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3
– 73화에 계속 –
73화 세력균형(勢力均衡)
‘세금을 내라, 군대를 가라, 닥쳐라.’
실제로 비스마르크가 한 말은 아니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과 비스마르크의 강압적인 정책에 반발을 느낀 남독일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이었다.
“조선의 양반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말입니다.”
이선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세금도 안 내고, 군대도 안 가고, 말만 많은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묄렌도르프도 조선의 양반들을 무위도식이나 하는 하등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으므로, 이선의 말에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십니다. 각하께서는 정말 포부가 대단하십니다.”
순간 이선은 웃음을 거두었다.
“헤어 묄렌도르프, 아니 목 참의.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물어봅시다. 공은 누구, 아니 어느 나라를 위해 일을 합니까? 조선입니까, 청입니까?”
이선의 직설적인 질문에 묄렌도르프는 순간 당황했다.
“당연히 조선이지요. 새삼스럽게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시는 겁니까?”
“나는 공의 진의를 믿어 의심치 않으나, 세간에서는 여전히 참의를 북양 대신 이홍장이 보낸 사람이라고 불신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나는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싶어서 묻는 겁니다.”
“각하, 분명 저는 북양 대신이 보내서 온 사람이 맞습니다. 한때 그를 위해 일했던 것도 맞고요. 하지만 지금 제가 모시고 있는 것은 조선의 국왕 전하와 독판 각하이십니다.”
묄렌도르프는 이선에게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서양인인 제게 근대화 정책의 복안을 맡길 정도로 극진히 대접을 해주는 것도 각하시지요. 그렇다면 제가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하지만 공은 독일인이고 본래 독일 외교관이었으니, 독일을 위해 일하기도 하겠지요?”
“이미 외교관 직에선 사임했습니다. 참의 목인덕은 이제 조선이 최우선입니다.”
진심인지 위선인지, 묄렌도르프는 조선에 충성할 뜻을 밝혔다.
“아니, 난 독일인으로서의 애국심까지 부정하라는 게 아닙니다. 조선을 위해 일함과 동시에 조국인 독일 제국의 이익도 고려하는 게 당연하지요. 목 참의가 구상하는 대로 독일 군사교관의 파견과 독일 자본의 투자, 독일인 고문관의 채용, 다 좋습니다. 독일 본국에 문의해서 추진하세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묄렌도르프는 독일인의 고빙을 추진했다. 이선은 이에 지지를 표한 것이다.
“각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주제를 좀 바꿔 볼까요. 지금 유럽의 국제 정치에 대해서. 유럽의 동맹과 대립 관계에 관해 설명해 주겠습니까?”
“예. 현재 유럽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이 있습니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있지요. 영국과 러시아는 세계 패권을 놓고 대립 중이나, 러시아는 발칸 반도를 놓고 오스트리아와도 대립 중입니다.”
이선의 자문에 묄렌도르프가 답했다.
“그렇다면 독일이 주도하는 이 동맹 체제하에서 빠져 있는 나라들이 보이는군요. 독일과 원수 관계인 프랑스, 한때 독일과 동맹 관계였으나 발칸 문제로 갈라진 러시아, 그리고 독야청청인 영국.”
“과연 그렇습니다. 각하는 이해력이 빠르시군요.”
“내 의견을 말해 볼까요? 독일에 원한을 품고 있는 프랑스와, 베를린 회의 이후 독일과 마찰을 빚고 있는 러시아가 손을 잡는 건 악몽이죠. 어차피 영국은 프랑스와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러시아와는 중앙아시아에서 대립 중이니까 논외로 치고.”
이선은 벽에 걸려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독일 정부의 아시아 담당 외교관이라면,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심사를 최대한 동쪽으로 돌릴 겁니다. 그래야 그들이 유럽 문제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영국과도 대립각을 세울 것이며, 독일에 대항하는 동맹도 생각하지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묄렌도르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러나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정말 대단한 추측이군요.”
“말했거니와 나는 비스마르크 수상의 정책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근거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근거가 있지. 내가 이미 21세기에 사료로 확인했는데. 난 비스마르크에게 관심이 많다고.’
이선우로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선우는 비스마르크를 제국주의 시대 최고의 현실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생각했고, 그의 정책과 연설에 대해선 세세한 것도 기억했다.
“뭐,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일 것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프랑스와 러시아는 영토를 넓히고 위신을 올려 좋고, 독일은 유럽 대륙에서의 세력균형과 패권을 굳건히 할 수 있으니 좋고. 조선 또한 이 기회를 통해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테니 좋은 일이지요. 조선 속담에 이런 말이 있는데, ‘누이 좋고 매부 좋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죠.”
비스마르크 외교 정책의 핵심은, 독일 중심의 세력 균형이었다. 이를 위해선 프랑스와 러시아가 손을 잡지 말아야 하며, 이들의 관심사를 유럽이 아닌 아시아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이건 바로 비스마르크가 동아시아 주재 외교관들에게 내린 훈령의 내용이었다. 조선으로 가게 된 묄렌도르프도 은밀히 러시아의 관심사를 조선으로 끌어들여서, 영국과 대립 구도를 이어나가게 하라고 비밀훈령을 받았었다.
“곧 미국이 수호 통상 조약을 비준할 거고, 러시아와도 같은 조건으로 조약이 체결될 겁니다. 그러니 독일도 조선과의 조약을 조속히 비준하길 바랍니다.”
조약 비준의 뜻을 밝힌 미국과 달리, 영국은 재협상을 요구했고, 독일은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난 청과 일본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미국을 조선에 끌어들일 겁니다. 그게 조선의 이익과 독일의 이익에 모두 부합하는 길이라 생각하는데, 공의 생각은 어떤지?”
“…… 과연 일리가 있습니다.”
묄렌도르프는 비스마르크에게서 받은 비밀훈령을 밝힐 수 없었지만, 이선의 말이 옳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목 참의는 종2품 외아문 협판으로 승진해서, 외교 정책도 보조하게 될 겁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목 협판.”
“가,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선이 가진 폭넓은 식견에, 묄렌도르프는 역시 이선이 조선의 실력자라고 판단했다. 묄렌도르프는 독일 정부에 보낼 비밀보고서를 생각했다.
“그럼 러시아와의 교섭을 시작해 볼까요. 비스마르크 수상이 말한 대로, 러시아와 좋은 조약을 맺는 게 정치의 비밀이니.”
이선은 쾌활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즉 외아문 독판 이선이 맡은 일 중, 가장 수월하게 일이 진행된 것은 제물포를 통해 입항한 베베르와의 수교 논의였다.
영국과 독일은 관세 문제로 비준이 연기되고, 프랑스가 조약 체결을 한 번 더 논의하다 기독교 선교 문제로 인해 좌절된 만큼, 러시아는 될 수 있는 대로 신속하게 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이 모든 사안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지침까지 내려둔 터였다. 러시아로선 극동 영토의 안정이 최우선이었다.
11월 24일, 베베르를 태운 러시아 군함이 인천 제물포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영사. 조선국은 영사의 입국을 환영합니다. 제가 한양까지 안내를 맡을 것입니다.”
조선을 대표하여 베베르를 제물포항에서 맞이한 건 외아문 독판 이선, 협판 묄렌도르프, 그리고 참의로 발탁된 김옥균이었다.
1882년 주일 러시아 공사 로젠에게 조약 체결을 강력히 희망했던 것도 그였던 만큼, 이선에게 청하여 러시아 사절단을 예방하기로 한 것이었다.
“영사, 러시아 정부가 조선국의 희망을 신속히 받아들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선은 베베르에게 반가움과 더불어 감사를 표명했다.
“다 공작께서 양국 간의 가교를 놓아주신 덕분이지요.”
“러시아와의 수교는 조선 외교사의 진일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미국, 영국, 독일과의 조약은 모두 청의 주선 하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이번 조약은 조선 스스로가 주도한 것이니까요.”
“러시아 역시 제3국을 거치지 않고, 조선과 단독으로 협상을 진행할 것입니다.”
러시아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뿐만 아니라, 협상의 실무를 맡은 이선과 묄렌도르프도 러시아에 우호적이라 협상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다.
단지 함경도와 연해주를 잇는 육로 통상 조약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는데, 결국 이 문제를 차후에 체결하기로 연기함에 따라 본 조약은 빠르게 맺어졌다. 베베르가 입국해서 조약이 맺어지기까지 채 2주가 걸리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조약이었다.
총 13조와 해상 통상 조약으로 구성된 조러 수호 통상 조약은, 거의 모든 항목이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조건을 따라 체결되었다.
대조선국 대군주와 대러시아국 대황제는 양국의 우호를 영원히 돈독하게 하기를 간절히 염원하여 피차 왕래하면서 오래도록 통상하는 일을 협의하였다.
1.1 대조선국 대군주와 대러시아국 대황제, 그리고 양국 인민은 피차 모두 각각 영원히 평화롭고 화목하게 지낸다. 이 나라 인민이 저 나라에 거주하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에서 본인과 가족 및 재산적 이익에 대하여 합당한 보호를 받는다.
1.2. 앞으로 만일 다른 나라와 분쟁이 일어나게 되면, 일국은 일단 다른 일국과 조약을 맺은 이상 대책을 강구하여 중간에서 잘 조처해야 한다.
……
대조선국 개국(開國) 491년 10월 27일
러시아력 1882년 11월 25일, 서력 12월 7일
특명 전권 대신 독판교섭통상사무 영정종경부사 이선
특명 전권 대신 5등 문관 성(聖)안나 2등 훈장 수훈자 K.I. 베베르
전권 대신 이선과 베베르가 각각의 국가와 군주를 대표하여 서명을 마치자 박수가 터졌다.
“조약 체결을 축하하며, 조선국 대군주 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베베르의 덕담에 이선 또한 덕담으로 받았다.
“러시아 황제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양국의 우호가 만대에 걸쳐 이뤄지길 기원합니다.”
조선으로서는 네 번째로 맺은 서구 국가와의 근대적 조약이요, 청의 주선을 거치지 않은 첫 조약이었다.
조선으로서는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자주독립국임을 공인받은 채 조약 체결을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고, 러시아로서는 라이벌인 영국보다 먼저 조선 진출의 발판을 얻게 되었다.
조약의 대표이자 실무를 맡았던 이선은, 마침내 일 하나를 마쳤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러시아에서 떠나서 활동한 성과를 조선에도 적용하게 된 것이다.
조선과 러시아 간에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은 머지않아 효과를 발휘했다.
“미합중국 상원은 조선과의 수호 통상 조약이 비준되었음을 알립니다.”
제일 먼저 미국이 조선과의 조약을 의회에서 비준하고, 한성에 주재할 외교관을 임명했다.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Chester A. Arthur)는 조선 주재 특명 전권 공사로 루시우스 푸트(Lucius Foote)를 임명하고, 조속히 부임하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과 개화파들은 그야말로 뛰는 듯이 기뻐했다.
조약의 형식에 집착하던 이들로선, 미국이 제일 먼저 조약을 비준하고, 청국이나 일본에 주재하는 공사와 동격인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하자 미국이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승인한 것으로 여겼다.
“『조선책략』에서 이르길, 미국은 평화를 존중하고 신의를 아는 대국이라 하였지.”
“미국은 타국의 영토에 관심이 없고 정의로운 나라라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이선은 그런 환상을 공유하지 않았으나, 미국이 조약을 비준하고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이제 독일과 영국도 가만히 있을 순 없을걸.’
러시아가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이 조약을 비준함에 자극을 느꼈는지, 아니면 묄렌도르프를 통해서 전해진 이선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몰라도, 독일도 결국 기존에 체결한 조약을 그대로 비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독일 제국 정부와 연방 참사원은, 조선과 1882년 6월에 체결한 조약을 비준한다.”
영국은 여전히 최저 10%, 최고 30%인 관세 조항을 수정하자며 억지를 부렸지만, 러시아의 조약과 미국의 비준에 이어 독일마저 비준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영국도 더는 혼자 몽니를 부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영국만 빼고 모두 조선과 조약을 체결할 기세입니다. 언제나 아시아 각국과의 외교에서 선두에 섰던 대영제국이, 미국과 러시아에 밀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청이나 일본과 맺은 조약과 비교하면, 조선과 맺은 조약은 관세율이 너무 높습니다. 이를 조정하지 않으면, 분명히 청과 일본도 관세 협정을 다시 맺자고 할 겁니다.”
“그건 대영제국의 힘으로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이대로 조선을 러시아에 넘겨줄 순 없습니다. 차후에 재협상하더라도, 일단 조약을 비준하고 상주 사절을 파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의회 다수당인 자유당은 실리적인 입장에서 조약 비준에 반대하고, 야당인 보수당이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내세워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글래드스턴 정부와 가까운 자유당 일부 의원들이 선회하여 조선과의 조약을 비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비준 찬성이 다수를 점했다.
조영 수호 통상 조약도 기존 조약을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