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26
3부 141화 혁명으로 가는 길
극동민족대회, 혹은 원동혁명단체대표자대회는 워싱턴 회의를 겨냥한 소비에트 정부의 구상이었다.
당초 소비에트 러시아와 극동 공화국은 서방과 화해를 도모하고 워싱턴 회의에 참가할 의사를 보였으나, 주최 측인 미국이 이들을 무시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워싱턴 회의를 격렬히 비난하고, 아시아의 공산주의·사회주의·민족주의·진보주의자들을 초청해 혁명운동을 조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미 1921년 소비에트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동방인민대회(Congress of the Peoples of the East)를 조직해, 튀르키예·페르시아·아르메니아·조지아·체첸·투르키스탄·아랍·인도 등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대표들이 대거 참석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동방인민대회의 성격은 전혀 ‘공산주의적’이지 않았다. 무스타파 케말의 튀르키예 대국민의회는 반제국주의의 선봉에 선 대표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심지어 청년튀르크당 지도자이자 오스만제국의 총사령관으로서 전쟁범죄의 책임이 있는 엔베르 파샤도 참석해 모든 무슬림의 단결과 저항을 외쳤다.
「서양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세계혁명 만세!」
「지하드!」
공산주의자들과 무슬림들이 한자리에 모여,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예프(유대계 러시아인)의 선창에 이슬람 지도자들이 칼을 빼 들며 지하드를 외치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됐다.
전투적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와 유일신을 믿는 무슬림은 상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손을 잡았다. 서양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했던 건 무슬림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중동을 멋대로 갈라 먹은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를 증오했다.
바쿠에 온 무슬림 지도자들 중 러시아처럼 사회주의 국가를 설립하겠다는 이는 드물었지만, 최소한 이슬람 율법이 아닌 진보적인 민족국가를 설립하겠다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22년, 코민테른의 아시아 반제국주의 동맹 전략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은 케말의 군대는 그리스군을 무찌르고 영국의 지중해 패권을 위협했고, 페르시아 북부에서는 공화국이 수립되어 영국의 괴뢰정권인 카자르 왕조를 비난했다.
소비에트 적군은 투르키스탄(중앙아시아)을 재정복했고, 시대착오적인 이슬람 율법들을 제거하고 급진적인 토지개혁과 인민해방을 약속했다.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를 향해서도, 반영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향한 M.N.로이가 이끄는 급진적 민족주의 그룹이 타슈켄트에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인도 해방을 노렸다.
「세계혁명으로 향하는 길은 아시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파리와 런던으로 가는 길 못지않게, 상하이와 뭄바이로 향하는 길도 중요하다!」
아시아에서 격화되는 반제국주의 운동에, 소비에트 정부는 유럽중심주의에서 탈피하여 아시아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극동민족대회는 동방인민대회의 동아시아 버전으로, 동아시아에서 ‘혁명의 길’을 찾으려는 소비에트의 전략이었다.
* * *
극동민족대회 대표 상임의장단에는 지노비예프(러시아인)·여운형(한국인)·김알렉산드라(고려인)·호한민(중국인)·가타야마 센(일본인)·담딘 수흐바타르(몽골인)·M.N.로이(인도인) 7인이 선출되었다.
“이거 참, 내가 의장단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지노비예프 동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혁명가이자 코민테른 의장이고, 가타야마 동지는 투쟁경력이 혁혁한 아시아에서 명망 높은 사회주의자인데······.”
“그만큼 여운형 동지에 대한 아시아 대표들의 기대가 크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여운형은 한국에서부터 유명했던 연설력, 이를 외국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유창한 영어 실력,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이끈 공로 등을 고려해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대표들의 투표로 뽑힌 의장단 선출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여운형의 정치적 지향성은 코민테른과 명백히 달랐다.
여운형과 코민테른의 공통점이라면,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당은 대한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유일한 원내정당이었다. 식민지 해방의 대의에 여운형은 공감했고, 한국이 서양 제국주의 열강과 함께 아시아를 분할하는 대신 아시아 해방의 선도자가 되길 바랐다.
“손중산 동지의 명을 받아 모스크바에 오긴 했지만, 삼민주의가 공산주의와 공존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상임의장단에 선출된 중국 대표, 호한민(胡漢民, 후한민)은 본래 손문의 최측근으로 국민당 선전부장이자 전(前)호법정부 외교부장이었다.
중화민국 호법정부를 이끄는 손문과 국민당은 군벌들의 항쟁에 질린 상태였다.
북양군벌 독재에 반대한다고 들고 일어난 호법정부 내에서도 남방군벌들의 분열과 반목은 계속되었다.
열강들은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회의를 통해 북양정권을 공인했고, 중국의 반식민지 신세는 여전했다.
열강의 외면을 받은 국민당은 난처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호법정부를 지지해 주던 한국도, ‘10국 공약’에 의거하여 중국 문제에 개입하기가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기실 한국은 중국의 분열상황이 훨씬 유리했으므로, 호법정부가 남방에서 북양정부의 발목을 잡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 그 이상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1922년 여름, 북벌을 부르짖는 손문에 맞서 연성자치론을 주장하는 광동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 정부를 광동에서 추방했다.
국민당을 지지하던 사천군벌 채악이 지병 치료차 일본에 떠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손문은 영국령 홍콩을 거쳐 중경으로 도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듭된 군벌들의 배신으로 손문은 독자적인 무력 확보를 절감하게 되었다. 곤란한 처지에 놓인 손문과 국민당을 향해, 코민테른이 접촉을 취했다.
코민테른의 지도로 탄생한 신생 중국공산당은 극소수 지식인의 정당이었으므로, 코민테른은 국민당과의 합작을 선호했다.
처음에 공산주의에 부정적이던 손문도, 카라한선언에 이어 거듭 소비에트가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자 국공합작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손문은 선전부장 호한민을 국민당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하고, 군사전문가이자 손문의 새로운 측근으로 부상하고 있는 청년장교로 하여금 노농적군의 성공사례를 연구하라고 명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공산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들은 삼민주의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겁니다.”
국민당의 군사전문가로서 소련에 온 이는 바로 장중정, 또는 장개석(蔣介石, 장제스)이었다.
장중정은 진형명의 정변에 맞서 군을 이끌고 손문의 탈출을 결사적으로 지휘했고, 그 결과 손문의 신뢰를 받아 국민당 내에서 급부상하게 되었다.
장중정 본인은 공산주의에 대해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소비에트와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는 손문의 주장에는 동의했다.
“저들은 일개 혁명정당에서, 반혁명세력을 격파하고 외세의 간섭까지 무찔러 러시아의 재통일이라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그 방법론은 배워 볼 가치가 있지요.”
국민당을 중심으로 중국혁명을 꿈꾸는 손문으로선, 볼셰비키의 사례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북벌을 위해선 강력한 군대가 필요해. 군벌이 아닌 국가와 당에 충성하는 군대, 확고한 조직력을 가진 군대. 공산주의자들은 믿을 수 없지만, 지금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열강은 러시아밖에 없다.’
장중정 본인도 국민당의 영도로 외세의 간섭을 무찌르고 중국을 재통일하겠다는 웅대한 목표가 있었으므로, 노농적군의 조직을 참조하려고 했다.
손문과 장중정은 가장 먼저 ‘반역자’ 진형명을 몰아내고 광동을 되찾고자 했고, 남방 6성을 재규합해 북양군벌에 맞서는 북벌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워싱턴에 모인 제국주의자들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제멋대로 분할하여, 세력권을 규정하고 이권을 나눠 먹었습니다. 워싱턴 회의는 파리에 이어 자유를 원하는 세계 인민의 외침을 짓밟고, 고혈을 짜는 흡혈귀들의 회동이었음을 재확인했습니다!”
극동민족대회는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 회의의 성토장이 되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는 인도,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안남,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는 자바 독립운동가들은 제국주의 열강을 격렬히 비난했다.
“중국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과 농민의 상황은 여전히 처참합니다.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외국 자본이 중국 산업을 통제하여 중국 시장에는 외국 상품이 범람하고, 전통적인 수공예는 파산의 처지에 놓였습니다.”
“열강의 간섭이 있는 한, 중국은 독자적인 산업화도 추진하기 어렵습니다.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을 반대하여, 반제혁명세력의 단결이 필요합니다.”
반(半)식민지 처지에 놓인 중국 대표단도 제국주의 열강을 비난했다. 공산당의 청년 이론가인 장국도(張國燾, 장궈타오)와 유소기(劉少奇, 류사오치)가 선봉에 섰다.
“몽골의 혁명운동은, 광기에 찌든 반혁명군벌 운게른의 세력이 점차 쇠퇴해지고 있는 현재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몽골은 중국도 만청의 일부도 아닙니다. 우리는 독자적인 조직을 갖고 있습니다. 운게른과 반동적인 왕공들의 정권을 타도하고 혁명을 완수할 것입니다.”
몽골 대표 담딘 수흐바타르는, 몽골에서 임박한 혁명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몽골은 중국과 확연히 달랐다. 몽골인은 중국과 청국 모두를 혐오했으므로, 이들이 바라보는 지원의 대상은 소비에트 러시아뿐이었다.
“일본과 한국은 아시아 인민의 대의에 부응하지 않고, 서양 제국주의와 야합하여 아시아를 분할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정책, 만주에 대한 한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은 철폐되어야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만과 해남(하이난)을 식민화하여 가혹하게 인민을 착취하는 데 이어, 본토에까지 촉수를 뻗고 있습니다. 복건과 절강에는 일본에 부역하는 매판 군벌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산동은 반환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대륙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도 성토가 이어졌다. 특히 일본은 러시아의 오랜 숙적이었고, 한국은 떠오르는 적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한국 제국주의는 만주를 장악하고, 러시아 인민의 힘으로 타도한 로마노프 왕가의 잔당과 콜차크와 브랑겔 같은 악질적인 반혁명 백군 분자들을 내세워 프리모리예(연해주)까지 침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고려인 대표단이 대한제국을 비난했다. 한국이 고려인 보호를 명목으로 연해주를 장악했으므로, 고려인 혁명가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혁명적 순수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더욱 강경하게 옛 부모의 나라를 비난해야 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고려인 동지들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고, 김알렉산드라와 박진순은 코민테른 동방부에서도 중책을 맡고 있었다.
“동양의 당면한 과제는, 아시아의 선진적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과 한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조직하고, 혁명적 동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노동자와 농민, 진보적인 부르주아지가 제휴하여 정권을 획득하고, 제국주의 정책을 철폐해야 합니다.”
이미 산업화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의회정치가 확립되었으며, 열강의 반열에 선 두 동양 국가 –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다른 전략이 추구되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러시아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 낸 소비에트 러시아 동지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인에게는 외부의 지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변혁은 한국인의 손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여운형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진보세력은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을 생각이 없음을 표명했다.
대한사회당은 중국국민당과 입장이 달랐다. 노동계급의 각성을 이끌어 내면, 합법적인 의회정치의 공간을 통해 집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모두 노동계급의 정치성은 취약했지만, 농민운동과 ‘진보적 부르주아지’는 존재했다.
한국의 경우는 특히 더 유리했으니, 농민운동과 유토피아 종교운동이 결합한 진보당이 원내 3당이었고, 진보적 부르주아가 이끄는 자유주의 세력인 신민당이 제2당이었다.
코민테른이 주장하는 통일전선 – 즉 사회당이 농민당인 진보당이나 부르주아 정당인 신민당과 제휴하는 전략은 여운형도 추구하는 바였다.
“여운형 동지의 정세분석은 타당합니다. 여운형 동지와 사회당은 한국 노동계급의 각성을 이끌어 내고, 합법적인 투쟁공간의 장을 열었다는 공로가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개량주의적 의회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범하는 오류와 같습니다. 이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였고, 제국주의자들과 야합하여 혁명적 노동운동과 식민지 해방운동을 짓밟는 것을 방조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오류를 답습하면 안 됩니다.”
여운형의 노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뜻밖에도 고려인 공산주의자가 아닌 한국 대표단 내부에서 나왔다.
비판의 목소리를 낸 이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한국 사회주의연구회’를 대표해서 온 박헌영(朴憲永)이었다.
* * *
충청남도 대흥(예산)에서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난 박헌영은 어릴 적부터 수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황성제일고등학교를 우등 성적으로 졸업하고, 최고 엘리트 양성기관인 황성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기독교 단체인 YMCA에서 활동하여 영어를 익히며, 황성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꿈꾸던 20세까지의 삶은 지방 출신의 수재의 엘리트 코스 자체였다.
운명의 1919년. 그 또래의 젊은이들이 다수 그랬듯이, 원산 학살과 9월 의거는 청년 박헌영의 인생을 바꿨다.
그는 노동자의 비참한 처지와 군경의 학살에 분노하고, 개화당 정권의 퇴진을 외쳤다.
박헌영은 9월 의거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학생운동의 중추가 되었다.
학생운동 지도부인 한위건 등이 귀국한 황제의 선제적 개혁 조치에 스스로 깃발을 내린 것과 달리, 급진파를 대표하는 박헌영은 투쟁을 이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의 민주주의는 황제가 던져 주는 선물이 돼서는 안 된다! 노동자와 학생의 손으로 개화당 정권을 타도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해야 한다!”
박헌영과 급진적 민주주의자의 주장은 당시 정세에서 도저히 불가능했다.
박헌영도 시기상조라는 걸 곧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설익었다는 걸 인지하고,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사조인 마르크스주의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까막눈을 벗어나 삶의 빛을 얻은 느낌이네.”
한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소개한 여운형이 번역한 저작들을 넘어, 박헌영은 직접 원서를 읽기 위해 독일어와 러시아어까지 공부하는 열정을 보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카우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 울리야노프와 트로츠키의 저작을 읽고 난 박헌영은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황성대학교는 국립 엘리트 양성기관으로, 학생운동에 비교적 관대한 여타 사립대학과 달리 박헌영과 같은 ‘불순분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제자의 재능을 아까워한 교수들의 옹호로 퇴학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정학 처분을 받았고, 박헌영은 이참에 유학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미국 유학에 집착하지 않았다.
최초로 근대적 종합대학이 출범한 유럽 고등교육의 중심지, 학비가 저렴해서 유학생들이 선호하는 나라, 그리고 마르크스의 모국 독일이었다.
1920년대 초반, 독일의 정세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회민주당이 제1당으로서 권좌에 앉아 있긴 했지만, 사민당은 급진좌익과 극렬우익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패전과 불황이 독일을 압박했다.
베를린은 독일에서도 좌익세가 강하기로 소문난 도시였다. 마르크스의 모교이기도 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박헌영은, 역사의 변화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격정적인 연설을 직접 듣는 기회까지 얻었다.
“자본주의-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세계혁명 만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휘날리는 붉은 깃발. 평생을 억압받는 자를 위해 헌신한 혁명가의 외침.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노동자들의 굳건한 단결.
동양에서 온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인종차별이 허다한 1920년대 독일에서, 오직 사회주의자들만이 동양인을 동등한 인간이자 동지로 대해줬다.
지방 양반 지주의 서자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불평등에 민감했던 박헌영으로선, 일찌감치 ‘만민평등’을 지지해왔다.
9월 의거 당시만 해도 서구식 민주주의를 꿈꾸던 박헌영의 모범은, 이제 소비에트 러시아가 되었다.
박헌영이 ‘프롤레타리아트 세계혁명’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작가의 말
실제로 극동민족대회 대표자 144인 중 52인이 (여러 계파를 총망라한) 조선인이었고, 상임의장단 5인 중 2인이 바로 김규식과 여운형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조선 독립운동계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코민테른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의미입니다.
후한민과 장제스의 소련행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역사의 변화로 인해 약간 앞당겨졌습니다. 장제스의 후일을 생각하면 기이한 조합이지요…
가타야마 센은 일본 노동운동의 태두로, 동양인 최초로 코민테른 상임위원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해방정국 5대 지도자(이승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중 마지막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이승만이 영미형 자본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 김구가 코포라티즘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자, 김규식이 정치이상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 여운형이 화합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자로 변화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박헌영은 세계혁명을 꿈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박헌영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했었고, 상해 망명 중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변화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