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7
– 77화에 계속 –
77화 아메리칸 드림
1883년 여름, 샌프란시스코 최대의 화젯거리는 단연 이선과 조선 사절단이었다.
하지만 기자나 호사가들은 특이한 흥밋거리일지 몰라도, 정치가와 자본가들은 진지했다.
“조선 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이 기회에 조선과 교역의 길을 터야 합니다. 미스터 푸트가 길을 열어주었으니, 재빠르게 선점합시다.”
캘리포니아 주법원 판사를 지낸 바 있는 푸트는 캘리포니아의 상류층과 인맥이 두터웠고, 보빙사가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전보를 보내둔 바였다.
“조선 사절단을 극진히 접대하여, 그들에게 미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몫은 사절단의 보고와 감명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입니다.”
미국의 여러 주 중에서도 태평양에 접하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동아시아와의 무역이 중요했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등장한 것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이들에게 조선은 아직 미지의 나라였고, 조선에 대한 정보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만 들었으므로 제한적이었다.
이선은 샌프란시스코시가 준 5박 6일간 빡빡하게 채워져 있는 일정표를 보면서, 미국인들의 목적을 간파했다.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 자본가들이 모이는 상공회의소와 미국 서부 최대의 산업시설인 유니온 제철소(Union Iron Works)였다.
“전하(Your Highness), 샌프란시스코시와 상공회의소의 임원들은 전하와 조선 사절단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미국과 조선, 양국 간의 우호친선을 기념하고 통상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지길 바랍니다.”
시장의 환영사에 이선도 간단히 답례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바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일입니다.”
‘전하라는 호칭은 영 부담스럽군.’
“감사합니다. 다만 전하라는 호칭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조선의 왕자란 신분이 아니라, 조선국의 특명전권공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이선은 자신의 방문 목적이 국가의 외교임을 상기시켰다.
“알겠습니다, 각하(Your Excellency).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소개하겠습니다.”
시장은 캘리포니아의 인사들을 소개했다. 이선은 이들이 다 누군지 몰랐지만,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아마도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정치가와 자본가들이겠지.’
소개를 마친 시장은, 상공회의소를 둘러보게 한 후 다음 일정을 안내했다.
“다음 일정은 미국과 캘리포니아의 자랑, 유니온 제철소를 시찰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안내해 주십시오.”
1883년, 올해로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지 꼭 100년이 된 미국은 한창 산업이 팽창해 가던 시기였다.
샌프란시스코 근교, 동남쪽 해안에 위치한 유니온 제철소를 방문한 사절단은 철강의 힘을 보았다.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유니온 제철소는 각종 철강 생산뿐만 아니라 대형 조선소도 있어 태평양을 누비는 기선과 군함을 건조했다.
철강은 근대의 상징으로, 바로 이 철강을 통해 근대 문명이 뻗어 나가는 것이었다.
전설적인 사업가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가 상징하듯, 미국의 철강산업은 남북전쟁 이후 확대일로였다.
서부 개척 역사가 길지는 않았으나, 1840년대 이후 캘리포니아의 금광 열풍은 서부 해안 도시들을 급속도로 발전시켜 놓고 있었다.
서양 문명을 경험하고 근대화를 목표로 시찰을 하러 온 조선 사절단에게 ‘컬쳐쇼크’를 안겨줄 목적이라면, 제철소만큼 좋은 장소가 없었다. 서양의 물질적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똑똑히 보여준 것이다.
이선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큰 감흥이 없었지만, 조선 사절단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어마어마하군.”
“서양의 기선이 이렇게 만들어지는군요.”
조선 사절단은 거듭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하에 버금가는 나라가 없다고 하던 중국이 참패할 만도 하군.”
미국인들은 이어 철도 부설 현장을 보여주며, 대륙횡단철도가 얼마나 크게 이바지를 했는지 설파했다.
1869년, 대서양의 동부와 태평양의 서부를 잇는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어 대륙의 대동맥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된 이후 미국의 교통과 무역은 엄청나게 팽창 중이었다.
이미 샌프란시스코에는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 이른바 ‘쿨리’들이 다수 거주하면서 철도 부설과 같은 중노동에 종사 중이었다.
조선 사절단은 거친 대우를 받으며 중노동을 하는 쿨리들의 모습에도 충격을 받았다.
“같은 동양인인데, 우리는 극진한 환대를 받고, 저들은 극심한 천대를 받으니 미국인들의 진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보기에 우리는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서양인, 특히 영국인과 미국인은 상업적 이익을 중시합니다. 조선에 이익이 있다고 판단되면 우리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를 극진히 여길 것이요, 아니라면 헌신짝처럼 내버리겠지요.”
이미 역사의 전개를 알고 있는 이선은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의 환대가 계산된 행동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분명 미국은 다른 유럽 열강들과 달리 동양에 대한 영토적 야욕은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조선책략에서 쓴 것처럼 미국이 정의로운 나라라서가 아닙니다. 이미 미국은 광활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기에, 식민지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후발주자인 미국이 유럽 열강과 동등한 입장에서 동양에 진출하려면, 동양 각국이 유럽 열강에 침탈당하지 않고 영토를 보존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이선은 미국의 의도를 분석해서 설명했다.
“가장 늦게 문호를 개방한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도, 미국 자본이 조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이 조선 시장에 관심이 있다면, 그 자신도 바라던 바였다.
‘근대화를 위해서라도, 세력균형을 위해서라도, 특정 열강과 동맹을 맺지 않고 척도 지지 않은 국가, 미국이 조선에서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19세기만 해도 ‘먼로주의’ 노선을 천명했던 미국은 유럽의 일에 신경 쓰지 않았고, 세계의 패권을 놓고 대립 중인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모두와도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미국 자본을 조선으로 끌어 들어야 한다. 이제 조선을 어떻게 포장해서 알리느냐는, 내게 달린 몫이겠군.’
이선은 조선을 최대한 가치 있게 포장해서 알릴 생각이었다.
“각하께서 미국에 오셨는데, 미국의 첫인상은 어떻습니까?”
시장 이하, 사절단을 영접하는 미국인들은 모두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아주 젊고 활기찬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가오는 20세기는 ‘미국의 세기’가 될 것입니다.”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20세기는 미국과 러시아의 세기가 되리라 예측했다.
“특히 태평양에 면한 미국의 서부가 중요해지고, 미국의 힘이 태평양으로부터 비롯되리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추측입니다만, 바로 캘리포니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그렇게 되었지.’
이선의 말은 역사의 전개를 아는 자의 말이었지만, 미국인들, 특히 캘리포니아 사람들을 크게 만족시키는 말이었다.
아무리 성장 중이라지만, 이때만 해도 미국 서부는 동부에 비하면 변방에 불과했다.
그런데 조선에서 온 왕자가 토크빌의 말까지 인용해가며, 미국과 캘리포니아의 잠재력을 극찬하니 이들 입장에서도 듣기 좋은 말이었다.
“하하, 각하께선 어쩜 이리도 말씀을 잘하십니까? 토크빌의 책까지 알고 있다니, 영어만 유창한 게 아니라 서양 문화 전반에 능통하시군요.”
“과찬이십니다. 그저 배워가는 단계이지요.”
미지의 나라 조선에서 온 왕자라는 신분, 유창한 영어와 서양 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 풍부한 지식, 그러면서도 겸손한 태도에 미국인들은 아주 놀라워했다.
이선에 대한 소문은 더욱 더 널리 퍼져나갔다. 이선에 대한 고평가는, 자연스럽게 조선에 대한 과대평가로 이어졌다. 조선에 대한 정보가 워낙 부족해서, 이선의 말이 곧 진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조선은 이제 막 서양국가와 수교를 맺고,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조선은 더 이상 ‘은둔의 나라’가 아닙니다. 상인이 무역하고 투자하기 좋은 나라로 변모해나갈 것입니다. 조선에는 무수히 많은 지하자원이 있으며, 이는 근대적 기술로 개발을 필요로 합니다.”
“조선에 금은이 많다던데, 정말인가?”
“잘 모르겠지만, 조선 왕자가 그렇다고 하던데.”
“잘만하면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와 같은 기회가 또 주어지는 게 아닌가?”
1840년대의 골드러시는 언제나 서부 사람들에게 꿈같은 일이었다.
“설마. 과장 아닌가?”
“일단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미지의 땅을 개척할 기회가 주어진 게 아닌가.”
보빙 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6일 동안, 무수히 많은 자본가와 상공인들이 이선을 만나길 청원했다.
“각하, 우리 회사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우리 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부디 각하께서 살펴주십시오.”
“캘리포니아의 밀과 각종 산물을 조선에 수출하고 싶습니다.”
“조선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투자할 수 있겠습니까?”
이선은 미국인들의 관심이 반가웠지만, 표정 관리를 했다.
“비록 내가 조선 국왕 폐하의 명을 받은 전권공사이지만, 통상 문제를 총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시급한 임무는 미합중국 정부에 국서를 전달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뜻은 조선으로 돌아가서, 정부의 공식 논의 후에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얼마나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당장이라도 시장 조사를 위해 조선을 방문해보고 싶습니다.”
“하하, 역시 미국인들의 모험심은 대단하군요. 하지만 양국의 통상무역은 조선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라, 미합중국 정부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일단 양국 정부의 공식 논의를 기다려 보시지요.”
아쉬워하는 이들에게 이선은 특혜를 암시했다.
“여러분의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온 곳이 바로 이곳 캘리포니아인 만큼, 정부의 허가가 나오면 가장 먼저 기회를 드리지요.”
사실 이선이 거의 유일한 조선의 전문가이니만큼, 통상에 대한 전권도 있었지만,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이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현시점에서 미국을 움직이는 건 동부 출신의 엘리트들이야. 이들을 만나보기도 전에 먼저 서부에 특혜를 주면 말이 많겠지. 미국과의 관계를 이끌어 내려면 동부의 정치가와 자본가들을 움직여야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선이 서부의 자본가들에게 낚싯밥을 던지는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민주국가이자, 연방 국가이고, 금권주의 국가다.’
민주국가인 미국은 선출직을 뽑기에, 여론을 중시한다. 하지만 선출된 정치가와 자본가들은 대개 유착 관계에 있었고, 자본가들의 여론이 곧 공론이었다.
‘조선 사절단이 왔을 때 시장 선점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서부의 자본가들이 워싱턴에 있는 지역구 의원들에게 연락을 쏟아내겠지. 그럼 자연스럽게 워싱턴에도 소문이 퍼져나가고, 동부의 정치가와 자본가들도 조선에 관심을 두게 될 터.’
결국 이선의 행동은 미국을 움직이는 워싱턴의 엘리트들을 움직이기 위한 밑밥 깔기였다.
사절단은 대륙횡단철도를 이용해 미국 정부가 있는 워싱턴을 향해 출발했다.
8월 8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열차는 4박 5일을 달려 13일 중동부의 시카고에 도착했다.
차창을 통해 시시각각 변해가는 풍경을 보던 이선은 감탄을 거듭했다.
이선은 이미 광활한 나라인 러시아를 경험한 바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바다를 통한 여정이었다. 이렇게 넓은 대륙을 철도를 통해 연결하는 건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선이 그럴진대, 조선 땅에만 살아오던 다른 사절들이 느끼는 바는 이에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지평선 너머 끝이 보이지 않는군.”
“태평양만 넓은 줄 알았는데, 미국 땅도 엄청나게 넓군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면 환재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세상에 정해진 ‘중국’이 없다는 걸.”
개화사상의 비조인 박규수는, 제자들 앞에서 지구본을 돌리며 중국이 결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가르쳤다고 한다.
‘20세기는 정말로 미국의 세기가 되겠지. 끝없이 팽창하는 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무수히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일 수 나라.’
아메리칸 드림. 수많은 이민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성공을 꿈꾸었다. 가난한 스코틀랜드 이민자에서 철강왕으로 거듭난 카네기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처럼 신기루에 불과했다. 아무리 다른 나라에 비해 성공의 기회가 많은 미국이라지만, 소수의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기회만 잡는다면, 끝없이 팽창하는 미국의 힘은 엄청난 부와 성공을 안겨줄 것이다.’
이선은, 그 기회를 잡아볼 생각이었다. 비록 가진 자산은 많지 않았지만, 역사의 전개를 안다는 건 바로 이선만이 갖고 있는 자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