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38
3부 153화 발해의 꿈
대륙 진출, 북방 민족과의 연합, 고구려 재건.
이는 단순히 급진 우익만의 주장이 아니라, 20세기 초 대한제국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정서이기도 했다.
전 세계적인 민족주의 열풍, 과거사에 대한 회고적 미화, 대청제국과 러시아제국이라는 전통적 육상제국의 붕괴, 비약적인 국력 신장, 동양의 떠오르는 열강이라는 믿음은 한국인들에게 정말로 현재의 시대를 ‘일천년래 최대사건’이라고 인식하게 해 주었다.
“옛 대조선(고조선)의 후예는 예맥(濊貊)족인 부여와 고구려요, 천손의 나라 고구려는 북방 민족을 통합하여 제국을 건설하였다. 고구려의 후예는 발해이다. 발해의 정통은 태자가 귀부한 고려가 계승하였으며, 고려의 정통은 조선, 즉 대한이 계승하였다.”
전통적인 조선의 정통사관은, 단군조선-기자조선-삼한-통일신라-고려-조선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이었다.
민족주의와 근대 역사학을 받아들인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국사(國史)는 고조선-삼한(마한&진한&변한)-삼국(고구려&백제&신라)-남북국(신라&발해)-고려-조선-대한이었다.
북방주의 사관은 이보다 더 나아가, 고조선-예맥-고구려-발해-고려-조선-대한을 정통으로 보았다.
공식 국사가 신라 정통론에서 벗어나 그동안 한국사에서 잊혀진 발해를 격상시켜 무통(無統)론으로 변화했다면, 북방주의 사관은 거꾸로 북방(예맥-고구려-발해) 정통론을 주장했다.
“다가오는 병인년, 서력 1926년은 고구려의 후예인 대(大)발해가 멸망한 지 꼭 1천년이 되는 해이다. 그로부터 꼭 1천년이 지나, 대한이 다시 대발해의 강역으로 진출하는 날이 오고 말았다. 실로 일천년래 최대사건이다!”
신채호로 대표되는 북방주의 사관은, 근래 들어 고구려에 이어 발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문헌기록이 부족한 발해가 근래 발전한 근대 고고학의 힘으로 서서히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발해의 영토였던 만주와 연해주가 1920년대 대한제국의 세력권에 들어오게 되면서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극동에 이주한 백계 러시아 고고학자들은 유럽의 선진적인 고고학을 한국에 전파했다. 한국-러시아 공동발굴단은 발해 멸망 1천년인 1926년 성과 발표를 목표로 발해 수도 상경 용천부의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정부와 학계에서는 발해 멸망 1천년을 역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었지만, ‘북방주의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대발해의 국토는 고구려보다 넓어, 남으로는 대동강에서 북으로는 흑룡강(아무르강)에 이르렀다.”
발해의 실질적 강역이 어디까지 이르느냐는 아직 불명확하지만, 북방주의자들은 북방 강역을 아무르강으로 비정했다.
고대국가는 영토보다 다스리는 인민이 중요한 제민지배체제로 강역의 넓이보다 인구가 더 중요했지만, 현대인들이 보기에 직관적인 건 강역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제3의 로마와 유라시아 제국이라는 성격을 동시에 지닌 보편국가였다. 그 러시아의 정통이 대한에 도달한 건 실로 하늘의 뜻이 아닐 수가 없다.”
‘제4의 로마’를 자처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무르 정부와 로마노프 왕가는 대한제국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 또한 북방주의자에게 유라시아 천명의 이전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발해는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해, 드넓은 국토에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던 보편국가였다. 대한은 대발해와 같은 보편국가의 길을 걸어야한다.”
북방주의자들은 극동으로 이주한 백계 러시아의 신흥 담론인 유라시아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발해를 유라시아 ‘보편국가’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대발해를 구성하는 민족 중 고구려인의 후예는 한민족이오, 말갈족의 후예는 만주족이오, 거란족의 후예는 몽골족이다.”
“러시아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연해주에 거주하는 퉁구스계 북방 원주민들은 발해의 소수민족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발해는 상업민족인 소그드인을 통해 서역까지 교역했다. 소그드인은 인도유럽계통 민족으로, 러시아인과 그 뿌리가 같다.”
발해 보편국가 담론은 다분히 현재를 인식해서였다.
발해의 지배계층인 고구려인은 한국인으로, 말갈인은 만주인으로, 거란인은 몽골인으로, 흑수말갈은 퉁구스 소수민족으로, 소그드인은 백계 러시아인으로 치환되어 은유되었다.
이는 새로운 북방의 ‘오족협화’를 의미했다.
“대발해가 고구려의 재건을 이루어 냈듯이, 대한은 1천년 만에 북방의 형제민족들을 규합해 대발해를 재건할 의무가 있다!”
이들이 외치는 ‘대발해’는 실제 했던 과거의 국가 발해라기보다는, 유토피아적인 북방의 이상국가에 가까웠다.
“이게 뭔 헛소리야? 한민족이 어떻게 북방 오랑캐와 같은 민족이라는 거냐?”
“되놈들이 언제부터 우리 형제였단 말이냐?”
대한제국이 ‘중화의 천명’을 계승했다고 믿는 유학자들은 물론이요, 근대 민족주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개화당과 주류인사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역사관에서 북방 이민족은 ‘오랑캐’ 혹은 ‘되놈’에 불과했고, 근대 대한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청은 과거에는 위대했을지 몰라도, 현재는 시대에 뒤떨어진 케케묵은 유물이다. 대한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중화민국에 멸망당했겠지.”
서양의 제국주의적 사고와 사회진화론을 내면화한 대한제국 주류세력에는, 만주족을 비롯한 북방 민족은 ‘시대에 뒤떨어져 근대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었다.
백번 양보해도, 대한제국이 ‘문명의 적자로서 어리석고 불쌍한 북방 민족을 도와, 문명개화를 이루도록 지도해야 할 대상’이지, 대등한 위치의 형제라는 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한의 국력이 더 강하다고 하여, 절대로 민족적 존엄성을 모욕하지 말라. 결코 타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말라.”
물론 황제 이선은 청 황실을 존중하고 만주인의 문화를 존중하라 상기시켰다. 정부 당국자 중에서는 김옥균과 김규식처럼 ‘청 황실의 존엄과 청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이들이 대(對)청 정책을 이끌었다.
그럼에도 이선이 주기적으로 상기시켜야 하듯, 한국인들이 주변 민족에 가지는 우월의식은 만연해 있었다.
민족주의자이자 북방주의자인 동시에,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에 우호적인 신채호는 한국인들의 만연한 우월의식이 개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헝가리와 핀란드에서 발흥해 멀리 한국과 일본에까지 인기를 끈, 범투란주의(Pan-Turanism, 우랄-알타이 범민족주의)를 한국적으로 변주한 신채호는 ‘북방 민족의 대단결’을 주창했다.
“내가 고구려와 발해의 재건을 외치는 건, 단순히 그 강역을 대한의 영토로 수복해 강역을 확장하자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서양 제국주의자는 물론이요, 일본 팽창주의자나 범중화주의자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특정 민족이 우월의식을 갖고 제국을 팽창하려 한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그 강대하던 독일제국의 패망이 증명하지 않는가?”
“대한은 북방 민족의 진정한 형제가 되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라는 두 대제국에 의해 짓밟혔던 북방의 약소민족들을 대한의 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설령 과거에 지배적인 민족이었더라도, 만주인과 러시아인은 더 이상 지배민족인 아닌 북방의 형제민족이 되었다. 북방의 다양한 민족을 하나의 그릇으로 모아, 옛 대발해가 그러하였듯 거대한 일가(一家)를 이루는 것이 대한의 사명이다.”
아시아주의와 투란주의의 한국적 변형인 이른바 ‘대발해주의’였다.
정부 당국자와 주류 인사들은 이상주의적인 망상이라고 코웃음을 쳤지만, 신채호와 그의 추종자들은 진지했다.
대발해주의는 급진 우익뿐만 아니라 일부 민족주의 성향의 좌익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대중적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박용만이라는 떠오르는 신진 정치인과 손을 잡게 되면서, 대발해주의는 단순히 변방의 이념이 아닌 대한제국의 정치 담론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 * *
1921년 이래, 아무르강 이남의 연해주는 대한제국의 지원을 받는 ‘프리아무례(연아무르) 임시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소비에트 정부는 백군 잔당들이 집결한 연해주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으나, 내전과 기근이라는 심각한 국내요인으로 인해 대한제국과의 전면전을 야기할 수 있는 ‘연해주 해방’을 당분간 포기했다.
소비에트 적군의 공세 중단은 아무르 정부의 생존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들은 통치 굳히기에 나섰다.
“우리는 러시아의 정통을 계승한 정통 정부다. 전러시아를 수복하는 그날까지, 우리의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남러시아군과 흑해함대가 극동 연해주로 이전하면서, 아무르 정부의 군사적 성격은 더욱 강고해졌다.
해군 총사령관 콜차크 제독, 남러시아군 사령관 브랑겔 장군, 극동군 사령관 디테히리스 장군이 삼두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중에서도 디테히리스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이자 가장 극렬한 왕당파였다.
“혁명과 볼셰비키는 정통 러시아를 파괴하려는 유대인의 음모다! 차르를 따르지 않는다면, 정교회를 믿지 않는다면 그건 러시아인이 아니다. 로마노프 왕조와 정교회의 이름으로 러시아를 수복해야 한다.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 황제 폐하 만세!”
시대착오적인 디테히리스의 주장에 아무르 정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자유주의 입헌민주당과 인민주의 사회혁명당(우파)은 불쾌함을 느꼈다.
연해주에 도착한 니콜라이 2세의 당숙이자 대전쟁 초기 러시아군 총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대공과 극우파들이 디테히리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제정복고파조차 부담스럽게 여겼다.
“임시정부에 왕당파만 있는 게 아닌데,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오?”
“아무르 정부가 생존하려면 한국, 일본, 미국, 영국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네 나라 모두 전제군주제를 시대착오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변화가 필요하겠군.”
워싱턴 회의에서 연해주 세력권을 공인받은 한국도, 극우파의 폭주를 미리 제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선은 대한제국 정부의 명의로 아무르 임시정부를 향해 5가지 준칙(準則)을 전달했다.
1. 아무르 임시정부는 인민에 의해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제헌의회에 의해 정치체제를 결정해야 한다.
2. 아무르 임시정부는 러시아인만의 국가가 아니다. 다원적 세속적 다민족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3. 아무르 임시정부는 ‘러시아’라는 국호를 써서는 안 된다.
4. 아무르 임시정부의 통치영역은 아무르강 이남으로, 이북으로의 진출과 교전을 엄격히 금지한다.
5. 아무르 임시정부는 독자적인 정부와 군통수권을 갖지만, 전쟁과 조약은 반드시 대한제국 정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요컨대, 아무르 정부는 사실상 보호국 상태인 만주의 청나라에 비하면 훨씬 많은 자율성을 갖지만, 한국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움직이라는 말이었다.
아무르 이북으로의 진출 금지와 러시아 국호 사용 불가는 소비에트 러시아를 구태여 자극하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지만, 만주가 중국과 다른 별개의 국가임을 국제사회로부터 공인받았듯이 연해주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다른 별개의 국가임을 공인받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워싱턴 회의의 결과로 대한제국, 대영제국, 미합중국, 일본제국은 공동으로 아무르 임시정부를 승인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아무르강 이남에서의 정부’란 의미였지,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이따위 명령을 받아들이라고? 한국이 근래 좀 국력이 강화되었기로서니, 로마노프 왕가와 사돈을 맺었다고 상국 노릇을 하겠다는 건가? 러시아라는 국호를 쓰지 못하는 나라가 어떻게 정통 러시아일 수가 있단 말인가!”
이진과 타티야나의 국혼 이후, 알렉세이 황태자를 추대하는 제정복고가 눈앞이라고 상상했던 디테히리스와 극우파는 펄펄 뛰며 반발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결정된 터였다. 한국은 아무르 정부에 극단주의 세력의 배제를 요구했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지원 없이 버티기 힘든 아무르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1922년 10월, 디테히리스는 ‘독직 혐의’로 체포되었다. 디테히리스는 불명예 전역처리 되었고, 군부 내에서 디테히리스의 추종자들은 모두 해직되었다.
극동군 파벌은 완전히 실각했고, 흑해함대와 남러시아군이 정부와 군부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제헌의회가 선출될 때까지 콜차크 제독이 임시로 ‘국가섭정’의 지위를 맡기로 했고, 브랑겔 장군이 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콜차크와 브랑겔 모두 심정적으로 차르의 복고를 원하는 왕당파였지만,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인민이 원한다면 민주공화국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이 가장 원하는 모양새는, ‘인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가 차르를 모시라고 외쳐’ 제정복고를 이루는 것이었다.
“차르 체제는 이미 한 번 실패했다. 그런데 그 체제로 돌아가자고?”
“소비에트 정권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상징성이 필요하다.”
“볼셰비키에 맞서기 위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왜 꼭 차르가 되어야 하는가?”
아무르 임시정부의 내무장관, 공안조직의 총수인 전직 혁명가 사빈코프는 제정복고에 반대했다.
“알렉세이 황태자? 병약한 어린아이가 아닌가. 병약한 어린아이가 어떻게 강력한 지도자가 되는가. 키릴 대공? 그는 민심을 읽는 눈이 있지만, 정작 왕당파들은 기회주의자라고 싫어한다. 니콜라이 대공? 군사적 능력은 있지만, 시대착오적 반동주의자다.”
계승서열 1위 알렉세이, 2위 키릴, 극우파들이 원하는 니콜라이 대공 모두 조건 미달이었다.
“한국 황제와 같은 군주가 있다면, 군주제의 복고를 받아들이겠다. 한국 황제는 단순히 군주가 아니다. 그는 진정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고 이끄는 영도자다. 군주가 아니더라도, 그는 통치자의 자격이 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국가와 민족을 이끄는 영도자지, 군주가 아니다!”
사빈코프와 그의 추종자들이 원하는 건, 국가의 영도자지 군주가 아니었다. 사빈코프는 소비에트에 맞서는 총동원체제와 ‘보즈드(Vozhd, 수령)’를 외쳤다.
“연해주의 인구는, 백계 난민들을 받아들였다지만, 겨우 130만에 불과하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인구는 얼마인지 아는가? 1억 3천만으로 추정한다. 문자 그대로 100대1이다! 동양에는 일당백이란 표현이 있다. 우리 인민 한 사람이 100명을 능히 상대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와 인민의 모든 힘을 이끌어 낼 초월적인 보즈드가 필요하다. 나약한 차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사빈코프의 주장은 사회주의와 반동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백계 러시아 청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인민! 한 사람의 영도자!”
“하나의 국가! 하나의 인민! 한 사람의 영도자!”
1923년 여름, 고려인 이주 6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연해주를 방문한 군무협판 박용만은 사빈코프의 연설을 매우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저 사람, 전직 좌익 사회주의 혁명가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사회혁명당 전투단을 이끌었죠.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인 모스크바 총독 세르게이 대공과 반동정책을 이끌던 플레베 내무장관을 폭살한 주역이지요.”
사빈코프는 혁명가 시절,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이자 알렉산드라 황후의 언니인 엘리자베타의 남편 세르게이 대공을 암살한 전력으로 인해, 우익으로 전향한 후에도 황실의 증오를 받고 있었다.
“보즈드, 영도자 이론이라, 매우 흥미로운데. 한 번 이야기 나눠 보고 싶군요.”
“사빈코프 장관도 한국에 매우 흥미가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 황제 폐하를 이상적인 영도자의 상으로 꼽을 정도니까요. 그런 군주가 존재한다면, 굳이 혁명이 필요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보는 눈이 있군요, 하하. 더욱 만나보고 싶은데.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만남으로.”
“그럼 소관이 자리를 주선해 보겠습니다, 협판 각하.”
“각하는 무슨, 우린 전우 아닙니까. 예전처럼 편히 대하세요. 그럼 부탁합니다, 김 부령.”
박용만은 키가 훌쩍 큰 장교와 반갑게 악수를 했다.
두 사람은 동부전선의 전우이자, 같은 뜻을 품은 동지이기도 했다.
장교는 바로, 아무르 임시정부 군사고문관이자 대한제국군의 촉망받는 장교 김좌진 부령이었다.
작가의 말
??? : 고…구…려… 대…발…해…
작중 이승만&개화당주류와 박용만-신채호의 대립은, 일본으로 치면 입헌정우회 정부와 아시아주의 야권의 대립과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작중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포용적이지만…
이선이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있지만, 작중 한국인들이 만주나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은 실제 일본제국이 ‘조센’과 ‘시나’를 바라보는 관점과 비슷한 셈이지요. 그 시대에는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실제 사빈코프가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에서 세계대전과 혁명을 거치며 국가주의 우익으로 전향한건 맞지만, 파시즘적 경향을 보이는건 작중 창작입니다. (카이저라이히 대체역사모드의 오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