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01
3부 116화 워싱턴 회의
1922년 6월 2일, 미합중국 수도 워싱턴 D.C에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군비통제 회담이자, ‘베르사유 체제’의 아시아-태평양 버전이었다.
미국의 주도하에 아시아-태평양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중화민국, 일본, 대한제국 등 9개국 대표가 워싱턴에 초청되었다.
패전국 독일과 국제사회에서 거부당하고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는 배제되었다.
“워싱턴 국제회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항구적 평화를 목적으로, 군비축소를 성사시키는 역사적인 회의로 남게 될 것입니다.”
회의를 주최한 미국 대통령 레너드 우드의 연설은 ‘항구적 평화를 위한 군비축소’를 약속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이상주의자라고 해도 없으리라.
국제회의의 목적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군사비 지출과 해군의 군축을 첫 번째로 꼽았지만, 주된 목표는 제국주의 열강 간에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아시아-태평양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해군 군축조약은 5대 해군 강국인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를 대상으로 했다.
동시에 아시아-태평양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위해 회담을 주도할 5개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그리고 한국이었다.
파리강화회의 못지않은, 신질서를 위한 제국주의 열강 간의 치열한 외교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 * *
워싱턴회의를 앞둔 각국의 이해관계는 분명했다.
옛 세계 패권국,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은 미국에 주도권을 넘겨주었다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하길 원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이 지역에서 영국은 보조적인 위치로 내려가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지. 대전쟁 이후 미국과의 공조는 불가피한 일이니.”
영국은 미국 덕에 세계대전에서 승전할 수 있었고,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건함정책에 심각한 우려를 느끼고 있으며, 태평양 일대에 일본의 해군력을 제한하길 원합니다. 이를 위해 해군 군축은 불가피합니다.”
“미국이 원하는 군축은 어느 수준이오?”
“미국과 영국이 1:1의 비율을 유지하고, 일본은 그 절반으로 묶는 것입니다.”
로이드조지의 설명을 듣던 조지 5세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영국은 세계 1위의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2-3위, 즉 독일과 미국을 합친 것보다 많은 군함을 보유한다는 전략을 채택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1:1의 비율이라니.
“조약을 지지해야 합니다. 미국과 건함경쟁을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동의하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영국은 더 이상 홀로 세계의 패권을 유지할 수 없었다. 떠오르는 강대국 미국과의 협력은 필수불가결이었다.
“또한 미국은 영일한동맹의 해체를 원합니다. 1923년으로 만료될 동맹을 더 이상 연장해서는 안 되며, 태평양을 향한 일본의 야욕을 최대한 억제하길 원합니다.”
“20년 동맹을 해체해야 하는가.”
“현재로선, 도쿄나 서울과의 동맹을 유지하기보다는 워싱턴과의 협력이 필수불가결입니다.”
조지 5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맹이 만료되더라도, 이들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막는 동양의 방파제가 되어 줘야 합니다. 이제 러시아는 지정학상의 적일 뿐만 아니라, 이념의 적이기도 합니다.”
로이드조지 내각은 처칠과 보수당 일각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적군의 승리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적백내전에서 손을 뗀 후, 러시아 봉쇄도 해제하여 무역관계를 수립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늦추는 건 아니었다. 러시아는 영국과 한 세기 동안 ‘그레이트 게임’을 펼친 숙적이었고, 잠시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손을 잡은 것뿐이었다. 하물며 세계혁명을 부르짖는 볼셰비키는 유럽혁명과 대영제국의 해체를 누구보다 염원하고 있을 터였다.
“지난 러일전쟁에서는 일본이 극동의 헌병이 되어 주었지만, 저들이 해군력 확대와 남중국-태평양 진출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상, 아시아의 떠오르는 육군 강국인 한국이 그 역할을 수행해 줘야 합니다.”
“과연 한국은 러시아를 막는 보루가 되어 줘야지. 한국은 영국의 우방으로서 건재해 줘야 하오.”
“실로 그렇습니다. 적이 되면 곤란하지요.”
조지 5세는 며칠 뒤로 다가온 한국의 국혼을 떠올렸다.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한국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태자와 로마노프 왕가의 후예인 타티야나의 국혼을 추진하는 것도, 한국 황제가 소비에트에게 적대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겠소?”
“공식적인 발표로는 정치적 의미 없이 두 남녀가 사랑한 결과라고 하는데, 왕가 간의 결합인데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적군에 패퇴한 백군 잔당을 결집시키고, 극동 러시아를 장악하려는 방편이겠지요. 아무튼 영국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이번만큼은 이선이 국익보다는 ‘아들의 염원’을 들어준 것이었지만, 정치가나 외교관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속내야 어떻든 다 그렇게 발표하는 거지. 그만한 이익이 있으니 대내외적 반발을 무릅쓰고 추진하는 게 아니겠소? 인종이나 종교 문제보다 국익이 더 중요한 거지. 충분히 이해하오.”
고개를 끄덕거리던 조지 5세는 문득 씁쓸함을 느꼈다. 그가 씁쓸한 건, 인종이나 종교 문제가 아니라 한때 자신이 올가 또는 타티야나를 며느릿감으로 여겼다는 점이었다. 바로 하객으로 참석할 예정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의 국혼 후보였다.
‘이번에 결혼하는 게 에드워드라면 얼마나 좋겠나! 에드워드, 이 어리석은 놈. 올가나 타티야나라면 영국의 왕비이자 윈저 왕가의 며느리로서 손색이 없는데. 태자가 돼서 나이 서른이 가까워지도록 결혼할 생각은 안 하고 정부(情婦)만 거느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이야! 웨일스 공이 유부녀들하고나 놀아나고 있으니, 이거 남사스러워서 원.’
조지 5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나이 30이 다 되도록 결혼도 거부하고, 애인을 갈아 치우며 방종한 삶을 사는 장남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근엄한 조지 5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장남 생각에 불쾌감을 느낀 조지 5세는, 일부러 생각을 떨치기 위해 화제를 전환했다.
“듣자 하니 윈스턴 경이 한국 황제와 술 마시면서 꽤나 친해졌다던데. 황제도 애주가라면서.”
“애주가끼리 잘 통했다곤 하지만, 속내를 드러낼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윈스턴 경이 러시아 내전 개입 조건으로 전차와 항공기 기술을 넘겨 주기로 했으니, 우리가 당한 셈이지요. 정작 내전은 제대로 개입도 하지 않고 넘어갔으니.”
이선과 ‘주정뱅이 윈스턴’과의 친분이 술로 이뤄졌다는 일화는 영국 내에서도 꽤나 유명했다.
처칠은 절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한국 황제로부터 ‘술 접대’를 받은 처칠이 술김에 한국에 전차와 항공기 최신기술을 넘겨줬다는 소문이 퍼졌다.
처칠이 강력히 주장했다고는 하지만, 내각의 협의로 결정된 사항이니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만큼 처칠이 애주가로 유명한 탓에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뭐, 그래도 극동 러시아에 개입해서 반소 정권을 수립했잖소. 소비에트가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을 차단했지. 난 국혼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정부에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국의 존재가치는 러시아의 태평양-중국 진출을 막는 데 있지요.”
“에드워드가 한국 황제에게 우리의 뜻을 잘 전해 주면 좋겠군. 동맹이 종료된다고 해서 우리의 우호가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걸.”
“잘해 주실 겁니다. 어차피 한국은 만주와 극동 러시아 문제를 놓고 영국의 양해가 필요합니다. 해군 군축조약에서도 빠지기 위해 우리와 미국에 열심히 로비하고 있지요.”
* * *
워싱턴회의 대한제국 대표단은 전권수석 외무대신 이승만, 차석 군무협판 박용만, 특별고문 주미대사 서재필이 대표했다.
총리까지 지낸 서재필이 차관급인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된 건 격에 맞지 않았지만, 대미외교에 서재필을 필요로 했다. 서재필은 오래전부터 공화당과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 공화당 행정부의 파트너로 적절했다.
“알다시피 미국 신임 대통령 레너드 우드는 군의관 출신이오. 경도 군의관 출신이고. 대화가 잘 통하리라 생각하오.”
“황공하오나 신도 이제 늙었습니다. 대미외교의 최전선에는 저보다 우남(이승만)이나 우사(김규식)가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들은 유능하니 대한국 외교의 미래가 되어주겠지. 하지만 우남은 편벽한 측면이 있고, 우사는 이상주의적인 측면이 있소.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윌슨의 제자로 유명해져 친민주당 인사로 분류되는 게 문제요. 공화당과는 경이 진작부터 인맥을 쌓아 오지 않았소. 지금까지는 영국이 동맹이었지만, 앞으로는 미국을 어떻게든 최우호국으로 끌어들여야 하오. 경이 나서 줬으면 하오.”
황제의 설득에 서재필도 끝내 수락했다.
이선은 서재필을 배려해 주미대사를 장관급으로 격상시켜 외무대신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
“미국의 요구대로 한영일동맹을 만료하는 대신, 한미영일 4국 협상을 구축하는 게 새로운 목표요.”
한영일동맹을 대체할 대한제국의 새로운 목표는 아시아-태평양 한미영일 4국 앙탕트(Entent) 체제, 더 직접적으로는 한미 간의 관계 강화였다.
“물론, 지금 당장은 미국이 일본과 협력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태평양의 패권을 놓고 갈라지게 될 거요. 우린 그 틈을 파고들어야 하오. 그러려면 미국에 대한이 얼마나 유용한 나라인지 보여 줘야겠지.”
현재까지는 한국과 일본이 동맹으로 묶여 있지만, 이제 일본과의 관계를 슬슬 청산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일 간에 경쟁을 부추기고, 미국과 영국의 양해를 얻어, 만주와 연해주를 대한제국의 단독 세력권으로 공인받을 계획이었다.
“미국은 최대한 일본의 해군력을 제한하려고 들 거요. 우린 표면적으로는 국외자인척 중립을 지키되, 내밀히 미국에 협조해야 하오.”
한국은 해군 군축조약에 묶이지 않기 위해 다방면으로 로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실제 한국의 해군력은 5대 해군 강국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작았으므로, 충분히 설득력은 있었다.
“5대국과 달리 해군 군축조약에서는 대한의 발언권이 적을 텐데, 묘안이 있으십니까?”
“다 방법이 있지요.”
이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미합중국, 뉴욕.
주미대한제국대사관 차석주재무관 김유진 부령은 ‘개인적’으로 ‘친구’를 만날 예정이었다.
김유진과 ‘친구’는 카드게임으로 엮인 끈끈한 우정을 자랑했다.
‘친구’는 바로 전 해군차관이자 1920년 미국 대선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였다.
“40년 전, 왕자 시절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링컨을 인용했다지요?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919년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리를 방문 중이던 해군차관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깊은 감명을 받은 듯 이선의 연설, 아니 링컨의 경구를 읊었다.
“정확히 하면, 1883년 뉴욕에서였지요.”
“내가 한 살 때 일이군요. 그때 나도 뉴욕에 있었는데. 물론 기억에는 없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때만 해도 어린 왕자가 뭘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군주의 입에서 나오는 외교적 수사라면 무서운 거고, 만약 가슴 속에 품은 진심이라면 더 무서운 거지요.”
루스벨트는 정색하며 동료에게 일깨어 주었다. 이선의 연설을 진심으로 여기는 이들은 진정으로 감격하여 경의를 표했고, 외교적 수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이선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에 찬사를 보냈다.
“아무튼 한국 황제의 진보성에는 경외감을 느낍니다. 언제 한번 한국을 방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뭐, 황제가 시대의 걸물인 건 틀림없지만,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먼 나라지요. 서양은 어림도 없고, 당장 일본부터 따라잡아야······.”
“산동과 태평양 섬들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봤지요? 장차 미합중국과 일본은 태평양을 놓고 경쟁하게 될 겁니다. 일본의 배후에, 미국의 이익과 이념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우방이 있으면 좋지요. 안 그래도 이승만 박사가 우리에게 꽤나 러브콜을 보냅디다. 워싱턴에선 아직까진 일본이 낫다고 여기지만, 결국 언젠가는 일본과 승부를 봐야 할 겁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한국에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 루스벨트의 정치적 잠재성을 인지하고 있는 이선은, 진작 이승만으로 하여금 친분을 맺도록 하게 해 둔 터였다.
하지만 1922년 시점에서, 이승만이 대놓고 루스벨트와 접촉하기는 곤란했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전권대표로서 워싱턴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가뜩이나 윌슨과의 친분으로 ‘친민주당 인사’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대놓고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우드-쿨리지와 경쟁했던 루스벨트와 친분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을 대신해서 야인 신분인 루스벨트와 접촉을 취하게 된 건, 젊은 주재무관 김유진이었다.
워싱턴 회의 공식 대표단도 아니고, 미국 군부에서는 그를 ‘촉망받는 젊은 장교지만, 어딘가 엉뚱하고 놀기 좋아하는’ 인사로 분류했다.
맥아더가 김유진의 ‘전우’로서 친분을 다지듯, 루스벨트는 ‘카드게임 친구’였다.
“에잇, 이 판은 무효야! 당신, 밑장빼기했지! 밑장빼기하다 걸리면 손목 날아가는 거 몰라?”
“크헤헤헤! 왜 져 놓고서 화풀이십니까? 이건 제 실력입니다, 실력.”
루스벨트가 벌컥 화를 내며 카드를 내던지자, 김유진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판돈을 쓸어 갔다.
“젠장, 한국 사관학교에서는 카드 치는 법만 가르치나?”
“그럴 리가요.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제 실력입니다, 실력.”
루스벨트는 헛웃음을 흘리면서 숨겨 놓은 위스키에 입을 댔다.
“제길, 이 망할 금주법. 이런 천하의 악법을 제정한 멍청이들은 전부 정계에서 사라져야 하는데.”
“한국에 오시죠. 최상급 술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허, 작년에 갔다 왔는데 거기까지 다시 가라고?”
1921년 여름, 부통령 선거에 낙마한 루스벨트는 아시아를 여행했다. 대한제국 외무대신 이승만의 ‘개인적인’ 초대를 받아서, 루스벨트는 이선과도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바로 이 아시아 방문 덕에, 루스벨트는 수영장에 빠져서 소아마비와 지체장애에 걸리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원역사대로라면, 루스벨트는 1922년에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뼈를 깎는 재활의 시기를 거치고 있어야 했다.
“황제 폐하께서 각하를 꽤나 마음에 들어하시더군요. 언제든지 다시 만나길 원하십니다.”
“허, 감사한 일이오만 난 야당인 민주당원이오. 나랑 친해져 봐야 공화당에서 의심할걸. 당분간은 공화당 세상일 텐데.”
루스벨트는 이선의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 정치적 파트너를 의미한다는 걸 인지했다.
“그래서 저를 보내신 거 아니겠습니까. 전 원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마이너리티거든요.”
루스벨트는 카드 판을 치우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카드나 치러 온 게 아닌 줄 알았소. 그래, 이야기하고 싶은 바가 뭐요?”
작가의 말
실제 1921년 워싱턴회의에 이승만과 서재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하긴 했습니다. 문전박대 당했지만…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두번째 좌절에 외교독립노선이 몰락하게 되지요.
여기선 6대 열강의 일원으로 참가한 대한제국. 과연 변화한 역사에서 이선은 어떤 책략을 꾸밀까요?
??? : 크헤헤헤!
10월 3일 개천절은 휴재합니다. 대신 4일에 연참할 예정입니다. 이용에 참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