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02
3부 117화 모던 코리아
웨일스 공 에드워드와 사절단을 태운 영국 순양전함 리나운은 한국 남해안을 따라 ‘고적지 순방’에 나섰다.
부산, 진해, 통영, 거제, 사천, 여수, 해남 등 이순신의 역사적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목표였다.
이영과 정부 대표단은 국혼과 정무를 위해 황성으로 돌아가고, 정친왕 이안이 리나운에서 동행하며 안내역을 맡았다.
“여기가 바로 이순신 제독이 역사적 승리를 거둔 한산도 해역입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오오, 이곳이 바로!”
영국 해군 장교들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쓰시마 해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방한 시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는 데 만족했다.
“드레이크가 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넬슨이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영국을 수호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꿨듯이,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수호하고 도요토미의 대륙침략 야욕을 저지했습니다.”
“이순신 제독은 그간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불멸의 이름을 얻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순신에 대해 너무나도 몰랐습니다. 정말 위대합니다, 제독!”
“와아아아!”
해양대국으로서 콧대 높은 영국 해군도 이순신에게는 경의를 표했다. 그동안 한국이 열심히 홍보한 덕도 있었지만, 실제 이순신의 전공은 서양 연구자들이 볼 때도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에드워드와 영국 해군 장교단은 이순신의 직계10대손인 이규풍 제독의 안내를 받아 통영 충렬사(忠烈祀)를 방문하였다.
추상과도 같았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충렬사는 살아남았고, 근래 충무공 선양 운동의 일환으로 성역(聖域)화되었다. 역대 삼도수군통제사가 그랬듯이 해군 함대사령관은 반드시 충렬사를 참배하는 게 의무였다.
“제독을 향하여- 경례!”
해군 대령 정복 차림의 에드워드와 장교단은 이순신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향해 거수경례하며 경의를 표했다.
“이 제문은 황제 폐하의 고조부가 되시는 정조 선황제께서 친히 쓰신 어제문(御製文)입니다. 또한, 제독의 전공과 명성을 흠모한 중국 명나라 만력제가 하사한 8종류의 보물이 전시 중입니다.”
만력제가 이순신에게 하사한 팔사품(八賜品)은 귀한 유물로 보관되었다.
조선은 대보단을 쌓고 명나라 멸망 후에도 임금이 친히 제사를 올리며 ‘고려천자’ 만력제의 은덕을 칭송해 왔다. 갑신경장 이후 제사는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만력제는 높이 평가되었다. 니콜라이 2세를 ‘아라사 고려천자’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오, 중국 황제의 보물이라. 적이었던 일본에서도 이순신 제독을 높이 평가하더군요. 동양에서 제독을 얼마나 존숭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기실 서양에 이순신을 최초로 알린 게 일본 해군이었으니,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대영제국 황태자 전하 천세!”
“한영동맹 만세!”
에드워드가 가는 곳마다 태극기와 유니언잭이 걸려있고, 한국인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가고시마에서 사무라이 갑옷을 입었던 에드워드는, 통영을 관광하면서 이선이 선물한 조선 왕실의 두정갑을 착용했다.
“오오, 영국 황태자께서 조선의 갑옷을 입으셨다!”
“영국 황태자께서는 이순신 제독을 존경하시니 우리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선물하신 거라네.”
“과연! 대영제국 황태자 전하 천세!”
1914년 6월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착용하여 화제가 되었던 갑옷과 같은 종류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외국인, 그것도 서양 태자가 조선 갑옷을 입은 건 처음 보았으므로, 한국인들은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와 한국민의 환영에, 대영제국과 영국민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영동맹 만세!”
에드워드는 한국인들의 환호에 감사의 표현을 보냈다. 한국인들은 더더욱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통영 방문을 끝내고 전함 리나운으로 돌아간 에드워드는, 선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갑옷을 벗어 던졌다.
“제길, 더럽게 무겁네. 옛날 무관들은 대단했군. 5월에도 이렇게 더운데, 여름에 이걸 어떻게 입고 싸우나?”
“정말 무게가 상당한걸. 뭐, 유럽에서도 16세기에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웠으니. 이순신 제독도 이걸 입고 싸웠겠지?”
“그래, 이순신 위대한 거 알겠어. 그런데 그 위대한 해군 제독의 후예인 한국 해군은 왜 이 모양인지? 영국 해군이 비교할 가치도 없고, 일본 해군과 비교해도 소규모 수준인데.”
밖에서는 경의를 표하던 에드워드가, 선실로 돌아가서는 비웃는 어조로 빈정거렸다.
“그거야 일본은 동양의 영국을 자처하는 섬나라고, 한국은 동양의 프랑스를 자처하는 대륙국가니까 그렇지. 프랑스도 육군에 집중하잖아.”
루이 마운트배튼이 에드워드를 다독였다. 6촌 형을 잘 아는 루이로서는, 에드워드가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얼마나 짜증이 났을지 짐작이 갔다.
“일본 따위가 동양의 영국이라고! 가소롭군. 프랑스인들도 한국 따위가 동양의 프랑스를 자처하는 걸 알면 기절할걸. 그 치들 자존심이 얼마나 센데.”
에드워드가 코웃음을 쳤다. 루이는 왠지 모르게 한국을 옹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군은 독일을 격파하는 데 함께한 전우야. 실제로 한국군은 동부전선에서 큰 활약을 보였잖나. 페트로그라드 전투의 승리자라고.”
“알아, 알아. 그러니 내가 저들을 위해 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흉내까지 내주는 거 아닌가.”
에드워드는 내심 동양인을 멸시했지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37년 전에 우리 해군이 포트 해밀턴(거문도)을 점령할 때만 해도, 이 나라는 구제불능의 미개국이라고 했단 말이야. 그때랑 비교하면 굉장한 진보임에는 틀림없지.”
1885년, 영국 해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그때만 해도 영국은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이자 미개국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제는 동맹의 일원으로, 영국 전함은 점령이 아닌 친선의 목적으로, 그것도 웨일스 공이 직접 한국을 방문했으니, 역사의 변화란 놀라웠다.
에드워드와 영국 해군은 여수에서 거문도를 방문하길 희망했다. 명목상의 이유는 거문도에서 순직한 영국 수병의 무덤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난색을 표했다. 황제가 웨일스 공을 기다린다는 이유로 거문도 방문을 거절했지만, 실제 이유는 영국이 옛 영토를 점령했던 과거를 떠올리기를 원치 않아서였다. 역사의 변화로 인해, 개항 이후 외국군이 한국 영토를 강점한 건 거문도가 유일한 사례였다.
“그리고 한국 남해안은 경치가 아름답네. 이렇게 섬이 많고 특이한 해안선은 흔치 않지.”
“아아, 정말로 특별한 아름다움이야. 마치 그리스의 에게 해안을 떠올리게 하는군.”
내심 한국을 무시하고 있는 에드워드도, 다도해의 경치는 인정했다.
때는 5월 말, 한창 날씨가 좋을 때였다. 군함 위에서 바라보는 남해안의 풍광은 실로 절경이었다.
한국에 망명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남해안을 처음 보는 건 마찬가지인 마리야와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아, 정말 아름다워! 푸른 바다와 아기자기한 산의 조화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걸.”
“그러게, 올랴와 타냐가 같이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야.”
“국혼 후에 신혼여행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그거 좋은 생각이네. 서울로 돌아간 후에 건의해 보자.”
즐거워하는 마리야와 아나스타샤를 보면서, 이안과 루이 마운트배튼도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제 누이들을 직접 러시아에서 망명을 이끌어 주고, 한국에서도 잘 보살펴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야 황제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임무를 수행한 것뿐입니다.”
루이가 감사를 표하자, 이안은 겸손한 자세로 답했다.
“루이 경과 공주님들은 이종사촌 사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예, 제 어머니와 서거하신 러시아 황후는 자매간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특별했지요.”
잠시 옛일을 떠올리던 루이는, 추억에 잠겼다.
아나스타샤는 이안과 루이를 흘깃 쳐다봤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루이는 정말 잘생긴 청년 장교였다. 로마노프 왕가의 신랑감으로서, 가문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외모로 보나 빠짐이 없었다.
‘마샤가 디키와 결혼하면 좋은 일이야.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망명으로부터 어언 4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안은 5남매를 정중하고 친절히 대하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이진과 타티야나가 국혼을 올리게 되면서, 이안의 처신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이제 황태자의 처가였다.
자연히, 이안에 대한 마리야의 사랑도 점차 식어갔다. 낭만적인 연애를 꿈꾸는 마리야로서는, 이안의 무덤덤한 태도에 자신도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나스타샤는 이안에 대한 연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올가와 타티야나가 결혼하면, 이제 남은 건 마리야와 자신뿐이었다. 더이상 마리야가 경쟁자가 아닐지라도, 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놓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추한 질투심이라고 자책하면서도, 아나스타샤는 이안을 포기할 수 없었다.
***
1922년 6월 1일, 인천항.
웨일스 공 에드워드가 탑승한 전함 리나운이 인천항에 입항하자, 21발의 예포가 발사되었다. 리나운에서도 답례로 예포를 발사했다.
웨일스 공 일행이 하선하자, 황실 군악대는 영국 국가와 한국 국가를 번갈아 연주했다.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태자 이진이 웨일스 공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웨일스 공 전하! 황제 폐하를 대리하여, 전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이진과 에드워드는 정중히 악수를 했다.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1913년 이진은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행사를 참관한 후, 영국도 방문한 바 있었다.
“그동안 방문하시면서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더군요. 한국인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즐거운 방문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즐거우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에드워드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참으로 세계적인 경사입니다.”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와 주신 덕에 국혼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이진은 진심으로 에드워드의 방한을 기뻐했다.
에드워드의 방일과 한영수교 40주년 기념행사에 맞물린 덕이라고는 하지만, ‘대영제국 황태자’가 하객으로 참석해 준 덕에 국혼의 격이 더 올랐다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부왕 폐하와 니콜라이 2세는 사촌 간이셨으니, 타티야나 여대공은 제게 있어 육촌이지요.”
“그럼 이제 저와 전하도 먼 친척이 되었군요.”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제 유럽 왕실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내심 이진과 타티야나의 결혼을 고깝게 여기는 에드워드였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축하했다.
“해군 대위 루이 마운트배튼 경입니다. 제게는 육촌형제가 됩니다.”
에드워드에게 해군 장교단을 소개받던 이진은, 루이 마운트배튼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이번에 신랑 들러리를 맡아 주신 분이군요. 감사드립니다.”
“전하의 국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진은 크게 기뻐하며 루이와 악수했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서 서울로 가시지요.”
“그러시지요. 곧 황제 폐하를 뵐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쁩니다.”
웨일스 공과 영국 대표단을 태운 황실 특별 열차는 한 시간 만에 경인선을 주파하여 황성 중앙역(서울역)에 도착했다.
역에는 대형 유니온잭이 걸려있었다. 역전에는 수많은 인파가 도열, 태극기와 유니온잭을 들고 만세를 외쳤다.
“대영제국 황태자 전하 천세!”
“한영동맹 만세!”
“환대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에드워드는 손을 들며 환영인파에 화답했다.
에드워드 일행은 황실 귀빈용 전차를 타고 바로 경운궁 인근에 있는 주한영국대사관으로 향했다.
전차 바깥으로 변모한 서울의 풍경을 보던 에드워드는, 처음으로 감탄을 했다.
“서울은 남해안과는 완전히 다르군. 부산만 해도 아직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서울은 도쿄와 비교해도 근대도시로서 손색이 없는걸.”
“그렇습니다, 전하. 제가 처음 서울을 부임했을 때와 비교하면, 천지개벽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1880년대에 제2대 주한영국영사를 재임한 노(老) 외교관 어니스트 사토우(Ernest Mason Satow)가 과거의 서울에 대해 설명했다.
1860년대 주일 서기관으로 처음 부임한 이래, 수십 년에 걸쳐 일본, 중국, 한국에서 외교관을 모두 역임한 사토우는 영국 동아시아 외교의 상징이었다.
특히 1880년대 초에 일본을 밀사로 방문한 승려 이동인으로부터 조선어를 배운 사토우는, 최초로 조선어를 익힌 영국 외교관이 되어 조선에 부임했다.
어느덧 은퇴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사토우는 한영수교 4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히 초청되었다.
“경이 부임했던 시기에는 어땠습니까?”
“1880년대의 서울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초가집만 가득할 뿐, 서양식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 영국 영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이 최초의 양옥이지요. 도로는 끔찍했습니다. 길도 좁았고, 그나마 오물로 가득 차 있었지요. 하지만 1900년대에 방문하니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도로가 넓어지고, 관청을 비롯해 번듯한 건물이 많아졌습니다. 전기가 도입되어 전차가 운행을 시작했지요.”
옛일을 떠올리던 사토우는 거듭 감탄했다.
“1920년대의 서울은 더 놀라울 정도로 변했군요. 웬만한 유럽의 도시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한국 속담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40년이나 지났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이제 이 늙은이들 기억 속에나 남아 있겠습니다마는, 과거의 한성은 흔적만 남아 있군요.”
그 말처럼, 서울은 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지지리도 가난하고, 헐벗고, 어둡고, 더럽고, 좁아터진 한양은 지명으로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활짝 펼쳐진 대로에 서양 고전 양식과 조선의 기와집이 조화를 이루고, 중절모를 쓰고 멋들어진 양복을 입은 ‘모던보이’와 양산을 쓰고 화려한 양장을 입은 ‘모던걸’이 여전히 갓을 쓰고 하얀 한복을 입은 노인들과 같은 거리를 걸었다.
교통의 중심지인 황성 중앙역에는 끊임없이 전국을 횡단하는 기차가 들어오고, 황성 곳곳을 누비는 전차에는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해가 지면 가로등이 켜져 도심의 어둠을 밝히고, 당대의 최신 기술인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며,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소식을 전했다. 모던보이들이 드나드는 ‘구락부(클럽)’의 측음기에서는 서양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에이, 그래도 아직 유럽에 비견할 정도는 아닌 듯싶소. 서울을 런던이나 파리에 비교할 수 있소?”
“물론 런던과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저들은 단 40년 만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40년 만에 서울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게 바로 황제가 추진한 근대화 정책의 성과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40년 뒤에는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면 서울은 아직 한참 뒤떨어 보일지 몰라도, 영국이 18세기 후반부터 140년 동안 전개한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한국은 단 40년 만에 신속하게 압축적으로 진행하였다.
혹자는 설령 그 근대화가 수도인 서울과 제2수도 평양, 부산·인천·원산 등 무역이 번성하는 개항장의 도시로만 한정되어 있다고 비판할 수 있었다. 여전히 향촌은 가난하고 전근대적인 면모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1880년대의 조선을 기억하는 이라면, 1920년대 한국에 한껏 관대한 평가를 할 수 있으리라.
1882년 이선이 조선으로 귀국하여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 지 꼭 40년.
서울은 1920년대 미국과 유럽의 도시와 비견될만한 ‘모더니티(Modernity, 근대성)’의 수도였다.
이는 단순히 외관상의 변화만이 아니었다. 1919년 9월 의거에서 드러나듯, 한국인의 내면에는 능동적인 근대적 ‘시민’의 정서가 싹 트고 있었다.
바야흐로 1920년대 대한제국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국가, 모던-코리아로 변모하는 중이었다.
작가의 말
??? : 윈저공의 충무공 코스프레… 이건 귀하군요…
실제 1880년대 한양이 어땠는지는 당대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근대국가 처지가 다 비슷합니다만, 정말이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작중 40년 간의 변화는, 현대사로 치면 1950년대 휴전 직후 폐허가 되었던 서울에서 88올림픽 이후, 1990년대 호황기 서울로의 변모로 비유하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도 정말 놀라운 변화였지요.
연참 예고했는데 못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갑자기 pc에 문제가 생겨서 부팅이 제대로 안되네요(이유 모름). 집필이야 노트북으로 하면 되는데, 비축분을 활용 못하니 문제… 급히 117화로 예정된 회차를 뒤로 돌리고 새로 집필했습니다만, pc 살리지 못하면 쓴거 다시 써야하는데… 아아아ㅠㅠ 이래서 미리미리 클라우드에 백업해야하나 봅니다.
대신 오늘 7500자 이상 분량을 꾹꾹 담았습니다. 비축분 살려내는대로 주중에 연참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