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23
3부 138화 시대의 변화
광무 26년(1922) 11월 20일, 대한제국 황성.
황태자 이진의 만 25번째 생일, 천추경절을 맞이하여 경운궁 석조전에서 축연이 있었다.
아직 고종 태황제의 삼년상 기간임을 감안한 이진의 사양으로, 행사는 재작년과 달리 간소하게 치러졌다. 황실 인척들과 칙임관 이상의 고위관료만 참석하는 축연이 열렸다.
“황태자의 탄일, 천추경절을 맞이하니 짐의 마음이 매우 기쁘다. 올해는 특히 황태자가 황태자비를 맞이하였으니, 아비로서 어찌 흡족하지 않겠는가? 기꺼운 마음으로 천추절을 축하하는 바이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황태자 전하 천세!”
황제의 축사에 일제히 만세삼창이 뒤따랐다.
“황태자 전하께옵서 황태자비를 맞이하셨사오니, 실로 국가의 경사이자 황실의 홍복이옵니다. 만백성은 국혼을 기뻐하며 오래토록 축하하고 있습니다.”
총리대신 이상설이 백관을 대표해 하례했다.
그런데 총리의 안색이 썩 좋지 못했다. 가뜩이나 건강이 좋지 못했던 이상설은 총리 취임 후 과로를 거듭하며 몸을 해쳤고, 사임해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였으나 의무감으로 버티고 있었다.
“고맙소, 총리. 자, 어서 술잔을 듭시다. 황태자의 탄일과 국혼을 축하하며!”
이상설의 안색을 본 이선이 빠르게 건배사를 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총리, 경은 짐보다 젊은데 어찌 이리 쇠약해 보이는가. 건강관리를 잘 해야지.”
“송구하옵니다. 노둔한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축연이 진행되는 동안, 이선은 이상설을 따로 불러내 염려를 표시했다.
역사의 변화로 이상설은 수명이 늘어나 총리까지 올랐지만, 원역사에서는 1917년 향년 47세에 별세했었다.
“신의 건강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만, 폐하의 성수무강하심은 국가의 대사입니다.”
“걱정하지 말게. 그저 흔한 고뿔이니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짐이 고뿔을 앓는 건 일상 아니던가.”
기실 이선 자신도 감기로 고생하는 중이었다.
나이 쉰이 넘어가면서 이선은 환절기마다 고생했고, 11월 하순처럼 추워진 날씨에는 감기를 피하지 못했다.
이선은 운동을 꾸준히 하며 체력관리를 했지만, 늘 과로와 불면증을 달고 살았기에 감기에 약했다.
“하오나······.”
“짐의 나이가 쉰다섯인데, 다행히 큰 지병은 없지 않나. 그만하면 됐네.”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는 환갑에 별세하면 호상(好喪) 소리를 듣는 시대였다.
흥선대원군처럼 70대 후반, 원로대신 김윤식처럼 80대 후반까지 사는 이들도 없잖아 있었지만, 매우 드문 일이었다.
쉰을 넘기면 노년기이자 슬슬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시기였고, 만기친람하는 군주는 더욱 그러했다.
조선 국왕의 평균수명은 47세였고, 특히 정조 선황제 이래 근 150년 동안 50세 이상까지 산 군주는 고종 태황제밖에 없었다.
“태자가 이제 스물여섯이네. 어린아이 같았었는데, 어느덧 장성하여 지아비가 되었네. 대리청정도 4년째 무난히 하고 있고. 믿음직한 후계자가 있으니 염려가 없어.”
이선은 이진을 바라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지켜봤던 장남이 어느덧 자라 만 25세가 되어 결혼까지 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설마······.”
“당장 선위하지 않을 터이니 걱정 말게. 대국민연설에도 생전에 선위하겠다고 했지, 언제 지금 물러난다고 했나. 이제 막 결혼한 태자와 태자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네.”
이상설이 무슨 말을 할지 예감한 이선이 딱 잘라 말했다. 이선의 솔직한 속내로 말할 것 같으면 선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황공하옵니다. 신이 감히 함부로 성심을 헤아렸사오니, 대죄를 청하옵니다.”
“짐은 알고 있네, 경의 충심을. 경은 진정 짐의 충신이야. 예전에는 고균과 금릉위가 짐의 고굉(股肱)이었지. 하지만 고균은 늙어 은퇴하였고, 금릉위는 뜻이 맞지 않아 멀리 떠났네.”
올해 72세인 김옥균은 건강이 악화되어 주청고등판무관 자리에서 사임 의사를 밝혔다.
얼마 전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 특사로 파견된 것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초대 고등판무관으로서 한청우호와 만주의 안정을 원했던 김옥균의 재임기간은 성공적이었고, 워싱턴 회의에서 한국의 만주 지배를 열강으로부터 공인받자 김옥균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판단했다.
「신 옥균이 성상께 아뢰나이다.
······ 신은 금년으로 이미 일흔둘이 됩니다. 선제의 명을 받아 관직에 오른 지는 꼭 50년이옵니다. 늙으면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은 나라에 규정에 있고, 병들어서 한가롭기를 바라는 것은 진실된 마음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나이가 노쇠에 이른 것을 가엾게 여기시며, 신의 정성이 깊은 충정에서 나온 것을 살피시고, 윤음을 내리시어 사직을 허락하소서.」
김옥균의 상소를 읽던 이선은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어디서 많이 본 문장이다 싶더니, 황희가 세종에게 사직을 청하는 상소와 내용이 매우 유사했다.
황희는 60대부터 세종에게 수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세종은 그때마다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황희는 나이 80대 후반이 되어서야 은퇴할 수 있었다.
「경이 국가를 위해 봉사한 지 어언 50년, 짐과 처음 동지의 의를 맺은 것도 어언 40년이 되었다.
경은 덕이 후하고, 식견과 기량이 깊으며, 대사를 잘 결단하고 헌장(憲章)에 밝았다. 짐의 고굉으로서 국가의 중책을 맡아 조정을 협력하여 이끌었으며, 경륜의 재능을 발휘하여 공업(功業)을 빛냈다.
아! 국가에 대한 경의 노고와 충심은 짐이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 백관과 국민 또한 잊지 않으리라.
경의 요청을 가납하여, 주청고등판무관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윤허한다.
하나 경은 국가의 원훈으로서, 짐과 소조, 대신들에게 경륜을 아끼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
이선은 김옥균의 사직을 윤허하고, 김규식에게 판무관 대리를 맡겼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되, 원훈으로서 계속 조언을 해 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김옥균은 여전히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원훈으로 정치가와 국민의 존중을 받고 있었다.
비록 사생활에서 여자 문제가 복잡하여 구설수에 오르는 소소한 흠이 있다고는 하지만, 권좌에 있으면서 흔한 부패 사건에 연루되는 일도 없었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1, 2등을 다투는 공로자였으나, 김옥균은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처신을 잘해서 박영효처럼 자신만의 파벌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 결과 황제의 신임을 잃고 몰락한 박영효와 달리, 김옥균은 명예롭게 은퇴하게 되었다.
“이제는 경이 짐의 고굉이자, 국민의 대표자일세. 그러니 건강을 지켜 국가를 위해 오래토록 일해 주게.”
단순한 공치사는 아니었다. 이선은 이상설을 개화당 원훈들과 대비되는 친위세력으로 양성했다. 박영효를 실각시키고 보통선거권 개혁을 하며, 광범위한 입헌개혁을 이끄는 첫 총리로 삼았다.
“성상께옵서 불민한 신을 이토록 아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찌 목숨을 다하는 그 날까지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고굉에 견주는 황제의 신임에, 이상설은 고개를 조아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하, 그럼 마땅히 장수하여 소조의 시대까지 보좌해 줘야겠지.”
이선은 이상설에게 깊은 신임을 표명하면서도, 이진과 대화하는 개화 4세대 관료들을 쳐다보았다.
김홍집과 김윤식으로 대표되는 개화 1세대(동도서기파), 김옥균과 박영효로 대표되는 개화 2세대(문명개화파), 이상설과 이시영으로 대표되는 개화 3세대(헌정개혁파)는 모두 근대화의 필요성을 믿고 개혁을 추진했을지언정, 본질적으로 유학자였다.
이상설만 해도 마지막 과거급제자이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유학자였다. 외국어, 국제정치, 법학, 수학, 화학 등 다양한 근대학문에 능통한 천재였지만, 그 근본은 유학을 익힌 유학자였다. 유학의 근대화를 이끈 개신유학의 종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총리대신으로서의 정체성은 국민의 지도자보다 황제의 충신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이승만·안창호·김구·김규식 등으로 대표되는 개화 4세대는 달랐다. 어릴 때부터 국민교육을 받은 1세대이기도 했고, 전통적 유학보다 근대 서구 학문의 영향을 훨씬 크게 받았다.
이들도 어릴 적부터 ‘충군애국’의 교육을 받았기에 황제에 대한 충심이 강했지만, 충군보다는 애국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내면화한 이들은 황제의 충신이라기보다는 국민국가의 대표자라는 의식이 더 강했다.
‘나의 시대와 달리, 진의 시대는 저들이 더 어울리겠지.’
이선은 시대의 변화를 체감했다.
이제는 전통적 왕조와 제국들이 무너진 시대, 1920년대였다.
* * *
저녁에는 가까운 가족들끼리만 중화전에서 이진의 생일을 기념했다.
축연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고, 새 황태자비로서 황실 여인들과 칙임관 부인들을 맞이하며 의무를 다한 타티야나에게 이선이 치하를 했다.
“태자비가 고생이 많았다. 남편의 생일인데도 단둘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일을 하게 되어 미안하구나.”
“아니옵니다, 폐하. 마땅히 제 의무입니다.”
타티야나는 옛 러시아제국의 공주로서 의전에 능했다. 비록 동양 황실은 예법이 달라 적응에 애를 먹고 있었지만,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황실의 서구화를 지향하는 이선은 이번 기회에 예법을 고칠 생각이었다.
오늘 천추경절 행사도 유럽 황실의 행사에 더 가까웠다. 국상 중임을 감안해 춤과 음악이 빠졌을 뿐, 내년에는 허용할 생각이었다.
이야말로 타티야나의 전문분야였다. 황태자비가 외빈 앞에서 태자와 무도회와 음악회를 갖는다는 건 보수적인 왕실에선 기절할 일이긴 했지만, 이선은 자신의 재위기에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내가 미리 바꿔 놔야 진이 부담스럽지 않지. 케케묵은 예법은 이제 안녕이다.’
“그래, 훌륭하다. 태자, 태자비가 사랑스럽지 않은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두 사람이 이토록 애정이 두터우니 보기 좋다. 머지않아 손주도 태어날 것이고, 짐은 할아버지가 되겠군. 하하!”
시아버지의 말에 타티야나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황상의 말씀이 지당하다. 왕실 여인, 특히 국본을 지아비로 두고 있는 여인의 가장 큰 덕목은 후계자를 생산하는 것이다. 태자비는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용히 있던 황태후 김씨가 거들었다. 타티야나는 긴장한 듯 고개를 바로 세웠다.
비록 황태후가 손자며느리는 황후의 영역으로 여겨 별 다른 말을 안 했지만, 며느리인 이서아를 엄히 대한다는 걸 타티야나도 들어 알고 있었다.
“원, 그게 태자비에게만 달린 문제겠습니까. 태자가 힘을 내줘야지요.”
이선은 분위기가 무거워질까 봐,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했다. 이진도 민망한 듯 웃음을 흘렸다.
“황상께서 태자비를 아끼는 성심은 잘 알겠사오나······.”
황태후는 작심한 듯 전에 없는 말을 했다.
“태자비가 멀리 서양에서 왔기에, 동양의 예법에 대해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지금은 조종(祖宗)의 예법을 익힐 때입니다. 비궁(妃宮)이자 종부(宗婦)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어찌 서양의 태자비와 같은 행동만 한단 말입니까. 황후께서 너무 어질어 보듬기만 하는 게 아닙니까.”
황후 김아영이 난처한 듯 남편과 시어머니를 잇달아 쳐다보았다.
“물론 황후를 대신하여 순행의 의무를 다하고, 백성을 만나 모범을 보이는 건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오나 제국의 후계자를 생산할 비궁이자, 장차 가문의 제사를 맡을 종부이기도 합니다. 마땅히 적절한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요컨대 현대적 황태자비의 상도 좋지만, 장차 국모가 되고 종부가 될 여인으로서 전통적인 빈궁으로서의 의무도 다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책무가 막중한데, 어찌하여 조종의 예법에 밝은 여인이 아닌 영친왕비가 비궁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겁니까.”
황태후의 화살은 며느리 이서아에게로 향했다.
근래 이서아는 타티야나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다. 태후로서는 친왕비가 태자비와 출신이 같다는 이유로 황궁 내에서 파벌을 형성하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출가외인인 친왕비가 태자비의 측근이 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황후가 나와 같은 광산 김문이라, 나는 더욱더 말과 행동을 조심히 했거늘. 같은 아라사인이라고 싸고돌다니! 참으로 처신을 못 하는구나!’
황태후와 황후는 먼 친척이었다. 그래서 황태후는 오히려 더 처신을 조심히 했다. 그런데 태자비와 친왕비가 같은 러시아 출신이라고 친밀하게 지내니, 황태후의 눈에는 어리석은 처신이었다.
「제 소원은, 태자비 전하를 가까이서 보필하는 것입니다. 제가 단순히 태자비 전하의 동향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황공하오나 저는 태자비 전하보다 먼저 서양에서 대한 황실에 왔고, 제 경험을 살려 태자비 전하의 적응을 돕고 싶습니다.」
이서아는 아무리 황제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지만, 처음부터 ‘로마노프 황실의 복고를 도와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았다.
이선은 황실 인척이 정치 문제에 개입하는 걸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겼고, 이서아도 남편 이영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대신 타티야나의 최측근에서, 조언자이자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하길 바랐다. 만약 타티야나가 비난의 화살을 맞을 일이 있으면, 자신이 대신 맞아 내상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렇다면 언젠가 기회도 올 수 있었다.
「좋소. 나 역시 제수씨가 그런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오. 태자비가 홀로 이질적인 문화에 놓이게 되었으니, 얼마나 외롭겠소? 친왕비가 태자비의 시숙모로서가 아니라, 지근거리에서 벗이자 동지가 되어 주었으면 하오.」
이선도 흔쾌히 수락했다. 타티야나가 아무리 순종적이고 의무에 충실하다고 해도, 역사와 종교, 문화와 예법이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된 터였다.
이서아의 존재가 타티야나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이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제가 명한 겁니다.”
“예? 황상······.”
“태후께서 우려하시는 바는 저도 잘 알겠사오나, 심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선은 황태후이자 법적 모친의 생각을 짐작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못을 박을 생각이었다.
“태후 폐하. 대한의 예법은 조종의 예법을 계승하였으나, 시대가 크게 변했습니다. 지난 40년간의 변화는 조종 400년의 변화에 비견될 만합니다. 어찌 옛 예법만 고수하겠습니까. 하물며 소자의 시대와 진이 살아갈 시대는 더욱 다릅니다. 젊은이들에게 옛 시대의 관습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이선의 단호한 대응에, 태후는 할 말을 잃었다.
“자전께옵서도 옛 관습에 얽매이지 마시고, 부디 노년을 편히 보내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이선은 한 살 많은 법적 모친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구중궁궐에서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게, 본래 조선 왕실 여인의 운명이었다.
남편을 일찌감치 잃고 청상과부가 되었으나, 오래토록 장수한 신정황후 조씨(효명세자빈, 고종의 법적 모친)와 효정황후 홍씨(헌종비, 고종의 법적 형수)는 60년 세월을 전각에서 독수공방하며, 1년에 한두 번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 아니던가.
당장 황태후만 해도, 외부 출입을 극도로 자제하며 공식 행사에만 참석했다. 그 외엔 종종 창덕궁 후원을 산책하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이선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행하는 것이었다.
한참 나이가 많은 임금, 그조차도 실권을 빼앗긴 임금에게 시집을 왔다가, 이제는 과부가 되었다.
이제라도 마음 편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 아들의 간곡한 청입니다.”
태후는 한 살 아래인 법적 장남을 언제나 존중했다. 아니, 내심 두려워했다. 그 무서운 시아버지 대원군의 후계자였고, 부친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아들이었다.
그렇기에 지난 세월 간 순종해 왔다.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그조차도 장남의 뜻이라는 걸 알게 된 태후는, 이제 자신이 시대로부터 완전히 퇴조되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황상.”
작가의 말
???가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셨다.
나이 쉰만 넘어도 죽음을 염두에 두던 시대라,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참 어색합니다. 그와중에 82세까지 산 영조가 레전드… 조선왕 평균수명은 영조가 늘려줬죠.
황태후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시대착오지만, 저 시대 기준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래저래 좀 딱한 양반이지요. 그래서 이선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들어주진 않지만.
불행중 다행히도, 부모님께선 미열과 인후통 말고는 무증상입니다. 부친께선 연세도 많으신데다 기저질환이 있으셔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백신을 4차까지 맞은 효과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