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69
3부 184화 옛 동지
1923년은 유럽 역사에서 전환점의 해였다.
프랑스의 루르 점령으로부터 비롯된 독일의 인플레이션과 체제위기는 절정에 달했고, 이탈리아의 파시즘 운동은 소극(笑劇)으로 끝이 났으며, 영국은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자 총리를 선출하여 노동당 정부가 들어섰다.
옛 제국의 잔해 위에서는 새로운 국가가 들어섰다. 러시아 제국의 영역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재편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폐지되어 튀르키예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분리하여 독립하였다.
대전쟁 종전 이후, 베르사유 체제로 규정된 질서는 단 5년 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도나우 연방,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연방은 헝가리의 탈퇴로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만이 구성원으로 남게 되었다.
“헝가리도 독립한 마당에, 남슬라브 민족의 크로아티아가 연방에 잔류할 이유가 있는가?”
크로아티아는 달마티아 해안 전체를 차지하려는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하려는 세르비아의 야망에 맞서 도나우 연방 잔류를 선택했었지만, 오스트리아에 범게르만주의 정권이 수립되고 헝가리가 독립함으로써 의미가 퇴색되었다.
세르비아는 반색을 하며 유고슬라비아 동군연합을 제안했지만, 이탈리아의 독립보장과 영토인정을 받은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에서 독자적으로 민주공화국을 선포하는 길을 택했다.
“흐르바츠카(Hrvatska,크로아티아) 공화국 만세!”
연방 산하 크로아티아 육해군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신생국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이 헝가리에 합병된 이래, 1천 년 만에 독립한 크로아티아 국민국가였다.
“위대한 합스부르크 해군의 깃발을 잠시 내리지만, 우리는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니다.”
생제르맹 조약의 제약으로 소수의 군함으로 남아 있던 연방 해군은 크로아티아 해군이 접수했다. 합스부르크 해군을 이끌던 호르티 제독이 헝가리 분리에 개입하다 실패하면서, 이미 해군은 지도부를 상실한 상태였다.
합스부르크 제국 해군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던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내륙국으로 전락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민족의 국가이다. 짐짝과도 같았던 마자르와 슬라브 민족이 분리하였으니, 우리의 조국인 대독일로 돌아갈 때가 돌아왔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좌익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합스부르크 왕조를 상징으로 둔 다민족 연방국을 지향했지만 극우 범게르만주의 대독일인민당은 독일과의 통일을 원했다.
범게르만주의자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분리를 오히려 환영했고, ‘대독일 통일의 걸림돌’인 합스부르크 왕조 퇴위와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선포를 주장했다.
“짐은 연방의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헝가리-크로아티아의 분리와 독일과의 통합을 외치는 범게르만주의자들이 모든 걸 망쳤다! 짐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대독일 통일의 걸림돌이라고? 정작 그 독일의 상황은 어떤가? 극도로 혼란스럽지 않은가? 장차 독일이 통일국가로 유지될지나 의심스럽다.”
카를 1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위를 위협하는 건 헝가리나 크로아티아가 아니라, 오히려 범게르만주의였다. 옛 동지인 두 나라는 연방 탈퇴와 독립으로 만족했지만, 범게르만주의자는 독일과의 통일을 위해 합스부르크 왕조의 퇴위를 요구했다.
“독일과의 통일은 생제르맹 조약에서 금지된바, 연합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소. 하물며 현재 독일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 기사당은 저런 무책임한 무리와 결별하시오.”
“사민당이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위 유지를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대연정을 제안하겠소.”
서로 앙숙이었던 우익 기독사회당과 좌익 사회민주당이 대연정을 수립했다.
독일과의 통일은 합스부르크 왕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이 동의하는 바였으나, 생제르맹 조약에서 독일과의 통일이 금지되었으므로 정치가들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왕당파인 기독사회당의 요구로 일단 카를 1세와 합스부르크 왕조가 유지되었다.
카를 1세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사도왕,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왕, 달마티아의 왕, 기타 등등…….≫의 작위를 보유했지만, 칭호로만 옛 제국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때 중부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옛 제국에서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슬로베니아의 작은 영토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열은 ‘민족자결주의’의 시대에 필연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게르만 ‘단일민족’이나 1871년 프로이센에 의해 통일된 독일의 통일은 영구할 수 있는가?
한편에서는 범게르만주의와 대독일주의가 기승을 부리지만, 한편에서는 프로이센의 지배에 반감을 갖고 있는, 프로이센에 강제로 병합되었다고 생각하는 서부 라인란트와 남부 바이에른에서는 분리주의가 세력화됐다.
“라인란트를 프로이센에 병합시킨 1815년 빈 조약이야말로 실수의 근원이며, 베르사유에서 바로잡지 못한 실수를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라인란트가 프로이센의 독재를 혐오하는 건 맞지만, 독일 국민국가의 형태를 깨서는 안 됩니다. 온전한 독일 국민국가는 프로이센의 지배를 깨트림으로써, 평화로운 유럽 질서와 공존할 수 있습니다. 독일 연방 내의 라인란트 자치, 그리고 루르-라인란트에 토대를 둔 프랑스-독일 대륙연합은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에 맞서 유럽의 번영을 이끌어 낼 것입니다.”
라인란트 정치를 대표하는 쾰른 시장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는, 프랑스의 괴뢰나 다름없는 라인 공화국 기획을 취소하고 독일 연방 내 라인란트 자치를 쟁취하자고 제안했다.
아데나워는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야말로 유럽의 평화를 되찾는 길이라 확신했고, 라인란트는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중재자이자 중심이 될 수 있었다.
대자본가 슈티네스는 아데나워의 계획을 지지하며 로비를 벌였다.
여전히 6,200만 독일 국민 중 3,800만이 프로이센주로 편입되어 불균형 상태였고, 1,500만 인구의 라인란트가 프로이센에서 분리된다면 얼추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라인란트의 반감은 경제적 요인도 컸다.
“베를린 정부가 화폐를 무제한 찍어내서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켜 놓고선, 새 화폐 공급은 왜 라인란트에 하지 않는단 말인가?”
1923년 11월 중순에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최절정에 도달해, 1달러가 무려 4조 2천억 마르크에 교환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독일 정부는 위기 타개를 위하여 새 화폐, ‘렌텐마르크(Rentenmark)’를 도입했다.
금이 아닌 독일 각지의 농장과 공장을 담보로, 금본위가 아닌 ‘토지본위’로 추진된 렌텐마르크는, 1조 마르크를 1 렌텐마르크로 교환했다.
렌텐마르크 발행 이후, 놀랍게도 하늘을 향해 천정부지로 치솟던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화폐가 신용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렌텐마르크의 기적(Wunder der Rentenmark)’이었다.
이로써 경제위기를 탈피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지만, 독일의 정치적 혼돈은 지속되었다.
“라인란트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 지불을 중단한다. 렌텐마르크는 라인란트에 유통할 계획이 없다.”
라인란트 분리주의를 길들일 목적으로, 슈트레제만 내각은 라인란트에 대한 중앙정부의 재정지출과 렌텐마르크 유통을 거부했다.
당연히 라인란트는 반발했고, 프로이센과 라인란트의 갈등은 절정에 도달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매국노’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와 라인란트 정치가들은 프랑스와 접촉을 이어 나갔다.
프랑스로서는 독일의 지도를 재편할 절호의 기회였다.
* * *
“작센에 대한 폭력적 진압은 정부에 대한 독일 노동계급의 신뢰를 잃게 하였다. 이에 사회민주당은 연립정부에서 탈퇴한다.”
국가방위군은 좌익 작센 주정부를 무력으로 타도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 적위대 수백 명이 살해당했다.
폭력적인 진압에 공산당은 길길이 날뛰었고, 노동조합의 격렬한 항의에 직면한 사회민주당도 슈트레제만 내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연립정부에서 탈퇴했다.
내각불신임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슈트레제만은 렌텐마르크 발행을 끝으로 총리에서 사퇴했다.
사민당의 이탈로 중도파-우파 연립정부가 수립되었고, 12월 초 가톨릭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Wilhelm Marx)가 새 총리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신생 독일 공화국은 최대의 위기에 도달했다.
“작센의 노동자들이 짓밟히면서, 독일 노동계급의 분노가 극에 이르렀습니다. 베를린의 부르주아 정권을 타도해야 합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독일 혁명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일도 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동지가 외쳐 왔던 혁명의 순간이 임박했습니다. 주저할 때가 아닙니다. 러시아처럼 노동계급의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독일 공산당 내부에서는 ‘혁명’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독일 공산당 급진파, 러시아에서 온 코민테른 요원들은 봉기를 촉구했다.
“우리도 독일 노동계급의 혁명을 완수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하지만 융커-부르주아-군부의 동맹은 아직 단단합니다. 독일 노동계급과 당의 운명을 걸고, 희박한 가능성에 도박할 수는 없습니다.”
독일 공산당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극우 세력으로부터 수차례 암살 위협을 넘기고,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부정하는 극좌파임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봉기에 나서는 것을 거부했다.
루덴도르프와 독일 극우진영이 정치경제적 위기를 틈타 섣불리 쿠데타를 모의했다가 실패한 것처럼, 섣부른 봉기는 한창 상승일로였던 공산당을 나락으로 빠트릴 가능성이 충분했다.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 노동계급의 조국, 소비에트 연방이 봉기를 지원해 줄 겁니다! 반동적 융커들의 저항은 소비에트가 분쇄할 수 있습니다!”
“국경 너머에 있는 소비에트가 무슨 수로요?”
“붉은 군대 100만 대군이 폴란드 국경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봉기가 일어나면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압박해 길을 열고,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할 겁니다.”
사실인지 허풍인지 떠들어대는 코민테른 대표 라데크의 호언장담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옛 동지에게 실망했다.
로자와 라데크는 모두 폴란드 태생 유대인으로, 첫 정치적 출발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이었다. 이후 로자는 독일로, 라데크는 러시아로 이주하여 각국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했다.
“라데크 동지! 그게 무슨 노동계급의 혁명입니까? 정말로 붉은 군대 100만 명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폴란드 노동계급과 독일 노동계급이 해방군으로 맞이하겠습니까? 침략자로 여기고 저항할 겁니다! 이미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요! 세계 자본주의는 유례없는 위기에 놓여 있으며, 노동계급의 절망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합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헝가리로 확산되었습니다. 소비에트에 맞서 단결했던 제국주의 세력도 분열해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단일대오는 더 이상 없습니다. 국제적으로 지금보다 더 좋은 혁명의 기회가 또 오겠습니까?”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봉기를 독촉하라는 임무를 받은 라데크는 온갖 희망회로를 돌려가며 봉기 성공 가능성을 설파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혁명은 아래로부터 위로 분출해야지, 위에서 기획해서 아래로 전파하는 게 아닙니다.”
“그 무슨 수동적 사고방식입니까? 그럼 누군가 혁명을 떠먹여 주길 기다릴 겁니까?”
“도대체 모스크바의 동지들은, 혁명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혁명은 지도부의 음모적 봉기나, 외국 군대의 도움을 받아서 쟁취할 수 없습니다. 노동계급의 자발적인 폭발로 이뤄져야지, 비자발적인 봉기로는 진정한 혁명을 이룰 수 없어요!”
룩셈부르크는 딱 잘라서 코민테른의 봉기 요구를 거부했다. 애초에 모스크바가 원거리에서 독일 혁명을 지도하려 든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좌익 소아병적인 발상, 극좌 편향이로군요! 울리야노프 동지와 트로츠키 동지는 더 강력한 반혁명 백군과 제국주의 세력을 격파하고 러시아에서 혁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런 소극적 태도를 지녔다면 절대 승리하지 못했을 겁니다!”
“러시아와 독일이 같은 조건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오산이지요. 동지들은 혁명의 수단으로서 국가와 군대를 너무 절대시하고 있어요. 러시아에서 옛 차르 장교들을 끌어들여 내전에서 승리했다지만, 어떻게 극우 민족주의자들까지 끌어들이려고 합니까? 이야말로 우익 편향적 태도죠. 동지가 사회주의자라면 부끄러운 줄 아세요!”
라데크는 루르 점령 이후 서방 연합국에 대한 독일의 민족주의적 반감을 이용하기 위해, 프랑스군의 점령에 저항하다 죽은 극우 준군사단체 지휘관들을 추모하며 반 서방 봉기를 촉구했다.
「독일이 싸우고자 한다면, 노동자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 민중의 대의가 민족의 대의가 된다면, 민족의 대의는 민중의 대의가 될 것이다.
…… 우리는 민족주의 대중의 대다수가 자본가의 편이 아닌 노동자의 편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마땅히 투쟁할 것이며, 이런 대중을 위한 길을 찾을 것이다.
…… 공산당은 독일 대중에게 선언한다. 공산당은 산업 노동자들을 위한 빵부스러기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정당이며, 이는 독일의 고통받는 온 국민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과 같다!」
라데크의 연설은 코민테른이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보내는 동맹 제안이나 다름없었다.
이 무렵 독일 민족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동맹을 추구하는 ‘민족 볼셰비즘(Nationalbolschewismus)’이 등장했다.
독일 우파 주류는 공산당이라면 학을 떼고 이를 갈았지만,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 서방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는 흑적색 동맹’은 민족주의 진영 일부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신조였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민족주의 편향’을 가차 없이 거부하던 코민테른도, 혁명의 수단으로서 독일 민족주의와의 연합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민족주의를 노동계급의 단결을 저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코민테른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한심함을 넘어 경멸감까지 느꼈다.
결국 이는 세계관의 대결이었다. ‘세계혁명’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련 공산당과, 혁명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독일 공산당의 대립이었다.
두 공산당의 논쟁은 결국, 소련 공산당과 독일 공산당의 간극만 확인하고 끝이 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베를린에 일정한 거처를 정하지 않고, 수없이 주소를 옮겼다.
1919년부터 ‘유대 마르크스주의’의 화신으로 찍힌 룩셈부르크를 암살하려는 극우의 시도가 수차례 있었고, 저격을 당해 생사를 오간 끝에 간신히 살아남은 적도 있었다.
번거롭지만 공산당 적위대의 경호를 철저히 받으며, 머무는 장소도 보안을 지켰다. 그녀를 만나려는 사람은 사전에 절차를 거쳐서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혼란스러운 정국에 룩셈부르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인물은, 멀리서 온 뜻밖의 여인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로자 동지. 한 30년 만이군요.”
로자는 간만에 듣는 폴란드어가 반갑기는 했지만,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동지라고 지칭하기에는, 서로 너무나 먼 길을 걷지 않았던가요? 얀코프스카 여사.”
‘옛 동지’의 냉정한 태도에, 마르가리타는 미소로 답했다. 로자도 저 미소는 미워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세월이 지나 있었지만, 여전히 기품 있고 아름다운 용모였다.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내게 당신은 동지란 단어로 기억에 남아 있네요.”
마르가리타의 미소에는 30년 전 흔적이 보였다.
두 사람은 문득 옛 추억에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