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73
3부 188화 원단(元旦)
광무 28년(1924) 2월 5일, 갑자년 정월 초하루.
한국의 역법이 태양력으로 바뀐 지 어언 30년이었다.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양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삼았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전통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었다.
“역법이 바뀐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케케묵은 음력 타령인가? 작금의 음력이란 청나라 시헌력을 기반으로 만든 중국 역법이다.”
개화파, 특히 외국에서 교육받은 개화파일수록 음력설을 구습의 잔재로 여겨 싫어했다. 개화파가 보기에 아직도 음력설을 고집한다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행태였다.
기실 전통이라는 태음력 시헌력(時憲曆) 자체가 독일 선교사 아담 샬이 명나라 숭정제의 명을 받들어 만들었으니, 서양 천문학 지식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었다.
막상 시헌력 공식반포는 청나라가 북경을 정복한 이후에 이뤄졌기에, 조선에서도 효종 때부터 시헌력을 받아들여 개량해서 사용하기는 했지만, 반청 의식이 강한 이들은 시헌력 사용을 거부하고 굳이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고집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책력은 오직 하늘의 아들인 황제만이 반포할 수 있는 것이었고, 제후국의 군주가 독자적 책력을 만든다면 불경이었다.
예외적으로 세종이 칠정산을 편찬하여 조선의 독자적인 책력을 만들었으니, 이는 실용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드러냄이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조선이 청나라를 격파하고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룩하자 공식적으로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고, 이선이 황제의 위에 올라 태양력을 대한제국의 책력으로 삼았다.
대한제국의 모든 국경일은 태양력을 기준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의 경축일도 음력에서 양력으로 환산되었다.
“대한의 역법은 태양력이다. 양력을 거부하는 자들은 문명개화를 반대하고, 대한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정통성 운운하는 발언은 지나치게 과격한 말이었지만, 서재필과 이승만 같은 기독교인 미국 유학파는 음력에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냈다.
“이중과세를 철저히 금해야 합니다.”
“아, 마땅히 이중으로 세금을 물리는 건 금해야지요.”
“그 의미가 아니라, 1년에 새해는 한 번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옳소! 이번 기회에 구습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광무 21년(1917), 이중과세(二重過歲), 즉 양력과 음력으로 두 번 설을 쇠는 건 금한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다.
기존의 개화당 정부에서는 양력을 사용해도 민간에서 음력설을 쇠는 건 눈감아 줬지만, 서재필 내각에서는 공개적으로 음력설을 금한다는 발표를 했다.
전시 계엄령하에서 낭비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음력설은 사치로 취급받았다. 공무원들은 어떠한 이유로도 휴가 사용을 못 하고 음력설 오전 8시 일괄 출근을 명받았고, 사기업에도 휴일을 못 하도록 했다.
밤에 제사를 못 지내게 하려고 설 전날에는 전기도 끊었고, 떡을 만들기 위해 찾는 방앗간도 강제 휴업령을 내렸다.
“아니, 도대체 왜 나라가 설 쇠는 거까지 간섭이란 말인가?”
“조상님들 모시는 날 아니냐? 조상님들은 음력 설날만을 새해 첫날로 아셨다!”
“여기가 서양이냐, 일본이냐? 수천 년 내려온 전통을 한순간에 저버리란 말이냐?”
“음력이 왜 구습의 상징이냐? 양력만이 문명개화의 상징이라는 건 누가 정했단 말이냐?”
“개화당 놈들, 진짜 별걸 다 간섭하는구나. 머리 깎고 양복 강요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음력까지 금지냐?”
민간에서는 음력설 금지에 반발이 거셌다.
본래 금지하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정부조치를 따라야 할 공무원들부터 오전 출근 이전 새벽에라도 차례를 지내고, 전기를 끊으면 촛불을 켜서라도 했다. 방앗간에서는 몰래 떡을 만들고는 했고, 시장에선 제수용품과 음식을 팔았다.
별 사소한 난관이 있어도 사람들은 음력설을 따랐다.
개화당 정부의 ‘계몽’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력설은 사회에 거의 정착하지 못했다.
황실과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면 국민의 절대다수는 음력설을 고집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성상께옵서 음력설을 금한다는 금령을 반포하시면, 성상을 존숭하는 신민들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옵니다. 책력은 오직 천자의 권위인데, 대한은 지엄한 황명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가 모두 태양력을 사용하는데도 음력을 고집하는 이들은 옛 시대의 구습을 미련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양력과 음력 사용은 단순히 역법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개화와 정통성의 문제로 비화되었다.
급진적 문명개화론자들은 음력을 낙후한 인습에다, 대한제국의 책력을 거부하는 정통성 부정으로 여겼기에 금하고자 했다.
정부는 황제의 권위를 빌려 금령 반포를 건의했으나, 정작 이선의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짐은 공식적으로 양력설을 쇠는 게 옳다는 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 하지만 국민이 저리 음력설을 따르는데 굳이 그걸 금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구태여 짐이 나설 일이 아니다.”
갑신경장 시기에는 문명개화의 시급한 과제가 있어, 조혼이나 가정 내 폭행과 같은 인습을 근절하기 위해 각종 조치를 취해 왔다.
하지만 음력설을 쇤다는 게 나쁜 인습도 아니고, 굳이 황제가 나서 금지할 필요성도 없었다.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어. 양력 쓰면 충량한 신민이고 음력 쓰면 옛 체제 그리워하는 반동이냐? 여전히 음력에 익숙해서 그런 게 아닌가? 오히려 금지하니까 더 음력에 집착하잖아. 단발양복도 문명개화 진행하니까 자연스럽게 정착되는데, 국가 차원에서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있어.’
이선은 대한제국 선포, 아니 갑신경장 이후 일관된 기조가, 불필요한 탄압은 더 큰 반발만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경장 초기에는 물리력을 동반하기는 했지만, 문명개화의 필요성과 우위를 보여 주니 전통 사대부 계급의 반발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만약 탄압으로 일관하였다면, 더 큰 반발과 분열을 불러일으켰을 터였다.
이선은 대한제국 정부와 황실에 공식적으로 양력 1월 1일을 원단으로 기념하도록 했지만, 여전히 음력을 선호하는 태상황과 황후를 비롯한 황실의 어른들도 존중하여 음력설이 되면 문안을 올리고 종친들을 모아 축연을 베풀고는 했다.
서재필 내각의 강경한 이중과세 조치는 민간, 특히 지방에서 상당한 반감을 낳았고, 광무 25년 최초의 보통선거에서 개화당이 단독과반을 상실하는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럼에도 정부의 태양력 강조와 이중과세 금지기조는 새 개화당-신민당 연립정부에서도 계속되었다.
연립정부를 주도하는 인사들 상당수, 특히 양당을 대표하는 외무대신 이승만과 내무대신 안창호가 양력 단독사용의 확고한 지지자이기 때문이었다.
“경장 40년이 되었는데 왜 아직도 구습에 얽매인단 말인가? 일본도 음력을 쓰는 나라였는데 양력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는가.”
“이중과세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개화당-신민당 연립정부는 대한제국 최초의 민주적 정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국민을 계몽’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적 사고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음력설은 여전히 공고했다. 태양력은 일상에 정착하기는 했지만, 음력 설날만큼은 민족명절로 자리 잡아 그 지위가 흔들리지 않았다.
「광무 28년은 벌써 정월도 다 지나가고 2월에 접어들어 벌써 닷새가 되어 가지만, 음력 계해년은 어제로써 마지막 영겁의 저 공간으로 흘러가 버리고 오늘부터 음력 갑자년 초하루를 헤아리게 된다.
이중과세를 말자, 양력설을 지키자 하는 소리가 이미 낡아 빠졌을 만치 되어 버렸다. 근하신년의 연하장도 양력설에 띄웠다마는, 아직도 떡국은 오늘 아침에야 먹고 세배도 오늘 아침에야 허리를 굽힌다.
남대문과 배오개장에 설빔, 반찬거리가 산같이 쌓이고, 종로 큰 거리에 끈목장수의 허리띠, 대님, 당기감이 오색찬란하게 바람에 나부끼며 포목점 진열대에는 주단 능라가 휘황하게 행인의 안목을 유인하고 있다. 모두가 설 기분이다.」
광무 28년 2월 5일 기사에서 드러나듯, 민간의 세시풍속은 압도적으로 음력설에 기울어져 있었다.
새로운 육십갑자의 시작을 앞두고, 지방, 특히 농촌의 여론을 대표하는 진보당의 전봉준이 민의원 회의에서 입을 열었다.
“정부에서 음력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된 이후 문화의 혁명이라는 이유로 여러 구습을 폐기하고 새로운 문화를 이식한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게 율리우스력 폐지와 그레고리력 사용입니다. 소련 정부는 율리우스력을 고집하는 정교회와 각종 민간 관습을 탄압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교회와 백계 러시아인들은 소비에트 정부의 개혁조치에 반감을 느끼고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고집했다. 아무르 정부도 주변국과의 책력 통일을 위해 공식적으로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긴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사용했다.
전봉준은 백계 러시아인으로부터 들은 소련 사정을 전한 후, 정부를 비판했다.
“물론 이러한 조치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큽니다. 우리 정부가 하는 일도 이와 대체 뭐가 다릅니까? 왜 오래된 전통은 다 구습이고 나쁜 겁니까? 국민은 새로운 세상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고, 단지 사소한 영역 몇 가지에서만 옛 전통을 고수할 뿐입니다. 이를 우열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됩니다.”
“이게 무슨 소리요! 대한의 문명개화 조치를 소련의 사회실험과 비교하다니!”
“대한과 소련을 비교하는 건 모욕이오! 당장 발언 취소하시오!”
개화당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진보당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진보당은 차기 총선에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면, 음력설도 공식 공휴일로 지정하는 걸 촉구하는 바입니다!”
“옳소!”
결국 음력설 문제가 정치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진보당은 정부의 음력설 금지 기조를 비판하며 공휴일을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고, 이는 민간에서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설은 역시 음력설이지.”
“그나마 진보당이 있어서 다행이지.”
“하여튼 오만방자한 개화당 놈들. 총선에서 쓴맛 좀 봐야 해.”
진보당은 ‘진보’를 내세웠지만 농민 정당임을 자인하는 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적으로 가장 보수적이었다. 농민계급은 경제적 변화를 열망하면서도, 사회적으로는 가장 보수적이기 때문이었다.
신민당에서도 여론 변화를 감지했다. 특히 개신유림 출신인 총리 박은식은 진작부터 이중과세 금지조치에 비판적이었다.
“오래 내려온 전통을 구습으로 단정하고 금지하려는 건, 서양 물 먹은 엘리트의 지나친 오만이오.”
이중과세 금지의 지지자였던 안창호도 정책 실패를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지기반인 서북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문명개화를 지지했다곤 하지만, 음력설 문제에서는 다른 지역과 일치했다.
진보당과 연대를 이끌어 내려는 안창호는 전봉준에 동조하고 나섰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양력 1월 1일을 원단으로 하되, 민간에서 어떻게 설을 쇠든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신민당도 음력설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섰지만, 개화당은 여전히 이중과세 금지를 고수했다.
“외무대신, 여론을 감안해서 한발 물러서야 하지 않을까요?”
“여론에 휘둘려서 옳은 정책을 뒤엎을 거면 정부 정책이 왜 필요한가? 어림도 없다, 암!”
이승만은 누구보다 강경한 음력 폐지론자였고, 자신이 총리가 되면 더욱 강력하게 이중과세 금지정책을 확대할 생각이었다.
“총선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요?”
“이 문제는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요. 개화당 40년의 업적, 현 정부 4년의 치적을 봐야지, 무슨 음력설 따위 문제를 신경 쓴단 말이오. 하여튼 진보당 이 작자들은 인민주의자 아니랄까 봐 완전히 포퓰리스트야! 얄팍한 인기나 끌려고.”
일본과의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신민당 우파를 개화당에 끌어들이는 정계개편에 거의 성공한 이승만은 자신감이 넘쳤다.
“연립정부는 사소한 일로도 논쟁이 생기고 발목이 잡혀. 강력한 단독정부를 수립해야지.”
여론의 추이를 봐도, 개화당의 1당 등극은 기정사실이었다. 이승만 자신도 황해도 출신이니만큼, 신민당 우파를 끌어들여 개화당이 취약한 서북 지방에서 지지를 확대해 단독과반도 가능하다는 목표를 세웠다.
“근로계급에는, 양력의 정통성이니 음력의 전통이니 따지는 게 무의미합니다. 단 하루라도, 일터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편안하게 쉬면서 화목을 도모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휴식과 재충전의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근로계급 동지들이여, 설에는 편안히 쉬기를 바랍니다. 사회당은 음력설을 공휴일로 도입하는 데 찬성합니다.”
여운형과 사회당은 노동자의 휴식이라는 관점에서 음력설 공휴일을 지지했다.
기실 기독교인이자 사회민주주의자인 여운형은 양반 출신임에도 진작부터 집안에서 제사를 폐지했고, 설날이 되면 과중한 제사음식 압박에 시달리는 부녀자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노동계급 역시 한국인답게 설날과 제사를 중시했기에 대놓고 폐지를 외칠 순 없었다. 문명개화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전통은 살아남았고, 오히려 호황으로 경제적 여유를 확립한 중하층 계급으로 제사 문화가 더욱 확산되는 경향이 있었다.
여운형은 허례가 많은 제사 문화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한제국을 근대적 사회로 바꾸려는 건, 모든 주요정당의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어떤 변화를 추구하느냐의 차이였다.
개화당과 신민당은 철저한 서구화를 통해 서양에 필적하는 ‘문명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에서 일치했다. 진보당은 근대화 속에서 전통의 주체적 변화를 강조했고, 이 점에서는 박용만의 우익 신당도 유사했다.
사회당은 철저한 서구화 그 자체는 동의했지만, 제도와 형식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궁극적 변혁을 추구했다.
‘하,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20세기판 예송논쟁도 아니고 음력설 문제 가지고 세계관 논쟁으로 비화하냐. 그냥 양력설에 쉬고 음력설에도 쉬면 되는 거 아니냐?’
정작 ‘하늘의 질서를 주관하는’ 황제의 지위에 있는 이선은, 왜 이 문제로 정체성 논쟁까지 확산되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21세기의 기억이 있는 이선으로선 실용적 관점으로 책력을 접근하지만, 조선과 한국의 과도기에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한국의 근대화는 이웃나라 일본이나 중국과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유학적 관념이 잔존하면서도 근대적 교육을 받은 세대 간의 세계관 충돌이었다.
‘그래도 뭐, 괜찮겠지. 중국에서는 유학과 근대의 충돌이 훨씬 폭력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신해혁명과 5.4운동 이후에도, 유교적 원칙을 신봉하는 복고운동에 나선 향신계급과 ‘유교와 봉건적 전통을 반대’하는 신문화운동에 나선 청년 지식인층의 상호 적대감은 엄청났다.
중국을 나눠 가진 군벌들은 대개 향신계급의 편을 들어 청년 지식인들을 탄압했다
혁명과 삼민주의를 내세운 국민당조차도 향신들 눈치를 보느라 사회변혁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신문화운동을 외치던 청년 지식인 계층은 국민당에 실망했고, 새로운 사조인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으로 전향하기에 이르렀다.
1923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 정부가 국공합작에 동의함에 따라 중국 남방에서는 사회변혁운동이 확산되었지만, 반대로 북양정부와 군벌들이 통치하는 지역에는 가혹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일부 지역의 군벌은 신문화운동을 이끄는 대학생들을 경계하여, 신문화의 상징인 여성의 단발머리를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정치관 여부와 상관없이 체포하고 수감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그래, 대한에서는 평화롭게 입씨름이나 하는 정도잖아. 이 정도면 흥미진진한 논쟁거리지.’
이선이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정치적 폭력이 난무하는 주변국이나 유럽 일부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논쟁이 말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치적 암살이 빈번한 일본, 만인이 만인에게 투쟁하는 준 무정부 상황인 중국, 이념적 적수를 절멸하려는 내전까지 벌어졌던 러시아, 쿠데타 위협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독일과 비교하면, 대한제국은 무풍지대나 다름없었다.
대한제국의 두 번째 보통선거, 1920년대 중반의 민의를 대표할 제6회 총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