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59
3부 174화 증오의 시대
‘베를린 진군’, 독일 우익의 어설픈 쿠데타가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인 루덴도르프는 스웨덴 대사관으로 피해 체포를 면했지만, 이로 인해 우익 내에서 루덴도르프가 가지는 위치와 명망은 영원히 추락하였다.
히틀러, 에르하르트, 룀, 괴링 등 ‘독일 투쟁동맹’의 지도자들은 도주하였으나 순차적으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다.
“독일 공화국을 위협하는 반란의 무리는 진압되었습니다! 이는 국가방위군이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베를린을 수호한 덕입니다.”
“독일의 수호자, 국가방위군 만세!”
슈트레제만 총리는 우익 쿠데타 진압의 공로를 젝트와 국가방위군에 돌렸다.
국가방위군의 무력이 쿠데타를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정작 젝트를 비롯한 국가방위군 수뇌가 쿠데타 방조와 진압을 저울질하다 선택했음을 생각하면 ‘독일의 수호자’라는 칭송은 과분한 감이 있었다.
“군부가 그동안 검은 제국군이라 불리는 비밀조직을 운영해 왔다는 게 명백해졌습니다. 어찌 군대 내에 사조직이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군부가 공화국에 충성하는 게 확실합니까?”
“군부가 쿠데타에 동조했다가 막판에 주인을 바꿨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군부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의혹을 제기했지만, 정부는 무시로 일관했다.
“국가방위군의 헌신과 충성이 없었더라면, 여러분은 모조리 체포되어 지금 의사당에 있지도 못할 겁니다! 루덴도르프 일당이 제국을 선포하고 카이저를 다시 모셔오는 꼴을 지켜봐야겠지요!”
어찌 됐건, 1919년 강철군단 반란은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의 총파업으로 진압되었지만, 1923년 우익 쿠데타는 국가방위군의 힘으로 진압하였으니 자연히 군부의 입김이 강해졌다.
당연하게도, 젝트는 대가를 요구했다.
“우리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제국군 전우들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이는 독일의 안정과 합법적 정부를 지키기 위한 국가방위군의 결단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총감.”
“이제 극우 쿠데타 가능성도 사라졌으니, 극좌의 반란을 진압할 시기입니다. 작센에 군사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십시오.”
9월에 성립된 작센과 튀링겐의 사회민주당-공산당 연립정부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공산당을 추방하라는 중앙정부와 군부의 최후통첩을 받았다.
작센과 튀링겐에서는 합법적으로 연립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는 베를린이나 바이에른의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베를린에서는 우익이 공화국을 타도할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했고, 바이에른도 공화국의 전복을 바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공산당의 입각이 러시아처럼 공산혁명으로 가는 예비 단계라고 의심했고, 통첩을 거부하면 군사력을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튀링겐 주정부는 최후통첩에 굴복하여 공산당이 연립정부에서 물러났지만, 작센에서는 저항이 계속되었다.
「작센의 사회민주당-공산당 연립정부는 공화국을 지지하는 노동 계급의 방어를 위한 정부입니다! 작센 주정부는 융커 반동들, 라인란트와 바이에른의 분리주의, 경제 권력을 쥔 대자본의 억압정책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 작센을 공격하려 한다면, 2천만 독일 노동자 계급의 저항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좌익은 작센의 ‘합법적인’ 정부를 지키기 위해 총파업을 경고했다.
“사민당이 진압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시다시피, 다수당인 사민당이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 내각은 자리를 보전하기 힘듭니다.”
“헌법 48조에 의거한 비상대권이 발동된 상황 아닙니까? 다수 여부와 관계없이 총리가 결단만 내리면 됩니다.”
우익 인사라 할지라도 원내 제1당인 사회민주당과의 협력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슈트레제만이 주저하자, 젝트는 총리에게 통첩을 날렸다.
“국가방위군은 소비에트 정권이 독일 내에 출현할 가능성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총리가 명령을 안 내리더라도, 군은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 작센으로 진격할 겁니다.”
군 통수권이 대통령이나 총리가 아닌 사실상 육군총감에게 있는 기이한 상황에, 슈트레제만은 결단을 강요받았다.
“현재 작센을 향해 배치된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약 6만입니다.”
“작센으로 진격하십시오. 주정부 해산 명령은 대통령께 허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총리 각하.”
젝트는 단안경을 고쳐 쓰며 총리를 향해 거수경례했다.
상관인 총리를 향한 경례였지만, 누가 독일의 군사력을 지배하고 있는지 명확했다.
“진압 명령이 내려졌다. 즉시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켐니츠를 향해 진격하라. 소위 노동자 적위대, 저항하는 좌익분자들은 모조리 사살해도 좋다.”
“예, 총감 각하!”
‘전우’였던 우익 쿠데타에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국가방위군이지만, 이념적 상극인 공산당에게는 어떠한 자비도 없을 터였다.
대전쟁이 만들어 낸 증오의 시대에, 자비란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 * *
1923년, 전후 베르사유 체제가 뒤흔들렸다. 아니, 어쩌면 1648년 베스트팔렌 체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는 변혁의 시기였다.
프랑스의 루르 점령으로 촉발된 위기는, 단순히 독일만의 위기가 아니었다.
프랑스 총리 푸앵카레와 프랑스 군부의 총수 포슈 원수는 1919년 베르사유에서 클레망소가 이루지 못했던 염원, 즉 ‘독일의 분할’을 원했다.
프랑스는 복수를 열망했다. 포슈를 비롯한 군부 수뇌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20년간의 휴전’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비록 영토 일부를 상실했지만, 통일된 독일 국가는 살아남았다.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수복했지만, 국가 안보의 불안전성은 변하지 않았다. 훗날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재무장에 돌입한다면, 프랑스를 앞지르는 건 시간문제다. 즉, 이건 평화가 아니라 20년간의 휴전에 불과하단 의미다!”
실제 원역사에서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꼭 20년이 되는 1939년에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결국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통찰력이었다.
윌슨과 로이드조지의 압박으로 클레망소는 독일의 분할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대신 클레망소는 미국-영국-프랑스 ‘대서양 3각 동맹’으로 국가안보를 보장받길 원했으나, 특정 국가와의 동맹을 원치 않는 미국의 고립주의로 인해 좌절되었다.
영국 역시 독일의 분할이 프랑스의 대륙 지배를 공고히 한다고 의심하였으므로, 오히려 프랑스의 의도를 견제하고 나섰다.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동부의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맹을 체결하였으나, 프랑스의 안보 우려는 사라지지 않았다.
독일에 강경하기로는 ‘호랑이’ 클레망소 못지않은 푸앵카레는, 독일의 위기를 틈타 유럽 질서의 재편을 획책했다.
“라인강 서부의 라인란트와 팔츠를 분리하여, 완충국을 건설한다.”
독일이 혼란에 빠진 1923년 10월 말과 11월 사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라인란트 분리주의자들이 ‘프로이센의 압제’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라인강 서부의 아헨, 코블렌츠, 본, 비스바덴, 트리어, 마인츠 등지에서 ‘라인 공화국’, ‘팔츠 자치령’ 등이 선포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를 금지했으므로, 독일은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라인 공화국이 프랑스의 괴뢰정부라는 건 분명해 보였고,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라인란트 주민들 상당수는 프로이센 군국주의에 반감을 품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은 그래도 같은 독일인’이지만 프랑스는 외세였다.
현지 관리와 경찰들은 라인 공화국을 부정하고, 베를린 중앙정부의 명령만을 받았다.
“영국 정부는 라인란트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데일리 메일 스캔들의 여파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제2당인 노동당과 제3당인 자유당이 연합하여 볼드윈의 보수당 정부를 무너트렸다.
볼드윈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선언했으나, 경제 위기와 노동당-자유당 연대 앞에서 보수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노동당수인 램지 맥도널드(Ramsay MacDonald)는, 머지않아 영국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가 될 가능성이 컸다.
이는 노동당과 자유당의 연대를 물밑에서 교섭했던 케인스의 공로가 컸다.
독일에 유화적인 노동당과 자유당은 프랑스의 정책에 제동을 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당장은 총선에 집중하느라 라인 문제에 개입하지 못했다.
“미합중국 정부는 루르 점령과 라인란트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미국도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레너드 우드 행정부는 국제정치에 적극 개입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계파를 계승했고, 특히 우드 본인은 대전쟁기 동부전선의 미군 사령관인 반독(反獨)적 인사로 프랑스의 입장에 더 공감했다. 하지만 미합중국 대통령으로서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었다.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윌슨은 독일에게 너무 관대했습니다. 프로이센 군국주의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생각하면, 독일이 전쟁을 다시 일으킬 가능성을 박탈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조약은 체결되었습니다. 무수한 반대가 있었지만, 미국은 베르사유 조약을 비준했습니다. 프랑스의 안보 우려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독일 국가의 주권을 깨트리는 형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윌슨이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이 상원에서 비준되도록 협력한 공화당 내 파벌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계파였으니, 우드로서는 독일 국민국가를 보전하려는 시도를 무너트릴 순 없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건, 분할되고 약화된 독일의 측면을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붕괴를 원치 않습니다.”
독일 정치는 극좌와 극우로 극단화되고 있었고, 극우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러 자멸한 상황에서 극좌가 득세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유럽의 정세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살얼음판과 같은 시기였다.
* * *
대한제국, 부산.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격한 정세 변화를, 이선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좋은 소식입니다, 박사. 우익 쿠데타가 완전히 진압되었다는군요.”
이선은 베를린에서 온 소식을 구체적으로 전해 주었다. 귀국을 잠시 미루고 기다리던 아인슈타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에 반유대주의 음모론을 신봉하고 선동하는 루덴도르프와 극우가 정권을 잡았다면, 유대인인 아인슈타인도 독일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터였다.
“다행입니다. 이제 독일로 돌아갈 수 있겠군요.”
“하지만 독일의 위기가 끝난 건 아닙니다. 작센에서는 국가방위군과 공산당의 유혈 투쟁이 시작되었고, 바이에른은 베를린 정부의 명령을 거역하며, 라인란트에서는 아예 독립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지금 독일은 대혼란 그 자체입니다.”
“제 생각에는, 작센 정부든 라인란트 정부든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단일국가를 향한 독일인들의 열망이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생각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단일국가에서, 소수민족의 안전이 얼마나 보장될까요?”
이선의 불안한 암시에 아인슈타인은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는 표정이었다.
“박사가 독일로 돌아간다니 우려가 됩니다. 독일 우익들은 패전을 사회주의자와 유대인 탓으로 돌리더군요. 특히 마르크스주의와 유대인을 동일시하고, 독일의 패전과 위기를 국제 유대인의 음모라고 선동합니다.”
“폐하, 그에 대해서는 독일에 살고 있는 제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물론 그렇게 선동하고 믿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독일인들은 이성적인 민족입니다. 결코 음모론과 선동에 이성을 상실하지 않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의 확신에, 이선은 되물었다.
“박사. 박사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인에게 받은 인상이 어땠습니까?”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점잖았습니다.”
“그렇지요. 일본인들은 대부분 친절하고 예의가 바릅니다. 다만 전제조건이 붙습니다. 박사가 백인이니까 그렇지요. 아, 인종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의 세상은 백인이 지배하고 있으니까요. 일본인들은 강자에게 친절하고, 약자에게 가혹합니다. 그들이 약자라고 천대하는 집단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습니까?”
아인슈타인도 풍문으로 들었던, 9월 간토(관동)대지진 이후 벌어진 일본인들의 중국인 이주노동자 집단 학살 사건을 떠올렸다.
그렇게 친절하고 예의 바른 일본인들이, 학살자로 돌변했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도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소문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했다.
일본인 자경단은 ‘사회혼란의 배후’로 지목된 사회주의자들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수천 여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잔혹한 방식으로.
이 사건은 일본과 중화민국 사이에 외교적 문제로 확대되었고, 중일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중국에서는 1919년보다 더욱 거센 반일 운동이 일어났다.
“지금이야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위치의 국력을 보유했기에 학살 대상에서 빠졌다지만, 만약 한국이 일본에게 병합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부터 먼저 학살했을 겁니다.”
‘실제로, 원역사에서도 그러지 않았던가?’
“내 생각에, 그건 일본인들이 특별히 사악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소수자, 소수민족에 대한 증오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병증입니다. 패전과 경제 위기. 대지진과 사회적 혼란. 인간은 변화와 공포 앞에서 취약한 존재고, 가장 손쉽게 탓할 수 있는 대상을 찾습니다. 그게 바로 소수자 집단이지요. 쉽게 눈에 띄고, 이질적이고, 적당히 수가 많으면 됩니다. 그게 독일에서는 유대인이고, 일본에서는 중국인이지요.”
이선의 날카로운 지적에, 아인슈타인은 할 말을 잃었다.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의 증오가 이성적 근거가 있습니까? 아뇨, 없지요. 다 음모론과 선동일 뿐입니다. 단지 가장 눈에 띄는 소수민족이라는 게 죄라면 죄지요. 만약 독일에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폴란드인이 증오의 대상이 되겠지요. 폴란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프랑스인이 되겠고.”
독일 우익이 증오하는 건 유대인이지만, 그 다음은 ‘독일의 영토를 강탈한’ 폴란드인과 ‘누대의 숙적’ 프랑스인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증오를 부추기는 게 선동가의 역할이고, 막는 게 정치가의 역할입니다. 내가 한국의 통치자로 남아 있는 한, 또 내가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는 이들이 내 후계자가 되는 한, 한국에서는 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지 않을 겁니다.”
이선은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전 인류가 합리성을 지킬 수는 없어도, 최소한 한국만큼은, 이 증오의 시대에 이성의 나라로 남아야 했다.
“과연 지금 독일에, 아니 유럽에 박사가 기대할 만한 이성이 남아 있는지 의문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만약 유럽인의 이성에 대한 박사의 확신이 깨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나와 한국을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언제든지 박사와, 박사의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최상의 자리를 약속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만이 아니다. 절대다수의 유럽인들은, 나치와 같은 비이성적인 집단이 선동으로 권력을 잡고, 대량학살을 ‘최종 해결책’으로 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로 증오의 시대가 만들어 낸 특수성이었다.
만약 변화한 세계에서 히틀러와 나치가 없을지라도, 누군가는 증오와 선동을 무기로 삼아 권력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