지? 에드워드를 결혼식 하객으로 불렀군.”
“예, 이진 태자와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혼례를 올릴 예정입니다.”
“놀라운 일이야. 동양 왕가에서 서양인 공주를 받아들이다니. 한국 황제와 니키(니콜라이)가 친밀한 관계였다지만, 이건 상상도 못 했던 일이오.”
“실로 세계적인 화젯거리지요.”
이진과 타티야나의 국혼 발표는 한국과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왕실 간의 혼사는 늘 있는 일이었지만, 동양 왕가와 서양 왕가의 결합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러시아제국이 망했다지만, 제국의 공주가 ‘동양 이교도’ 왕가에 시집을 간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우리도 놀랍다지만, 그쪽도 만만치 않을 텐데. 동양인들이 서양인 태자비, 혼혈 왕손을 받아들이겠소?”
“혼혈이라면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 황제의 차남이…….”
“아, 폴란드 혼혈이지. 이해했소. 하지만 제위를 계승할 태자는 입장이 다르지 않나?”
“거부감이야 강하겠지만, 한국에서는 황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니 황제의 결단이라면 따를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타티야나 여대공도 종교를 유교로 개종한 것 같더군요.”
“들었소. 니키의 사진 앞에서 곡을 했다지. 나 참, 별일 다 보겠군. 니키는 무슨 생각을 할지.”
조지 5세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그들 남매가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유일하게 한국 황제만이 보호해 줬으니까. 인간적인 도리를 본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니키와 나는 사촌인데도 외면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에드워드가 결혼식 하객으로 간다니, 니키가 내 결혼식에 하객으로 왔을 때가 생각이 나는군.”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의 이종사촌으로, 쌍둥이처럼 똑같은 외모로 유명했다. 조지 5세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한 니콜라이가 신랑으로 오인을 받아 축하를 받았다는 건 유명한 일화였다. 두 사람 모두 어머니를 닮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니콜라이가 폐위된 후 영국 망명을 희망했을 때, 조지 5세는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지만 영국 정부가 결사반대했다. ‘폭군 니콜라이’는 영국에서도 악명이 높았고, 니콜라이 일가의 망명을 받아들이면 노동당과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전시단결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전달받은 영국 왕실은 공개적으로 망명을 거부했다.
그 당시에는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후일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 부부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지 5세는 죄책감을 느꼈다. 니콜라이는 실패한 군주라고 해도 자신의 사촌이오, 알렉산드라도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사촌이었다. 그나마 그 자식들은 한국이 보호해 준 덕에 살아남아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었다.
“혹자는 격에 안 맞는 결혼이라고 하는데, 어쩌니저쩌니해도 한국 황제가 그들 남매를 보호해 준 거는 사실이오. 나도 감사를 느끼고 있소. 에드워드를 통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군.”
“예, 정부 역시 축하의 뜻을 보낼 예정입니다.”
20세기 초는 인종적 편견이 극에 달했던 시대로, 동양인과 서양인의 결혼 자체에 반감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조지 5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그사이에 태어날 왕손은 로마노프 왕가와 글뤽스부르크 왕가, 그리고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의 후예가 되는 건가. 이로써 한국 왕가도 유럽 왕가의 일원이 되었군.”
타티야나는 부계로는 로마노프 왕가의 후손이오, 모계로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증손녀였다.
즉, 이진과의 사이에 태어날 왕손은 유럽 유수의 왕가와 혈통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거대한 유럽 왕실 일가의 일원이 되는 셈이었다.
“한국 황제는 외교에 능하지. 아들의 결혼, 손자의 혈통도 외교에 써먹겠군.”
“그렇겠지요. 한국 황제는 국익에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저희 정치가들과 외교관들도 감탄할 때가 여러 번입니다.”
“3년 전 파리강화회의에서도 역할이 상당했다고 들었소.”
“비공식 옵서버인데도 배후에서 활약했지요. 그렇게 숙련된 외교관은 드뭅니다.”
파리에 온 이선은 배후에서 윌슨, 클레망소, 로이드조지, 처칠 등과 잇달아 밀담하며 대한제국의 국익을 위해 노력했다.
“내가 진짜 놀란 건, 한국 황제가 프랑스 의회에서 연설했을 때였소. 군주가 그 정도 연설을 할 줄이야.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이 정확하오.”
“동양의 군주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혁명에 찬사를 보내다니, 어지간한 정치가와 외교관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지요.”
1919년 7월, 이선이 프랑스 상원에서 행한 연설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 전체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 * *
시간을 잠시 앞으로 돌려, 1919년 7월.
이선은 귀국하기 전에,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130주년 기념식을 참관했다.
황제가 군주제 타도를 기념하는 혁명기념일에 참석하는 게 역설적인 것 같지만, 그해 7월 14일은 프랑스의 승전과 베르사유 조약 타결을 기념하는 행사였으므로 연합국의 군주가 참석하는 게 이상할 것 없었다.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프랑스군과 연합군은 승전 퍼레이드를 했고, 한국군 근위기마중대도 행진 대열의 일원으로서 박수를 받았다. 귀빈석의 이선 역시 파리 시민의 환호를 받았다.
진정 놀라운 건, 다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뤽상부르 궁전(Palais du Luxembourg)은 본래 루이 13세의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s)의 궁전으로, 부르봉 왕가의 궁전으로 쓰이다가 프랑스 혁명기에 다른 궁전들처럼 용도가 변경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통령정부 관저로 쓰이다, 황제 즉위 후 프랑스제국의 원로원으로 전용되었다. 제2공화국과 제2제정 시기에도 상원으로 쓰였고,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의사당은 고전주의 양식과 들라크루아의 아름다운 그림들로 극히 화려하게 꾸며졌다.
제3공화국 선포 이후에도 뤽상부르는 프랑스 원로원(상원)으로 기능했고, 부르봉 궁전에 자리 잡은 국민의회(하원)와 함께 프랑스 공화정을 상징했다.
바로 그 공화정의 상징에서, 한국 황제의 상하원 합동 연설이 있었다.
본래 이선의 연설은 예정된 게 아니었다. 파리를 떠나기 전, 총리 클레망소의 호의로 이선은 정부청사로 쓰이는 궁전들을 방문했다. 상하원뿐만 아니라, 대통령 관저, 총리 관저, 내무부 청사, 외무부 청사, 국방부 청사 등은 모두 옛 왕궁 또는 귀족의 저택으로, 화려한 건축 양식을 자랑했다.
이선은 예술애호가로서 방문 자체가 감개무량했다. 특히 그는 극히 화려한 양식과 아름다운 소장품들을 자랑하는 뤽상부르 궁전에 만족했다.
“뤽상부르 궁전은 평시에 원로원으로 쓰이므로, 일반에 공개하지 않습니다. 외국 군주 중에 방문하신 사례는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이후로 폐하가 처음이십니다.”
의회도서관을 장식하고 있는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의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이선을 향해, 클레망소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정말 훌륭합니다. 짐은 저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특히 좋아합니다.”
“폐하께서는 예술애호가시지요. 우리 프랑스인들은 폐하의 면모에 진심으로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선이 르누아르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였다. 이선의 예술애호가적인 면모는 프랑스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선 역시 단순한 예술애호를 넘어 이미지메이킹과 프로파간다 용도로 사용했다.
‘외견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완전히 서구화된 한국 황제’는 근대화된 대한제국을 상징했고, 서양인들은 이선을 보고 한국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다.
“호오, 여기가 바로 나폴레옹 1세가 원로원 의원들에게 연설했던 장소입니까.”
“예, 엄밀히 말하면 그 시절하곤 의사당 위치가 다릅니다만, 바로 그 장소입니다.”
의사당 한편에는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 원로원 의원들에게 한 연설의 내용이 비문으로 만들어져 벽에 장식되어 있었다.
“괜찮다면 짐도 연설해 보고 싶군요. 동맹국인 프랑스 공화국과 대한제국의 우호를 위하여.”
이선의 발상은 상당히 즉흥적이었다. 클레망소가 보기에는 ‘동양의 나폴레옹’ 운운하는 비유가 유명하니, 자신도 나폴레옹처럼 연설해 보겠다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선은 외국 국가원수가 동맹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게 최고의 외교 이벤트인 21세기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연초에 윌슨도 프랑스 의회에서 연설을 하고 열렬한 환호를 받지 않았던가?
“외국 군주의 의회 연설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만,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의회와 의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기대하겠습니다.”
과연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원로원 의장 레옹 부르주아는 이미 이선과 관계가 좋았으므로 적극 지지했다.
프랑스 상하원은 논의 끝에 이선의 연설을 받아들였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 황제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지만, 그만큼 이선의 이미지메이킹이 성공적이었고, 의원들도 동양의 군주가 무슨 연설을 할지 궁금해서였다.
1919년 7월 17일, 뤽상부르 궁전 정부-상하원 합동회의.
그날의 연사는 특별하게도 대한제국 황제였다.
“친애하는 프랑스 공화국 원로원과 국민의회 의원 여러분. 먼저 짐에게 연설의 기회를 준 대통령 각하, 총리 각하, 의장 각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선은 프랑스어로 연설을 시작했다. 이선의 프랑스어 실력은 영어만큼 유창하진 않았고, 발음도 전형적인 외국인 발음이라 프랑스인이 듣기에는 어색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동양의 군주가 그 정도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 자체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여러분은 프랑스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민의 대표입니다. 짐 또한 대한제국의 국민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물론 짐은 여러분처럼 선출직은 아닙니다만, 평생 임기제 공무원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군주가 공화국의 의원들에게 연설을 하는 어색한 상황을 농담처럼 짚고 넘어가자, 의원들도 어색함을 풀고 웃음을 흘렸다.
“본래 이 궁전은 부르봉 왕조의 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의 의사당이 되었습니다. 혹자는 군주인 짐이 불편함을 느낀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반대입니다. 짐은 인민주권을 존중하며, 인민주권의 역사적인 첫발을 뗀 프랑스 대혁명에 깊은 경외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총리 클레망소 이하 정부 관계자, 상원의장 부르주아 이하 의원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이선을 쳐다보았다. 군주, 그것도 동양의 군주가 프랑스 대혁명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윌슨도 찬사를 보낸 바 있었지만, 그는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의 가치를 유럽에 퍼뜨렸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유혈과 오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프랑스 혁명의 가치는 오늘날 유럽을 넘어 세계에 퍼졌습니다.”
이선은 경악과 경의로 물드는 의원들의 표정을 보며, 연설을 이어 나갔다.
“대전쟁은 곧 민주주의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승리했습니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그랬듯이, 인민의 목소리를 거부한 군주는 패배하고 몰락했습니다! 짐은 중대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인민과 함께하지 않는 군주는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절반은 외교용 수사였지만, 절반은 이선의 진심이었다.
“짐은 군주이지만, 동시에 국가지도자로서 민주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의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위해 지난 40년간 노력의 경주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범은 그동안 프로이센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패배했습니다. 프로이센 전쟁기계는 인민의 힘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근대화는 외견적 근대화만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내면적 근대화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짐은 대한제국의 우방이자 세계질서를 선도하는 프랑스 공화국, 대영제국, 미합중국을 모범으로 삼아 정치개혁에 돌입하고자 합니다.”
기실 이선 그 자신으로 말하면 서양 민주주의 국가들, 즉 자신들만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식민지에서는 여전히 군림하는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었지만, 국익을 중시하는 외교관으로서의 이선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과연 프랑스 정부와 의원들은 이선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 중간중간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선의 연설이 이어지자 다시 경청했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가치와, 링컨 대통령이 말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제국 만세! 프랑스 공화국 만세! 대한제국과 프랑스의 우호 만세!”
이선의 연설이 마치자, 프랑스 정부 인사들과 상하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박수와 함께 만세를 외쳤다.
“대한제국 만세! 프랑스 공화국 만세! 대한제국과 프랑스의 우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는 과거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을 향해 보내는 만세 구호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선을 향해 보내고 있었다.
동양의 황제가 프랑스인의 자부심인 공화국과 혁명의 의의를 이해하고 경의를 표했으니, 그들도 마땅히 동양의 황제를 향해 나폴레옹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자, 해당 국가가 듣고 싶어 하는 바에 중점을 맞춰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이선의 외교가 절정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3부 113-3화 외전. 황제 폐하의 정치
이선의 뤽상부르 연설은 서방에 상당한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켰다.
21세기 기준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수준의 외교적 수사였지만, 20세기 초 기준으로는 급진적인 내용의 연설이었다. 하물며 동양에서 온 전제군주가 인민주권과 공화주의 혁명을 찬양했으니,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연설문을 황제가 직접 쓰진 않았을 테고. 김규식 대사가 썼다던데 그 사람 입김이 들어간 거 아닌가? 외교관치고는 상당히 급진적이라던데.”
“한국 황제는 연설문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는다더군요. 김규식 대사의 역할은 황제의 한국어 연설문을 프랑스어로 번역까지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외국어 가장 잘하기로 유명한 이라.”
“허, 그럼 황제 본인의 생각이라는 건데. 만약 왕자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혁명가라도 되었겠어.”
“동양에서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니, 혁명가라면 혁명가라지요. 뭐, 나폴레옹도 황제라지만 혁명가 소리 듣지 않았습니까?”
“이 시대의 혁명가라면 울리야노프나 트로츠키가 떠오르는데. 지긋지긋한 볼셰비키 놈들.”
“하지만 동양의 혁명가는 우리 편이지요.”
“물론 우리의 훌륭한 동맹이지. 더욱이 아주 영민한.”
뤽상부르 연설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비공개 비보도’를 원칙으로 했지만, 의정기록에 남은 데다 큰 감명을 받은 의원들이 이곳저곳에 이야기를 했으므로 모를 수가 없었다.
* * *
1922년, 버킹엄 궁전.
“뭐, 프랑스와의 관계가 중요하긴 하지만, 짐이라면 그렇게까지 말하지 못할 거요. 프랑스인들이 대혁명과 공화국에 자부심을 갖는 건 알고 있지만, 군주의 입장에서 혁명을 찬양할 수는 없지. 프랑스와의 관계를 중시한 선왕(에드워드 7세)께서도 프랑스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지만, 혁명만은 예외였소.”
“물론입니다, 폐하. 존엄하신 군주께서 그러실 이유가 없지요.”
“그렇다면 한국 황제는 왜 그랬던 걸까? 하물며 동양의 전제군주 아니었던가.”
국왕의 물음에 로이드조지가 답했다.
“첫째로는 우방인 프랑스, 더 나아가 민주공화국인 미국에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었겠지요. 한국 황제는 외교적 수사라면 타고난 사람입니다. 영국에 대해서도 얼마나 찬사를 보냈는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긴, 짐에게도 명예혁명과 영국식 입헌군주제에 대해서도 극찬을 했었지. 언젠가 영국식으로 개혁을 완수할 거라 하였고.”
“과연 그렇습니다. 둘째로는, 한국 황제는 귀국 직후에 보수파들을 숙청하고, 보통선거권 개혁과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천명했습니다. 그 자신의 의지를 보여 준 게 아니겠습니까?”
이선은 귀국 직후에 원산 사건을 명분으로 개화당 우파를 숙청하고, 보통선거권 개혁과 정당정치 입헌군주제로 나아갔다.
사건의 추이가 이렇게 되자, 서방의 관찰자들은 뤽상부르 연설이 이선의 진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꼭 서방에서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검열로 간략히 보도되었기에 많은 이가 알지 못했지만, 뤽상부르 연설을 직접 들은 서재필·이상설·이승만·김규식 등은 황제의 연설에 경악과 경의를 동시에 느꼈다. 그들도 외교적 수사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기에 이상설 등은 귀국 후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보통선거권 개혁에 나섰던 것이었다.
“그것도 놀라운 일이야. 아시아에서 보통선거권을 시행하는 국가가 생기다니. 덩달아 일본까지 따라 하지 않았나. 영국을 모범으로 한 입헌군주제를 추구한다니, 바람직하오.”
“한국이 아시아의 프랑스,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을 자처해 준다면 우리로서도 좋은 일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던 조지 5세는 문득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우리 외교관 중에 한국 황제와 독대한 사람이 있지 않았소? 젊은 외교관인데 독대를 하고, 한국 황제의 심경을 전해서 놀랐지. 그의 보고서를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이…….”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입니다, 폐하. 강화회의 대표단에 이어 파리 주재 외교관으로 근무하다, 이번 웨일스 공 전하의 아시아 방문에 수행원으로 동참했습니다.”
에드워드 카는 독일과 소비에트에 유화적인 데다 내각의 대외정책에 비판적이었으므로 로이드조지는 썩 내키지 않았으나, 일부러 아시아 순방명단에 합류시켰다.
“아, 그 친구도 에드워드군. 우리 에드워드가 이름 같다고 수행원으로 택했을 리는 없고, 정부가 일부러 포함시켰겠군.”
“한국 황제와 그토록 깊게 대화를 나눈 이도 드무니까요. 속내를 잘 밝히지 않는 사람인데. 황제와 여러 번 회견한 저나 윈스턴 경과도 정무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그 정도까진 아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에드워드 카는 좀 특수한 케이스지요. 당시만 해도 젊은 신참 외교관이었으니.”
“과연. 황제가 그 젊은 외교관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할지 기대가 되는구려.”
* * *
광무 26년 5월, 경운궁.
그 무렵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한창 아시아 순방 중이었다. 에드워드는 4월부터 한 달간 일본에 체류했고, 한국에서도 그만큼 체류할 예정이었다.
아시아 순방에 동참한 외교관 에드워드 핼릿 카는, 웨일스 공의 방한을 앞두고 협의를 위해 먼저 한국에 입국했다.
“외신(外臣)이 삼가 황제 폐하를 알현합니다.”
영국 외교관이 한국식 예의를 표하자, 이선은 빙긋 웃었다. 비록 어설프기 짝이 없는 발음이었지만, 정성이 마음에 들었다.
“호오, 언제 한국어를 익혀서 그런 고급 표현까지 익혔단 말이오? 아무튼 반갑소. 영국은 이 시간대가 티타임이지요? 좋은 실론 홍차 준비했소.”
이선은 카와 반갑게 악수를 하며 홍차를 권했다. 첫마디만 한국어일 뿐, 물론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였다.
“황공하옵니다. 아시아 방문을 앞두고 약간만 배웠을 뿐입니다.”
“그래요, 한국에 근무할 게 아니라면 굳이 배울 필요 없지. 차라리 러시아어 학습을 권하고 싶군요. 그게 경의 커리어에 더 도움이 될 터이니.”
“마침 근래 러시아어 학습 중입니다. 제가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걸 아셨습니까?”
“1919년 시점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에 그렇게 관심을 보였던 영국 외교관은 경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연히 익히고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공무다망하실 터인데 그걸 다 기억하고 계시다니, 감격할 따름입니다.”
“기억력이 짐의 장점이지요.”
이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정말로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E.H. 카라면 기억할 수밖에. 사학과 입학 후에 가장 먼저 읽은 책 중 하나인데. 카 평전도 완독했다고.’
후일, 외교관보다는 소비에트 러시아사 전문가이자 국제정치학자·역사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에드워드 핼릿 카.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기억되는 그 E.H. 카이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영국 대표단에는 후일 학자로 명성을 떨칠 청년 외교관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그리고 에드워드 핼릿 카.
케인스는 재무부 소속으로 독일 배상금 문제를 전담하다 연합국 거두의 비타협적 태도에 환멸을 느껴 사임했고, 토인비는 외무부 고문이자 문명사학자로서 지중해-중동 국경문제를 전담했다.
카는 외무부에 소속된 외교관으로서 독일-폴란드 국경문제를 전담했다. 중산층 출신으로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엘리트인 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파리에서 열변을 토한 트로츠키의 ‘혁명적 견해’에 깊은 인상을 받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 연구를 시작한 카는 백군이 우세할 때에도 소비에트가 내전에서 승리할 운명이라 확신했고, 처칠의 반(反)볼셰비키 개입정책에 반대하여 로이드조지에게 내전 불개입을 설파했다.
1919년 당시만 해도 20대 외교관에 불과했던 카의 견해는 무시당했지만, 내전에서 결국 소비에트가 승리하자 그의 식견은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카는 독일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배상금과 굴욕을 안겨 주는 데 반대했고, 신생 소비에트 정권도 승인하여 국제질서의 일부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는 지나치게 대독, 대소 유화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카는 자신의 견해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결국 러시아에 대한 경의 예측은 맞아떨어졌지. 놀라운 식견이었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폐하께서는 저보다 먼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선이 카와 회견한 건 1919년 7월, 뤽상부르 연설 직후였다. 당시만 해도 적백내전 개입 여부를 두고 한국과 영국 간에 논의가 진행되던 중이었다.
당시 처칠은 곧 한국이 내전에 개입하리라고 호언장담했고, 개입정책에 반대하던 카는 김규식에게 비공식적인 회견을 요청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규식이 아니라 황제가 직접 카를 맞이했다. 카로선 깜짝 놀랄 일이었다.
“폐하, 결코 러시아 내전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러시아에도 한국에도 비극이 될 것입니다.”
“미스터 카, 오늘의 회견은 영국 정부를 대표해서 온 겁니까, 아니면 개인적인 만남입니까?”
“송구하오나 개인적인 요청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오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겁니다. 피차 비공개를 전제로 말합시다. 동의하지요?”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황제가 아닌 개인 이선의 의견을 말하지요. 내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자면, 내전에서 소비에트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리라 확신합니다. 백군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신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처칠에게 한 약속하고는 달리, 이선은 카에게는 ‘개인적인’ 의견을 말했다. 어차피 독단적인 행동을 한 카가 회동 내용을 반대파인 처칠에게는 말하지 않을 거고, 최대한이 로이드조지에게 보고하는 것일 터였다. 로이드조지 자신도 개입에 소극적이었으므로, 이선의 ‘개인적인’ 우려를 이해할 터였다.
“특히 한국군은 시베리아에서의 전쟁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영국 역시 노동계급의 반발을 불사하고, 개입에 나서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클 터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단독으로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카는 상관인 처칠이나 로이드조지보다 이선이 더 정세를 정확히 이해하는 걸 보고 놀랐고, 자신과 같은 의견에 기뻤다.
이후 카는 이선과 허심탄회하게 국제정세와 외교에 대해 논의했다. 두 사람의 회견은 서로에게 만족감을 주었고, 카는 이선과 한국에 대해 최고로 우호적인 보고서를 올렸다.
“폐하께선 오랜 외교 경력이 있으신데, 누가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는지요?”
“쉬운 외교란 없지요.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한 명만 꼽자면, 팔병신……, 아니 실례했소. 실언이니 잊어 주시오. 카이저 빌헬름이었소.”
‘공공의 적’ 빌헬름을 비하하는 말에 카의 얼굴에도 실소가 흘렀다.
“짐작이 갑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힘드셨습니까?”
“카이저의 그 장광설을 듣기가 너무 힘들었소. 한 소리 하고 또 하고, A 주제로 말하다 갑자기 B로 넘어가고, 뜬금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아, 과연.”
이선에게는 니콜라이가 가장 상대하기 쉬었고, 영국 정부를 상대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영국 외교관 앞에서 그렇게 말하긴 곤란하니, 공공의 적 빌헬름에게 화살을 돌렸다. 니콜라이와 조지 5세도 비슷한 이유로 사촌 ‘빌리’를 싫어했다.
“지금은 쫓겨나서 망명한 처지라지만, 한때 카이저의 자의식은 지구를 뚫고 우주까지 갈 것 같았소. 전쟁 전에 영국하고도 실언으로 크게 구설수 일으키지 않았소?”
“아, 1908년 ≪데일리 텔레그래프≫ 스캔들 말씀이시군요.”
「영국인들은 발정 난 토끼마냥 미쳤나? 왜 독일을 그리도 적대하는가? 위대한 나라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길 바란다. 독일 국민은 대부분 반영적인지 몰라도, 짐은 친영이다. 짐이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나? 거짓과 편견은 내 본성과 거리가 멀다.……」
카이저의 막말은 영국과 독일 양쪽에서, 특히 독일에서 더욱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국민의 비난이 들끓었고, 제국의회에서도 격렬한 비판이 쏟아졌다. 카이저는 자신을 향한 비난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정부의 압박으로 카이저는 결국 외교정책에서 당분간 배제되었다.
“카이저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영국인들 못지않게 독일인들도 어리석어 자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왔소. 그게 더 사태를 악화시켰지. 그냥 깔끔하게 실언이었다, 앞으로 주의하겠다 사과하면 될 것을 그놈의 허세 때문에 더욱 상황을 악화시킨 것 아니오. 그러는 바람에 오히려 황제의 위신은 더 떨어졌지. 어리석기는!”
이선은 혀를 끌끌 찼다. 카이저는 이미 그때부터 실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영국에서는 독일에 적대감을 느꼈다기보다는, 카이저가 조울증이 아닌가 의심했지요.”
“뭐, 카이저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믿는 왕권신수론자였으니 그렇다 칩시다. 국민에게 선출되었다는 민주공화국에서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이선은 프랑스에 대한 찬사는 언제였냐는 듯, 화제를 프랑스의 치부로 전환했다. 진보적인 영국인에게는 즐거운 소재였다.
“드레퓌스 사건을 봅시다. 드레퓌스가 간첩이 아니고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게 분명해진 후에도, 프랑스 군부와 우파는 유대인 드레퓌스가 범인이라고 끝까지 우겼소.”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어, 참전하여 독일군에 맞서 싸운 지금까지도, 드레퓌스 중령이 독일 간첩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요, 아직까지도 드레퓌스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고 있지요. 그리고 여전히 ‘유대인에 매수된 좌파, 언론, 지식인’ 탓을 합니다. 극우파가 반(反)유대주의자라서?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위신에 대한 광적인 집착 때문이오. 국가는, 군대는 무오류고 틀려서는 안 된다. 위신을 위해서라면, 설령 진짜 간첩이 아니더라도 간첩이어야만 한다. 이게 근본적인 오류란 말이오.”
이선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내가 권좌에 앉아 있는 이상, 이런 오류를 반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부든 나든, 잘못을 저지르면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국민 탓으로, 의회 탓으로, 언론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지요. 권력에는 무한한 책임이 뒤따른다. 이는 정치가의 의무입니다.”
카는 문득 3년 전 대화를 떠올렸다. 이선이 귀국할 즈음, 바로 드레퓌스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원산학살 사건이 있었다. 카는 이선의 해결책을 고대했다. 과연 입바른 위선인가, 진심인가?
“폐하께서 친히 피해자에게 조의를 표하고, 책임자들을 단호히 처벌하는 것을 보고 영국에서도 놀랐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민주정에서도 정치인들은 사과에 인색합니다. 위신이 걸렸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명령도 내리지 않은 군과 경찰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고, 바로잡으셨지요.”
“당연히 짐이 사과하고 바로잡아야지요. 비록 내 명령이 없었다 할지라도, 짐은 국가원수이자 통수권자로서 책임이 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요? 권력에는 무한한 책임이 뒤따른다고. 짐은 통치자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정색하던 이선은 표정을 풀고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덕에, 한국에 보통선거권과 진정한 입헌정치가 확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상황에서 내가 끝끝내 군경의 말만 듣고, 사과를 거부한 채 사건을 묻어 버렸다고 칩시다. 진실이 묻힌 건 물론이고, 국가를 위해서도 굉장히 나쁜 선례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국민을 우민이라 여기며 속이고 억압하는 정권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짐은 늘 액튼 경의 경구를 기억합니다. 권력은 타락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온데 폐하께서 어떻게 이토록 매번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는지, 군주로서 서양 정치가들보다 더욱 진보적인 의식을 갖고 계신지, 진실로 궁금합니다.”
카는 단순히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경의를 담아 질문했다.
“역사를 공부하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오지요. 동양에서는 걸주(桀紂)가, 서양에서는 찰스 1세와 루이 16세가, 가까이로는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가 짐에게 반면교사가 되어 주지요.”
“과연, 역사는 중요하지요. 저도 늘 역사를 통해 배우려고 합니다.”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과거를 이해하고 다뤄야 합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니까요.”
‘History i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현직 외교관이자 미래의 학자인 카는 이선의 말이 꽤나 인상 깊은 듯,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언젠가 자신이 쓸 역사서의 경구로 인용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
3부 113-4화 외전. 검은머리 국군 대원수
광무 26년, 대한제국 육군참모본부.
대전쟁기의 군제개혁으로, 원수부에서 완전히 독립한 참모본부는 군부의 새로운 중핵으로 떠올랐다. 여전히 군령권은 대원수인 황제와 그 직속기관인 원수부가 행사했지만, 군정권(軍政權)은 참모총장이 행사했다.
4대 육군참모총장 노백린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국군의 현대화에 만전을 기울이고 있었다.
키가 훌쩍 큰 젊은 군인이 정복 차림으로 참모본부에 들어섰다. 군복만 입지 않았더라면, 군인이 아닌 청년 사업가로 보일 만큼 말쑥한 용모였다.
“참령 김유진, 참모총장 각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 어서 오게. 앉게나.”
노백린은 청년장교에게 자리를 권한 후, 군인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이었다.
“김 부령의 새로운 부임지가 결정됐네.”
“부령이요? 아시다시피 전 참령입니다만.”
“내가 조금 전에 귀관의 부령 진급에 서명했어. 곧 폐하께서 부령으로 임명하실 거네. 축하하네, 김 부령. 나이 갓 서른에 부령이라니, 정말 빠른 진급 아닌가?”
김유진은 표정관리에 나섰다. 분명히 예상보다 빠른 진급이었다. 하지만 그 특유의 삐딱한 관점으로 보면…….
‘얼마나 힘든 일을 시키려고 벌써 진급시킨 거지?’
육군무관학교 28기 김유진은 군부 내에서 가장 빠른 진급 속도로 유명했다. 군부의 가장 촉망받는 엘리트들인 23기 김광서와 지대형, 24기 홍사익과 김좌진, 26기 이응준 등을 능가하는 속도였다.
“각하께서도 서른에 부령이셨지요.”
“그때와 지금이 같나? 그땐 군 규모의 성장에 비해 장교 자체가 부족해서 진급이 수월했지. 귀관은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은 거고.”
까마득하게 높은 참모총장이지만, 김유진은 꽤나 편안한 태도를 보였다. 노백린은 바로 김유진의 후원자였다.
프로이센 군부와 유사하게도, 장성들은 유능한 청년장교들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예컨대 고 박유굉 대장은 김광서와 홍사익의 후원자였고, 이동휘 대장은 지대형을, 홍범도 대장은 김좌진을, 노백린 대장은 이응준과 김유진을 후원했다.
이러한 개인적 친소관계가 군부 내 파벌로 연결될 우려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능한 청년장교들이 발탁되어 경험을 쌓고 빠르게 진급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혹자는 참모총장 노백린이 김유진의 후견인이라서 줄을 잘 탔다고 폄하했지만, 바로 그 자신이 대전쟁기에 다대한 전공을 세운 덕분이었다.
“제가 먼저 진급해서 이응준 선배의 실망이 클 것 같습니다만.”
“이 참령에게 기대가 컸는데, 근래 태도가 위험할 정도야. 소비에트에 지나치게 강경해. 대놓고 전쟁을 부르짖으니 말이야. 이갑 장군의 사위라서 러시아를 포기 못하겠다는 입장인 건 이해하는데, 공과 사는 가려야지.”
시베리아 파견군 정보장교인 이응준은 김좌진과 더불어 가장 강경한 소장파였고, 연해주 백군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응준 참령의 개인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이 참령은 원래 대외팽창주의자였습니다. 거기에 개인적인 감정이 곁들어진 거겠죠. 장인이자 존경하는 선배가 피를 흘린 땅에서 물러날 수 없다.”
“그러니까 더 위험하다는 거지. 군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귀관처럼 대국적으로 시야가 넓은 장교가 필요해. 특히 이번 일에는 말이야.”
“제 임무가 무엇입니까?”
“따라오게. 직접 설명해 주실 분이 있으니.”
노백린은 김유진을 대동하고 참모본부 맞은편에 있는 원수부 건물로 향했다. 김유진은 의아했다.
‘참모총장보다 높은 사람이 있나? 아, 군무대신인가? 그럼 군무부로 가야지, 왜 원수부로?’
김유진의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노백린이 평상시에는 비어 있는 대원수 집무실로 직행했던 것이다.
“대원수 폐하, 신 대장 노백린, 삼가 알현을 청합니다.”
“아, 들어오시오.”
어지간히 대담하고 여유만만한 성격의 김유진도, 통수권자인 황제를 직접 대면하는 순간에 긴장했다.
“대원수 폐하! 신 참령 김유진……,”
“아, 귀관이 김유진 부령인가. 막 귀관을 부령으로 임명한 참일세. 페트로그라드 전투에서 맹활약했다지. 좌좌진, 우유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1918년 페트로그라드 전투에서 기동대를 이끌고 공훈을 세운 장교 중에 대표적으로 김좌진이 있지만, 그 못지않은 공로자로 김유진이 있었다. 김유진이 이끄는 제93기동대는 독일군의 전선에 균열을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이름도 비슷해서, ‘좌(左)좌진 우(右)유진’이라고 불렸다.
정작 김좌진과 김유진의 성격이나 지휘 스타일은 상극이라서,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김좌진이 맹장이라면 김유진은 지장(智將)이었다.
“귀관이 쓴 육군대학 졸업논문은 매우 흥미로웠네. 그래서 직접 만나 보고 싶었지.”
김유진은 최근에 3년 과정의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참령 계급으로 육대에 입학한 특이한 케이스였다.
일반적으로 육대는 30세 이하의 정위와 부위를 선발하는데, 공교롭게도 김유진은 광무 18년(1914) 임관 이후 산동 전역과 동부전선에 모두 파병되어 육대에 입학할 시기를 놓쳤다.
그 사이에 공훈을 세워 예외적으로 26세에 참령까지 빠르게 진급했고, 원칙적으로 입학하기엔 계급이 높았지만, 종전 이후 노백린의 강력한 요구로 예외적으로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육군대학은 군부 내 최고 엘리트코스였고, 김유진은 지휘관으로서뿐만 아니라 참모이자 군사이론에서도 탁월했으므로 육대에서도 놓치고 싶지 않은 인사였다. 아니, 당장 강단에 서도 손색이 없었다.
“소파전쟁(蘇波戰爭, 소비에트-폴란드전쟁)의 사례로 본 전차와 전투기의 합동작전이라. 이건 김광서 부령의 보고를 떠올리게 하더군.”
“김광서 부령님의 보고서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김유진의 재능을 탐내는 곳은 많았으므로, 그는 육대에 재학하는 동안 참모본부 병기과에서 근무하며 새로 도입되는 전차와 전투기를 감독했다.
전차와 전투기를 활용하는 현대적 전술의 적극적인 지지자인 김유진은 육대 졸업논문에 현대전의 양상을 예측하는 논문을 썼고, 이는 군부 상층부뿐만 아니라 황제 이선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흥미롭군. 귀관의 논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겠나?”
“예, 대원수 폐하.”
갑자기 대원수에게 자신의 논문을 브리핑을 하게 된 김유진은 내심 당혹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을 이어 나가던 김유진은 문득 옛일을 떠올렸다.
* * *
광무 6년(1902) 건원절, 근위사단의 열병식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위풍당당한 행진을 보았다.
고위관료인 부친의 손을 잡고 열병식을 지켜보던 소년이 물었다.
“저기 차 위에 있는, 가장 멋진 옷을 입은 사람이 누구예요?”
“대원수 폐하이시다.”
“와, 정말 멋지다. 나도 커서 대원수가 되고 싶어요!”
순간 부친의 얼굴이 굳어졌다.
“쉿! 이 나라에서 대원수는 황제 폐하만이 될 수 있어. 다시는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알았지?”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해도, 불경(不敬)이 될 수 있는 말이었다. 정작 이선이 듣는다면 어린아이가 대범해서 좋다고 웃어넘겼겠지만, 이미 대한제국에서 황제는 신성불가침한 존재였다.
소년 김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부친의 당부대로, 두 번 다시 대원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광무 14년.
소년 김유진은 자라 열여덟 살의 수험생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기로 소문이 난 김유진은 황성대학에 합격하리라 자신했다.
유진은 특이했다. 수재 청년들은 대부분 관리로 입신양명을 꿈꿨지만, 그는 부친처럼 경제학을 공부하고 당대에 유행하는 최신 직업, ‘사업가’가 되리라고 마음먹은 터였다. 바야흐로 식산흥업에 자본주의가 팽창하는 시대 아니던가?
그런데, 부친의 요구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네가 육군무관학교에 가길 바란다.”
“예? 그럼 무관이 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 가문을 되살리려면, 장남인 네가 관직에 올라야 한다.”
“그럼 황성대학 졸업 후에 고등문관시험을…….”
“박영효 그 작자가 권좌에 있는 이상 너는 절대 문관으로 성공 못해! 앞으로 박영효의 권세는 적어도 20년은 갈 거다. 황제 폐하의 직속인 무관만이 그자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게야.”
김유진의 부친 김상준은, 장남을 향해 전에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김상준은 몰락한 양반이었으나, 개화의 시대를 만나 운명이 바뀌었다.
갑신경장 이전부터 개화당에 입당하여 행동대원이 되었고, 갑신경장 이후에는 국비 미국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영어와 근대 경제학을 배웠다.
귀국 후에는 상공부 관료로 특채되어 실무를 맡았고, 당시 총리인 김홍집과 유학 선배인 유길준의 눈에 들어 빠르게 승진했다. 개화당 내에서도 유길준 계파에 합류한 김상준은, 유길준 내각에서 상공부대신으로 입각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순간이 바로 김상준의 정점이었다.
광무 13년, 유길준이 퇴임하고 박영효가 신임 총리가 되었다. 유길준의 후임자인 박영효가 전임자와 사이가 나쁘다는 건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유길준은 김상준을 탁지부대신으로 추천했으나, 박영효는 유길준의 사람을 내각에 남겨 둘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유길준에 대해 정치적 공세를 벌였다. 원훈인 유길준을 직접 공격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크니, 그 측근인 김상준을 수뢰 혐의로 집중 공격했다.
수뢰 혐의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상공대신인 김상준이 기업들과 연결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는 관치경제였으므로, 정치와 경제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훗날 드러나듯이, 박영효 계파는 정경유착으로 훨씬 큰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결국에 본질은 권력투쟁이었다. 파워게임에서 패배한 유길준은 뒷방으로 물러났고, 김상준은 모든 책임을 지고 낙마하여 정계에서 은퇴해야 했다.
“박영효 네 이놈! 제 놈은 몇 배로 더 해 먹었으면서, 네놈 권세가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
김상준은 분노했지만, 당시 박영효의 권력은 정점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박영효는 총리이자 개화당의 총수였고, 황제의 신임을 받아 공업화 정책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박영효의 몰락을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김상준은 기업계로 진출하는 길을 택했다. 상공업계의 인맥을 통해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와 관직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가 없었고, 자신이 아니라면 총명한 장남이 국가를 위해 대업을 이루길 원했다.
“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고 싶습니…….”
“그건 네 동생이 하면 된다. 장남인 너는 관직에 올라 입신양명하고 국가를 위해 일해야지! 이제 무관의 시대가 올 거다. 나는 너를 믿는다.”
“제가 사업을 하고 유신이가 무관학교 가면 되지 않을까요? 이름도 김유신이니 무관이 될 운명 아닐까요?”
“장남이 되어가지고 의무를 동생에게 떠넘길 생각이냐? 너, 어릴 적에 대원수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대원수는 못 되지만, 대장은 될 수 있다. 박유굉 대장을 봐라. 얼마나 권세가 대단하냐.”
“아니, 그건 어릴 적에 뭣도 모르고 한 말이잖아요. 저는 무관에 어울리는 성격이 아닌데요.”
불만스러워하는 아들을 향해 부친은 타협책을 내놓았다.
“장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령까지만 올라도 퇴역 후에 갈 수 있는 곳이 많을 게다. 정령까지만 해라.”
부친의 판단이 자식의 운명을 결정하던 가부장제의 시대에, 특히 장남인 유진은 부친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약속하신 겁니다. 딱 정령까지만 할 겁니다.”
“그래, 그 후에는 네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김유진의 인생항로는 바뀌고 만 것이었다.
그 자신의 생각과 달리, 김유진은 대한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교가 될 자질이 있었다.
* * *
‘결국 박영효가 이렇게 실각할 줄 알았으면, 내가 굳이 무관학교 갈 필요도 없었잖아?’
광무 23년(1919), 철옹성 같던 박영효의 권세는 뜻밖에도 빠르게 무너졌다.
그 10년 사이에, 김상준의 금산기업은 한국-일본-미국을 잇는 대형 무역회사로 성장했다. 김상준은 정계에 복귀하지는 않았지만, 신민당의 정치자금을 맡았다. 정계의 떠오르는 총아인 이승만, 안창호와 모두 관계가 두터운 김상준은 배후에서 개화당-신민당 연립정부가 성사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 좋아. 벌써 부령이니 별다른 사고 안 치면 5년 후에는 정령이겠지? 그래도 서른다섯이니 새 인생을 살기에는 충분하네. 이 호황기는 당분간 계속되겠지. 사업가로 인생을 살기에 딱 좋은 시기야.’
김유진은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렸지만, 정작 군부에서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유능한 장교를 왜 퇴역시켜 준단 말인가? 하물며 이제는 황제의 눈에까지 들어선 상황이었다.
‘김유진, 김유진이라고? 원역사에서 어떤 인물이지? 김경천, 지청천, 홍사익, 김좌진 등은 누군지 다 알겠는데, 대체 김유진은 누구야? 전 상공대신 김상준의 장남? 어디서 이런 천재가 튀어 나왔지?’
이선은 열심히 기억의 회로를 돌렸지만, 도저히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역사의 변화가 만들어 낸 건가? 하긴, 이미 수많은 인간의 운명이 바뀌었는데, 원역사에는 없었던 천재가 튀어나오지 말란 법이 없지. 미래를 알지 못하는데 이런 전략적 안목을 갖고 있다면, 김유진이는 타고난 천재임이 틀림없어.’
이선은 노백린이 상신한 김유진의 육대 졸업논문을 읽고 감탄했다. 김유진은 장차 ‘전격전’의 양상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아직 초보적인 단계의 가정이었지만, 1922년 시점에서 이런 시야를 가졌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페트로그라드 전투의 공로자로서 지휘관으로서 검증되었고, 장군을 보좌하는 참모장교로도 유능했고, 대국적인 시야도 넓고 군사이론가로서도 탁월했다.
‘군부 삼대장, 홍범도와 이동휘와 노백린을 합친 완전체 느낌인데? 앞으로 중용해야겠어.’
김유진의 인생계획과 달리, 이선은 그를 앞으로 영원히 부려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코 ‘사직을 윤허하지 않을’ 터였다.
“잘 들었네. 짐의 기대 이상이야. 앞으로도 활약을 기대하지.”
“황공하옵니다, 대원수 폐하.”
“좋아. 이제 귀관의 임무를 설명하지. 곧 워싱턴에서 국제회의가 개최되는 건 알고 있겠지?”
“예, 폐하.”
원역사보다 몇 달 늦어지기는 했지만, 미국 대통령 우드가 요청한 10개국 회의가 워싱턴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주된 논의는 동아시아-태평양 문제, 특히 중국 이권 문제와 해군 군축 문제였다.
“귀관을 주미대사관 주재무관으로 임명하니, 다가오는 워싱턴 회의에 만전을 기하도록.”
이미 외무대신 이승만을 전권대사, 군무협판 박용만을 부대표로 하는 사절단이 꾸려져 있었다. 군사 논의는 주로 해군이 될 예정이라, 해군국장 신순성 부장과 보스포루스 해협통제위원을 역임한 안중근 부장이 군부를 대표할 예정이라 뜻밖의 명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육군이 이번 회의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선의 눈짓에 노백린이 대신 답했다.
“귀관의 역할은 주재무관이자 정보장교일세. 정관계 및 군부와 인맥을 트고, 다양한 정보를 얻고, 분석해서 보고하는 게 일이지. 나는 귀관의 영어실력과 정세판단력을 높이 평가해서 대원수 폐하께 추천했네.”
“황공하옵니다.”
정보장교는 처음이었지만, 김유진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미국의 경제성장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 지금이 기회야. 다양한 인맥을 트고, 전역 후에 금산의 샌프란시스코 지부를 맡으면 좋겠지. 뭐, 군대에 있는 동안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김유진은 일반적인 군인들과 달랐다. 국가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부르짖는 동료들과 달리, 훨씬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미국에서 자란 덕일 터이지만, 그래서 동료장교들은 그가 썩 내키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노백린과 이선의 눈에 들었다.
“귀관은 미육군사관학교장 더글라스 맥아더 준장과 상당한 친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예, 상당한 친분까지는 아니고, 동부전선에서 안면을 튼 정도지요.”
주미공사를 역임한 부친을 따라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김유진은 영어가 유창했고, 사고방식도 그만큼 자유롭고 유연했다. 미국인들과도 말이 잘 통했고, 기동대를 맡기 전에는 주차 러시아 한국군 사령부의 영어통역을 전담했다. 자연히 미군 동부전선 참모장인 맥아더와도 친분을 맺게 되었고, 맥아더는 김유진의 능력과 전공을 인상 깊게 보았다.
“그 맥아더 준장이 지금은 육군사관학교에 있지만, 곧 워싱턴으로 돌아갈 예정이네. 우드 대통령이 옛 참모장 맥아더를 신뢰한다는 건 유명하지. 장차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귀관은 그와 더 친분을 쌓도록 하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야.”
맥아더는 동부전선의 상관인 우드가 대통령이 되자 자연스럽게 군부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미군 최연소 장군이자 최연소 육군사관학교장이 되어 웨스트포인트의 개혁을 이끌었고, 임기가 끝나자 우드의 부름을 받아 워싱턴으로 발령받았다.
‘아, 그 자의식 과잉, 자칭 미국의 시-저한테 잘 보여야 한다 그건가. 하긴, 그 양반이 똑똑하긴 하지.’
김유진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삼가 명을 받듭니다.”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이선이 특명을 내렸다.
“귀관의 활약을 기대하겠네, 김 부령. 그리고 귀관에게 내릴 특명이 하나 더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