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35
3부 150화 아시아의 선두
「대한건아 박용만,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다!」
전쟁이 끝나고, 박용만은 정위 계급으로 전역했다.
당장은 무직이 됐지만, 미래가 보장된 외교관을 그만두고 최전방까지 다녀온 박용만은 전쟁영웅으로 불리게 되었고, 정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개화당에 입당한 박용만은 고향인 철원에서 출마하여 무난히 당선되었고, 정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우성이 군무협판을 맡아주게.”
“저는 관직 경험이 부족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자네가 적임자라고 판단해서 임명한 거니, 마음껏 소신을 펼쳐보도록.”
“예, 각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군무대신은 무관 출신이 맡았지만, 문민통제를 위하여 차관인 협판은 반드시 문관이 임명되었다.
보통 협판은 관료가 맡는 게 관행이었지만, 이상설 내각에서는 정계와 군부 양쪽에 두루 인기가 좋은 전쟁영웅 박용만을 군무협판에 임명했다.
군무협판으로서 박용만은 상당한 수완을 보였고, 신임 군무대신 이동휘를 보좌하여 전후 군제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군이 동부전선에 파병되면서 사령부 통역장교로 전임되었던 박용만은, 한국군 소장파 장교들은 물론이요 미군 장교들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다.
동부전선 당시의 인연으로, 워싱턴 회의에서 주재무관 김유진이 맥아더와 접촉하며 공작하는 동안, 전권 부대표였던 박용만도 우드 대통령 및 고위 장성들과 접촉하여 한국의 국익을 관철시켰다.
“개화당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인물이라면 역시 우남일 줄 알았는데, 우성도 만만치 않아.”
“우성은 정부와 군부 모두를 다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하지.”
박영효 계파의 몰락 이후, 개화당 우파는 지도자를 잃고 정파로서 위기에 몰려 있었다.
반공 반소를 외치며 소비에트에 대한 강경한 외교로 우파의 지도자로 떠오르던 이승만이었지만, 워싱턴 회의 이후 박용만은 이승만의 아성을 위협하는 개화당 신진주자로 떠올랐다.
“옛 대조선(고조선)의 고토는 만주를 넘어, 서로는 몽골에서 동으로는 연해주, 북으로는 시베리아까지 이어집니다. 대한은 고토를 되찾아 북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옳소!”
“대륙에 웅거하던 러시아제국과 대청제국이 동시에 붕괴한 건, 대한에 있어 백 년에 한 번, 아니 천 년에 한 번 올 지정학적 대전환입니다! 북방으로 나아가는 건 대한의 천명입니다!”
“와아아아아!”
“우성! 우성!”
박용만은 만주, 몽골, 시베리아까지 고조선의 강역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적 민족주의 사관을 받아들여, 고토회복론을 외치며 우익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현재 대한의 인구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많아질 겁니다. 3천만이 4천만으로, 4천만이 5천만이 되는 건 시간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무수히 많은 인구가 좁은 영역 안에서 부딪히면, 사회적 갈등은 더욱 커질 겁니다!”
의학의 발전과 경제적 부의 증대는, 인구 증가를 낳았다.
1900년대부터 인구 증가는 본격화되었고, 호황기였던 1910년대부터 ‘베이비붐’ 현상이 나타났다.
1920년대에 이르자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매년 100만 명씩 출산하여 사망자를 제외한 자연증가율은 연간 70만 명에 달했고, 광무 23년에 2,500만이었던 인구는 불과 4년 뒤에 2,800만으로 추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추세라면, 곧 3천만이 눈앞이고, 1940년이면 4천만에 도달하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원역사에서 1925년에 약 1,900만이었음을 감안하면, 훨씬 빠른 인구 증가였다.
“드넓은 만주에는 2천만이, 연해주와 몽골에는 겨우 100만이 살 뿐입니다. 3천만 대한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은 북방에 있습니다. 적극적인 확장과 이주 정책으로 대한의 실질적 강역을 넓혀야 합니다!”
여기서 머물렀다면, 박용만은 기존의 흔해 빠진 팽창주의자들과 같을 터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대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유럽의 정세를 분석하고 있는 박용만은 달랐다.
“우리에게는 북방개척운동과 토지개혁이라는 훌륭한 전례가 있습니다. 북방으로 이주한 우리 농민에게 미개간 토지를 주어, 북방을 지키는 간성으로 삼아야 합니다. 만주인, 몽골인, 러시아인, 퉁구스인을 우리 형제로 삼아, 진정한 오족협화를 이뤄 내야 합니다!”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독점하고 있으며, 영국은 대영제국을 단일 경제블록으로 재편성하려고 합니다. 실패로 끝났지만, 독일 역시 전쟁에서 승리하면 중동부 유럽을 하나의 블록으로 편성하려고 했습니다.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우리 민족의 오랜 숙적인 중국, 동양 패권의 경쟁자인 일본에 맞서, 대한도 새로운 지역 블록을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라는 불세출의 위대한 지도자가 계십니다! 대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만주와 몽골과 연해주의 대통합! 대청 황실의 정통이 만주로 이전하고, 러시아 황실의 정통이 대한으로 온 건 실로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대한과 만주, 몽골, 러시아는 형제가 되어 하나의 대가족을 이루어야 합니다!”
“대한이 넓은 팔을 뻗어, 그 머리는 만주에, 왼팔은 몽골에, 오른팔은 연해주에 두어 북방에 웅비한다면, 대한의 천년 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박용만은 기존의 확장주의자와 달랐다.
미국 먼로주의, 영국의 지정학, 독일의 대전기 중부유럽 경제블록 계획, 프랑스 전시 코포라티즘(협동조합주의), 이탈리아의 이레덴티즘(실지회복주의), 러시아 공산주의를 두루 연구한 박용만은 우익의 새로운 진화를 보였다.
“우성! 박용만! 우성! 박용만!”
지도자를 잃고 방황하던 개화당 우파와 우익 세력은, 박용만이라는 젊고 참신한 지도자의 등장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 * *
박용만의 새로운 이론에는, 일본의 급진파 사상가 기타 잇키와도 관계가 있었다.
10.26 사건, 이토 암살 이후 기타 잇키와 사토 히로시는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나는 인민의 각성에 의한 혁명을 지향하지, 무분별한 테러는 반대합니다. 내 사상과 이토 공작의 암살과는 완전히 무관한 일입니다.”
기타와 히로시는 범인 아사히 헤이고와 일면식도 없었고, 아사히가 기타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암살을 교사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었다.
결국 일본 법원은 기타 잇키의 기소를 기각했다.
하지만 아사히 헤이고가, 일본의 급진파들이, 기타 잇키의 저작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1920년 기타는 자신의 사상이 담긴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을 집필했는데, 그 내용의 급진성에 지식인들조차 놀랄 지경이었다.
초판은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고, 기타는 아주 민감한 내용은 수정하여 1922년 다시 출간했다.
「국민의 기본권 존중, 언론의 자유, 화족(귀족) 폐지, 특권계급 철폐, 토지개혁, 진정한 의미의 보통선거, 누진세 강화를 통한 사유재산 상한제, 재벌 해체, 노동자의 권리 증진, 노사화합, 파업금지, 황실재산 국유화, ‘국민의 천황’으로의 이행.」
급진 사회주의자 뺨치는 과격한 주장들에 대하여, 기타는 부연했다.
“나는 좌익적 혁명에 대항하여, 우익적 국가주의적 국가 개조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타는 국가주의자인 동시에 사회주의자, 곧 국가사회주의자였다. 혁명은 국가의 이름으로 이뤄져야 했다. 일본 국민이 숭배하는 천황의 특수성을 존중하여 천황제는 유지하되, ‘천황의 국민’이 아닌 ‘국민의 천황’이 되어야 했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정신병자 아닌가?”
“이번에도 출간 금지시킬까요?”
“됐네, 미친놈에게도 떠들 자유는 있지. 이 장황한 괴설을 이해할 자가 몇이나 되겠나? 내용을 보면 우익은 우익대로, 좌익은 좌익대로 싫어할 만한 여지가 많네. 황실에 대한 민감한 구절만 삭제하고 발행을 허가하게.”
1907년과 다른 점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에 기타의 저작이 금서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일본개조법안대강≫은 일부 삭제된 채로 발간이 허용되었다.
그 급진적이고 특이한 사상으로 인해 좌익과 우익 양쪽에서 공격을 받았다.
좌익은 기타의 군국주의적 사고방식에 반대했고, 우익은 일본의 금기인 천황제와 황실에 대해 거침없이 의견을 쏟아 내는 기타에게 경악했다. 출간 이후 그와 절연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타는 적잖은 추종자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혁명의 완수. 일중한 삼국의 연대. 아시아에서 서양 제국주의 세력 타도. 일본이 아시아의 모범이 되려면, 류큐인과 아이누, 대만인을 대하는 식민지적 차별부터 철폐해야 한다.」
기타가 국수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아시아주의자였다는 점이었다. 그는 차별받는 류큐와 아이누, 식민지 대만에 대해서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게 저항할 권리가 있다면, 국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인 일본은 세계의 부르주아 국가인 영국으로부터 호주를, 세계의 지주 국가인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를 탈취해야 한다.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인도와 아시아 식민지를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하여 육군과 해군은 대대적으로 증강되어야 한다.」
기타가 사회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그는 팽창과 전쟁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무산국가’ 일본은 세계를 과점(寡占)하고 있는 ‘부르주아’ 영국과 ‘지주’ 러시아를 격파하고 권리를 획득해야 했다. 이를 위한 군비 팽창은 계속되어야 했다.
* * *
박용만도 기타 잇키의 일본개조법안대강을 읽고 깊은 흥미를 느꼈다.
한국 현실과 맞지 않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주장은 배제하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국가 대한제국’이 ‘세계의 부르주아’ 영국과 ‘세계의 지주 러시아’에 맞서 아시아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받아들였다.
“저게 무슨 미친 개소리야? 박용만이,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히 돌았구만.”
이승만은 박용만의 주장이 허황된 건 둘째치더라도, 박용만이 개화당 소장파의 주자로 상승하여 우파의 지지를 놓고 자신과 갈등을 빚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상설이 이대로 건강 회복을 못해 정계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총리뿐만 아니라 개화당 총재에서도 물러날 터였다. 차기 개화당 총재가 곧 차기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승만의 관심사는, 박용만이 자신의 경쟁자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개화당 소장파를 대표해서, 지도자를 잃은 우파의 지지를 얻어내는 방식으로 단숨에 주요 주자로 떠올랐다.
그런데 박용만이 새로운 개화당 소장파 주자로서 우파의 지지를 얻어내고 있는 이상, 자신의 경쟁자인 동시에 포섭대상이 될 수 있었다.
6월의 어느 날, 이승만은 박용만을 개화당 지도부가 종종 찾는 고급 요정으로 초대했다.
“우남 형님, 이게 웬일입니까. 저를 다 초대를 해주시고.”
“우리가 워싱턴에서도 같이 갔는데, 국사가 바빠서 제대로 회포를 못 풀었잖나. 회포도 풀겸 불렀지.”
“허허, 그럼 다른 곳에서 보시지. 우남 형이 술 안 드시는 거 아는데.”
“정치하려면 술도 좀 마셔야지. 자, 한잔 받게.”
“형님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럼 감사히 먹지요.”
말만 그럴 뿐, 실상은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국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이 오고 가는 동안,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승만은 본론을 꺼냈다.
“이봐 우성, 요새 내지르는 소리가 너무 과격하지 않나?”
“무슨 말씀이신지?”
“대조선의 고토를 회복하자고? 만주, 몽골, 시베리아가 대조선의 고토? 그런 헛소리를 믿나? 철모르는 애들 데리고 선동하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야.”
이승만의 비판에 박용만이 빙긋 웃었다.
“우남 형, 중요한 건 내가 믿느냐가 아닙니다. 대중이 믿고 싶어 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선동가 다 됐구만.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반공 반소에 충실한 겁니다. 반공 반소는 우남 형도 주장하던 거 아니던가요?”
이승만이 벌컥 화를 냈다.
“나는 국제정세를 면밀히 분석하여! 대한의 지정학적 의의가, 영미와 손잡아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반공 반소에 있다고 보는 거지만! 자네는 미친 팽창주의 담론으로 떠들어대는 거 아닌가!”
“우남 형, 대한이 언제까지 영미의 강아지 노릇만 해야 합니까?”
“뭐?”
박용만이 미소를 거두고 정색했다.
“지금은 영미와 손잡는 게 대세죠. 당연합니다. 하지만 영미도 결국 아시아를 짓밟는 제국주의자란 말입니다. 대한에는 대한의 길이 있어요. 우린 아시아의 선두주자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근데 우남 형은 대한의 위치를 영미 세계패권의 바퀴로만 한정하려는 거 아닙니까.”
“자네, 미국 자유주의 신봉자 아니었나? 언제 그렇게 바뀐 거야?”
“파리와 워싱턴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위선을 정말 잘 보았기 때문입니다. 형이 그토록 스승으로 모시는 윌슨의 행태를 보십시오. 아시아에는 민족자결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만의 민족자결주의지요.”
“그래서, 소비에트처럼 민족해방이라도 내세우겠다는 건가?”
자신의 ‘스승’인 윌슨을 비판하는 것에 이승만이 못마땅해하자, 박용만도 불편한 티를 냈다.
“공산주의 몰이 그만하십쇼. 형도 알다시피, 난 대한에 충실한 애국주의자니까. 왜 공산주의자들이 아시아에서 흥성합니까?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못하는, 민족해방의 대의를 지원하고 나서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아시아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 것 같습니까?
박용만은 아시아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역할을 장차, 우리가 해야 한단 말입니다. 아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우리 황제 폐하를 위대한 해방자로 존경합니다. 그 자산을 포기할 겁니까?”
“성상께선 전혀 그렇게 생각 안하실 걸. 지금껏 대한의 서구화 정책을 이끈 건 성상이시라는 걸 명심하시게.”
“그래요. 우리는 근대화의 후발주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그렇게 살 겁니까? 유럽의 마지막이 아니라, 아시아의 선두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 이제 자네 생각 잘 알겠네. 이거 가만 보니까, 일본식 아시아주의에 심취했구만.”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내 첫 번째 가는 충성의 대상은 오직 대한일 뿐이니.”
같은 정당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옛 동지 이승만과 박용만 사이에는 확연한 분열의 강이 명백히 드러났다.
작가의 말
1920년대 변혁에 맞춘 한국 좌익의 변화상도 보였으니, 우익의 변화상도 다뤄야겠지요.
(전통적인 국가주의 우익에서, 한국형 파시즘으로의 변화?)
역사가 바뀌고, 서는 위치가 바뀌면 자연히 인간의 생각도 바뀌게 마련이지요.
우성 박용만 선생은 일찌감치 무장독립론을 외치며 미국에 한인군사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을 세운 분입니다.
다만 1920년대에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고조선의 영토인 만주, 몽골, 시베리아에 조선인을 대거 이주시켜 독립의 발판으로 삼자’는 주장을 한 바 있습니다.
그때문인지 비밀리에 조선총독부와 모종의 협상을 했는데, 변절한 친일파로 오인받아 의열단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실제 변절한건 아니고, 오해로 암살당했다는게 학계 정설입니다.
생전의 주장에서 영향을 받아 새로운 우파의 대표주자로 삼은거지, 실제 우성 박용만이 파시스트였던건 절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