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37
3부 152화 정치적 도전
이 무렵, 원내 제3당이자 제1야당인 진보당도 노선 논쟁에 휘말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진보당은 농민운동과 특정종교(천도교)가 결합한 특수한 정당이기에, 농민운동과 천도교의 목표가 같았을 때에는 분명히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
천도교는 태생인 동학부터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한울이다)을 내세웠기에, 대한제국의 종교 중 가장 ‘진보적’인 종교였다.
계급평등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던 여성과 아동의 인권을 중시했다. 갑신경장 이후 정부에서도 여성과 아동의 인권 향상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했지만, 사회적으로 이를 확산되게 하는 데에는 천도교의 공이 컸다.
특히 ‘어린이’란 용어와 ‘어린이날’이 제정되는 데에는 천도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교령 손병희의 사위인 방정환(方定煥)이 앞장서서 어린이의 인권 존중을 위해 노력했다.
정치적 평등을 넘어 사회적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천도교의 역할은, 세계사의 분수령을 맞이하며 논쟁에 부딪혔다.
바로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 사회주의의 세계적 확산이었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제 군주를 시해하고 기존 질서를 철저히 파괴한 무군무부(無君無父)한 자들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며 탄압한다.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 평등 역사의 신기원이다. 불평등한 신분제, 약탈적 자본주의, 억압적 제국주의에 분연히 맞서고 일어났다. 세계의 수많은 피억압계층이 감격하고 있다. 우리의 인내천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천도교와 진보당에서는 러시아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신파와 구파, 혁신파와 보수파로 나뉘게 되었다. 청년층으로 갈수록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과연 사회주의는 인내천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정치 평등을 넘어 사회 평등을 부르짖는 건 세계의 대세다. 태서(유럽)에서도 사회주의 정당이 선거에서 잇달아 승리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당과 연합하여 노농당(勞農黨)이 되어야 한다.”
진보당의 거두 녹두 전봉준은 본래 유학을 익힌 이답게 러시아 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진보당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 혁신적인 노동자-농민 정당으로 변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내천과 사회주의는 다르다. 사회주의는 서양에서 온 외래사상으로, 새로운 서학이다. 우리 동학의 가르침과는 명백히 다르다. 사회주의는 계급갈등을 부추기며, 사회통합을 무너트린다.”
천도교 교령이자 진보당의 공동대표인 손병희는 구파의 반발에 오랜 동지인 전봉준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특히 결정적인 문제가 된 건,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반종교 운동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했듯,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오직 과학적 방법론과 유물론만이 이러한 중세적 미몽(迷夢)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종교에 미혹된 대중들이 마수에서 탈출하도록 해야 하며, 특히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이뤄지는 종교 교육을 철저히 반대해야 한다.」
반종교 운동가들의 첫 번째 공격 대상은 마르크스주의의 숙적인 기독교였지만, 천도교·불교·유교도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세기에 천주교가 서학(西學)으로서 기존 조선의 주류질서를 부정했다면, 20세기에는 사회주의가 새로운 서학으로서 한국의 주류질서에 도전했다.
“한국은 특정 일신교가 지배적으로 군림했던 유럽이나 중동과 명백히 다르다. 종교의 영향력이 컸던 유럽에서는 세속주의 투쟁이 필요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도 그런가? 한국은 종교가 세속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불교, 천도교, 기독교는 기존 조선 사회에서 박해받았으며, 종교 자유화 이후 평등과 진보의 가치를 전파하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은 종교와 대립할 때가 아니다.”
사회당 대표 여운형이 급진파의 반종교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여운형 자신이 기독교도이기도 했고, 종교가 한국의 근대화에 나름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걸 인정했다.
개화당은 불교, 신민당은 기독교, 진보당은 천도교와 밀접한 데 굳이 자극을 할 필요가 없다는 현실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도산과 신민당 지도부 태반이 기독교도, 진보당은 아예 천도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반종교 운동이라니 도대체 현실감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신민당의 안창호, 진보당의 전봉준과 연대를 논의하고 있는 여운형으로서는 반종교운동에 혀를 찼다. 여운형은 한국의 현실과 괴리된 급진파들에 부정적이었다.
여운형과 사회당 지도부의 제동으로 반종교운동은 현저히 약화되었으나,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입장에서는 사회주의자를 못마땅하게 여길 여지가 충분했다.
“사회주의자들과는 절대로 연대할 수 없소!”
“암, 사회당은 상종할 수 없지.”
“그래도 몽양은 대화가 되는 사람이오.”
“몽양 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이지.”
안창호와 전봉준 모두, 당내 우파와 달리 여운형을 협상 파트너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봉준·안창호·여운형 모두 개화당의 장기집권을 끝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고, 방향은 약간 달라도 정치적 평등을 넘어 사회적 평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전봉준은 농민운동과 신분해방운동을, 안창호는 계몽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여운형은 노동운동과 계급평등운동을 이끌었다.
공동의 목표와 의무감으로, 세 사람은 비밀리에 접촉하여 연대를 논의했다.
“우리 세 사람이 이렇게 모인 건, 단순히 내년 총선거를 넘어, 대한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변화하려는 데 있소이다.”
좌장(座長)격인 전봉준이 먼저 운을 떼었다. 노선은 달라도, 안창호와 여운형은 전봉준을 대선배로 존중했다.
“개화당은 지난 40년간 대한의 부국강병을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으나, 장기집권의 관성으로 여러 오류를 저질렀소. 이제 권좌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소이다.”
“동의합니다. 무릇 진정한 데모크라시라면, 정권교체가 이뤄져야지요.”
“단순히 정권교체에만 방점이 찍혀서는 안 됩니다. 노동자·농민·서민의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는 데에 의의가 있지요.”
“그야 물론이오.”
전봉준이 안창호에게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도산, 신민당은 개화당과 연립정권을 끝낼 생각이 있습니까? 차기 총선에서 신민당과 진보당, 더 나아가 사회당과의 연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요?”
“저와 저를 따르는 이들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안창호는 말을 흐렸다.
전봉준과 여운형은 무슨 말인지 짐작했다. 신민당 우파는 진보당이나 사회당과 손잡느니, 차라리 개화당과 통합되는 게 낫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녹두 선생님, 저도 여쭙고 싶습니다. 진보당 내에서도 사회당과 연대하는 데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흔히 구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회당에 부정적인 건 사실이오. 사회당이 모스크바에 다녀온 것, 사회주의자들이 반종교 운동을 전개한 것에 불만인 사람들이 많소이다. 나와 동지들이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노력은 하고 있소이다만.”
전봉준도 안창호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진보당 구파는 사회당과 연대하느니 차라리 오랜 숙적인 개화당과 손을 잡는 게 낫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회당 내부에서도 급진파들은 진보당을 이름만 진보인 보수정당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노력합니다만.”
“그럼 신민당은 유산계급 정당이라고 하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 노동당이 자유당과 연대하였듯, 연합정치는 의회정치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운형이 독일 사민당과 영국 노동당을 모델로 삼고 있듯이, 안창호도 영국 자유당의 운명이 신경 쓰였다.
한때 보수당과 양대 정당이었던 자유당은, 로이드조지가 전시연립정부라는 명목으로 보수당과 연정을 하다 보수당과의 차별성을 상실했고, 1922년 총선을 기점으로 진보적인 표심을 노동당에 빼앗겨 양대 정당의 지위를 넘겼다.
‘신민당도 이대로 가다가는 자유당 신세가 될 거야. 서북이라는 지역기반이 있어서 당세는 유지하겠지만, 서북만의 지역정당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집권을 향해 나아가려면, 개화당과 어떻게든 차별성을 둬야 한다.’
지지기반이 서서히 노쇠화 되고 있는 전봉준의 고민도 같았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지방 농민은 예비 도시 노동자가 되고 있다. 노농 연대는 시대적 흐름이다. 천도교라는 기반이 있어서 당세는 유지되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천도교도만의 정당이 될 거야.’
비록 현재는 10석에 불과하지만, 유럽의 사례를 볼 때 상당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사회당을 이끌고 있는 여운형도 고민했다.
‘아직 대한의 노동계급은 소수에 불과하다. 급진파들 주장대로 독야청청하다가는, 영원히 군소정당으로 남고 말겠지. 진보적 자유주의자, 진보적 농민운동과 손을 잡고 의회정치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 정당 모두 연대해야 한다는데 이해관계가 일치했고, 세 사람은 연대에 반대하는 당내 반대파에 맞서야 한다는 처지도 일치했다.
“내년 총선거를 목표로, 가급적 올 연말까지, 각자 당을 설득하여 정치 혁신을 위한 연대를 결성합시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당원 동지들을 설득해 내겠습니다.”
전봉준, 안창호, 여운형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당 대 당 통합까지는 아니어도, 정권교체를 목표로 반(反)개화당 혁신연대를 결성한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내 인생 마지막 도전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목표가 있었다. 만민평등. 진정한 평등을 이뤄 내려면, 담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지난 40년간 만민평등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던 전봉준의 나이 어느덧 69세. 다행히 아직 신체는 건강하지만, 정계은퇴를 바라볼 시기였다.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40대 안창호와 30대 여운형보다, 늙은 전봉준은 더욱 조바심이 들었다.
신민당, 사회당과의 연대를 통한 개화당 장기집권의 종식은 전봉준의 마지막 정치적 도전이었다.
* * *
40년 집권정당, 개화당도 혁신과 외연 확장에 나서고 있었다.
경장 이후의 세대인 40대 이승만과 박용만이 당의 주요주자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개화당도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이상설이 개화당을 이끄는 동안 당의 체질개선에 성공했고, 신민당과 연립정부 운영으로 오히려 외연을 넓힐 수 있었다.
개신유림을 중심으로 한 신민당 우파는 사실상 개화당과 노선이 다를 바 없게 되었고, 차기 총선 이후에도 연립정부 연장을 찬성했다.
“사회당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당도 정권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이성과 계몽, 합리적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개화당과 신민당만이 정부를 운영할 자격이 있습니다.”
개화당을 대표해서 탁지대선 이시영과 외무대신 이승만, 신민당 우파를 대표해서 농림대신 이동녕과 법무대신 홍진이 연립정부 연장을 의논했다.
이승만은 아예 더 나가서 개화당과 신민당의 통합을 구상했다.
‘박용만 추종자를 개화당에서 축출하고, 신민당 우파를 끌어들여, 나를 중심으로 통합 보수-자유주의 정당을 결성한다.’
박용만 축출은 황제가 경계하는 극우 숙청을 명분으로 당내 주류의 지지를 얻어 낼 수 있지만, 신민당은 달랐다.
안창호는 신민당과 동일시되는 인물이었다. 특히 서북지역에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안창호가 전봉준, 여운형과 접촉했다고 합니다.”
“반 개화당 연대라도 추진하나 보지? 만약 성사되면 곤란한데.”
“신민당 내에서 반대의견이 상당하다더군요.”
“오월동주가 그리 쉽게 될 리가 있나. 위기는 기회지. 잘하면 신민당과 진보당의 분열을 끌어낼 수 있겠어. 언론을 움직이게. 사회당과의 연대는 소비에트와 손잡는 것과 다름없다고 캠페인을 벌이자고.”
이승만은 정치공작, 특히 흑색선전에 능란했다.
미국의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미국 사회당의 유진 데브스(Eugene V. Debs)는 미국의 대전쟁 참전에 반대하다 반전평화주의 운동을 하다 수감되었다.
1920년 대선에 옥중출마를 강행하여 100만 표를 득표하는 적잖은 성과를 올렸으나, 대선 기간 내내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마타도어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에서 정치를 배운 이승만은 미국식 선거 전략과 정치공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승만이 정치공세에 나서자, 첫 공격대상이 된 박용만은 개화당 내에서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박용만의 세계관은 일본 아시아주의자들의 세계관과 다를 바가 없다!」
「박용만은 제2의 박영효가 될 생각이다. 성상께서 이를 용납하실 수 있겠는가?」
박영효가 팽창주의를 내세우며 개화당 우파를 이끌다가 권좌에서 실각한 게 불과 4년 전 일이었다.
박용만이 황제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내세우는데도 불구하고, 박영효를 연상시킨다는 이승만의 공격은 개화당 주류로 하여금 불길한 기시감을 떠올리게 했다.
이승만은 개화당 주류와 더욱 가까워지고, 박용만은 위험인자로 찍히게 되었다.
“역시 우남다워. 박영효 일파의 지지를 얻으려고 할 때는 언제고, 나더러 제2의 박영효라고?”
애초에 개화당 우파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던 건 이승만이었는데, 재빠르게 변신한 것이었다.
박용만은 정치공학에서 이승만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절감하게 되었다.
박용만 자신도 개화당 내에서 당장 주류로 떠오르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총재 선거 도전은 자신의 주장을 알리려는 목적이 더 컸다.
그런데 이대로 이승만이 당권을 거머쥐기라도 한다면, 박용만은 개화당에서 설 자리가 없을 터였다.
“좋다. 어차피 낡은 개화당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일이 걸릴지라도, 독자노선으로 간다.”
박용만은 개화당과 결별할 생각을 하고, 외연 확장에 나섰다.
대외적으로는 팽창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국내적으로는 개화당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보적인 정책을 구상하는 박용만은, 어차피 개화당과 한배를 계속 타기는 어려운 운명이었다.
“단재 선생님, 소생을 도와주십시오.”
박용만은 신민당에서 독자적인 비주류 정파를 이끌고 있는 신채호와 접촉했다.
근래 도발적인 저작 ≪광해군≫으로 인해 신민당 우파에게 격렬한 비판을 받은 신채호는, 그 자신도 신민당 우파의 보수성에 실망한 터였다.
신채호는 고구려 재건을 외치는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사회경제관은 유럽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절대 아니었지만,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인간 해방의 대의에는 공감했다.
“저는 선생의 사관을 깊이 존경합니다. 청제국과 러시아제국의 붕괴는 실로 일천년래 대사건입니다.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한 대한이 북방으로 웅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요.”
박용만은 신채호의 역사관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엄밀히 말하면, 박용만은 신채호의 역사관을 곡해해서 대중에게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 도처에는 사대주의가 깔려있습니다. 과거에는 중국을 사대했다면, 이제는 영국과 미국에 사대하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외무대신 이승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승만은 실로 현대의 김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사대주의’를 혐오하는 신채호에게 있어, ‘현대의 김부식’은 최악의 비난이었다.
“분명히 해 두지요. 소생이 대한에 고구려의 기상을 되살리자는 건, 단순히 영토를 팽창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중국과 조선이라는 사대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를 넓게 바라봐 자주적이고 웅대한 기상을 되살리자는 의미지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고구려 재건이 패권주의의 확대라면, 기존의 제국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대한은 영미, 일본, 중국, 러시아에 대비되는 아시아 약소민족의 진정한 벗이 되어야 합니다. 고구려 재건은 북방민족의 자유로운 연합이 되어야 합니다.”
신채호가 외치는 ‘고구려 재건’은, 대한제국 중심의 제국주의 국가가 아닌 러시아-중국-일본-영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자유로운 북방민족의 연합’이었다.
“단재 선생,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시아의 선두이자, 아시아 민족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만들려는 이상향입니다.”
“그렇다면, 소생 역시 우성 선생과 뜻을 함께해 볼 생각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단재 동지! 우리 함께 고구려 재건을 촉진합시다.”
신채호는 박용만의 배후에 있는, 지도의 만주와 연해주를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고.구.려······.”
작가의 말
슬슬 인물, 지역중심 정당에서 유럽식으로 이념을 대표하는 정당구조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단채 신채호 선생은 보통 민족주의 역사학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 저 무렵에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신랄히 비판하는 급진 아나키스트에 가까웠습니다. 마침 조선혁명선언을 쓴게 1923년이군요.
여기서는 역사의 변화로 다른 책을 쓰고, 다른 노선을 걷게 되었습니다만… ‘고구려 재건’은 작중 창작이라는 걸 분명히 해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