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30
3부 145화 역사의 재해석
해가 바뀌어, 광무 27년(1923).
올해 1월 21일은 고종 태황제의 붕어(崩御) 2주년이 되는 날로, 삼년상의 끝을 알리는 대상(大祥)에 해당되는 날이었다.
혼전(魂殿)에서 대상 의례를 행하고, 두 달 뒤 담제(禫祭)까지 마치면 삼년상의 모든 절차가 종료되었다.
군주는 사대부의 예와 달리 마지막 절차가 있었으니, 신위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였다.
이때 선왕의 공신을 종묘에 배향하는데, 이를 부제(祔祭)라고 한다.
“고종 태황제의 신위를 태묘(太廟, 종묘)에 모시고자 하니, 마땅히 태황제의 공신을 배향하고자 한다. 경들은 의망하도록 하라.”
일반적으로 배향공신은 군주의 즉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신하 또는 재위기에 충실히 보좌한 신하로 정해진다.
“문익공(文翼公) 박규수(朴珪壽), 문경공(文敬公) 신응조(申應朝), 문정공(文貞公) 이돈우(李敦宇), 충헌공(忠獻公) 김홍집을 의망하여 삼가 아뢰옵니다.”
개화당의 비조(鼻祖)이자 고종 초기의 명신인 박규수가 태황제의 으뜸가는 공신 반열에 올랐다.
이돈우는 오랜 신하로 고종 즉위의 공이 있어 뽑혔고, 신응조는 본래 위정척사파지만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에 의해 정승에 임명되어 민심을 안정시킨 공로가 있어 유학자를 대표하여 뽑혔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대한제국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은 태황제의 공신이냐, 광무제 이선의 공신이냐를 놓고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당연히 후자가 맞겠지만, 고종 재위기가 재직기간의 대부분인 점을 감안하여 고종의 배향공신으로 결정되었다.
벌써부터 논의할 사항은 아니었지만, 광무제의 으뜸가는 공신은 김옥균이라는 걸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바였다.
“문익공 박규수, 문경공 신응조, 문정공 이돈우, 충헌공 김홍집을 고종 태황제의 공신으로 배향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종묘배향공신이 된다는 건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형식적인 배향이 되었지만, 전기에는 당대 최고의 공로자들이 배향되었다.
예컨대 태조 고황제의 신위에는 조준, 이화(의안대군), 이지란, 조인옥, 남재, 이제, 남은, 정도전이 배향되었다. 조선의 1등 개국공신들이었다.
무인정사(왕자의 난)로 피살된 남은과 태조의 사위 이제(李濟, 흥안군)는 이미 태종에 의해 신원되어 배향되었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신원된 정도전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후 이선의 명으로 추배(追配, 추후 배향)되었다.
세종대왕의 신위에는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이제(李禔, 양녕대군), 이보(효령대군), 김종서가 배향되었다.
황희를 비롯한 공신들은 당대에 배향되었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고종 2년 대원군에 의해, 김종서는 광무 5년 이선에 의해 추배되었다.
선조대왕의 신위에는 이준경, 이황, 이이가 배향되었다. 그나마도 당대에는 이준경과 이황뿐이었고, 고종 대에 이이가 추배되었다.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신들이 배제되었다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던 이선은, 광무 5년 유성룡과 이순신을 문무의 대표로 추배하였다.
「정도전과 김종서는 태종대왕과 세조대왕의 정난(靖難)으로 숙청되었으니, 태묘에 배향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이선이 선대왕의 공신들을 추배할 때, 반대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이의 없는 만장일치였지만, 문제는 정도전과 김종서였다.
태종과 세조가 그 둘을 정변에서 가장 먼저 제거하였으니, 선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가 있었다.
「정도전은 대원왕께서 신원하여 문헌(文憲)의 시호를 내렸고, 김종서는 영조대왕께서 신원하여 충익(忠翼)의 시호를 내렸다. 문헌공은 태조 고황제의 원훈이자 개국의 공신이다. 충익공은 세종대왕의 원훈이자 문종과 단종의 충신이다. 어찌 그 공을 기리지 않겠는가?」
관례상 황제가 직접 선대왕의 역사 재평가에 개입하기가 곤란한 일이었지만, 정도전과 김종서의 숙청이 옳지 못하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선은 후손이자 왕통을 계승한 입장에서 선왕을 비난할 수는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실로 단종대에는 충역(忠逆)의 도리가 거꾸로 섰다. 김종서와 황보인은 세종대왕과 문종대왕의 유훈을 받은 고명대신이자 충신이요, 한명회와 권람의 무리는 권력을 탐해 정변을 획책한 쥐새끼 같은 역적의 무리다. 그런데 한명회와 권람은 태묘에 공신으로 배향되어 있는데, 어찌 왕명을 받들어 국토를 확장하고 고명대신의 역할을 다한 김종서는 배제되어야 한단 말인가?”
황제의 비답에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수양대군의 쿠데타, 계유정난에 유학자들이 부정적인 건 그 당대부터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일이었고, 사육신과 김종서에 대한 동정론도 그 못지않게 오래된 일이었다.
사육신과 김종서는 숙종 대와 영조 대에 복권되어 시호를 받았다지만, 숙종과 영조도 대놓고 계유정난을 비난하는 일은 없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선대왕의 일을 후손이 함부로 논해서는 곤란한 일입니다.”
국가를 대대적으로 개조한 개화당조차도 조심스러워했다. 하물며 이선은 태종과 세조처럼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만민의 추대’를 받은 군주가 아니던가?
‘내가 태종이라면 모를까, 수양대군 따위와 비교대상이 되나? 그렇게 피를 흘려 가며 쿠데타로 집권해서 도대체 한 일이 뭐냐?’
특히 이선은 태종은 여러 면에서 높이 평가해도, 세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유학자의 관점에서 찬위(簒位)를 해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렇게 유혈투쟁으로 찬탈을 해서 얻은 권력으로 대체 뭘 했냐는 게 이선이 부정적으로 여기는 이유였다.
“대한이 북벌을 완수하고, 국토가 압록과 두만을 넘어 만주에 이른 지금, 조종의 국토를 확립했던 김종서의 공훈을 기림이 마땅하다.”
광무 5년은 의화단 전쟁 승전과 북벌의 완수로 이선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시기였다.
신흥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김종서를 국토를 넓힌 공신으로, 유학자들도 일찌감치 김종서를 충신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지라 배향을 찬성하는 의견은 압도적이었다.
김종서는 세종의 공신으로 배향되었다.
이선의 복안은, 단순히 옛 공신을 우대하는 게 아니었다.
이선은 모든 역사를 선왕의 업적으로 만들어 금기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대한민국에선 조선왕조가 이미 멸망했기에 자유로운 역사연구가 가능했지, 만약 군주국으로 존재한다면 제약이 얼마나 많았겠나? 황제의 선조를 비판하는 건 곤란한 일이 되었겠지.’
근대문명국가의 기본은 언론의 자유이자, 사상의 자유였다. 선대왕이라 하여 절대적으로 신성시한다면, 앞으로도 엄정한 역사해석이 어려울 터였다.
이선은 역사해석에 있어서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 * *
광무 27년, 바로 이 해에 도발적인 역사저작이 나왔다.
1923년, 계해년은 인조반정 300주년이자 5주갑(周甲)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역사학자 신채호가 ≪광해군(光海君)≫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기존의 통설에서 크게 벗어난,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저작이었다.
조선에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국왕들은 인조의 후손이자, 집권세력도 반정을 주도한 서인의 후계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광해군은 ‘폐모살제’를 범하여 유교적 도리를 저버린 패륜아이자, 명나라에 대한 은의를 저버린 혼군, 의심이 많아 신하들을 대거 숙청한 폭군, 숱한 궁궐 공사를 일으켜 민생을 혼란에 빠트린 암군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비난받은 건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명나라에 대한 조선 유학자들의 신앙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유학자들은 광해군을 ‘군부(君父)의 은혜도 모르는 금수와도 같은 자’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명나라와 중국, 청나라와 만주에 대한 한국의 관점이 변화하게 되었다.
더 이상 명나라와 중국의 숭상이 대상이 아니었고, 만주족도 오랑캐가 아닌 ‘형제민족’이 되었다.
자연히 광해군에 대한 인식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 재평가의 선봉에는 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있었다.
신채호는 진작부터 대북의 정신적 영수였던 정인홍을 높이 평가하여, 인조반정으로 참살된 정인홍의 복권운동을 이끌었다.
「내암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왜란에 분연히 맞서 일어나 국란을 극복한 우국충정의 지사이다. 가히 을지문덕과 이순신에 버금가는 대한의 삼걸(三傑)이다!」
정인홍이 인조반정 이후 90에 가까운 노년에도 불구하고 참살당한 건 정치보복이란 인식이 유림들 사이에서도 깔려 있었는데, 신채호는 이를 넘어서 정인홍을 진정한 선비의 표상이자 한국 역사상의 삼걸이라고 끌어올렸다.
조선 후기의 역사는 철저히 서인, 그중에서도 집권 노론의 관점에서 사관(史觀)이 형성되었기에, 지방 유림들과 학자들 사이에서는 ‘역사의 패배자’들의 복권을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선은 이러한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광무 7년 정인홍·윤휴·이징옥 등 역적으로 단죄되었던 이들 중 억울하다고 판단된 수십 명을 재심 끝에 일괄 사면하여 명예를 회복하도록 했다.
또한 다양한 업적을 세우고도 역사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인물들, 특히 실학의 선구자들을 높이 평가하여 시호를 내리고 저작을 간행하도록 했다.
대표적인 이가 다산 정약용으로, 실각과 오랜 귀양살이로 중앙 정계에서 잊혀진 존재였던 정약용의 저작들을 대대적으로 발간해 사표(師表)로 삼게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 선황제께서 아끼던 신하요, 다재다능한 시대의 천재였다. 만약 다산과도 같은 이가 중용되어 그 뜻을 펼쳤다면, 어찌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과도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다산의 저작을 널리 알려, 새로운 시대의 사표로 삼도록 하라.」
집권 개화당은 혈통으로 보면 노론의 후예였다. 예컨대 서광범은 정약용의 철천지원수였던 서용보의 증손자였다.
그렇기에 옛 남인이나 북인이 복권되어 높이 평가받는 걸 거북할 수도 있겠지만, 개화당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개화당 자체가 자신들의 벌열(閥閱) 가문과 결별하고 변혁을 외친 급진파의 비밀결사로 출발했고, 이들은 예전처럼 당파가 아닌 근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았다.
예컨대 윤치호처럼 서자·무반 가문의 후예로 신흥 엘리트 반열에 오른 이에게는,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북인이니 따지는 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윤치호는 다산 정약용 현양 사업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개화 이래 다양한 역사적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선대왕의 평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건 여전히 까다로운 금기였다.
그런데 신채호가 그 금기에 도전한 것이었다.
「광해군이 폐모살제의 우를 범하고, 거듭된 궁궐 공사로 민심을 크게 잃었으니, 반정을 초래한 건 실로 자업자득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이기도 하다. 광해군은 왜란의 위기에 몸소 분조를 이끌며 전방에서 분투하였기에, 전쟁이 가져올 참사를 누구보다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교묘하게 균형을 잡아 전란의 위험을 피하게 하였다. 강홍립과 정충신으로 하여금 북방의 위협을 적극적으로 탐지하게 하여, 삼전도의 굴욕과 같은 일이 없도록 미연에 방지하였다.」
「······ 병자년의 참상, 삼전도의 굴욕은 누구의 책임인가? 반정을 주도한 이들은 어리석은 정책을 반복하다, 국가를 10여 년 만에 파탄의 길로 내몰게 하였다. 그 죄는 오히려 그들이 폐위한 광해군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의 주장은 도발적이었다.
폭군으로 대대로 비난받던 광해군에 재평가를 했을뿐더러, 인조반정으로 등장한 정권을 통렬히 비판했다.
대놓고 인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서인 정권에게 패전과 굴욕의 책임을 물었다.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의 태두이자, 개혁적 유림 출신으로서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치에도 참여하고 있는 신채호는 학계와 대중 양쪽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신채호였다.
신채호의 저작은 단숨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광해군과 같은 폭군에게 어찌 이리 과한 찬사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일각에서 재평가를 한다 한들, 광해군이 폐모살제를 저지른 폭군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지만 어찌 감히 선대왕을 비난할 수 있는가? 신채호는 성상께서도 인조대왕의 후손임을 잊었단 말인가?”
“신채호는 대한의 국민이자 성상의 신하이다. 선대왕을 부정하는 자가 성상께 충성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이는 불충이다!”
극우파와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신채호의 주장을 ‘불충(不忠)한’ 것이라 하여 맹비난했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도 용납하기 어렵지만, 선대왕인 인조를 비판한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단재 선생께서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단 말인가? 광해군이 내치에서는 암군이었을지 몰라도, 외교에서는 현명한 판단을 한 게 아닌가?”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은 우리 역사에 전무후무한 치욕이다. 서인 정권이 국가를 파탄 낸 건 사실이 아닌가?”
“나는 신채호 박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대한은 헌법으로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다. 학문의 자유에 충성, 불충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불충 운운하는 건 학자의 자유로운 연구를 막으려는 말이다!”
신채호를 추종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근대 역사학의 연구방법론을 따르는 학자들도 성향을 불문하고 신채호를 옹호했다.
신채호가 시도한 광해군과 인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지만, 역사해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자신의 저작을 옹호하는 논설을 싣자, 이를 비판하는 논설이 다음 날 실렸다.
신문지상에서 신채호를 비판하는 주장, 옹호하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이는 지성계의 일대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선은 학문적 자유를 고려해 논쟁에 개입하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그런데 비판 측에서 신채호를 황실모독죄로 고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자, 이선은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선 본인의 생각으로 말한다면, 그는 광해군과 인조 모두에게 비판적이었다.
‘광해군이 외교적으로 탁견이 있었을지는 모르나, 내치에서 숱한 우를 범했기에 책임을 지고 실각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광해군을 끌어내린 인조 정권이 대책 없이 배청친명 정책을 펼치다 삼전도의 굴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대청 강경책을 쓰려면 전쟁에서 이기든지. 그 책임은 당연히 인조에게 있지.’
이선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인 고종의 아들이었기에, 왕통상으로든 혈통상으로든 인조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그건 역사적 평가하고는 별개의 문제였다. 당장 선왕이자 생물학적 부친인 고종의 실정을 그 자신이 통렬히 비판했는데, 머나먼 10대조인 인조야 말할 것도 없었다.
「짐이 말하건대, 대한은 조선의 왕통을 계승하였으나, 새로운 문명국가의 길을 열었다.
대한은 법치국가다. 물론 황실의 존엄성도 중요하겠지만, 헌법은 국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이다.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학문의 자유는 대한국헌법이 보장하는 바이다.
학자에게는 역사를 연구하고 평가할 권리가 있다. 이를 황실 모독 운운하며 재갈을 막으려는 시도를 용인할 수 없다.
역사의 평가는 객관적이고 냉철해야 한다. 공과(功過)를 논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수백 년 전의 일을 지금조차 논할 수 없다면, 대체 언제 논한단 말인가?
선대왕의 치세가 아니라 짐의 치세라 할지라도, 비판할 사안이 있다면 과감히 비판하는 게 학자의 자세다.
짐은 전혀 개의치 않으니, 학자들은 자유롭게 연구하여 백가쟁명(百家爭鳴)을 펼치도록 하라.」
황제 자신이 직접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완전한 역사 해석의 자유를 인정했다.
특히 황제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고, 유교적 정통성이 지배하는 나라인 대한제국에선 선대왕의 공과를 논한다는 게 더욱더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그렇기에 황제인 이선이 직접 나서서 그 금기를 허물고, 자유로운 역사해석의 물꼬를 틔었다.
이는 막 태동한, 한국 근대 역사학의 발전에 혁혁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작가의 말
??? : 마음만 같아선 수양대군, 하성군, 능양군에게 역사의 징벌을 받게 하고 싶구나!
21세기 역사학자의 기억이 있는 이선은 당연히 현대 역사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만, 왕통을 계승한 군주의 입장에서 선왕을 비판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광해군은 워낙 평이 갈리는 군주고, 조선시대에 과도하게 폄하된만큼이나 반대로 현대에는 과도한 호평을 받는 감이 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탁월한 군주임에 틀림없지만, 내치에서 광해군이 보인 그 숱한 잘못들을 보면, ‘내정 없는 외치란 없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하죠.
유교적 명군이었던 정조가 근대화를 꿈꾸던 개혁군주로 추앙받고, 시대의 변화에 보수적이었던 광해군이 비운의 개혁군주로 포장되는 걸 보면, 확실히 괴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광해군에 대한 기대와 호평은, 그 뒤에 온 인조가 워낙 한심해서… ‘다시 보니 선녀같다’라는 느낌을 준다고나 할까..
광해군에 우호적인 수정주의 학설은 1930년대 일본 역사학자 이나바 이와키치가 처음 제기했습니다만, 해방 후에도 손진태, 신석호, 이병도 등이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학계의 통설로 자리됩게 됩니다. 신채호는 정인홍을 극찬했고 ‘사대정권’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변화한 역사의 작중에서는 광해군에게 찬사를 보낼만한 역사적 여지가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