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58
3부 173화 비극과 소극
1923년 10월, 독일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작센과 튀링겐의 좌익 연립정부는 급격한 좌경화로 ‘소비에트’ 정권으로 불렸다. 작센 주정부가 베를린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중앙정부는 국가방위군을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으로 투입시켰다.
하지만 바이에른을 비롯한 우익의 반(反)공화국 음모에는 미온적이기 짝이 없어, 좌익의 불만과 분노가 점증됐다.
“군부가 한패야. 틀림없어.”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짓밟고 독재자가 되려는 거겠지.”
베를린에는 육군총감 젝트가 ‘독일의 보나파르트’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만약 군부의 총수인 젝트가 쿠데타에 동조한다면, 정부는 쿠데타를 진압할 방도가 없었다.
서로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공동으로 총파업을 일으켜 우익의 쿠데타에 맞설 것을 천명했다. 강철군단의 쿠데타 시도도 총파업으로 무너지지 않았던가?
문제는, 그때와 달리 1923년 독일 경제는 파탄 위기라는 점이었다. 노동자들 상당수가 실직 내지 임시 휴업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총파업 호소가 먹혀들 리가 없었고, 효과적인 전술도 아니었다.
“이런 개 같은 세상, 하루빨리 뒤집혔으면.”
독일 사회의 분위기는 분노와 염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극좌든 극우든 폭력으로 정권을 쟁취할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임박한 극우 쿠데타에 대비하여, 노동자 계급을 무장시키고 혁명을 준비한다.”
공산당은 은밀히 무장봉기로 전략을 전환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서는 혁명의 가능성을 놓고 밀담이 이어졌다.
“임박한 공산당의 폭동에 대비하여, 군대를 베를린으로 진격시켜 군사정부를 확립한다.”
극우는 공산혁명의 두려움을 이용해, 쿠데타를 정당화할 생각이었다. 검은 제국군이라는 무장집단까지 확보하고 있는 극우가 군사봉기에 더 유리한 환경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루덴도르프와 음모자들의 눈에는, 군사정권 재수립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11월 9일은 반역자들이 제국을 무너트리고 정권을 쟁취한, 소위 11월 혁명 5주년이다. 분명히 이날을 노려 각종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겠지.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베를린에 검은 제국군이 진격한다. 베를린을 접수하는 즉시, 루덴도르프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새 정부를 수립한다.”
11월 9일은 1918년 독일 11월 혁명 기념일이자, 공교롭게도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브뤼메르 18일이었다.
“투쟁동맹은 민족혁명에 대한 전 독일 민족의 지지를 이끌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1923년 9월에 성립된 극우 연합 준군사조직, 독일투쟁동맹은 루덴도르프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바이에른의 극우정당인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 ‘나치’)을 이끄는 아돌프 히틀러는 투쟁동맹의 ‘정치 지도자’를 맡아 선전선동을 책임졌다.
쿠데타 주모자들은 히틀러에게 서커스의 ‘북 치는 사람’ 역할을 맡겼고, 히틀러 자신도 그 역할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히틀러는 쿠데타에 회의적이었다.
‘베를린에 괜히 왔어. 베를린은 바이에른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빨갱이들과 유대인들이 지배하는 도시 베를린에서는 내 말이 먹히지도 않잖나.’
베를린은 사회민주당의 거점으로 불릴 만큼 노동계급과 좌익세가 강한 도시였고, 바이에른 지역정치를 벗어나 처음 베를린으로 진출한 히틀러는 선전선동에 애를 먹고 있었다.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억양은 베를린 토박이들의 비웃음거리였다.
‘제정복고? 쿠데타가 성공한다 한들, 반동적인 융커들이 권력을 다시 장악하는 꼴이 아닌가. 진정한 의미의 민족혁명이 아니지.’
독일제국으로의 복고를 외치며, 고전적인 의미의 군부독재를 희망하는 루덴도르프와 프로이센 융커들과 달리, ‘최전선과 길바닥에서 투쟁한’ 히틀러와 나치는 ‘민족혁명’을 내세웠다.
민족혁명은 게르만 민족의 대단결을 의미했고, 황실이나 융커와 같은 낡은 계급적 구분도 사라져야 했다.
프로이센 융커가 나치를 밑바닥 인생이라고 경멸하듯, 나치도 융커를 특권계급이라고 혐오했다.
단지 공화국과 ‘국제 유대인’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투쟁동맹을 결성했을 뿐, 투쟁방식부터 집권 이후 국가건설계획에 이르기까지 판이하게 다른 집단이었다.
“젝트 대장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아니, 최소한 중립만 지켜 준다면 쿠데타는 성공한다.”
루덴도르프는 히틀러와 같은 선동가보다는 옛 동료인 젝트에게 훨씬 동질감을 갖고 있었다.
군부의 총수인 젝트가 쿠데타를 방조한다면, 분열과 갈등으로 노동계급의 지지를 상실한 정부는 단숨에 무너지고 말 터였다.
10월 30일.
에른스트 부흐루커(Ernst Buchrucker) 예비역 소령은 대전쟁 참전용사이자 강철군단의 지휘관으로, 혁명과 공화국에 대한 강렬한 증오를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강철군단 반란에 연루되어 예편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국가방위군 내의 비호를 받아 검은 제국군을 비밀리에 이끌고 있었다.
예비역 군인들로 구성된, 하지만 정규군이나 다름없는 검은 제국군 4,500명은 부흐루커 소령의 지휘를 받아 쿠데타를 준비했다.
정부의 단속 강화에 정보 누설을 두려워한 주모자들은, 쿠데타를 1주일 앞당겨 11월 1일에 베를린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쿠데타 준비의 첫 단계로 검은 제국군이 베를린 주위에 집결하자, 국가방위군과 검은 제국군 간의 연결을 맡고 있는 페도어 폰 보크(Fedor von Bock) 중령이 단속에 나섰다.
“총감의 명령도 없이 군대를 움직이다니! 정말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이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소, 중령! 루덴도르프 장군의 명령이오!”
“루덴도르프 장군은 예비역 장성이지. 국가방위군은 젝트 장군의 명령을 받소.”
“뭐요? 그럼 젝트 장군을 만나게 해 주시오!”
“젝트 장군이 이 자리에 있다면, 단안경을 쓰고 진압 명령을 내릴 거요. 즉시 동원 해제하시오. 그럼 불문에 부치게 해 주겠소.”
보크는 쿠데타를 방조하지 않겠다는 젝트의 뜻을 분명히 전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정규군인 국가방위군하고 충돌하면 검은 제국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베를린 교외에서 우왕좌왕하던 반란군은 루덴도르프에게 연락했다.
깜짝 놀란 루덴도르프는 즉각 대리인을 육군총감실에 보냈다.
“루덴도르프 장군에게 전하시오. 나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독일 정부를 무너트릴 생각이 추호도 없소.”
“모스크바의 조종을 받는 유대인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독일을 무너트리는 상황을 지켜만 볼 생각입니까?”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우리 국방군이 확실하게 진압할 거요. 제국군 전우끼리 싸우는 상황은 원치 않소이다만, 쿠데타는 용인하지 않겠소.”
젝트는 단안경을 눈에 끼우며 베를린 주위의 군사배치 지도를 바라보았다. 진압하겠다는 의미였다.
독일제국의 부활을 염원하는 건 제국군인의 소원이고, 철저한 군국주의자인 젝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군부 쿠데타와 군사정권 수립이 내전과 독일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슈트레제만의 호소에 젝트가 응답했다.
정부의 진압 ‘명령’에는 응하지 않아도, 독일의 안정을 지켜달라는 ‘호소’에는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현실감각이라고는 없는 멍청한 놈들. 베르사유 조약을 정말 폐기하고 싶으면 일단 힘부터 키워야지. 지금 무슨 수로 프랑스와 싸워 이긴단 말인가? 폴란드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인데. 공산주의자는 때려잡아야겠지만, 소비에트 러시아는 서방에 맞서 동맹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협력자다. 조악한 유대인 음모론만 믿고 러시아까지 적으로 돌리자고?’
젝트는 라팔로 조약 이후 극비리에 소비에트 정부의 국방인민위원 트로츠키와 접촉해서, 독일의 군사기술을 전수하는 대가로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된 전차와 항공기 등을 러시아에서 생산하고 훈련할 수 있도록 밀약을 맺었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퇴역장성 루덴도르프와 융커들은 소비에트 러시아라면 이를 갈았지만, 젝트와 군부 실무자들에게 러시아는 ‘적의 적은 친구’였다.
“독일 투쟁동맹을 자처하는 무리와 결정적인 대결의 시기가 왔소. 의원 동지 여러분, 똑바로 처신하시오. 쿠데타에 연루되는 자는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슈트레제만은 자신의 당인 인민당과 우익 국가인민당 의원들을 향해 경고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군사독재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사전에 강력히 경고를 해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젝트의 지지에 힘을 얻은 슈트레제만 정부는 부흐루커 소령과 검은 제국군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배신자! 전우 대신에 빨갱이 정부를 택해?”
“젝트가 정부의 개가 되었는데, 어떡합니까?”
“이제 와서 어떻게 취소해! 체포영장까지 떨어졌다는데!”
보크는 재차 지금 투항하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고 통보했지만, 검은 제국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베를린으로 진격한다! 우리가 민족혁명의 대의를 갖고 진격하면, 제국군 전우들도 우리와 뜻을 함께할 거다! 지크 하일!”
“지크 하일!”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보다는 체계적인 꼴은 갖추고 있지만, 도박과도 같은 베를린 진군이 시작됐다.
검은 제국군의 거점인 베를린 동남부 320KM 지점 오데르강의 퀴스트린(Küstrin)에서 쿠데타에 동조하는 세력이 도시를 점령했다.
쿠데타군 특공대는 베를린 서북부 교외의 슈판다우(Spandau) 요새와 하네베르크(Hahneberg) 요새를 점령했다. 슈판다우와 베를린 중심가는 도시철도로 연결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특공대가 슈판다우 요새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봉기해야겠군. 특공대에 신속히 베를린으로 진입하라고 명령을 내리시오.”
“다 함께 전진하여, 제국군 전우들에게 협력을 호소합시다!”
루덴도르프는 젝트와 국가방위군이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 시점에서 실패를 직감했지만, 이미 과녁을 향해 화살이 날아간 시점에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타넨베르크의 영웅, 대전쟁의 지도자 루덴도르프의 명성이라면 제국군 전우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으리라는 실낱같은 믿음도 있었다.
국방부와 총사령부만 장악한다면, 육군의 힘으로 정부를 엎을 수가 있었다.
“민족혁명을 개시한다. 베를린을 장악하라!”
쿠데타 세력은 ‘민족혁명’의 시작과 신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육군대장 정복을 입은 루덴도르프를 선두로, 히틀러, 헤르만 에르하르트, 에른스트 룀, 헤르만 괴링 등 투쟁동맹의 지도자들이 준군사조직을 거느리고 육군 총사령부와 경찰청 등을 장악하기 위해 진격했다.
“쿠데타인가!”
“빨리 본국에 보고하도록!”
국방부와 육군 총사령부가 있는 벤들러 지구(Bendlerblock) 건너편 거리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한국 대사관 등 외교공관이 밀집해 있었다. 각국 외교관은 신속히 본국을 향해 쿠데타 발발 소식을 타진했다.
쿠데타 발발 소식이 1보로 전 독일과 전 세계로 알려졌지만, 성패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발포한다!”
벤들러 지구는 이미 국가방위군이 출동하여 철저히 수비를 지키고 있었다.
국가방위군 병력의 대부분은 소요사태에 대비하여 작센, 튀링겐, 함부르크, 바이에른, 베스트팔렌 등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베를린을 방어하는 제3군관구 직할 병력은 최정예였다.
“전우들이여! 유대인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부를 위하여 참호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을 쏠 생각인가? 우리 함께 민족혁명에 동참하자!”
“해산에 응하지 않으면 발포한다!”
반란군의 호소에도, 총감의 명령을 받은 국가방위군은 단호한 태도로 물러서지 않았다.
“발포하라!”
“사격!”
타다다다당!
국가방위군이 발포를 개시하자, 준군사조직 투쟁동맹은 정규군의 공격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발포에 대열은 단숨에 흐트러졌고, 당장이라도 베를린을 엎어 버릴 기세였던 투쟁동맹은 혼비백산했다.
“안 되겠소! 우리도 쏩시다!”
“흔들리지 마라! 반격해! 그러고도 민족혁명을 이끌 투쟁동맹 전사들이냐!”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어! 퇴각하라!”
“으윽!”
전방에 서 있던 헤르만 괴링이 하반신에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지도부는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후퇴! 후퇴!”
“퇴각하라!”
투쟁동맹은 기세가 무색하게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런 오합지졸들이 정규군을 무슨 수로 이기나! 젝트 이놈이 중립만 지켜 줬어도!”
실패를 확신한 루덴도르프는 그대로 중립국 스웨덴 대사관으로 도주했다.
“배신자 융커 놈들! 애초에 이따위 쿠데타 계획에 동조하는 게 아닌데!”
히틀러는 이를 뿌드득 갈며, 측근의 호위를 받으며 베를린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만약 자신이 지도자였더라면, 소수의 음모인 쿠데타가 아니라 진정한 ‘민족혁명’의 방식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방법을 택했으리라.
하지만 전직 하사, 34세의 히틀러는 아직 변방 소수 정당의 지도자에 불과했고, 이제는 실패한 쿠데타의 공범일 뿐이었다.
“반란군은 항복하라!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선처를 약속한다!”
슈판다우 요새를 점령한 검은 제국군 특공대도 국가방위군에게 항복했다.
이튿날인 10월 31일, 반란군 최후의 거점인 퀴스트린도 실패가 확실시되자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검은 제국군과 투쟁동맹의 쿠데타 시도는 불과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사상자는 반란군 측 수십여 명, 국가방위군은 단 4명에 불과했다.
1919년 강철군단의 반란은 베를린을 며칠이라도 점령했었지, 1923년 쿠데타는 베를린 진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어처구니없는 촌극이었다.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笑劇)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
–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마르크스가 1851년 백부 나폴레옹 1세를 흉내 낸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비웃으며 썼던 문장이 시공간만 바뀐 채 그대로 적용되었다.
‘20세기의 나폴레옹’을 꿈꿨던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못지않게, 베를린 진군도 소극으로 끝이 났다.
루덴도르프가 꿈꾸었던 독일제국의 재건이든, 히틀러가 꿈꾸었던 장대한 바그너식 독일 오페라 비극이든 간에, 벌어진 일은 한 편의 소극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벌어질 일은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처럼, 우익의 실패는 좌익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검은 제국군의 ‘흑색경보’가 소음조차 내지 못하고 잦아들자, 노동자 적위대의 ‘적색경보’가 울리게 될 시기가 왔다.
혁명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