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67
3부 182화 사과와 배상
대한제국 진상조사단은 시모노세키에 당도한 순간부터 ‘칙사 대접’을 받았다. 도쿄는 아직 폐허나 다름없었으나, 조사단은 최상의 예우를 받았다.
조사단은 대진재의 와중에도 튼튼하게 버틴, 저명한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설계한 최고급 호텔인 데이코쿠(帝國)호텔에 투숙했다. 데이코쿠 호텔의 초대 소유주는 전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 현 소유주는 일본 근대경제인을 대표하는 시부사와 에이치(渋沢栄一)로, 일본 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역시 기술은 미국이야. 대지진으로 동경 전역이 쑥밭이 됐는데 이 호텔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니.”
이승만은 새삼 미국의 기술력을 칭송했다.
“19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도 도시를 크게 파괴했지만, 인명의 참상은 도쿄보다 훨씬 덜했습니다. 하물며 타민족을 해칠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요. 아시아인을 법적으로 이민제한을 두고 차별을 할지언정, 지진의 혼란을 틈타 학살한다거나 하는 일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 차이만 봐도 미국과 일본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나. 일본은 외형만 성장한 유사 근대국가야. 절대로 대한의 모범이 될 수 없지.”
진상조사 부단장을 맡아 현지에서 조사를 이끌던 주일공사 신흥우가 일본을 비판했다. 신흥우 역시 로스앤젤레스 남가주대학에서 법학박사를 받은 미국 유학파였다.
이승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본을 유사 근대국가라고 비판했다.
과거 개화파 1세대를 비롯한 개화당 초기 구성원들은 일본을 모범으로 삼았지만, 미국을 경험한 이승만과 미국 유학파들은 이전 세대의 일본 숭배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이야말로 서양 근대문명의 본산이며, 일본은 이를 흉내 냈을 뿐이 아닌가? 미국의 인종차별이 극심하다고는 하지만, 일본처럼 주변민족을 학살하지는 않지 않은가?
“신 공사, 대진재 피해 파악 현황은?”
“일본 정부도 정확한 파악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전체 사망자와 실종자는 대략 10만에서 15만 가량으로 추정됩니다. 부상자는 셀 수 없이 많고, 이재민은 약 200만에 달합니다. 경제적 손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정확한 집계도 불가능하고, 수십억 엔은 될 거라고 평가하더군요.”
추정 피해치에 이승만은 혀를 내둘렀다.
“엄청나군. 일본이 혼란에 빠질 만도 해. 그럼 한인 피해자는?”
“지진 전 재외국민 등록부에 등록된 사람들 중 사망 및 실종은 약 400명으로 추정됩니다. 파악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미등록 인원을 합치면 이보다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단기체류자나 불법체류자 같은 미등록 인원까지 외국에서 파악하긴 어렵지. 합법적인 인원만 따지자고. 그럼 그중에서도 살해당한 희생자는 얼마나 되겠나?”
“일본 경찰이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뭐라고 떠드나?”
“대진재로 행정력이 마비돼서 정확한 조사와 파악이 어렵다더군요.”
“내 그럴 줄 알았어. 아무튼 계속 하게.”
“대사관에서도 동포들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자체조사로는 30에서 40명 정도가 희생당한 게 아닐지 추정하고 있습니다.”
메모를 적고 있던 이승만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거 밖에 안 되나? 생각보다 적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40명은 너무 적어. 중국인은 수천 명이 죽었다며? 우리도 100 단위는 넘어가야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가 좋지.”
희생자를 숫자로 따지는 이승만의 냉혹한 태도에 신흥우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일단 자체조사 결과는 3배, 아니 4배 정도 늘리지. 160명이라고 하자고.”
“일본 정부가 받아들이겠습니까?”
“어차피 일본 정부도 정확한 파악은 어렵다며? 여기서부턴 외교의 영역이지. 희생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피 값을 많이 받아 낼 수 있으니까.”
이승만은 보고서의 숫자를 고쳐 썼다. 그에게 희생자의 숫자는 외교적 수단일 뿐이었다.
“우리 대한국민 160명이 일본 폭도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동맹국이었던 나라에 말입니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우리 정부는 결코 묵과할 수 없습니다!”
“160명이라니, 대체 근거가 뭡니까? 일본 경찰의 추산에 따르면, 중국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당한 일본인이 약 60여 명, 한인은 약 2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20여 명이라니! 대사관에 접수된 증언만 해도 얼마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대사관 조사에 따르면, 대진재로 사망한 한인이 약 800명가량으로 추산됩니다. 이 중에서 학살 피해자는 160여 명이라는 게 우리 측 추산입니다.”
일본은 어떻게든 은폐하고 줄여 보려고 하지만, 이승만은 그러거나 말거나 수를 최대한 부풀렸다.
“허, 증언이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경찰 추산은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일본 군경이 학살에 가담했다는 증언도 다수 있는데, 가해자가 퍽이나 최대로 조사하겠군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음해를! 일본의 명예를 모욕하는 발언이외다!”
“그러니까! 진상조사단이 제대로 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귀국 정부가 성의를 다 보여 달란 말입니다. 우리도 납득할 만한 성과를 보여야 귀국할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의 강경한 태도에, 일본 정부도 일단 협조하는 시늉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귀국 조사단이 정부조사에 참관할 수 있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그럼 조사 후에 다시 논의하지요.”
대한제국 진상조사단은 본격적으로 착수하였지만, 시작부터 현실적인 제약에 부딪혔다.
외국에서 행정권이나 사법권이 없는 상황이니 당국의 협조가 필요한데, 일본 정부는 말로만 협력한다고 할 뿐 실상은 비협조로 일관했다.
“중국인 집단학살 및 한국인 오인살인에 군경이 개입된 사항은 철저하게 은폐해야 하며, 자경단 일부 극렬분자의 망동으로 처리해야 한다.”
“진상조사는 최대한 시간을 질질 끌면서 우야무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한국 조사단이 도일하기 전, 사이토 마코토 내각은 5부(내무·외무·사법·육군·해군)회의에서 진상의 은폐를 결의했다.
“단장 이승만은 한국에서 가장 친미적으로 평가받는 인사입니다. 주일미국대사를 중재자로 내세워서 해결하는 게 좋겠습니다.”
“좋소. 동시에 막대한 향응을 베풀어서 주의를 돌리도록 하시오.”
진상조사는 11월에서 12월까지 넘어갔지만, 확고한 진실이 나오지 않았다.
일본이 은폐와 시간지연에 열성을 다하고 있으니, 한국 조사단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한계가 있었다.
“예상했던바, 하나도 놀랍지 않다.”
이승만은 진상조사에 참여하는 대신, 각국 외교관들과 접촉하며 여론전에 나섰다. 특히 주일미국대사관은 주된 접촉대상이었다.
12월 초에는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파견한 진상조사단이 도착했으나, 이들 역시 일본 정부의 비협조에 벽이 막혔다.
“일본 정부의 사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에 대한 배상.”
한중 양국 조사단은 공동으로 일본을 압박했으나, 양국 공조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중국이 더 소극적이었다.
북양정부가 가진 내재적인 문제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였다. 안휘파 군벌정권은 1918년 일본에 1억 5천만 엔의 차관을 빌렸으나, 제대로 갚지 못하여 전전긍긍했다. 거센 국내여론에 밀려 조사단을 파견하긴 했지만, 채권자의 눈치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북양정부보다는 피해가 집중된 절강성에서 파견한 민간조사단이 더 적극적일 정도였다.
“이래서야 중국은 일본을 움직일 지렛대 역할도 못하겠구만.”
이승만은 혀를 끌끌 찼다. 가장 큰 피해자인 중화민국이 일본을 몰아쳐야 하는데, 정작 정치가와 외교관이란 자들은 물주의 눈치를 보느라 소극적인 항의에 머물러 있었다.
“역시 열쇠는 미국이군. 현재 일본의 물주는 미국이니.”
일본은 자신들보다 약한 나라에게는 기세등등했지만, 강한 나라에는 쩔쩔 맸다.
중화민국은 일본 기준으로 ‘약한 나라’니 무시하고, 한국은 그나마 ‘동등한 나라’지만 굽힐 생각이 없고, 미국이야말로 ‘강한 나라’였다.
당시 주일미국대사는 근래 부임한 사이러스 우즈(Cyrus Woods)였다. 우즈는 대지진을 구호하기 위한 미국의 여론을 이끌었다.
미국은 일본 정부나 일본계 이민에 비판적인 여론과는 별개로, 대지진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일본을 향하여 미국인들의 구호성금이 쏟아졌다.
“안녕하십니까, 대사.”
“어서 오십시오, 박사.”
이승만은 프린스턴 박사임을 내세워 반드시 자신을 ‘DR. Lee’로 소개했기 때문에, 외교관들은 그를 꼭 박사라고 불러 주었다.
“서재필 대사께서 안부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오, 그분은 안녕하십니까?”
“언제나 활동적이시지요.”
우즈는 펜실베이니아대학 출신이었고, 공교롭게도 서재필도 같은 시기에 펜실베이니아 의대에서 유학하여 서로 친분이 있었다. 그 덕택에 이승만은 우즈와 빠르게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 일본의 만행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샌프란시스코 지진 당시에 미국인들은 일본인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을 포용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은 주변국민을 학살했습니다. 강력히 규탄 받아야 마땅한 일입니다.”
“보편적인 인권의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요.”
“일본은 미국에 인종평등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주변국민에 대한 평등부터 달성해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박사. 하지만 일본은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원만한 타협을 원합니다.”
“오해라니요. 버젓이 벌어진 학살입니다!”
“의도해서 죽인 건 아니고, 중국인으로 오인해서 살해한 경우라고 들었습니다만.”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시지요. 중국에서 미국인을 영국인으로 오인해서 죽였다면, 미국 정부는 참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이승만의 비유에 우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국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중요한 우방인 일본과 한국이 관계가 멀어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우리 역시 외교적 단절을 원하는 건 아닙니다. 한국의 주적은 소비에트 러시아지 일본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일본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한국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정부가 한국에 기대하는 건,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반공의 보루였다. 미국은 일본의 야망을 경계하고는 있지만 워싱턴조약에서 힘을 꺾어놨으니, 당장은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그러니 소련의 남하와 태평양 진출을 저지할 한일두 나라의 관계가 흔들리는 건 미국 입장에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대사께서 중재를 맡고 계시니, 일본을 설득해 주십시오. 한국에 대한 보상이 중국에 연계되는 건 아니니, 한국과 중국을 별개로 생각하라고.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하면 양국관계는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설득해 보지요.”
* * *
미국의 압박에, 일본도 결국 한국과는 타협할 필요가 있다고 결단을 내렸다.
온건파인 하라 다카시 전 총리대신, 이누카이 쓰요시 체신대신은 한국과 타협하라고 사이토 총리를 압박했고, 사이토는 하라와 이누카이에게 협상을 부탁했다.
“박사. 50년, 아니 수천 년 양국관계를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단절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명확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 학살 책임자 처벌, 피해자에 배상금 지불, 이 3가지 사항은 반드시 관철되어야 합니다.”
하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 자신도 일본 우익의 거듭된 테러 시도에 가까스로 암살을 면한 채 고향에 낙향해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후임인 다카하시 내각이 무너지면서 급히 상경하기는 했지만, 대지진으로 수도가 파괴되는 꼴을 봐야 했다.
원로 자격으로 제도(帝都)부흥위원회 총재를 맡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체포된 자경단원 중, 한인 살해에 연루된 자는 엄히 처벌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학살에 군경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우리 측 조사에 의해서도 드러나고 있고요.”
“박사, 군경 개입설은 그냥 잊으십시오. 군대는 총리였던 나도 못 건드립니다. 정부가 천황폐하의 군대를 처벌할 수는 없어요.”
이승만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차피 일본 정부의 구조상 일본군에게 처벌을 요구할 생각은 없었고,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도 일본 정부가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는 현실에 기가 찰 따름이었다. 그나마 역사의 변화로 적극적으로 문민통제를 이끌었음에도 이 정도였다.
“귀국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이해 감사합니다. 대신 군경의 책임자인, 내무대신과 육군대신은 책임을 지고 사임하도록 하겠습니다.”
학살을 조장하고 방조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와 육군대신 겸 계엄군 사령관 야마나시 한조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면피성 사임에 가까웠지만, 하라도 이 두 사람만은 반드시 경질하라고 사이토를 압박해서 관철시켰다. 어차피 해군 출신인 사이토 입장에서는 육군과 경찰에 특별한 애착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정부 차원의 공개적인 사과는 어렵습니다만, 비공식적으로 유감 표명을…….”
“이건 우리도 양보 못 합니다. 하다못해 대신 중 한 사람이라도 천황의 친서를 지참하고 한국에 와야 합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하는 이승만으로선, 사과와 배상 문제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40년 전 임오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당시 조선에서 박영효 공과 김옥균 공이 특사로 대군주의 친서를 들고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그 일로 양국관계가 악화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임오군란 후속 해결을 위한 특사로 파견된 박영효와 김옥균은 오히려 일본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박영효는 초대 주일공사가 되어 한일관계의 진전을 이끌었다.
“그럼 소생이 직접 가지요. 한국에 있는 사위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순 없습니다.”
주한대사 요시자와의 장인인 이누카이가 총대를 메자, 하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정부를 설득해 친서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배상이었다.
한국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은 수천 명이 학살당한 중국 때문에라도 하기 어렵다는 게 일본의 입장이었다.
대신 ‘조의금’ 내지 ‘위로금’ 형식으로 실질적일 배상을 대신하겠다는 타협안이 제기되었고, 임오군란 당시 배상금 지불을 끝끝내 거부하고 위로금으로 대체했던 한국 측도 이를 받아들였다.
“공동조사로는 한인 사망자가 약 400명, 이 중에서 살해된 인원은 최대 40명 내외로 추산합니다.”
한일 공동조사에 의한 추정치가 나왔으므로, 이승만도 더는 160명이라 주장할 생각은 없었다.
“대진재 사망자와 부상자를 위한 위로금으로 20만 엔, 살해된 이의 유족에게는 별도의 조의금으로 8만 엔을 지불하겠습니다.”
학살 희생자 1인당 약 2,000엔을 보상하겠다는 의미였다.
1923년 대지진 이전 일본의 백미 10kg의 소매가격이 3엔 4전이었다. 2,000엔은 일본 기준으로도 쌀 5.8톤을 살 수 있는 큰 금액이고, 일본보다 물가가 저렴한 한국에서는 더 큰돈이었다.
대개 중산층 이하인 피해자 유족들에게는 상당한 액수였다.
“억울하게 살해당한 목숨값으로 2천 엔은 너무 적군요. 그 두 배, 4천 엔은 되어야겠습니다.”
이승만은 두 배를 올렸다. 보상액이 최대한 클수록 자신의 외교적 성과였다.
“박사, 우리 입장에선 이게 최선입니다. 대진재 피해복구에 엄청나게 많은 정부 예산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산이 없습니다.”
“각하, 지진 소식을 듣고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20만 달러를 흔쾌히 쾌척하셨습니다. 그 돈만 따져도 40만 엔입니다. 그런데 보상금으로 이보다 적은 금액을 지불하려 합니까?”
하라와 이누카이는 고민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위로금과 조의금으로 총 40만 엔을 지불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합의안을 작성하지요.”
1. 일본제국은 한국인들의 사망에 대하여, 대한제국에 심심한 유감의 뜻을 보낸다.
2. 일본제국은 천황 폐하의 친서를 지참한 대신을 파견하여 대한제국 황제 폐하께 전달한다.
3. 한국인으로서 피해를 당한 자는 일본제국이 예를 다해 장례를 치른다.
4. 일본제국 정부는 40만 엔을 지불하여 피해를 받은 한국인의 유족 및 부상자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
5. 한국인 살해와 관련된 흉도(凶徒)는 엄중히 처벌한다.
공교롭게도 40년 전 임오군란의 갑과 을이 바뀌었다.
형식은 일본에 양보했지만, 실질은 한국이 원하는 사안 대부분을 얻어 낼 수 있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에 유의미한 사과와 배상을 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