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52
3부 167화 하이퍼인플레이션
1923년은 독일 경제사에서 최악의 해라고 할 수 있었다.
둑이 무너져 버린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사람들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게 전개되었다.
10월이 되자 마르크화는 마침내 1달러에 1조 마르크를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0을 계속 붙이다 못해 역사상 액면가가 가장 높은 1조 마르크 화폐가 등장했지만, 그 가치는 1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은행에서는 돈 따위는 세지 않았고, 무게를 달아 어림짐작으로 계산을 했다.
사람들의 생활은 곤두박질쳤다. 임금 상승은 미쳐 날뛰는 인플레이션을 따라가지 못했다. 1조 마르크를 급료로 받아 봤자 연명하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필품도 살 수 없었다.
1922년 말에 베를린에서 빵 한 덩이는 160마르크였지만, 1923년 가을에는 1천억 마르크에 거래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이 아득한 상황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이들은 현금에 의존하던 연금생활자들이었다. 평생 열심히 일해서 모은 저축은 종잇조각만도 못한 쓰레기가 되었다.
독일 도시에서는 점잖은 정장 차림의 노신사들과 귀부인들이 세간살이를 팔려고 나오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마저 빵이나 버터로 교환되었다.
“빨리, 빨리 주시오! 10분 사이에 가치가 얼마나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노동자들은 급여를 월급도 주급도 아닌 주 3회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지불일이 되면, 대기하고 있던 아내들이 남편으로부터 돈을 받아 즉시 주변 상점으로 가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물건이나 사들였다. 물건의 가치는 화폐가치보다 오래 가기 때문이었다.
“오늘 달러 시세 얼마요? 달러당 1조 5천억 마르크? 그새 또 올라갔어? 제길, 전부 바꿔 주시오. 뭐? 은행에 달러가 없다고요? 그럼 파운드든 프랑이든 뭐든 좋으니까 바꿔 주시오!”
“전량 주식 매입해 주시오. 어떤 회사냐고? 해운주 갑시다. 무역이야 아예 끊기지는 않을 테니.”
그나마 현실에 적응한 사람들은, 급여를 받는 대로 은행으로 달려가 환전을 했다. 시중 은행에 달러 품귀현상이 일어났으므로, 외환 암시장이 판을 쳤다.
어떤 사람들은 주식거래소로 달려가 주식을 매입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 와중에도 잘나가는 회사들은 있었고, 독일이 아예 망하지 않는 이상 주식시장은 궁극적으로 우상향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도 투기꾼 놈들은 돈을 처버는구나.”
이런 미친 세상에서도 돈을 버는 이들은 있었다. 식료품상, 물건을 미리 매점해서 파는 거래인, 암시장의 상인들, 헐값에 사들여 자산을 축적하는 부동산 투기꾼, 그나마 견실한 이들은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굶주리든 말든 내가 알 바인가? 내 주머니 채우면 그만이지.”
외국인들은 달러 몇 장만 들고 오면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다. 한창 환락의 도시로 성장하고 있던 베를린의 나이트클럽과 카바레에는 인파가 득실거렸다. 외국인과 투기꾼 외에도, 어차피 망한 인생 환락이나 즐기다 죽자는 자포자기도 늘어났다.
고통 앞에서는 귀족도 서민도 없었다. 양갓집 아이들도 정부나 정당, 교회나 봉사단체에서 준비하는 무료급식소를 찾아갔다. 종교를 혐오하는 무신론자가 교회를 기웃거리고, 좌익을 혐오하는 퇴역 군인도 사민당이나 공산당의 무료급식소를 기웃거렸다.
양갓집 영애들이 한 끼니를 위해 몸을 팔고, 귀족 청년들도 먹고살기 위해 막노동을 했다.
그 와중에 모르핀과 코카인이 뒷골목에서 유행을 했다. 마약에 취해 인생의 시름을 잊으려는 젊은이들이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국가의 총력을 총동원해 세계패권을 추구하던 독일의 처참한 몰락이었다.
“이게 다 프랑스 때문이다. 프랑스 놈들을 몰아내야 한다.”
“아니! 이게 다 유대인 놈들 때문이다. 유대인은 세계 금융을 배후에서 조종한다. 이놈들은 러시아를 멸망시키기 위해 혁명을 배후에서 조종했다. 그다음 차례가 독일이다.”
“마르크스는 독일 유대인.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는 트로츠키는 러시아 유대인. 독일 공산당을 이끄는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독일을 멸망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음모론이 팽배했다.
정작 마르크스든 트로츠키든 룩셈부르크든 유대인 정체성이 거의 없는 국제주의자였지만, 가장 쉬운 타겟은 유대인이었다.
러시아제국의 공안기관인 오흐라나에서 처음 만들어져, 유럽에 광범위하게 퍼진 ‘유대인 국제자본 배후론’이 독일을 강타했다.
유대인 국제자본은 월스트리트를 조종하고, 그 정반대 대척점인 코민테른도 조종한다.
조금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지만, 유대인 국제자본 배후론을 믿는 이들에게는 이게 다 유대인의 음모였다.
유대인은 러시아를 파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혁명을 조장했고, 이제는 유럽 문명의 보루인 독일을 쓰러트리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고 있었다.
“투기꾼들을 죽여라! 빨갱이들을 죽여라! 즉 유대인을 죽여라! 유대인은 곧 투기꾼이자 빨갱이니!”
극우의 직접적인 목표는, 라팔로 조약을 체결한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라테나우가 가장 성공한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 독일을 대표하는 산업자본가이자, 정계에도 진출하여 외무장관까지 오른 이였다.
“나는 유대계 독일인이다. 내 민족은 독일 민족이요, 내 고향은 독일이고, 내 믿음은 루터교이며, 내 신념은 세계에서 우뚝 선 독일제국이다.”
정작 라테나우의 정체성은 철저한 독일 민족주의자였다. 대전쟁 전에는 독일 최대 전기회사인 AEG(Allgemeine Elektricitäts-Gesellschaft)를 이끌며 독일 산업계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전시에는 전쟁원료부(Kriegsrohstoffabteilung)를 이끌며 효율적인 총동원체제와 국가배급체계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전 국민 배급체계는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군국주의 독일에서 나왔다는 게 거대한 역설이었다.
라테나우의 작업이 어찌나 효율적이었는지, 적들조차 찬탄을 보냈다. 연합국은 라테나우가 ‘순무의 겨울’을 거치고도 1918년까지 버틴 독일의 패전을 1년 늦췄다고 평가했는가 하면, 울리야노프와 소비에트 정부도 라테나우의 국민배급체계를 모델로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구상했다.
전시에는 독일의 세계패권을 위해 일했던 라테나우는, 독일이 패전하자 민주공화국을 지지하는 정치가로 변신했다.
현실적으로 극좌와 극우에 맞서 공화국이 대안이었다. 극좌는 대자본가를 용납할 수 없었고, 극우는 유대인을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사민당과 손잡고 대자본가로서 앞장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 냈다.
재무부와 외무부를 이끌며 신생 공화국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던 라테나우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적 혐오에도 소비에트 연방과 제휴하는 길을 택했다.
라테나우의 구상은 군부 총수인 국방총감 제크트조차도 동의할 정도로, 독일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구상이었다.
서방 세계에서 고립된 두 국가가 손잡는 건, 베르사유 체제를 탈피하기 위한 길이었다.
하지만 ‘유대-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증오로 눈이 먼 극우의 생각은 달랐다.
“마침내 라테나우가 유대인으로서의 본성을 드러내 볼셰비키와 한패가 되었다는 증거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한패였을지도.”
「가서 요제프 비르트를 잡아, 그 목을 댕강 잘라라! 발터 라테나우를 죽이자, 빌어먹을 유대인 수퇘지를!」
극우 국수주의자들은 공공연히 수상과 외무장관에 대한 테러를 표명했다.
1922년 테러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던 라테나우는, 1923년 인플레이션의 혼란 속에서 결국 극우파들의 총탄을 맞고 암살당했다.
극우는 라테나우의 죽음에 환호하며 암살자들을 민족 영웅으로 추앙했지만, 양식 있는 이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폭거였다.
독일의 산업발전과 전쟁지속에 막대한 기여를 했던 독일 애국주의자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적은 바로 여기에 있소! 적이 우측에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소이다!”
“옳소!”
중앙당 총리 요제프 비르트(Joseph Wirth)는 의회에서, 우익의 좌석을 바라보며 공개적으로 외쳤다.
총리의 연설에 중도파와 좌파는 박수로 화답했다.
민주공화국의 적은 오른쪽에 있다. 정치폭력, 거듭된 암살, 반란 음모, 쿠데타 시도는 극우가 ‘11월의 반역자’라고 딱지를 붙인 사민당이 아닌 극우 쪽에서 빈번히 벌이고 있는 짓이었다.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특단의 방법이 필요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서, 내각은 몇 달 단위로 무너졌다.
결국 9월에 이르러 역시 산업가 출신이자, 전시 제국주의 정책을 열렬히 지지했으나 패전 이후 ‘현실적 공화주의자’로 변신한 중도우파 인민당(DVP)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이 거국일치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최악의 혼란기에 받아들인 독이 든 성배였다.
* * *
극우파들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유대인이 조종하고 수혜를 누리고 있다고 선동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최대 수혜자는 오히려 우익에 막대한 정치자금을 대고 있는 대자본가들이었다.
대자본가에게,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오히려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루르의 왕’ 휴고 슈티네스(Hugo Stinnes)는 독일 산업계, 아니 독일의 지배자가 될 기회를 잡았다.
“위기는 기회다. 산업을 재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말이지.”
슈티네스는 루르 지방에서 광산업을 하던 가업을 이어, 전쟁 전에 광산·해운·철강·조선·전기 산업에 진출하여 거대한 콘체른(Konzern, 대기업집단)을 형성했다.
그는 절대로 마르크화를 보유하지 않았다. 은행에서 막대한 돈을 차입해 실물자산을 사들였다. 대금을 회수할 때에는 당시 유일하게 금본위제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 달러로 받았다. 그리고 친독 중립국인 네덜란드에 자산을 모두 빼돌렸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터졌다. 은행에 지고 있던 막대한 채무는, 인플레이션으로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다. 사실상 채무탕감이었다.
막대한 외화를 보유하고 있던 슈티네스는 파산에 직면한 기업과 공장들을 헐값에 인수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거치며 슈티네스가 ‘사냥’한 기업만 1,500여 개에 달했고, 공장은 2,500여 개에 달했다.
슈티네스가 가진 자산의 가치가 독일 경제 전체를 상회하리라는 전망까지 있었다. 미국 타임지는 슈티네스를 독일의 ‘새로운 카이저’라고 지칭했다. ‘루르의 왕’은 이제 새로운 카이저였다.
「돈, 더 많은 돈. 산업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더 필요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슈티네스는 정계에도 발을 뻗고 있었다. 그 자신이 슈트레제만의 인민당 소속 국회의원이기도 했고, 주요 언론들을 인수하여 대자본의 선전도구로 삼았다.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그의 산업은 번영했기에, 극단적인 정치적 변동만 없다는 전제 하에 경제적 혼란은 오히려 상관없었다.
독일에 총체적 혼란을 불러일으킨 프랑스군의 루르 점령도, ‘루르의 왕’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장이었다.
슈티네스는 언론을 조종해 베르사유 조약 폐지를 주장하고 우익을 후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루르 지방의 광산과 철강업을 모두 자신의 지배하에 둘 구상을 세웠다.
당연하게도 독일 정부는 국가의 주요 기간산업이 한 개인에게 종속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기에, 슈티네스는 은밀히 프랑스 점령군과 접촉했다.
슈티네스에게 조국은 돈이었다. 그게 바로 산업계의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라테나우와의 차이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유대인 라테나우는 독일을 최우선 가치로 여겼고, 게르만인 슈티네스는 자본을 최우선 가치로 여겼다.
“라테나우가 안됐어. 독일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말이야.”
슈티네스는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우익에 자금을 대고 있었지만, 극우 테러는 혐오했다.
전시에 힌덴부르크-루덴도르프 군부독재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지금도 루덴도르프의 극우 정치활동에 자금을 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우 군부독재가 재현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에는 자본가가 왕이 되어야지. 훈장 주렁주렁 단 시대착오적 융커 귀족나리들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처럼 자본가가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지, 언제까지 융커들의 하수인 노릇으로 만족하겠나?”
독일제국 시절에는, 부르주아지가 프로이센 융커(엘베강 동부의 대지주계급. 프로이센 군부의 핵심)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융커가 정치권력을 독점했고, 부르주아지는 융커의 구상에 돈을 대는 물주 역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융커와 부르주아지가 적대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공생관계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융커의 군국주의적 야망과 부르주아지의 자본주의적 야망이 결합하여, 한때 유럽정복과 세계패권을 노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독일이 군사력으로 세계패권을 지배할 기회는 패전으로 사라졌다.
이제 가능한 건 자본의 힘이었다.
자본으로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슈티네스에게 신경 쓰이는 보고가 올라왔다.
최근 함부르크에 기반을 둔 마이어 무역회사(H.C. Meyer & Co)가 공격적으로 기업을 인수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마이어 무역회사? 동아시아 무역에 중점을 둔 회사가 아닌가? 벌어들인 외화를 지금 투자하는 건가?”
마이어 무역회사. 동아시아에서는 세창양행(世昌洋行)이란 이름을 쓰며, 1870년대부터 활동했다. 한때 홍콩-상해-천진-인천-부산-고베-요코하마를 잇는 동아시아 무역을 지배했다.
“하지만 자금 여유가 그렇게 넉넉하진 않을 텐데?”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마이어 무역회사 초대 회장, 하인리히 콘스탄틴 에두아르 마이어(Heinrich Constantin Eduard Meyer)는 슈티네스도 알고 있었다.
독일 동아시아 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특히 조선과 관계가 깊어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주함부르크 대한제국 명예영사의 지위를 30년간 유지했다.
대전쟁 발발 이후 독일의 철수로 동아시아 무역은 급속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대륙과 대양을 잇는 독일의 주요 무역회사이기는 했다.
하지만 대전쟁과 경제 위기로 무역회사는 사세가 크게 기울어졌을 터인데, 어디서 막대한 외화를 들여와 기업 사냥에 나서는지 의문이었다.
“분명히 배후에 누군가 있다. 외국 자본일 가능성이 커. 신경 쓰이는데 조사 좀 해 봐.”
“예, 회장님.”
슈티네스의 정보력은 독일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머지않아 원하는 답이 왔다.
“차명으로 위장하고 있습니다만, 마이어 회사의 대주주가 바로 스웨덴 엔스킬다 은행(SEB)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외국 자본일 줄 알았는데, 엔스킬다라고? 그럼 발렌베리 가문이잖아?”
엔스킬다 은행의 소유주는 스웨덴 최고의 재벌 발렌베리 가문이었다.
전쟁 전부터 스웨덴 철광석 수입을 전담하고 있어, 스웨덴 철광석을 지배하고 있는 발렌베리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슈티네스로서는 예상치 못한 경쟁자가 등장한 셈이었다.
“이놈들이 독일에 들어오려면 나한테 먼저 신고를 해야지. 마이어 회장한테 한번 보자고 해.”
스웨덴 자본이 독일에 진출하려 한다면, 당연히 자신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소한 무역회사라면 눈감아 줄 수도 있겠지만, 외국계 금융대자본이 자신의 밥그릇에 손을 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슈티네스는 마이어의 배후에 발렌베리가 있다고 확신하고,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