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
– 7화에 계속 –
7화 위기의식
기묘년 12월 28일 오시(午時).
임금이 창덕궁 인정전으로 나아가, 월대(月臺)에 올라 문무백관의 진하(進賀)를 기다렸다.
종친과 신료들이 인정전의 품계석에 섰다. 품계석의 정1품에서 종9품에 이르기까지, 조복(朝服)을 차려입은 문무백관이 도열했다.
영종정경부사 완화군 이선은 지체 높은 종친과 원로대신들만이 서 있는 정1품 품계석 앞에 섰다.
“국궁(鞠躬), 사배, 흥(興), 평신(平身)!”
찬의의 여창(臚唱)에 종친과 문무백관이 일제히 네 번 절하며 사배례를 행하였다.
“궤(跪)!”
종친과 문무백관이 꿇어앉았다.
의례의 절차가 계속될 때마다 사배례와 꿇어앉기가 반복되었다.
마지막으로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이 예물을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 중궁전의 상전(尙傳)에게 전하였다.
“국궁, 사배, 흥, 평신!”
다시 네 번 절하며 사배를 행하자, 찬의가 의례가 끝났음을 알리었다.
‘춥다. 빨리 끝내자.’
사배례를 총 4번, 16번이나 절하며 한겨울 차가운 돌바닥에 절하기를 반복하자, 이선은 왕실 의례에 대해 처음으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조정의 원로대신인 영중추부사 이유원, 영돈녕부사 홍순목(洪淳穆), 판중추부사 한계원(韓啓源)이 앞에 나아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하늘과 조종께서 말없이 돕고 안정시켜 주시어 세자궁의 두후가 며칠 안에 나으시니, 막대한 경사가 무엇인들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온 동방의 생명 있는 무리가 춤추며 기뻐서 축하하는 기상이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합니다.”
“세자궁의 두후가 나은 것은 우리 동방의 억만년 그지없는 복이니, 신들의 기쁜 마음을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 돕고 조종께서 안정시켜 주시어 세자궁의 두후가 나으니, 우리 동방의 막대한 경사이고 그지없는 복입니다. 기뻐하는 소리와 화협하는 기운이 온 나라 안에 넘쳐 춤추며 기뻐서 축하하는 것을 형용하여 아뢸 수 없습니다.”
원로대신들의 찬사에, 임금이 기쁘게 화답했다.
“세자궁의 두후가 편안한 것이 하늘과 조종께서 도우시고 조야의 신민이 축원한 바라는 것은 참으로 경들의 말과 같다.”
“우리 성상의 지극히 인자하신 덕이 위로 하늘에 사무쳐서 이 막대한 경사를 가져왔으니, 신들의 찬송이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 갑니다.”
‘……가뜩이나 추운데 손발 오그라들겠다.’
맨 앞자리에 서 있는 덕에 모든 대화를 생생히 듣고 있는 이선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의례적인 찬사라고는 하나, 임금에게 지나치게 찬양을 바치는 대신들의 말에 낯 뜨거울 지경이었다.
세자의 천연두가 회복된 건 분명 기쁜 일이긴 하지만, 지나친 과잉의례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역시 예의의 나라다워. 국제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심각히 돌아가는데 무사태평한…….’
이선이 속으로 혀를 차는데, 임금이 직접 월대에서 일어나 교서를 낭독할 준비를 했다.
이에 종친과 문무백관은 다시 돌바닥에 엎드려야 했다.
“생각하건대, 내가 어렵고 큰 사업을 이어받고 다행히 뒤를 이을 원량(元良)이 있어, 세자의 명위를 정하므로 종묘의 제사를 맡을 자가 있는 것이 기쁘고, 덕행이 일찍부터 삼선(三善)에 나아가므로 점점 자라나는 것이 가상하다. 훌륭한 용모와 아름다운 목소리는 온화하고 문채 나는 명예에 합당하고 제왕의 풍채와 제왕의 용자는 뛰어나 의용을 나타내며,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질이 빼어나서 종묘사직의 부탁이 본디부터 정해지고, 광명하고 원만하며 빛나고 윤택하다는 칭송이 일어나 신민이 모두 같이 사랑하여 받든다…….”
임금은 세자의 회복을 진하하며, 대역죄나 강상죄(綱常罪), 살인죄나 강도죄와 같은 중죄를 제외한 경범죄자들의 사면을 명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 나라가 이토록 태평하고, 과인의 치세가 안정이 되며, 세자의 환후가 회복됨에는 조종의 보살핌 덕이나, 또한 경들의 노고가 크다. 이에 관직에 있는 자는 모두 한 자급을 더하며, 주연을 열어 이 기쁨을 경들과 함께 누리고자 한다.”
“전하의 성덕(聖德)이 하늘과도 같사옵니다!”
원로대신들의 외침에 문무백관이 일제히 외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
종친들은 휘장(揮帳)이 쳐진 곳에 따로 앉아 가장 존귀한 대접을 받았다.
종친 중에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신분이 높은 완화군은 상석에 앉았다. 다들 완화군에게 예의를 표하면서도, 따로 말을 섞으려는 종친들은 없었다.
‘굳이 나와의 친분을 드러내어 운현궁 편이요, 하려는 치들은 없겠지.’
이선 본인의 생각이나 처신과 달리, 그는 중궁전의 경계 대상이자 운현궁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종친들이 그를 내심 꺼린다는 건 미루어 짐작이 됐다.
종친과 문무백관에게 음식과 술이 나누어지고, 궁중 악사와 무희가 음악과 무용을 선보였다.
과연 궁중 연회답게 음식은 하나같이 맛있고, 음악과 무용은 격조 높았다.
종친과 문무백관은 연회를 한껏 즐기며, 태평성대와 임금의 덕을 찬양했다.
“모든 경사 때마다 다들 막대한 경사라고 하지만, 오늘의 경사야말로 틀림없이 막대한 경사입니다!”
“성상의 치세가 이토록 태평성대이니, 춤추며 찬축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조종의 보살핌과 성상의 밝은 정치로 태평성대가 와서 종묘사직이 만대에 이를 것이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만대는 무슨, 이런 식으로 하다간 30년 뒤에 망할 나라다.’
이선은 대신들의 아부에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이 중에서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단 말인가?’
이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임금부터 신하에 이르기까지, 다들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더없이 험난한 시대가 조선을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지금의 조선은 거친 파도 위를 떠다니는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지나지 않는다.’
1880년대가 되면, 그간 세계와 담을 쌓고 있던 은둔의 나라 조선을 노리는 열강의 접근과 압력이 심화될 시기였다.
영국과 러시아는 전 세계적인 패권 다툼,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을 1880년대에 동아시아까지 연장하게 된다.
청과 일본은 동양의 패권을 놓고 대립을 시작한다. 이들의 다툼에서 가장 큰 관심사이자, 가장 큰 희생양이 될 나라는 단연코 조선이었다.
‘하지만 누가 그런 위기를 예상하고 있는가.’
없었다. 적어도 이 궁궐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지배 계급 중에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완화군, 이래서 네가 날 보낸 것이구나.’
이선은 문득 서삼릉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 일찍 죽은 게 행운이라고? 그렇지 않아. 나도 내 나라를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고.
‘혼령으로 이승을 떠돌며, 나라가 망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네 무력함이 한스러웠던 거구나.’
완화군 이선의 육체에 미래인 이선우의 정신이 깃들어져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는 어떤 섭리를 느꼈다.
– 나 대신 네가 내 꿈을 이뤄 줄 수 있겠어?
‘앞으로 30년 뒤에 망할 운명인 이 나라와 곧 죽을지도 모르는 내 운명을 바꿔 보려고? 좋다. 해 보자.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못할 것도 없지.’
이선은 화려한 궁중 연회를 지켜보며, 미래의 역사를 바꿔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선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던 순간 했던 결심을 되새겼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이 나라는 망하지 않으리라. 절대 죽지 않는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나 이선도, 이 나라 조선도!’
궁중 연회가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온 이선은, 현재 자신의 대차대조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첫째, 왕의 서장자라는 신분.’
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왕의 큰아들이라는 존귀한 신분이지만, 차기 왕위를 계승할 세자의 형이라는 위치는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중전의 경계를 받는 건 물론이요, 역모의 수괴로 추대되어 어느 날 비명으로 죽기 딱 좋은 신분이었다.
‘둘째, 대원군의 총애.’
이는 분명한 자산이었다.
대원군이 조선의 보수파를 대표한다지만,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유림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대원군은 결단력과 과단성이 있는 정치가였고, 집정 10년 동안 조선의 오래 묵은 적폐들을 도려냈다. 백성들 사이에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형성되는 것도 당연했다.
구식군인의 임오군란,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 동학의 갑오 농민 전쟁에 이르기까지 임금과 중전에 반대한 모든 시도에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대원군이 추대되었다. 그만큼 대원군에 대한 백성의 지지가 컸던 덕이었다.
‘대원군을 잘 설득해 보면, 답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건 현시점의 조선에서 그만한 능력을 갖춘 정치가는 없으니까.’
이선은 앞으로 대원군에게 개국과 근대화의 필요성을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셋째, 내 자신의 능력.’
단적으로 말해서, 현재 조선에서 이선만한 능력자는 없었다.
미래의 이선우는 외교사 전공자였고, 외교사 전공자는 특히 외국어를 잘할 필요가 있었다.
근대 외교사는 특히 조선과 관련된 주변 열강들의 1차 사료를 볼 필요가 있었으므로, 조선과 중국의 공문서에 활용됐던 한문, 조선과 주요한 관계였던 일본어, 19세기 외교의 공용어였던 프랑스어 등을 최소한 독해는 할 줄 알아야 했다.
‘학계의 만국 공용어인 영어는 기본이고.’
그런고로, 이선우는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한문을 독해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는 곧 서양 열강과 교섭해야 하나, 아무도 서양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조선에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넷째,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현재에 대한 지식. 특히 국제 정세.’
이선우가 집중적으로 파고든 게 바로 이 시대, 1880년대 열강들의 대(對) 조선 정책이었다.
어릴 적부터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던 이선우는, 특히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자신이 흥미가 꽂힌 분야, 특히 근대사에 광적으로 파고들었던 이선우였다.
그 결과, 이 시대의 웬만한 사건은 연월일 단위로 기억하고, 웬만한 인물은 행동을 줄줄 꿰고 있었다.
열강들의 가장 내밀한 정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니, 어쩌면 이선은 조선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정보가 뛰어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완화군의 영혼이 날 선택한 것이겠지. 사건과 인물을 꿰고 있다는 건 중요한 강점이다. 누굴 나의 동지로 만들지, 적으로 봐야 할지 뚜렷하게 알 수 있으니까.’
물론 이선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개입하게 된다면, 그 역사는 뒤틀리게 될 것이다. 뒤틀린 역사가 어떻게 변할지는 그 자신도 예측 불허였다.
‘…… 완화군에 대해서도 좀 알아뒀으면 좋았을걸.’
완화군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나의 가장 큰 단점은 이거겠군. 곧 죽을 운명이라는 것.’
경진년, 1880년에 완화군 이선이 죽는다.
‘당장 내일부터 경진년인데, 이에 대해 대비를 해야지. 일단 내가 살고 봐야 개혁이든 외교든 할 것 아닌가.’
아직까지 팔팔한 이선으로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게 저승사자가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병사?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건 병사인데. 어떤 병일까? 세자처럼 천연두인가?’
일전에도 생각했듯이, 현재로선 가장 가능성 높아 보이는 사인(死因)은 천연두였다. 이선은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일단 천연두부터 예방해야겠다.’
현재 조선에서 천연두를 확실히 예방할 방법은 없었다. 근대적 종두법이 들어오기 전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선에서 종두법을 실시한 게 딱 이 무렵 아닌가? 수소문해 봐야겠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지석영(池錫永)이 종두법을 배워 천연두를 예방한 게 1880년대 초였다.
‘자연사일 경우엔 천연두가 가장 가능성이 높고. 자연사가 아니라면……. 설마, 암살?’
종친인 이선을 대놓고 죽이려는 자야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순 없었다.
‘앞으로 음식을 철저히 가려 먹어야겠군. 질병 예방을 위해서도, 독살을 막기 위해서도.’
이선은 음식에 대해서 철저히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믿을 만한 경호원도 있어야겠어. 그렇다면 역시…….’
대비책을 골몰하던 이선은, 안영흠을 불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