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48
3부 163화 주사위는 던져졌다
1923년, 대전쟁의 유산이 유럽 전역을 덮치고 있었다.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는 대전쟁의 승리자였다. 오랜 숙적 합스부르크 제국을 격퇴하고, 이탈리아인이 거주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하에 있었던 ‘미수복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수복했다.
하지만 달콤했던 승리의 과실은, 이탈리아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남부 문제, 계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탈리아의 국토가 아무리 확장된다 한들 의미가 없습니다.”
이탈리아는 1천 년 넘게 분열되었다가, 1870년에 이르러서야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주도로 가까스로 통일을 이룬 나라였다.
그건 독일도 마찬가지였지만, 비록 관념적이라 할지라도 ‘신성로마제국’이나 ‘독일연방’이라는 정치적 통합체가 있었던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처음부터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우리는 마침내 이탈리아를 창조했다. 이제 이탈리아인을 창조할 차례다.」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카보우르 백작의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다젤리오(Massimo d’Azeglio)의 말처럼, 1천 년 넘게 다른 나라 사람이었던 ‘피에몬테인’, ‘롬바르디아인’, ‘토스카나인’, ‘베네치아인’, ‘사르데냐인’, ‘나폴리인’, ‘시칠리아인’ 등을 ‘이탈리아인’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 수단은 물론, 국민국가 건설과정에서 흔히 그러하였듯, 학교와 군대였다.
하지만 산업화된 북부와는 다른 역사적 발전 경로를 겪은 남부 이탈리아인들은 통일을 북부 자본가의 식민지화로 인식할 정도로, 남부와 북부의 갈등은 심각했다.
어찌 보면, 이 누더기 신생 국가가 열강으로 성장해, 옛 종주국인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는 절묘한 외교력으로 프랑스와 프로이센을 동맹으로 바꿔 가며 합스부르크 제국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건설했다.
이탈리아 통일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외교적 작업이 삼국동맹 탈퇴와 연합국 합류였고, 런던 조약에서 트렌토-이스트리아-달마티아 해안의 할양을 약속받았다.
비록 60만 청년이 스러졌을지라도 승전국이 되었고, 연합국 ‘빅4’의 지위에 오른 이탈리아는 목표의 대부분을 달성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열강에서 지역 국가로 추락했고, 경쟁자가 될 유고슬라비아 성립도 막았고, 열망하던 피우메(리예카)도 얻었다.
‘불구의 승리’를 피한 이탈리아 정부와 정치가들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피우메를 얻었지만, 우리 영웅적인 이탈리아인들이 얻은 건 뭔가?”
“60만이 죽었다! 60만이 피 흘릴 가치가 있는 전쟁이었나?”
“알프스 꼭대기 최전선에서 개고생하며 구른 대가가 대체 뭐냐?”
“지독한 불평등, 형편없는 급료, 폭등하는 물가, 대체 뭐 하나라도 나아진 게 있나?”
“러시아처럼 윗대가리들을 날려 버려야 해!”
전쟁이 만들어 낸 국민적 대단결이 끝나자, 냉혹한 현실이 다가왔다.
해발 2000m 이상인 알프스 전선에서 벌어진 고지전의 참혹함을 체험하고 귀환한 이탈리아 청년들은,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분개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919-21년까지 ‘비엔니오 로쏘(Biennio Rosso, 붉은 2년)’라 불리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이탈리아를 덮쳤다.
전후 첫 보통선거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은 원내 제1당으로 떠올랐다. 사회당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급진 아나르코-생디칼리즘 조직이 토리노와 밀라노의 공업지대를 휩쓸며 총파업과 공장 점거에 나섰다.
“혁명 만세! 러시아처럼 구체제를 타도하자!”
북부 포강 유역의 평원에는 유럽 최대의 쌀 농경지가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쌀농사에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다.
이 지역의 농업 구조는 자작농이 아닌 대지주가 소유한 토지에 고용된 농업노동자가 일하는 형태였다.
남부에서 온 농업노동자들에 이어, 전시에는 여성 농업노동자들이 급증했다. 젊은 여성 농업노동자들은 저임금, 과도한 노동, 성추행 등에 시달리며 농업에 종사했다.
종전 이후 남성 노동자들도 복귀하면서 농업노동자들은 대지주에 맞서 투쟁에 들어갔고, 임금 인상과 작업 환경 개선을 요구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사회당을 찾아갔고, 원내 제1당인 사회당은 혁명적 열기를 억누르면서 지주와 자본가들을 압박했다.
“이러다 완전히 빨갱이 세상이 되겠군.”
“저 천한 것들을 분쇄하지 않으면, 이탈리아도 러시아처럼 되고 말 거요!”
“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사회당 눈치 보느라 사회적 대타협이나 운운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일이 그렇지 뭐.”
“그래? 정부가 우릴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 힘으로 자경단을 고용해야지.”
“검은 셔츠단이란 퇴역 참전용사 친구들이 있는데, 빨갱이 잡는 데는 최적이라고 합디다.”
“빨갱이들 분쇄할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소.”
전투 파쇼단, 즉 최초의 파시즘은 ‘붉은 2년’의 토양에서 태어났다.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항하는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주의, 미래주의, 협동조합주의, 군국주의의 세례를 받은 참전용사들은, 전쟁영웅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와 전직 사회주의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휘하로 들어갔다.
저명한 시인이자 탐미주의 예술가, 공군 조종사이자 오스트리아 빈 상공까지 출격하여 이탈리아의 승리를 확신하는 선전물을 뿌린 전쟁영웅 단눈치오는 우익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젊은 이탈리아는 늙은 유럽을 대체해야 한다! 낡아빠진 합스부르크 제국을 완전히 분쇄하고, 젊은 이탈리아의 독수리가 하늘로 비상해야 한다!”
단눈치오와 그의 추종자들은 피우메 할양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런던 조약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옛 영토였던 달마티아 해안 전역을 양도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연합국은 약속을 지켜라!”
윌슨은 이탈리아의 과도한 야망에 질색했고, 달마티아에는 이탈리아인이 다수가 차지하는 일부 항구도시를 제외하면 크로아티아인 인구가 대다수인 점을 감안해 도나우 연방을 구성하는 크로아티아 왕국의 영토로 인정했다.
그러자 1919년 가을 단눈치오와 추종자들은 퇴역군인들을 사병으로 동원해 달마티아의 해안도시 차라(자다르)를 점령했고, 이탈리아인이 다수인 차라 주민들은 단눈치오를 열렬히 환영했다.
자다르는 신생 국제연맹에서 지루한 협상이 이어진 끝에, 이탈리아 인구가 다수인 도시만 주민투표 절차를 거쳐 이탈리아령으로 귀속하고, 나머지 배후지는 크로아티아령으로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지루한 협상이 1년 동안 이어지는 동안, 단눈치오는 자다르에 ‘카르나로 섭정국(Reggenza Italiana del Carnaro)’을 세워 스스로 섭정에 취임, 협동조합주의·국가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미래주의·탐미주의가 섞인 기이한 예술적 파시즘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Viva Il Duce! 우리의 영도자시여!”
“Eia, eia, eia! Alala!”
단눈치오는 화려한 제복, 군중이 모인 발코니 연설, 팔을 쭉 뻗는 로마식 경례, 유래를 알 수 없는 구호, 연극적인 행위로 파시즘의 모범을 만들어 냈다.
“차라 주민투표가 확정됐는데, 저 미친놈들을 더는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군을 동원해서 제압하라.”
이탈리아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단눈치오의 연극을 끝장냈다. 이탈리아군은 단눈치오의 사병을 가볍게 격파하고, 자다르를 점령하여 병합을 위한 주민투표 절차에 들어갔다. 단눈치오는 추방되어 스위스 국경의 호숫가 저택에 은거했다.
단눈치오의 기이한 모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탈리아 우익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무솔리니와 신생 전투파쇼단은 단눈치오의 미학에서 모범을 얻었고, 검은색 셔츠와 로마식 경례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무솔리니와 단눈치오의 결정적인 차이는, 예술가였던 단눈치오는 이상주의적 파시즘의 미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몰두해 있었지만, 전직 사회주의 선동가 무솔리니는 계급 간의 갈등이라는 현실세계에 적극 뛰어들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위대한 국가를 부정하는 빨갱이들의 머리를 부셔 버릴 것이다!”
검은 셔츠를 입은 전투파쇼단은 지주와 자본가들에 자경단으로 고용되어 지역 사회주의 당사를 파괴하고, 파업과 노동조합을 분쇄하고,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검은 셔츠단’의 폭력이 거세질수록, 지주와 자본가들이 보내는 환호와 자금은 더욱 늘어났다.
전통적인 보수 우익 정당도 무솔리니를 정치깡패라고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우익 정치연합 ‘국민블록’에 참여한 파시스트당은 1921년 총선에서 무솔리니를 포함하여 35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회는 여전히 사회당이 제1당을 차지했고, 가톨릭 사회주의 성향의 인민당이 사회당의 경쟁자인 제2당으로 자리 잡았다.
파시스트당은 여전히 국민적으론 소수파였고, 의회를 통한 집권 가능성은 요원해 보였다.
1923년이 되자, 이탈리아 중북부의 지역 상당수가 파시스트당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초법적인 사태는, 지역 경찰과 군대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파쇼가 대신해 주는 게 아닌가?”
사회당과 인민당의 눈치를 보는 자유주의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는 지주와 자본가뿐만 아니라 군경도 실망시켰고, 검은 셔츠단에게 지지를 보냈다.
사회주의 세력이 강성했던 롬바르디아와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에서 검은 셔츠단은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을 분쇄했고, 지역 지주와 자본가들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사회당은 당내 급진 좌파와 온건 중도파로 분열되어 입씨름하기 바빴고, 파시스트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무솔리니는 기껏해야 지주와 자본가들의 청탁을 받는 정치깡패, 선동가일 뿐이다. 통치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지배계급의 조종이나 받겠지.”
보수우익뿐만 아니라, 적대자인 좌익 역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무솔리니에게 통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무솔리니를 한패로 끌어들이려는 우익연합도 장관 자리를 넘겨주어 하위파트너로 삼으려 했다.
“우리는 오직 이탈리아를 통치하길 원할 뿐이다! 우리는 권력을 원한다! 의회 같은 추악한 협잡의 장이 아닌, 우리의 힘으로 로마를 쟁취할 것이다!”
무솔리니는 ‘올인’ 전략으로, 우익의 연립정부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탈리아 민족의 영도자가 되느냐, 실패하느냐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역사의 변화로 인해 ‘로마 진군’을 주저하던 무솔리니는, 마침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8월 하순 그리스-알바니아 국경 조정을 위해 국제연맹을 대표하여 파견되었던 이탈리아 장교가 정체불명의 무장집단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암살의 배후에는 그리스 정부가 있다!”
이탈리아는 자신들의 영향권에 있는 알바니아에 유리하게 국경을 조정하려고 하였다가, 그리스 정부가 고용한 암살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음모론이 돌았다.
아직 정확한 상황 파악이 안 되었지만,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은 그리스를 배후로 몰았다.
“국제연맹에 제소해서 신속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하겠다.”
이탈리아 정부가 국제연맹 제소를 선언하자,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은 집요하게 물어뜯었다.
“배후가 그리스라는 게 분명한데, 정부는 국제연맹 눈치나 보고 있는 건가? 국제연맹은 아일랜드와 아이티 따위를 열강과 동등한 지위에 놓는 정신 나간 집단일 뿐이다. 하다하다 패전한 그리스 따위의 눈치도 본단 말인가?”
무솔리니는 거침없이 여론을 선동했다. 여론은 그리스에 강경한 요구를 주문했으나,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으로서 책임 있는 외교를 하려는 이탈리아 정부는 온건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던 와중에, 9월 중순 스페인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 장군이 정치 안정을 내세워 쿠데타를 선언하자, 사회주의 세력의 확산을 경계하고 있던 국왕 알폰소 13세는 쿠데타 주모자를 즉각 총리로 임명했다.
총리에 임명된 프리모 데 리베라는 10년간 노동조합을 금지하는 계엄령을 내려 국왕에게 보은했다.
너무나도 손쉬운 쿠데타 성공에, 무솔리니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우리의 힘을 보여 주고 나면, 사보이 왕가도 굴복하게 될 것이다!”
무솔리니는 연극적인 어조로 추종자들에게 선언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로 진군한다! 카이사르에 비견될 루비콘 강의 진격으로 로마를 쟁취한다!”
“와아아아아!”
“비바 일 두체!”
검은 셔츠단의 로마 진군이 시작되었다.
역사가 변화하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승리할 수 있었으리라.
* * *
이탈리아 왕국, 로마.
주이탈리아한국대사 이위종은 본국과 베를린에서 보낸 전문을 읽으며 전율을 느꼈다.
이위종은 외교관인 동시에 제국익문사 유럽 요원이었고, 유럽지부장 조한민의 지휘를 받았다.
황제의 뜻은 분명하고 확실했다.
「영국과 협력하여 파시스트의 집권을 저지한다. 영국 외무부에는 사전에 공작을 마친 상황이다. 이탈리아 정부의 결정을 이끌어 내야 한다.」
본래 진보적인 데다 그 자신도 러시아 귀족 여인과 결혼했던 이위종은, 근래 ‘데일리 메일 스캔들’을 보고 분개하던 건 매한가지였다.
데일리 메일이 파시스트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들을 분쇄하는 건 개인적으로도 매우 기쁜 일이었다.
“아, 영국 대사관입니까? 한국 대사입니다. 예, 긴급한 일이 있으니 바로 대사관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만나서 말씀하시지요. 예. 감사합니다. 점심때 뵙지요.”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위종은 지체할 틈 없이, 빠르게 행동에 나섰다.
이 당시, 이탈리아 총리는 80대 노인 조반니 졸리티(Giovanni Giolitti)였다.
졸리티가 총리에 취임한 건 무려 여섯 번째였다.
자유주의 우파 지도자인 졸리티는 단호한 결단력과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좌파에게는 ‘의회 독재자’, 우파에게는 ‘노추’라고 불렸다.
극단주의 세력을 혐오했고, 단눈치오의 섭정국을 분쇄하라고 명령을 내린 장본인도 졸리티였다.
1923년,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국민블록을 이끄는 졸리티에게 여섯 번째 총리직을 임명하며, 우파대연합을 주문했다.
졸리티는 무솔리니에게 부총리와 내무장관직을 제안하며 연정을 제안했지만, 무솔리니는 총리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 장악을 외치며 로마 진군을 선언했다.
“천박한 깡패 놈. 로마 진군? 봐주니까 한도 끝도 없군.”
졸리티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자본가들과 달리, 노인은 단호한 결정을 내릴 필요를 느꼈다.
“난 로마 진군을 반란으로 간주하고 단호히 진압할 생각이오. 군의 충성은 얼마나 믿을 수 있소?”
“군은 정부에 충성합니다. 다만 전직 참전용사가 다수인 검은 셔츠단을 향해 발포한다면 반감을 가질 이들이 많을······.”
군부 상당수가 파시스트에 동조하고 있다는 말에, 졸리티는 벌컥 화를 냈다.
“그게 무슨 충성이란 말이오! 나는 확고하게 정부에 충성을 바칠 부대를 원해!”
“알피니라면 확고하게 정부를 지지할 겁니다.”
이탈리아 알피니(Alpini)는 특수병과인 산악부대로, 고지전이 대부분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한 부대였다.
알피니 9개 연대는 이탈리아 요충지 곳곳에 주둔 중이었다.
“그래, 알피니가 있지! 로마에서 가까운 연대들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6개 대대를 로마로 집결시키오. 그동안 경찰 병력을 총동원해 검은 셔츠단의 로마 시내 진입을 저지하도록.”
“예, 각하!”
2만여 명의 검은 셔츠단이 열차와 차량을 징발해 오합지졸처럼 로마로 몰려들었다. 그조차도 제대로 얻지 못해 도보로 움직이기 일쑤였다.
무장상태도 형편없는 검은 셔츠단이 비를 맞으면서 로마 진군에 애를 먹고 있는 동안, 6개 대대로 구성된 정예 알피니 임시여단은 철도와 배를 타고 빠르게 로마로 진입했다.
“계엄령을 선포한다.”
내각은 계엄령 선포를 결의했다. 군대가 유사시 무력을 행사하려면, 명목상 군통수권을 갖고 있는 국왕이 계엄령에 동의를 해 줘야 발동이 가능했다.
“폐하께서 동의하실까요?”
“어떻게든 동의를 받아내야지.”
졸리티는 계엄령을 요청하는 내각의 결의안을 들고 국왕을 알현하러 갔다.
진압을 결심한 늙은 총리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가 바뀌려하는 중대한 분수령의 순간이었다.
작가의 말
2차대전기의 무능으로 이탈리아가 유독 희화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1870년대야 통일국가를 이룬, 독일보다 한참 아래의 국력인 이탈리아가 열강의 위치까지 오른게 기적이라고 봅니다. 애초에 피에몬테가 프로이센과 비견될 수가 없으니…
러일전쟁 ‘승전’이 일본에게 결과적으로 해악이 된 것처럼, 1차대전의 승전이 이탈리아에게 오히려 해악이 되었습니다. 국력을 과신하다못해 극단주의자들이 집권하여 제국의 망상을 품게 되었으니…
파스타국의 변화가 어찌 역사의 분수령이 되겠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파시즘이 나치즘과 각국의 극단주의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탈리아 파시즘은 20세기 역사의 중대한 분수령입니다.
이제 역사의 스노우볼이 본격적으로 굴러갈 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