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27
3부 142화 우리의 길
1922년 9월,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의 한국인 유학생 박헌영은 베를린 잔다르멘마르크트(Gendarmenmarkt)의 비어홀(맥줏집)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여어, 박 동지.”
“조 동지 오셨습니까.”
“여기 맥주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바이에른 맥주 마셔 보셨소?”
“아뇨, 전 베를린에서만 있어서.”
“맥주는 바이에른 스타일이 맛있지. 여름에 뮌헨에 갔을 때 정말 좋았소이다. 그런데 점잖은 박 동지가 이런 곳을 어찌 다 알고 불러냈소?”
“조 동지가 술 좋아하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모실 분도 술 좋아하십니다.”
“암, 맥주 한 잔이면 기분이 아주 유쾌해지지.”
박헌영을 찾아온 청년은 퍽 쾌활한 어조였다.
안경을 쓰고 책만 들여다보는, 전형적인 책상물림인 박헌영과 달리, 청년은 그야말로 활동가로 보였다.
“몽양 선생님, 오셨습니까.”
“여 박군, 오랜만이네. 자네를 이 머나먼 독일에서 만나는 날이 올 줄이야.”
비어홀에 들어선 여운형과 박헌영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여운형이 황성대학교 강사로 재직하던 시절, 박헌영이 그의 수업을 들은 바가 있었다.
“이쪽 청년은 뉘신가?”
“인천 강화 사람 조봉암이라고 합니다. 황성에서 먼발치나마 선생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청년의 이름은 바로 조봉암(曺奉岩)이었다.
“조 동지는 3년 전 황성 노동자 투쟁에서 큰 역할을 한 바 있습니다.”
“오, 그런가요. 훌륭한 청년이로군.”
여운형은 조봉암의 등을 치면서 격려했다.
여운형이 오늘 박헌영을 만난 건 특별히 사상적인 회합이라기보다는, 머나먼 독일에서 유학하는 동포 청년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본래 호인(好人)인데다 청년들을 아끼는 여운형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는 했다.
“나는 청년들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합니다. 조군의 이야기도 들어 보고 싶군요.”
조봉암은 광무 2년(1898) 인천 강화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농지개혁의 수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강화도는 농지 자체가 부족했고, 자연스레 가난한 유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시대의 변화는 빈농의 자제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당시 시골 빈농 출신이 오를 수 있는 최상의 길은 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가 되거나, 농업학교 졸업 후 ‘면서기’가 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영특했던 조봉암은 농업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광무 19년(1915) 인천부청의 하급관료로 임용되었다.
조봉암의 부모가 집안에서 ‘나으리’가 나왔다고 기뻐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젊은 조봉암이 임용되었을 당시는 박영효가 이끄는 개화당 독재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이자, 공업화와 대전쟁으로 사회가 급변하던 시기였다.
전시 호황으로 경제적으로 부가 급등했지만, 그 수혜는 상층에서 누렸다. 정경유착이 비일비재했고, 관료들은 뒷주머니로 돈을 받았다. 특히 서해의 주요 무역항인 인천항에서는 온갖 비리와 협잡이 판을 쳤다.
조봉암은 행정 능력이 뛰어나고,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10명이 할 일을 혼자서 한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유능했다.
하지만 부패한 상관과 마찰을 빚게 된 조봉암에게, 상관은 누명을 씌었다.
빈농 출신인 조봉암은 가난한 이들에게 동정적이었고, 술자리에서 러시아 혁명에 대해 우호적인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를 꼬투리 잡아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운 것이었다.
전시 계엄령 하에서 사회민주주의자라는 꼬리표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걸 의미했다.
특별한 혐의가 없었으므로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관료사회에 정나미가 다 떨어진 조봉암은 스스로 사직서를 내고 나갔다.
황성으로 상경해서 주경야독하며 대학 입학을 준비하던 조봉암은, 정말로 급진주의자가 되었다.
급격한 산업화로 성장하면서 사회에도 모순이 증대했고, 산업화의 과도기적 현상이 한국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도시와 농촌 간의 불균형은 심각했다. 결국 어느 나라건, 산업혁명의 태두인 영국부터 시작해서 근래의 일본에 이르기까지, 공업화는 농민의 희생을 전제로 했다.
아무리 농지개혁으로 자영농을 우대했다고는 하지만, 공업화 정책의 일환으로 농업 경영의 상업화, 상업 작물의 수출, 부의 집중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소농은 자본과의 경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협동조합 운동도 결국 자본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다.
가난한 농촌의 자제들은 상경해서 도시 임노동자가 되었고, 특히 여성 직공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형편없는 저임금을 받고 일했다.
정부에서는 이런저런 법을 제정해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지키라고 했지만,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기 일쑤였다.
전시 계엄령하에서 불만은 표출할 수 없었고, 개화당은 노동운동이든 농민운동이든 철퇴를 날렸다.
조봉암은 농민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진보당에 가입하여 활동했지만, 이미 원내정당이 된 진보당은 재야의 눈에서 보기엔 체제에 순응적이었다.
운명의 1919년. 원산 학살 이후 황성에서 발생한 노동자 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조봉암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황제 귀국 이후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면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조봉암의 세계관은 이미 변화하였다.
황제의 명을 받아 새로 성립된 신 개화당 내각이 보통선거권 부여와 여러 가지 개혁조치에 나섰지만, 정치적 평등과 달리 사회적 불평등이 해소될 여지는 까마득했다.
‘세계에는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해. 이미 러시아와 유럽은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더 공부를 하자. 배우고 익혀서 민중을 위해 쓰자.’
조봉암은 학비가 저렴하면서도 교육 수준이 높은 독일 유학을 떠났다.
본래 청년 조봉암의 사상은 아나키즘에 기울어져 있었지만, 독일에서 당대의 유행인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게 되면서 변화를 일으켰다.
‘일부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잘살고 호사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잘살고 호사할 수 있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인터내셔널의 분열은 어쩔 수 없을 듯하군. 독일과 러시아 간에 화해가 이뤄져서 인터내셔널도 통합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는데 말이야.”
여운형은 혀를 끌끌 차며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혁명적인 코민테른과, 부르주아지의 앞잡이인 개량주의자들이 함께 갈 수 없다는 건 분명하지요.”
독일과 러시아의 화해 분위기에 맞춰 베를린에서 분열된 인터내셔널이 통합을 추진했으나, 결국 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박군이 독일 독립사민당에 입당했다고 했던가?”
“예, 곧 갈라질 것으로 보입니다만.”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급진 독립사회민주당(USPD)은 노선을 놓고 분열 직전이었다.
사회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다 정책 차이로 결국 탈퇴하였고, 사회민주당과의 재통합을 추진하는 세력과 급진 독자세력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충돌했다.
2.5 인터내셔널에 가담하며 독일 사회민주당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모두 거리를 두고 있던 USPD는, 결국 인터내셔널이 통합에 실패하면서 결정적으로 분열하였다.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 등 주류파는 다시 원 소속인 사회민주당과의 재통합을 결정했고, 이에 반발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급진파는 독일 공산당(KPD) 창당에 나섰다.
“자네는 코민테른 노선이 옳다고 생각하는군.”
“코민테른이 옳지요. 사회민주당은 대전쟁의 책임자인 융커,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고 혁명의 기회를 날렸습니다.”
“사민당의 실책이 적지 않지. 하지만, 만약 사민당이 부르주아지와 타협하지 않았더라면 내전이었을 거야. 그럼 러시아처럼 피를 흘리고 싸워야겠나?”
“유혈사태는 가급적 피해야겠지만,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여운형은 한숨을 쉬었다.
“내전은 끔찍한 거야. 동포들끼리 이념이 다르다고 죽이다니, 이보다 끔찍한 일이 어디 있나. 나 역시 소비에트 러시아가 이뤄 낸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들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네. 자네가 따르는 로자 룩셈부르크도 소비에트를 그렇게 비판하지 않았나?”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혁명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볼셰비키의 독재에 대해서는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룩셈부르크의 존재로 인해 독일 급진좌익은 코민테른과 거리를 두었고, 신생 독일 공산당도 독자노선을 걷게 될 예정이었다.
“룩셈부르크 동지의 비판은 타당합니다. 그래서 제 눈으로 직접 러시아를 보고 싶습니다. 현실과 이상이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지.”
변화한 역사로 인해, 박헌영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내전을 거치며 전위당론으로 전환한 볼셰비키보다는, 민중의 자발성을 강조한 ‘룩셈부르크주의’에 더 경도되어 있었다.
“자네도 모스크바의 초청을 받았나?”
“예, 저와 조봉암 동지는 한국 사회주의연구회의 일원으로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리프크네히트 동지가 직접 추천서를 써 줬습니다.”
“호오, 그런가. 그럼 나와 같이 가세. 조동호 동지도 초청을 받아 함께 갈 예정일세. 가는 길이 심심하진 않겠군.”
“예, 선생님. 영광입니다.”
* * *
1922년 10월 25일, 모스크바.
박헌영의 비판에 직면한 여운형은 쓴웃음을 지었다. 베를린에서 대화할 때 이미 그런 조짐을 보이긴 했었지만, 박헌영은 극좌파에 경도되어 있었다.
“저런 위아래도 없는 놈을 봤나. 감히 옛 스승한테······.”
여운형의 최측근인 사회당 선전부장 조동호(趙東祜)가 분통을 터뜨렸다.
“됐네, 유정(榴亭, 조동호의 호). 노선 논쟁에 사제 간이 어딨겠나.”
여운형은 조동호를 만류하고, 논쟁에 응했다.
“유럽과 아시아는 다릅니다. 아시아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급선무고, 노동자 계급이 농민운동, 혁신적 민족주의자, 진보적 부르주아지와 4각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게 바로 울리야노프 동지의 테제가 아닙니까? 울리야노프 동지는 극좌파의 모험적인 태도를 좌익 소아병이라고 일갈한 바 있지요.”
여운형은 일부러 울리야노프의 주장을 인용해 반박했다.
“보통선거권과 의회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선, 제국주의 국가가 폭압적인 압력을 가하는 식민지에선, 혁명적 투쟁에 나서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다릅니다.”
“보통선거권과 의회에 집착하는 건 개량주의적 편향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혁신정당을 자처하던 신민당이 연립정부의 일원이 되니 제국주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설령 사회당이 의회 1당으로 올라서는 날이 오르더라도, 제국주의자들과의 타협은 불가피할 것입니다. 사회당이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역사의 진보는 그리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그랬다고, 한국에서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는 법칙이 있습니까?”
논쟁이 계속 이어지자, 수석 상임의장 지노비예프가 종을 울려 중단하게 했다.
“두 동지의 논쟁은 매우 흥미롭지만, 다음 안건을 논의해야 합니다. 일본 정세를 논의하면서 다시 이 주제를 논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가탸아마 동지, 발언하십시오.”
코민테른의 노선에 충실한 건 물론 박헌영 쪽이었지만,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는 울리야노프는 여운형을 크렘린 관저에 초청했다. 중국 대표 호한민과 일본 대표 가타야마도 함께였다.
“혁신적 정당이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조직해 혁명적 동력을 확보하여, 노동자와 농민, 진보적인 부르주아지가 제휴하여 정권을 획득하고, 제국주의 정책을 철폐해야 한다는 여운형 동지의 테제에 나는 공감합니다.”
코민테른이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의 파트너로 ‘혁신 민주주의 정당’을 더 선호한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었다.
“호한민 동지. 중국의 급선무는 봉건적이고 매판적인 군벌들을 타도하고, 민주혁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국민당이 그 선봉에 서야 합니다.”
“예, 손중산 동지도 소비에트 정부의 원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가타야마 동지. 일본은 아시아의 가장 선진적인 공업국가이자,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혁명적 정당의 조직화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속히 조직해야 합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여운형 동지. 한국은 아시아의 새로운 제국주의 열강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동시에 민주개혁이 한창인 젊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농민당, 자유주의 정당과 제휴하여 개혁의 고삐를 강하게 당겨야 합니다.”
“예, 동의합니다.”
울리야노프는 한중일 세 나라의 대표에게 강조했다.
“동지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민족주의에 휘둘리지 말고, 국제주의 연대를 택해야 합니다. 일본과 한국의 변혁, 중국혁명, 아시아 식민지의 해방은 함께 추구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공산당이면서도, 러시아 당과 핀란드 당이 불화를 겪는 이유는 러시아인들의 우월감 때문입니다. 이런 대국적 쇼비니즘을 경계해 야합니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서로 함께 악수해야 합니다. 만주인, 몽골인, 대만인, 안남인 등 약소민족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아의 혁명을 위해 함께 투쟁해야 합니다.”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민족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울리야노프는, ‘대국적 쇼비니즘’을 경계하고 소수민족을 우대했다.
울리야노프는 백계 러시아인은 물론이고, 중도파에게도 ‘대러시아 제국을 해체하고 팔아먹었다’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민족문제에 전향적이었다.
붉은 군대가 ‘신생 소비에트의 국가안보에 필요하다’고 간주된 러시아제국의 영토를 재정복하기는 했지만, 울리야노프는 각 민족에 자치 사회주의 공화국의 형태로 최대한 자율권을 보장하도록 했다.
반대파들은 ‘붉은 제국주의’라고 비아냥거렸지만, ‘민족들의 감옥’이라 불리던 러시아제국 시절과 비교하면 혁신적인 변화였고,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소비에트 러시아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러시아는 4년간의 전쟁, 3년간의 내전, 외세의 개입과 봉쇄, 혹독한 흉년으로 이루 말 못할 곤궁에 시달리고 있다. 설탕과 식량의 부족으로 유아는 영양실조에 걸리고, 노동자와 군인은 누더기와 같은 옷을 입는다. 기차 내에서도, 역 구내에서도 기아와 질병으로 죽인 이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새 국가를 건설하려는 강렬한 의지에 불타고 있다. 이들은 인내하고, 근면히 일한다. 어린 청소년들조차도 이상향의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이들은 맹렬히 땀을 흘리면, 언젠가 이상향에 도달하리라고 믿는다.
러시아는 차르 시절과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소비에트 정권의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경탄을 금할 길이 없다. ······」
5년 만에 러시아를 재방문한 여운형은, 자신의 일지에 감상을 적었다.
자신의 러시아 방문이 분명히 국내에서 구설수에 오를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는 꼼꼼하게 일지를 작성하여 귀국 후 발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우리의 모범이 될 수 없다. 한국과 러시아의 역사적 발전 경로는 확연히 다르다.
영국, 프랑스, 독일도 마찬가지다. 모든 국가는 독자적인 발전경로를 갖고 있으며, 다른 국가의 사례가 참고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은 공상이 되고, 이상이 없는 현실은 사물에 불과하다. 정치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실제적 세밀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요, 공상적 개괄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한에는 대한의 길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우리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작가의 말
박헌영은 여운형을 대비시키기 위해(실제 역사에서도 그랬고) 등장시킨거긴한데…
역사가 변화해서 이완용도 매국노가 아닌 ‘애국노’가 되었는데, 박헌영의 인생경로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박헌영이 레닌주의(스탈린주의)자였다면, 이 세계관에선 살아남은 로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실제 청년기의 조봉암은 조선공산당 창당멤버이자 소비에트 공화국을 꿈꾸던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아시다시피 해방 이후에는 사회민주주의로 전향,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어 농지개혁을 이끌어내어 대한민국에 혁혁한 기여를 했죠. 그러니 사람의 인생이란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