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77
3부 192화 정계개편
광무 28년(1924) 2월 22일.
대한제국 외무부는 외무대신 이승만의 명의로 새로운 성명을 발표했다.
「……외무부는 후속 보고를 통해 현지 상황을 엄중히 살펴본 결과, 궁내부대신 특사 이재각의 발언에 외교적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에 외무부는 기존의 성명을 취소하고, 영국 정부에 정중한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광무 28년 2월 22일, 외무대신 이승만.」
외교적 수사로 빙빙 돌리고는 있어도, 뜻풀이를 하면 다음과 같았다.
특사의 발언이 문제가 있었고, 한국 외무부는 초동 보고에 정확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영국 정부에 책임을 돌리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한 후 최종적으로 사과의 뜻을 표한다.
1차 성명의 ‘유감(express regret)’이 영국 정부에 ‘실망’했다는 의미였다면, 2차 성명의 ‘유감’은 우리의 잘못을 확인했으니 ‘사과’한다는 의미였다.
“한국 정부의 입장을 확인하였으니, 이 발언은 특사 개인의 돌출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 사안에 대해 더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귀국 정부의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영국 정부도 사실상 사과의 의미를 담은 2차 성명을 받아들이고, 외교적 공세를 중단했다.
하루 전만 해도 노동당 정부는 한국 외무부의 비우호적 태도에 후속조치를 고려하고 있었다.
「특사의 발언은 본국 정부와 어떠한 논의도 없었던 돌출행동입니다. 대영제국 정부를 향한 대한제국 정부의 우호는 확실합니다. 본 대신의 지난 기자회견은 오해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으며, 영국 정부에 정중한 사과의 뜻을 전합니다. 양국의 우호가 앞으로도 영원하기를 바라며.」
외무부의 후속 성명 외에도 외무대신이 비공식적으로도 사과의 뜻을 전했기에, 영국 정부도 더는 몰아칠 필요가 없었다.
지난 정부 시절에 있었던 ‘오리엔탈 스캔들’로 한국이 영국에 불쾌할 만한 여지는 충분히 있었고, 노동당 정부도 영소 해빙무드에 찬물을 끼얹는 보수당의 비난에 경고를 하려는 국내정치적 목적도 있었으므로 이쯤에서 사안을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외무부가 막 나가다가 결국 이렇게 됐군.”
“황제 폐하께서 외무부에 친림하시어 외무대신을 크게 질책했다던데.”
“성상께서 특정 부처를 찾아가 크게 질책한 적이 있었나? 내가 아는 한 근래에는 없었네.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다는 의미지.”
“그러니 적당히 나댔어야지. 성상께서 오죽하시면…….”
“외교의 귀재라고 불렸던 우남이라지만, 이번 사건으로 단단히 신뢰를 잃은 게 분명하네.”
“승승장구하던 개화당의 악재로군.”
황제가 진노하여 외무부를 찾아 이승만을 질책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실상 공개적으로 움직였으니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황제의 진노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정관계(政官界)에서는 의미를 생각했다.
워싱턴 조약 체결, 관동 대학살 문제를 해결하여 외교적 주가가 치솟았던 이승만의 위신이 추락했다.
이를 토대로 개화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자신이 주도하는 정계개편까지 추진하여 차기 대권에 가장 유력하게 다가갔던 이승만이었다.
권좌의 야망에 명백히 암초를 맞은 격이었다.
* * *
제6회 총선거, 두 번째 보통선거를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정당 간의 합종연횡이 뚜렷했다.
광무 28년 초, 개화당이 오랫동안 공들였던 신민당의 분열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개화당의 세대교체와 신민당의 연립정부 참여로 인해, 과거에는 날 선 각을 섰던 두 정당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졌다.
보수적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개화당과 진보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신민당 사이에는 이념적 차이도 크지 않았고, 실질적인 차이는 오히려 지역 문제였다.
즉, 기호(畿湖)와 서북의 갈등이라는 오랜 지역적 구도 때문이었다.
개화당의 뿌리는 개화파, 신분적으로 보면 노론 명문가 벌열(閥閱)이자 기호 출신이 주류였다.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급진개혁에 나섰지만, 근본은 조선 사회의 기득권과 관계가 깊었다.
이에 비하면 신민당은 오랫동안 차별받던 서북 출신 신흥 엘리트들이 이끌면서, 실권(失權)했던 삼남 출신 개신유림도 참여한 형태였다.
그런데 뿌리 깊었던 지역 문제가 해소되고, 신민당도 연립정부에 참여하게 되면서, 양당의 경계는 점점 불분명해졌다.
개화당과 신민당은 한자리에 어울렸고, 신민당은 연립여당으로서 ‘개화당 2중대’로 여겨졌다.
신민당 지도자 안창호는 이러다 신민당이 개화당에 종속되는 상황을 우려해 야당과의 연합을 추구했으나, 우익 계파에서는 개화당과의 연합이 계속되길 원했다.
특히 황해도 출신 신흥 엘리트인 이승만이 개화당의 당권을 장악하면서, 신민당 지도부와의 거리는 더욱 줄어들었다.
“따지고 보면 해서(海西, 황해도)는 기호와 서북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언제까지 기호, 서북 따질 겁니까? 이제 우리도 유럽과 미국처럼 이념정당으로 가야 합니다.”
“우남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승만은 2살 때 한양으로 이주해서 성장하였기에 황해도가 고향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지만, 황해도 출신이라는 걸 내세워 해주가 고향인 김구와 부쩍 가까워졌다.
“치안국을 이끌었던 백범이라면, 사상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확고한 반공 대열에 서야 합니다. 친소 좌익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작금 한국 정치에 친소 좌익이라 할 만한 이들이 있겠습니까?”
“허허,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사회당의 여운형이 대표적인 친소 좌익이지요. 도산이나 신민당 일각에서는 이상하게 몽양을 좋게 보던데, 모스크바까지 가서 코민테른과 작당한 자가 친소 좌익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김구는 내무협판 겸 치안국장을 맡아 경찰개혁에 나서면서, 부쩍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가 경계하는 건 소련을 맹종하는 공산주의자이지, 여운형과 사회당처럼 제도권 내에서 합법적으로 움직이는 정파는 아니었다.
“소생은 몽양의 사상이나 행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신민당이 사회당과 손을 잡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현재로선 대한의 정치를 이끌어 갈 당은 딱 둘, 개화당과 신민당뿐입니다. 그런데 도산은 자신이 총리가 될 목적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당을 이끌어 가고 있으니…….”
이승만은 여운형보다는, 오히려 안창호가 진보당-사회당과 연대하려는 걸 겨냥해서 비난했다.
“소생이 도산과 담판을 지어 보겠습니다.”
“잘 말씀해 보십시오. 나는 차기 정부에서 신민당과 연정을 이어 나갈 생각이 있습니다. 만약에 도산이 응하지 않는다면, 백범과 손을 잡고 싶군요. 차기 내무대신은 백범의 몫입니다.”
“소생은 본래 직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할 일을 할 뿐이지요.”
“하하, 역시 백범다운 말씀이시오. 명심하지요.”
자신이 1인자가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이승만과 달리, 김구는 직책에 크게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구는 포괄 우파 정당 건설을 목표로 손을 잡았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당권 경쟁에서는 패배했지만 2인자 자리를 유지하게 된 이시영도 신민당 인사들을 설득했다.
“이대로 가면 신민당의 독자성은 사라지고, 개화당에 종속될 뿐입니다! 우리는 차기 정부에서 더 이상 개화당과의 연립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진보당과 손을 잡고 연합정치를 이룩해야 합니다.”
“진보당은 이미 사회당과 소위 노농연대에 나섰습니다! 완전히 왼쪽으로 기울어졌단 말입니다!”
“개화당이라는 검증된 연합대상을 놔두고, 왜 진보당과 손을 잡는 모험을 택해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도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 신민당은 연립정부 참여 이래 개화당의 2중대란 소리를 듣고 있는 형편입니다. 신민당이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이룩하려면, 우리는 국민을 대표하여 수권(受權)을 지향하는 독자정당으로서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진보당과의 연대는 반대요!”
신민당의 분열은 현실이 되었다.
총리 박은식과 이상재를 비롯한 원로는 당의 상징인 안창호를 지지했지만, 우익블록은 반발했다.
농림대신 이동녕, 법무대신 홍진, 내무협판 김구 등이 이끄는 우익블록은 진보당과의 연합에 반대해 끝내 신민당을 탈당, 개화당과 손을 잡는 길을 택했다.
“입헌개화당은 우국의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과의 연합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이승만과 개화당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신민당 우파가 이탈하여 개화당에 합류한 이상, 개화당에서 갈라서 나간 박용만의 신당보다 더 정치적 파급은 크리라는 계산이 섰다.
특히 황해도에서 강력한 지역기반을 갖고 있는 김구가 합류했고, 소선거구제 특성상 신민당의 표를 가져와 충분히 단독 과반도 가능하리라는 계산도 가능했다.
여기까지는, 이승만의 뜻대로 되는 것처럼 보였다.
황제의 진노라는 암초를 만나기 전까지는.
“성상께서 저리 질책하시다니, 이번 건은 우남이 크게 잘못했소.”
“영국에서 벌어진 일에 정보가 제한적이었던 우남 입장에선 그렇게 말할 수도…….”
“중요한 건 성상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거고, 국익을 침해할 수 있는 일이었소!”
“국제정치보다는 국내용, 총선용으로 쓰려고 했던 것이었겠지요. 우남에게 실망이 큽니다.”
“차기 총리는 우남이 유력하겠지만, 우리는 여당 내의 야당이 되어, 우남의 권력을 견제해야 합니다.”
개화당에 새로 합류한 이동녕과 김구 등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들 모두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였고, 이승만의 독단적 행위로 영국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는 사실에 혀를 찼다.
하지만 이미 합당은 성사됐고, 정치적으로 한배를 탄 처지였다. 개화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노력하되, 여당 내 야당으로서 견제할 각오를 했다.
“이승만이 친영파라는 비난을 벗어나려고 얄팍한 정치적 노림수로 영국을 도발한 결과,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성상께서 진노하시어 질책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불필요한 갈등이 계속되었을 겁니다!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대한의 국익은 당당하게 추구하되, 불필요한 갈등은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선의 진노를 누구보다 잘 이용하고 있는 건, 황제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를 자처하는 박용만이었다.
개화당에서 탈당한 박용만은 개화당 우익 블록과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신당을 창당했다.
당명은 신대한당(新大韓黨)이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외교적 실수가 아닙니다. 왜 이승만이 권좌에 앉으면 안 되는지 명백히 보여 줬다고 생각합니다!”
신민당을 탈당하고 신대한당에 합류한 신채호도 이승만 비난 대열에 목소리를 높였다.
민족주의자이지만, 이념적으로 우익보다는 좌익에 더 가까운 신채호의 합류는 신대한당이 예전의 제국당처럼 팽창을 정당화하는 극우 민족주의 정당이 되지 않도록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민족의 대단결’과 제국주의를 추구하되, 경제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이런 면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거부한 ‘제3의 위치’, 유럽의 파시즘 운동이나, 일본의 기타 잇키가 제창하는 ‘순정사회주의’ 혹은 ‘사회제국주의’와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대발해국’, ‘오족협화’ 등 다민족 제국을 지향하는 박용만-신채호의 구상은 배타적인 파시즘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유적 대한의, 자유적 대한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대한을 건설하기 위하여, 특권계급 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당대를 풍미하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아, 정치·경제·사회·문화에서 구조선을 모두 파괴하고 신대한을 건설하자는 신채호의 논설은 급진 좌익 뺨칠 정도로 과격했다.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하여, 변혁을 원하지만 소련과 공산주의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급진적 민족주의 청년층에게서 열광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영미가 주도하는 질서를 받아들이며 보수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개화당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정당이었다.
“진보당은 차기 총선에서 사회당과의 노농연합을 실시합니다.”
“반대! 한울님을 섬기는 우리가 서양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무신론자들과 손을 잡을 수는 없소!”
“우리는 천도교도만의 당이 아닙니다! 인구의 절대다수인 농민과 노동자의 대의를 추구하는 당입니다!”
진보당을 이끄는 전봉준은, 당내 우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회당과의 ‘노농(勞農)연합’을 구축했다.
천도교 우파 성향의 당원들은 반발했지만, 교령인 손병희가 나서 전봉준을 지지하자 입을 다물었다.
천도교 교령 손병희의 위상은 천도교도에게 여전히 절대적이라, 신민당처럼 당내 분열로 이어지지 않았다. 일부가 무소속으로 이탈할 뿐이었다.
“사회당은 차기 총선에서 진보당과의 노농연합을 실시합니다.”
“진보당은 소(小)부르주아 계급인 자영농을 대표하며, 특히 미신이나 다름없는 천도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다수인 당입니다!”
“동지들, 이념적 순수성만 신봉하다 영원히 소수정당으로 남을 겁니까? 우리가 의회제도라는 입헌적 틀 안에서 투쟁하기로 결의한 이상, 비(非)사회주의 진보적 정당과의 연합은 필수입니다! 노동당의 성공사례를 보십시오. 그들 또한 자유당과의 연합을 통해 성장했고, 마침내 수권했습니다. 우리는 영국 노동당의 사례를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독자노선을 주장하는 당내 좌파의 반발을 잠재우고, 진보당과의 연대를 확정했다.
“대한의 농민을 대표하는 진보당과, 도시 노동자를 대표하는 사회당이, 인민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함께 손을 잡았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의 연합, 노농연합 만세!”
진보당과 사회당 모두 합당까지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선거연합을 공식화하는 걸로 통합을 이룩했다.
진보당과 사회당은 후보 단일화를 이룩해, 단일후보로 총선에 나서기로 했다.
“우남이 총리가 돼서는 안 됩니다. 개화당에 맞서서 우리가 연합해야 합니다.”
“성상께서도 우남이 총리가 되면 안 된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내셨다고 봅니다.”
외교 문제로 당혹스러워하는 개화당과는 반대로, 신민당과 진보당은 연대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안창호는 독자정당으로 수권에 나서기 위해, 전봉준은 만년 야당을 벗어나 집권당이 되기 위해 손을 잡았다.
특히 올해 나이 일흔에 접어든 전봉준으로서는, 아무리 여전히 정정하다고 하여도, 이번이 마지막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신민당과 진보당이 차기 정부에서 연립정부를 수립하길 제안합니다.”
“우리는 이미 사회당과 노농연합을 구성했습니다. 노농연합에 신민당도 합류하길 바랍니다.”
“노농연합에 반감을 느끼는 우파가 탈당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껄끄러워하는 당원들이 적잖습니다. 공식적인 선거연합 대신, 신민당과 노농연합이 각자 독자 출마를 하되, 연합해서 개화당에 맞설 수 있는 지역구에선 단일후보를 개별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총선 후에 연립정부 구성에 나서도록 하지요.”
신민당이 노농연합과 공식적인 선거연합을 구성할 경우, 탈당하지 않은 당내 우파의 반발을 우려해 총선 후 연립정부 구성을 함께하자는 제안이었다.
“좋습니다. 우리 세 당이 합쳐서 과반을 넘기도록 해야겠군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우리는 연합관계를 구축했지만, 개화당은 신당과 단일화를 이룩하지 못할 테니.”
“개화당 40년 장기집권을 무너트릴 절호의 기회입니다. 동지들, 우리 함께 나아갑시다!”
전봉준, 안창호, 여운형 3인은 손을 맞잡았다.
여러 이념과 정파를 포괄하는 연합정치가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광무 28년, 한국 헌정사상 최대의 정계개편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