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1
– 71화에 계속 –
71화 이이제이(以夷制夷)
‘청은 일본과 러시아 신경 쓰느라 조선에 행동의 자유를 부여할 거고, 일본은 청과 러시아 신경 쓰느라 부당한 요구를 하지 못하겠지. 러시아는 영국 신경 쓰느라 수세적인 정책을 유지할 거고, 영국도 러시아 신경 쓰느라 고압적으로 나오지 못할 거고. 후, 정말 카드값 돌려 막는 기분이군.’
이선의 정책은 고전적인 이이제이를 넘어 균세(均勢), 즉 세력 균형을 꾀하는 것이었다.
이선이 조청무역장정을 연기하는 동안 러시아 영사 베베르와 접촉하여 조러 수호 조약을 의논하고, 조선에서 박영효와 김옥균을 일본에 파견하여 독자적인 외교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청나라에도 전해졌다.
이 소식은 가뜩이나 이홍장과 조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청의 강경파들을 자극했다.
특히 이홍장의 외교 정책에 비판적이던 청류파 사대부들의 비난이 강했다.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속방인데 독자적으로 외교를 한다는 건 가당치도 않습니다. 통상 대신을 보내 조선의 외교를 대신하게 하소서. 차관을 제공할 게 아니라 직접 교관을 보내 서양식 무기와 군대를 양성하게 하소서.”
“그걸로는 부족하옵니다. 조선에 감국(監國)을 보내 나라를 대신 다스리거나, 아예 중국의 군현으로 합병하소서.”
“일본이 유구를 멋대로 차지한 이상, 언제 조선까지 노릴지도 모릅니다. 속히 조선을 확보하여 유구를 되찾고, 일본을 정벌해 동정(東征)을 완료해야 합니다.”
“일본을 공격하자!”
청류파 사대부들의 상소에 서태후가 이홍장에게 자문했다.
‘…… 이놈들이 현실 감각이 있나? 조선을 병합하고 일본을 공격하자고? 이놈들도 이게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이러는 거겠지? 이건 조선이 아니라 나를 겨냥해서 비난하는 것이렸다?’
이홍장은 즉각 반박했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나, 그 내정과 외교를 자주로 한지 오래입니다. 태종(홍타이지)과 성조(강희제)께서도 조선의 풍습은 중국과 다르니 이를 존중하라 하셨습니다. 어찌 오랜 관습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조선이 서양과 막 수교를 한 지금, 중국이 조선을 함부로 대한다면 서양이 중국을 어찌 신뢰하겠습니까?”
이홍장은 선례를 든 뒤, 자신의 복안을 설명했다.
“일본의 침략을 막겠다는 건, 조선의 힘을 키워 저들을 견제하는 게 가장 비용이 적게 듭니다. 이는 실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는 것이니, 이이제이의 책략입니다. 또 일본을 치겠다는 의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찌 칠 것입니까? 일본은 섬나라입니다. 먼저 북양수사의 군함을 늘려 해군력을 강화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북양 대신 이홍장은 서양에 굴욕적인 것도 모자라, 이제 일본과 조선에 대해서도 한없이 관대하게 구려고 합니다.”
“이홍장은 국가의 힘을 키우려 하지 않고, 그가 이끄는 회군과 북양수사만 강화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이홍장은 본래 탐욕스러운 자입니다. 조선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놈들이 진짜…….’
이홍장은 발끈했다. 역시나 청류파들이 조선이나 일본이 아닌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 걸 파악했다.
“신의 충심은 오직 국가와 황상께 있나이다. 나라에 대한 충성을 효보다 중시하기에, 모친상을 당해 끓는 비애의 시기에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직무에 복귀하였습니다. 하오나 신 또한 사대부의 한 사람으로서 효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합니다. 하물며 신에 대한 혐의까지 쏟아지니 피혐(避嫌)을 하려 합니다. 신은 북양 대신 직례 총독 직위에서 물러나 고향 합비로 돌아가 삼년상을 치르겠사옵니다. 부디 신의 사직을 받아주소서.”
이홍장의 사임 의사에, 총리아문을 이끄는 공친왕이 즉각 서태후에게 항의했다.
“대체 이홍장이 물러나면 누가 조정의 외교를 도맡으며, 누가 회군과 북양 수사를 이끈단 말입니까? 이홍장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하고, 사직을 반려해야 합니다.”
내심 이홍장의 능력과 힘을 경계하여 청류파의 공격을 즐기던 서태후도, 이홍장이 물러나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회군과 북양 수사는 이제 청 조정보다 이홍장 개인에게 더 충성을 바치는 집단이었다. 이홍장이 물러나면, 이들을 통제할 적임자가 없었다.
“외교의 일은 전적으로 북양 대신의 뜻을 존중하니, 세간의 구구한 비난은 신경 쓰지 말고 뜻대로 추진하도록 하라.”
“중당께서 참으로 심려가 크셨겠습니다. 소생이 괜히 책잡히게 한 게 아닐지…….”
이선이 진심으로 위로하는 표정을 짓자, 이홍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문인과 학사들로부터 걸핏하면 이단과 기괴한 것을 숭상한다는 질책을 받고 있소. 일부 중국인들의 마음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소.”
“일부 조선인들의 마음도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릇 양이(攘夷)를 실현하려면 양이(洋夷)의 기술을 받아들여야 하거늘, 무턱대고 배척하고 들면서 어찌 양이를 무찌르겠습니까?”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오. 다들 너무 현실 감각이 없소. 아직도 중화가 세계 제일이오, 오랑캐는 정신으로 무찌를 수 있다는 미몽 속에 살고 있지. 완화군도 개혁을 하려 하니, 앞으로 고생이 많을 것이오.”
이홍장은 자국의 보수파 관리들보다 오히려 이선과 더 마음이 잘 통하는 듯했다.
“저뿐만 아니라 국태공께서도 양무운동을 본받고 싶어 하니, 중당의 지도를 바랄 뿐입니다.”
“하하, 좋소. 같이 힘 써봅시다.”
조선과 청의 타협이 이뤄졌다. 1882년 10월 10일, 조청상민무역장정은 역사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조선은 오랫동안 제후국으로서 전례에 관한 것에 정해진 제도가 있다는 것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다. 다만 현재 각국이 수로를 통하여 통상하고 있어 해금을 속히 열어, 양국 상인이 일체 상호 무역하여 함께 이익을 보게 해야 한다. 변계에서 호시하는 규례도 시의에 맞게 변통해야 한다. 이번에 제정한 수륙 무역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뜻이며, 각국과 일체 같은 이득을 보도록 하는 데 있지 않다.”
국가 간의 조약이 아닌 장정(章程)으로 규정된 서문에서, 청과 조선의 사대 관계가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하의 내용에서 청이 주로 명분을 얻었다면, 조선은 실리를 얻었다.
이는 특수한 장정으로 서양의 최혜국 대우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못을 박았고, 조선 측 요구가 거의 관철되었다.
청과 조선은 각각 한양과 천진에 상무위원이란 이름으로 영사관을 설치하기로 했다.
조선이 특히 부당하다고 여겨진 치외법권은 철폐되어, 각국의 범죄자는 각국이 각자 관리하기로 했다. 대신 조선은 청 상무위원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조항을 달았다.
청나라 상인의 내륙 침투도 금지되었다. 청은 북경을 개시장으로 허용했지만, 조선은 한성부 대신 양화진을 개시장으로 무역을 허용했다.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홍삼에 대한 관세도 30%에서 10%로 줄이는 데 성공하고, 청의 조선에 대한 수출품도 관세율 10%도 상호 조정했다.
“이 장정은 대청이 조선을 특별히 우대한다는 걸 잊지 말아 주길 바라오.”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지극한 황은과 중당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럼, 감읍하고말고.’
이선은 만족했다. 역사상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청의 조선 속방화가 강화됐고, 무엇보다 온갖 경제적 독소 조항으로 인해 조선의 재정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청에 내준 특권을 똑같이 달라고 일본과 서양의 항의가 들끓었다. 장정에 준하는 조건으로 조일 무역 협정이 체결되고, 2차 조영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모든 혜택은 최혜국 대우에 따라 각국에 분배되었다.
조선의 경제적 이득은 크게 줄었다. 전통적 상권은 점차 청과 일본, 서양에 잠식당하고, 정부 재정의 피폐와 백성의 고달픔이 점차 극에 달했다.
임오군란으로 인한 외세의 개입 이후, 온갖 폐단은 눈덩이처럼 쌓이고 쌓여, 끝내 망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선은 외교적·군사적 압박을 피하는 데에 이어 경제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도 성공했다.
“이제 조선은 세관을 설치하고 일본과 관세 조약을 다시 맺으며, 귀국의 재정개혁을 돕고 외교 업무에 자문해 줄 고문관이 필요할 것이오.”
“실로 그렇습니다. 마땅히 적임자를 고빙해서 그 권리를 관장하게 한 뒤에야 자주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내가 적당한 인물을 추천하겠소.”
“혹여 전 천진 덕국(독일) 대리 영사 묄렌도르프가 아닌지요?”
“바로 그렇소. 역시 알고 있었군.”
이선은 이미 묄렌도르프를 만나서 알고 있었고, 이홍장이 그를 추천하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이홍장의 개인 통역관을 지낸 적도 있어, 친분이 두터웠다.
“묄렌도르프는 재주가 많고 각종 업무에 뛰어난 이요.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고 한문 실력이 뛰어나니, 귀국과 소통하는데도 큰 지장이 없을 것이오.”
“실로 적임자로 여겨집니다.”
“이는 이이제이의 목적도 있소. 묄렌도르프는 덕국에서 관직이 높았으니, 일본인이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오. 일본인은 덕국을 가장 두려워하고, 경외하오. 나는 일본인이 귀국을 업신여기는 것을 가장 증오하오. 그러므로 묄렌도르프를 보내서 그들을 제어하려는 것이오. 일본인은 반드시 전처럼 제멋대로 하지 못할 것이오.”
이홍장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메이지 일본의 독일에 대한 관점은 거의 숭배에 가까워서, 특히 1870년대 이후 독일식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독일식 사법제도와 독일식 군제, 독일식 의학을 도입했고, 독일인 고문관이 다수 입국하여 일본인을 지도하고 교육했다.
묄렌도르프를 최초의 서양인 고문관으로 데려가는 건 이홍장의 추천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이선의 복안과도 관계가 있었다.
‘지금은 독일과 막 조약을 체결한 직후라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나중에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지. 특히 과학과 의학, 법학과 군사는 독일인 전문가들을 데려오고 싶군.’
당시 독일은 근대 학문의 중심지이자 군사 강국이었으므로, 이선 역시 장기적으로는 독일과 손잡기를 열망했다.
‘지금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는 동아시아 문제에 관심이 없으니, 정세에 개입할 의지도 없다. 그러니 군사교관을 맡겨도 딱 좋지. 일본이 독일인 고문관들을 초빙한 이유이기도 하고.’
정치적으로도, 독일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관계를 맺기에 적당한 나라였다.
조선 최초의 서양인 고문관, 묄렌도르프의 고빙 계약이 천진 해관에서 체결되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외교 업무를 자문해 주고 해관 설치를 담당하며, 조선 정부는 월급으로 청은 300냥을 지급한다.”
이선은 묄렌도르프의 고용 계약서를 직접 썼다.
“조선 정부가 묄렌도르프에게 어떤 업무를 부여하더라도 거절할 수 없다. 조선 정부의 결정으로 3개월 급료의 퇴직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해임할 수 있다.”
‘돈을 주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조선이니, 무슨 일을 시키든, 해고하든 조선의 명령을 따라라.’
“동의합니다.”
이선과 묄렌도르프는 계약서에 서명한 후, 악수를 하였다.
“계약금으로 3개월 치 급료를 먼저 지급하겠습니다. 조선 조정에서 중책을 맡을 분인데 후대해 드려야지요.”
묄렌도르프도 돈이라면 사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왕자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헤어(Herr, 독일 경칭) 묄렌도르프.”
“조선을 위해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서양 고문관의 특징은, 돈만 많이 주면 얼마든지 고용된 국가를 위해 일하는 프로페셔널이란 점이었다.
실제 역사의 묄렌도르프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묄렌도르프는 분명 이홍장이 추천한 사람이지만, 조선의 돈을 받게 되자 청이 아닌 조선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 결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진 못했지만, 조선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은 다했다.
‘자, 돈을 받았으니 열심히 일해라!’
이선은, 묄렌도르프가 실제 역사보다 더 조선에 도움이 되도록 모든 능력을 짜낼 생각이었다.
1882년 10월, 황제의 칙령으로 조청무역장정과 차관이 확정되었다.
이선은 모든 목표를 달성하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무역 협상을 마무리 짓고, 차관을 도입하며, 러시아와 조약을 예정하고, 서양 고문관을 초빙해서 조선으로 돌아갔다.
어느덧 가을에 접어든 듯, 선상에서 부딪히는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하지만 이선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