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4
– 74화에 계속 –
74화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조선에 폭풍과도 같았던 임오년, 1882년이 끝나고, 계미년, 1883년 새해가 밝았다.
1883년 1월, 기무처는 산하에 외교를 전담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과 내정을 담당하는 통리교섭군국사무아문(내아문)으로 개편되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는 이선과 김홍집이 각각 독판과 수협판(首協辦) 자리에 유임한다. 목인덕과 홍영식을 협판으로 임명한다.”
조선 땅에 도착한지도 얼마 안 된 서양인 묄렌도르프에게 얼마나 기대를 갖고 있는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참의에는 개화파 관료들이 중용되어 김옥균, 어윤중, 신기선이 임명되었고, 그를 보좌하는 주사들에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 서얼·중인 출신 실무가들이 대거 임명되었다.
신분과 출신에 관계 없이 능력이 있으면 중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물론 정책을 모두 총괄하는 기무처 총재 대원군은, 여전히 실권을 갖고 군림했다. 이선이나 개화파 관료들은 권력자라기보다는 실무가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산하에는 장교사(掌交司)·정각사(征榷司)·부교사(富敎司)·우정사(郵程司)의 4사가 설치되었는데, 장교사에서는 외교 교섭과 사신 파견을, 정각사에서는 세관 업무를, 부교사에서는 화폐주조와 상공업 업무를, 우정사에서는 도로와 통신 업무를 맡았다.
장교사에서는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번역했다. 동아시아에서는 미국의 법학자 휘튼이 저술한 『국제법 원리(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청나라에서 번역한 만국공법을 주로 읽었기 때문에, 마침내 조선에서도 만국공법의 체계를 따라 국제법을 따르겠다는 의사를 천명했다.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으니 전국 팔도와 각국에 행회(行會)하여 다 알고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태극기를 국기로 반포할 것을 제안했고, 임금이 이를 윤허함에 따라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합류하려는 조선의 의지를 만방에 공표했다. 개화를 향한 조선의 발걸음은 빨라보였다.
개화가 시대적 대세라는 것을 지배층인 사대부들조차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원군의 ‘변심’과 함께 위정척사 세력은 점차 쇠퇴하였고, 임금은 강력히 개화를 추진할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에 관료들과 사대부들 역시 개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려 조정의 의지에 공명했다.
조정은 친영 4군영을 신설하여, 옛 고려대대를 중심으로 군사력의 혁신을 꾀했다.
또한 박영효가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어 도성의 혁신을 추진하니, 치안을 담당할 순경부가 설치되고 박문국이 신설되어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이름처럼 10일마다 한 번씩 발간되었다.
“1882년, 지난 1년간 세계에서는 이러한 일이 있었다…….”
이선 또한 박영효의 부탁으로 세계 사정을 전달하는 필진에 합류하게 되었으니, 《한성순보》는 국제 정세를 조선에 전달하는 창구가 되었다.
다만 순한문으로 제작되어 이를 읽을 수 있는 이가 관료와 지식 계층으로 한정된다는 것이 흠이었다.
“외아문 참의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를 겸하게 하라. 참의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를 겸하게 하라.”
조정은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로 임명하여, 울릉도와 주변 섬들을 관리하게 했다. 울릉도로 불법 이주하는 일본 어민을 단속하고, 조선 백성의 이주와 개척을 추진하게 했다.
동시에 어윤중을 서북경락사로 임명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관리하게 했다. 청나라와 러시아 국경지대를 방비하고, 월경 이주민을 관리하며, 육로통상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그동안, 대원군은 중요한 문제에 몰두해 있었다.
“나라의 국모는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는 일이오니, 속히 전국에 명을 내려 국혼을 진행하소서.”
외척에 대한 껄끄러운 기억이 있는 가능한 중전 자리를 최대한 비워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여론, 즉 사대부의 공론을 무시하는 건 아무리 대원군이라 해도 무리였다.
“국혼은 국가의 매우 중요한 절차다. 부족함이 없도록 진행하라.”
대원군이 처가 사람인 민자영을 중전 자리에 낙점하여 속전속결로 국혼을 진행하던 17년 전과 달랐다.
대원군은 직접 꼼꼼하게 삼간택을 챙기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중전을 내세우기 위해 국혼 절차를 최대한 끌었다.
“대체 대원군은 국혼을 할 생각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국혼 과정에서 대원군은 또 다른 국가의 어른, 대왕대비 조 씨와 갈등을 빚었다.
대원군이 추천한 후보는 대왕대비가 거부하고, 대왕대비가 추천한 후보는 대원군이 거부하면서 지루한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뭐, 나쁘지 않군.’
대원군은 온갖 정력을 국혼에 쓰고 있었다. 이선은 이 상황이 나쁘지 않다 싶었다. 대원군이 국혼에 온 정력을 쏟는 동안, 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하는 개혁안은 착착 진행되었다.
개혁을 추진하려면 자금이 필요하고, 자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어떻게든 확보해야만 했다. 청나라에서 들여온 은 100만 냥으로 급한 불은 껐다지만, 각종 개혁을 시작하려면 자금은 계속 필요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과 일본과의 무역 조약 재협정으로 관세 수익이 발생했지만,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수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지세 개정을 위해 전국 각지에 관리가 파견되어 양전(量田) 사업이 시작되었지만, 이 또한 몇 년은 걸릴 일이었다.
시중의 화폐 부족 현상으로 인해 주전이 필요하게 되자, 재정개혁도 맡고 있는 묄렌도르프는 고심했다.
과거 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한 것을 알게 되자, 기존 화폐가치의 다섯 배인 당오전을 발행하여 재정 수입을 늘리자고 제안했다.
“국태공께서 과거 당백전을 발행한 것처럼, 당오전을 발행하면 어떨지요?”
당백전의 파멸적인 인플레이션을 기억하고 있었던 개화파는 이러한 제안에 경악했다.
“당오전은 과거 당백전이 그러했던 것처럼 심각한 폐단을 불러일으킬 것이오!”
곧 묄렌도르프와 김옥균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금은으로 화폐를 주조해서 그 근본으로 삼는 건 시급한 일입니다. 그러나 당오전, 당십전은 물론이고 당백전이라도 마땅히 주조해서 눈앞의 급한 것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조금도 폐단이 될 것이 없습니다.”
“당오전, 당십전은 보조 화폐에 불과합니다. 당장 주조에 이익이 있을지 몰라도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방책은 절대 아니고, 청이나 일본처럼 본위화폐를 확립시킨 후에나 논해볼 일인 것이오. 서양에서 거액의 차관을 공채해 은본위제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김옥균은 차관을 도입하여 은본위제로 전환하고, 국민 경제의 기틀로 삼자고 제안했다.
“은본위제는 쉬운 줄 압니까? 조선의 국고에는 은본위제를 시행하기에 충분한 은이 없습니다. 서양에서 조선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거액을 쉽게 빌려줄 리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조선은 경제 구조가 농업단계인데, 은본위제를 도입하기 전에 경제발전을 먼저 해야 합니다. 일단 당오전을 발행해서 재정을 확대하여 필요한 자금을 써야 합니다.”
“당오전을 발행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수입이야 5배 증가하겠지요. 그러나 신뢰성 없는 화폐가 얼마나 통용이 되겠습니까? 물가만 천정부지로 올라갈 뿐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차관을 들여야 합니다!”
‘…… 묄렌도르프는 세관 업무랑 외교 보조만 맡겨야겠다. 재정전문가는 따로 영입해야지. 당오전 발행하면 당백전의 실수를 반복할 게 뻔한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선은 묄렌도르프에게 처음으로 실망감을 느꼈다.
‘김옥균도 허황하기는 매한가지. 갑오개혁 때 섣불리 일본을 따라 해 은본위제 했다가 대실패했지. 장기적으로 금은본위제를 택해야겠지만,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
은본위제든 금본위제든 이를 실시하려면, 국고에 은과 금이 충분히 쌓이고 태환지폐를 발행하여 시장에 통용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공채가 필요하다는 건 공감한다. 당장 개혁 자금이 필요하니까. 일본도 유신 직후에 일단 국채를 빌려 개혁을 추진했지. 그런데 어찌한다?’
이선은 대안을 모색했다.
이미 당백전으로 큰 실패를 맛본 경험이 있는 대원군으로선 당오전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가 이미 주전을 남발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무슨 당오전인가? 허가할 수 없다.”
대원군은 묄렌도르프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옥균의 제안도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양으로부터 차관을 들이자니……. 저들이 아무 조건도 없이 돈을 빌려줄 리 만무하다. 분명 조선의 목줄을 쥐려 하지 않겠는가?”
“이는 제가 직접 맡아보려고 합니다.”
이번에도 이선이 직접 나섰다. 매번 이선이 상당한 성과를 가져온 걸 알기에, 대원군도 기대가 되었다.
“오, 그래.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곧 미국 공사가 한양에 올 것입니다. 시생의 생각으로는…….”
이선은 귓속말로 대원군에게 속삭였다.
1883년 5월.
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한 지 꼭 1년 만에, 초대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가 한양에 부임했다. 첫 조선 주재 서양 외교관이었다.
푸트는 캘리포니아주 지방 판사와 미합중국 관세국장을 지내고, 1878년부터 1881년까지 칠레 발파라이소 총영사를 지냈다.
푸트 본인도 첫 조선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걸 크게 기뻐했고, 조선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5월 18일. 외아문을 방문한 푸트는 조약 비준 문서를 교부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사. 조선국은 미합중국을 대표해서 온 공사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본관이 미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조선에 온 걸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선과 푸트는 비준서를 교환한 뒤, 반갑게 악수를 하였다.
‘나도 기쁘다마다. 세력균형을 실천하는 데 미국이 꼭 필요하니까.’
미국이 조선 주재 사절을 청이나 일본과 동급인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한 건, 그만큼 수교 초기에 미국이 걸었던 기대가 컸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곧 조선이 무역 시장으로서 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자, 기대는 금방 식고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선은 어떻게든 열심히 미국의 관심을 끌어볼 생각이었다.
“조선 국왕 폐하께서도 미국 공사가 부임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십니다. 내일 국서 봉정식은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입니다.”
“오, 귀국과 국왕 폐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공사께서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귀국에 대해 특별한 호의를 갖고 있습니다.”
“저도 왕자에 대해서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유창한 영어와 외교적 식견으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조선 왕자’의 존재는 이미 서양 외교가에 소문이 파다했다.
“하하, 그 무슨 과찬의 말씀을. 미국에 대한 제 호의라고 생각해 주시지요.”
“그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미합중국 정부가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호오, 그게 무엇입니까?”
이선은 짐작을 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미소를 지었다.
계미년 4월 14일, 1883년 5월 19일.
경복궁에서 국서 봉정식이 있었다.
임금은 최초의 서양인 공사인 푸트를 그야말로 극진히 환대하였다.
사실상 일본의 메이지처럼 의전상 국가원수가 된 임금은, 미국에 대한 개인적인 호의인지, 미국을 끌어들여 뭔가 일을 해보려고 하는지, 아니면 이제는 체념했는지 몰라도 의전 절차에 상당히 집착했다.
“미합중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를 대신해, 특명 전권 공사 루시어스 푸트가 조선 국왕 폐하께 국서를 봉정합니다.”
“조선은 가장 먼저 조약을 비준한 미국에 대해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양국의 관계가 만대에 걸쳐 우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미합중국 또한 조선과 우호 관계가 영원히 이어지길 바랍니다. 저 역시, 조선의 충실한 벗이자 조언자가 되겠습니다.”
“참 고마운 말씀이오.”
푸트가 처음으로 조선에 가져온 선물이 조미 조약의 비준과 한양 주재였다면, 두 번째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미합중국 정부는 조선에서도 미국으로 사절 파견을 해주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음, 답례는 꼭 필요하지요. 하지만 조선은 멀리 서양까지 사절을 파견한 사례가 없으니, 선박이나 비용 같은 제반 문제가…….”
“선박과 비용이라면 걱정 마시옵소서. 미국 정부의 국비로 조선 사절단을 초대하고, 미국 각지를 방문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서양 각국을 시찰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오! 듣던 중 반가운 말입니다.”
바로 이게 두 번째 선물이었다. 미국 정부는 새로 조약을 맺은 조선의 지배층을 미국에 초청해, 미국의 부와 힘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답례하는 사절, 즉 보빙사(報聘使)가 미국에 파견된 계기다.
이미 이선과 대원군 사이에 합의가 있었으므로, 서양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일은 신속하게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