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15
3부 130화 세계사의 전환점
1922년 여름, 미합중국 수도 워싱턴에서는 3년 전 파리강화회의에 비견될 만한 국제회의가 한창이었다. 향후 아시아-태평양의 운명을 결정할 회의였다.
워싱턴 회의에서 각국의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인 사안은 크게 다음과 같았다.
1. 군비 축소. 특히 해군 건함경쟁의 종식.
2. 동맹의 종식. 특히 한영일동맹의 존폐 여부.
3. 중국 문제. 특히 일본의 산동 점령 사안.
4. 러시아 극동 문제. 특히 한국의 연해주 점령 사안.
5. 태평양 문제. 특히 필리핀-미국령 괌과 일본의 남양군도 위임통치령 요새화 사안.
대한제국은 5개 회의에 모두 참여했지만, 실질적인 중요성은 2, 3, 4 사안에 있었다.
「대한제국은 해군 건함경쟁에 합류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해군조약은 5대 해군강대국 간의 조약이 되어야 한다.」
「대한제국은 미국의 요구대로 한영일동맹의 종식을 받아들이겠다. 대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안보협력체계가 필요하다.」
「대한제국은 중화민국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지지하며, 산동의 중국 복귀를 지지한다.」
「연해주는 소비에트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대한제국은 프리아무르 임시정부의 반소투쟁을 지지한다.」
「태평양 문제에 대하여, 대한제국은 이해당사자 각국의 원만한 타협을 지지한다.」
전권대표 외무대신 이승만, 차석대표 군무협판 박용만, 특별고문 주미대사 서재필, 해군을 대표하는 신순성 부장과 안중근 부장은 회의에 참석하여 대한제국의 입장을 관철하고자 했다.
회의는 6대 강국 – 즉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한국 간에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회의 초기에는 전반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입장이 일치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입장이 일치하는 방향이었다.
한국은 대미(對美) 협조외교의 기치를 내걸고, 회의 주최국이자 새로운 패권국으로 떠오르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두 번 다시 세계대전이란 어리석은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향후 한 세대 동안, 대양에서 해전은 없을 겁니다. 미국은 대대적인 건함계획을 폐기하여, 배수량 85만 톤의 전함을 폐기할 겁니다. 영국은 60만 톤을, 일본은 45만 톤을 폐기해야 합니다. 최종적인 비율은 10:10:6이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다음과 같은 전함을 폐기할 예정입니다······.”
미국 전권대표 휴스 국무장관은 구체적인 전함의 이름까지 명기하며 영국과 일본을 압박했다.
최초의 제안인 10:10:5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질러 본 것이었고, 미국의 진정한 목표는 10:10:6이었다.
“영국은 미국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클라이드의 조선소에 전문을 보내 슈퍼후드급 전함 4척의 건조 작업을 전면 중단하라고 명했습니다.”
영국은 슈퍼후드(Super-Hood)급 전함 4척의 건조 취소로 1억 6천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 미국에 갚아야 할 전시 채무의 1년 이자를 내기에 충분한 금액으로, 미국은 영국의 협조에 매우 흡족해했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 세계사의 전환점이었다.
영국은 한 세기 동안 누려 왔던 해군력의 절대 우위 정책을 폐기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편승하겠다는 의미였다.
영국 전권대표 밸푸어 외무장관도 씁쓸한 어조로 미국의 우세를 인정했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역사 그 어느 때를 살펴봐도, 대영제국과 같은 패권을 누렸던 제국이, 이토록 중대한 세계적 패권의 우위를, 명백하게 의식적으로 제3국에게 넘겨준 사례는 없다.”
지난 100년간의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는 종말을 맞이하고,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상징했다.
“일본은 군비 축소에 동의합니까?”
미국의 공세는 일본에 집중되어 있었다. 미국이 보기에, 일본의 야심찬 8·8함대(신형 전함 8척, 순양전함 8척)계획은 태평양의 패권을 넘어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폐기되어야 했다.
“일본은 군축의 대의에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10:6이란 비율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10:7의 비율이 고수되어야 합니다.”
일본 전권대표 가토 도모사부로 해군대신은 휴스의 제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했지만, 문제는 전함의 보유와 비율 문제였다.
“10:6이란 비율도 귀국에 유리하게 책정된 겁니다. 현시점에서 일본의 군함 보유는 미국의 60% 미만입니다.”
“우리의 건함정책이 완료되면, 70%를 상회합니다. 60%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가토는 해군 내 현실주의자였다. 미국과 건함경쟁을 하면 일본의 재정파탄과 몰락이 기정사실이었다. 다이쇼 10년(1921)도 국가 예산의 무려 3할을 건함에만 쏟아부어도, 미국과 경쟁할 능력은 요원(遙遠)해 보였다.
무엇보다 GDP가 미국의 15% 미만인 일본으로선, 도저히 미국과 장기적으로 경쟁할 능력이 없었다.
가토는 대미협조를 방략으로 정한 총리 하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워싱턴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 내 강경파들의 압박을 받고 있는 가토는 ‘대미 7할론’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함대가 방어함대를 화력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50%의 우세를 유지해야 한다.
공자(攻者)의 1.5:1의 우세는 방자(防者)의 0.67:1의 열세와 동등하다. 만약 방자가 0.67의 비율보다 적은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으면, 공자에 대한 승리의 가능성은 낮아진다. 한편, 0.67의 비율보다 높으면 공자에 대한 승리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방자는 공자에 비해 70%의 해군력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방자가 공자의 해군력 대비 60%의 해군력을 보유한다면, 국가방위에 큰 안보위협을 줄 수 있다.」
– 사토 데쓰타로, ≪제국국방사론≫
해주육종 북수남진의 방략을 이론화한 일본 해군의 이데올로그, 이순신 숭배자로도 유명한 사토 데쓰타로의 주장은 일본 해군에 있어 성서처럼 받아들여졌다.
사토는 대미 온건파였지만, 러시아가 몰락한 이후에는 미국이 제1의 가상적국이라는 군부의 진단에 동의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일본은 반드시 대미 7할의 전력을 유지해야만 미국과의 대결에서 승리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아니, 꼭 미국과 대립해야 합니까? 일본은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력과 통상무역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해군력이 아니라 경제력으로 세계 3위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일본 최고의 경제전문가, 내각의 2인자인 대장대신(재무장관)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미국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한 군부가 이해되지 않았다.
다카하시는 러일전쟁 당시 외채담당으로 미국과 영국의 경제지원을 끌어내, 가까스로 일본의 파산을 막고 전쟁을 지속할 수 있게 했던 승리의 숨은 주역이었다.
하지만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쓰시마 해전의 승리자인 해군에게 돌아갔고, 다카하시와 같은 경제관료의 노력은 잊혀졌다.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의 우월함을 누구보다 강하게 인지하고 있던 다카하시로서는, 유사시 미국과 대립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다카하시의 구상은, 원역사로 치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의 국가전략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미국과의 전쟁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군비경쟁도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군축은 일본에도 이득이 될 것입니다. 재정 압박은 군부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지지해 왔던 일본의 호전적 당파를 몰락시킬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라-다카하시-가토 3인방과 워싱턴 회의 실질적인 전권위원인 주미대사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는 군축, 대미협조, 대중국 정책의 전환, 호전적인 군부의 통제라는 대원칙에 동의했다.
문제는 늘 그렇듯이, ‘호전적인 당파와 이를 지지하는 여론’이었다. 가뜩이나 ‘연약한 외교’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 미국의 요구에 모두 굴복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정치적으로 곤란했다. 특히 해군을 대표하는 가토로서는 치명적이었다.
그렇기에, 문민정부는 최종적으로 10:6이란 비율을 기꺼이 받아들일 의사가 있었지만, 가토는 해군을 대표하여 완고하게 저항해야 했다.
* * *
“5대 강국이 건함을 규제한다면, 마땅히 한국도 규제되어야 합니다!”
일본은 물귀신 작전으로 한국을 끌어들였다.
일본 대표단은 한국이 여전히 ‘약소국 흉내’를 내면서 온갖 이득은 다 누리고, 규제는 빠져나가려 한다고 의심했다.
특히 건함 규제와 산동 문제에서 한국이 모두 미국 편만 들자, 일본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미국이 한국을 내세워 일본을 견제하는 게 아닌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 밀약이라도 맺었나?’
이승만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공개외교를 주창하는 우드 행정부는 아직 한국과 어떠한 종류의 밀약도 맺지 않았다.
“아니, 여태 뭘 들었습니까? 한국은 건함경쟁에 참여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니까요? 전함 3척이 전부인 나라에서 무슨 건함경쟁입니까? 일본에서 해군이 절대적 우위를 누리듯, 한국에서는 육군이 절대적 우위를 누립니다. 한국은 대륙국가로 육군국이며, 이해관계는 북방의 대륙에 있습니다.”
워싱턴에서 한국 해군을 대표하는 신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속이 쓰렸다. 한국 해군은 여전히 육군의 곁다리 취급이었다.
“북방의 대륙이라, 말씀 잘하셨습니다! 모든 연합군이 러시아에서 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직 한국만이 점령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시데하라 대사는 일본이 러시아 내전 간섭에 참여하지 않은 것마냥 한국을 물고 늘어졌다. 일본의 산동 점령과 한국의 연해주 점령은 전혀 다른 사안이었음에도, 일본은 하나로 묶어 놓고 있었다.
“일본군도 여전히 페트로파블롭스크와 니콜라옙스크에 주둔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곧 철수할 예정이지만, 한국군의 연해주 점령은 영구주둔이라는 야욕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습니다!”
‘니항참변’을 명분으로 내세워 일본은 캄차카에서 아무르강 하류에 이르기까지 오호츠크해의 주요 항구도시들을 점령하다, 워싱턴 회의 개회 직전에 순차적인 철수 성명을 냈다.
당대 일본 외교의 방향성을 정하고 있는 시데하라는 합리적인 인사였다. 국제협조, 특히 미국과의 협조를 원칙으로 삼았고, 미국의 견제방향을 일본이 아닌 한국의 ‘공격성’에 돌리려 했다.
요컨대 시데하라는 이승만과 ‘미국의 총애를 얻기 위한 충성경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럼 소비에트 러시아, 세계혁명을 부르짖으며 아시아를 위협하고 있는 러시아가, 연해주를 넘어 태평양까지 나아가는 상황을 보고 싶은 겁니까? 적군이 태평양에서 피에 묻은 총검을 씻는 걸 보고 싶습니까? 신사 여러분 중에 그런 상황을 원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이승만이 빈정거리는 어조로 답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공포와 반감은 자본주의 국가 모두가 공유하는 감정으로,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 반공(反共)의 보루’로 규정하여 외교적 이득을 노렸다.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구가하고 있는 건 일본이 아니라 한국입니다. 한국은 청국에 보호령이나 다름없는 조약을 강요하여 만주를 장악했고, 이제는 연해주까지 점령하여 극동 러시아까지 세력을 확대하려 합니다. 프리아무르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보호를 받는 괴뢰일뿐더러, 근래 한국 황태자 전하와 로마노프 공주의 국혼이 연해주 병합을 염두에 두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대사, 그 무슨 무례한 말입니까! 황실의 중대사에 세간의 소문을 운운하며 모욕을 주다니! 그럼 귀국이 대한국 황실에 국혼을 제안한 건, 일본의 한국 병합을 염두에 두고 한 겁니까?”
침묵하고 있던 안중근이 벌컥 화를 냈다. 시데하라도 답이 곤궁한 듯 입을 다물자, 이승만이 쐐기를 박았다.
“영국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국혼의 하객으로 방문하셨는데, 그럼 설마 영국이 한국의 연해주 보호를 지지하는 의미입니까?”
이승만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영국 전권대표 밸푸어에게로 향했다.
“웨일스 공의 방한은 어디까지나 양국의 우호친선을 위한 일이었으므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이와는 별개로 영국 정부는 한국의 대러시아 정책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영국 정부는 아무르 임시정부가 극동 러시아 지역 인민의 의지를 대표하며, 한국군이 해당지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영국의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에, 일본 대표단뿐만 아니라 각국 대표단 모두 깜짝 놀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 영국은 일본과 입장을 함께하며 한국에 외교적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연해주 문제나 해군 군축 문제에 있어서 영국은 한국보다 일본을 지지하고 있었다.
로이드조지 내각은 소비에트 정부와 무역협상을 재개하고 있었고, 백군의 잔당과는 완전히 손을 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영국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제기랄, 왕실의 추태로 정부 정책을 바꿔야 한다니. 한국 따위에게 끌려다니는 상황이라니, 미국에 패권을 넘겨주는 것 이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야. 내 외교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군.’
노회한 외교관 밸푸어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는 1903년 영일동맹을 총리로서 성사시킨 당사자이고, 한국을 동맹에 합류시킨 후에도 일본을 훨씬 중시한 친일 인사였다. 로이드조지나 처칠이 때때로 친한(親韓)적인 태도를 보여도, 밸푸어는 일본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데 로이드조지는 한국에 전적인 협력을 아끼지 말라는 훈령을 보냈다.
밸푸어는 황당해하며 설명을 요구했지만, 에드워드가 방한 중에 한국에 무슨 약점을 잡혔는지 ‘웨일스 공과 관련된 국가적 대사’라며 로이드조지는 영국의 정책 전환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뭔가 약점을 잡혀도 단단히 잡혔다는 판단에, 밸푸어는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정책 전환을 받아들였다.
「차후 영국 정부는 대한의 외교방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으로 보이니, 전권대표단은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각국의 협력을 이끌어 낼 것.」
황제의 훈령을 받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던 한국 대표단은, 정말로 영국이 전적인 협력을 보이자 감탄했다.
“대체 성상께서 천하의 영국을 어떻게 구워삶으신 걸까요?”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명백한 외교적 승리입니다.”
“과연 성상께서는 외교의 신이십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보이는 미국과 달리, 영국은 그간 같은 동맹임에도 일본을 편애해 왔다.
그런 영국이 일본이 아닌 한국의 편을 들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영국은 워싱턴 회의를 통해 세계패권을 내려놓았지요. 즉, 외교정책에 근본적인 전환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자연히 대일정책이나 대한정책에도 변화가 있었겠지요.”
이승만은 제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분석해 보려고 했다. 그 자신이나 외교관의 ‘합리성’으로는, 설마하니 웨일스 공이 친왕비를 유혹하다 걸려서 약점이 잡혔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영국의 정책전환을 통해 한국의 국익증진으로 이끌어 낸 건 성상의 혜안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영국을 우리 편으로 만들었으니, 앞으로 일이 수월해질 겁니다.”
“이제 미국을 확실하게 설득해야 합니다.”
외교적 우위를 선점하게 된 한국은, 다음 전략으로 나아갔다.
세계사의 전환, 대전쟁 이후의 세계질서를 결정할 중대한 순간이었다.
작가의 말
일본 해군이 ‘대미 7할’에 사활을 건 이유에는 충무공빠 사토의 교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원역사에서, 놀랍게도 이 시기는 일본이 가장 미국과 서양열강에게 협조하여 국제질서의 일익을 담당하던 시절입니다.
부친의 낙상사고는 불행중 다행히도 골절을 피한 덕에 회복단계에 있습니다. 오늘 병원에 모시고왔는데 많이 좋아지셨다고 합니다.
걱정하고 염려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한시름 놓게 되었으니 주중에 연참해서 보강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