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79
3부 194화 제6회 민의원 총선거
“신민-진보-사회 3당의 추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걱정 마시오. 개화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더 많으니. 우린 40년 수권정당이오. 충분히 과반으로 승리할 수 있소.”
개화당에 반대하는 3당 연대가 맹렬히 추격을 했지만, 40년 여당이 쌓아온 힘은 여전히 승리를 자신했다.
“개화당을 제치고 3당 떨거지들이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어림도 없다, 암!”
4년 전. 5회 총선거에서도 개화당은 105석, 개화당계 무소속까지 합치면 단독 과반에 근접했다. 개화당 정부에 의한 원산 학살과 이에 맞선 민중의 9월 의거라는, 개화당 입장에서 악재가 가득했던 선거임에도 그랬다.
그만큼 개화당의 집권당 프리미엄은 강했다. 특별한 변수가 없었더라면 개화당은 무난히 제1당을 차지하고, 이승만의 호언장담대로 단독 과반까지 노려 볼 수 있었다.
“대한국민 동지 여러분! 우리 신대한당이야말로 진정 황제 폐하의 당이며, 국가와 민족의 당입니다. 개화당에서 요직에 오른 이 박용만이 솔직히 밝힙니다. 개화당은 특권계급의 정당으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그들은 국민정당을 자처하지만, 오직 정치가-관료-재벌-지주의 이익만을 대변합니다. 우리야말로 진정 개화당 40년 기득권의 틀을 깨트리고자 나온 당입니다! 진정한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나온 당입니다!”
이승만과 개화당 지도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은,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생각했던 신대한당이 현실에서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대한, 신대한에는! 양반과 상민, 개화와 수구, 부자와 빈자, 기호와 서북, 남자와 여자, 도시와 농촌의 적대감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 된 한민족, 오직 민족 동지만이 있을 뿐입니다!”
신채호의 연설은 신대한당이 단순한 우익 정당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신채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급진 좌익에 더 가까웠고, 일대변혁을 주창하는 건 사회당을 능가할 정도였다.
“2년 후면 발해 멸망 꼭 1천 주년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1천 년 만에 만주와 연해주로 나아가, 대발해의 영광을 되찾는 순간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신대한은 대고구려, 대발해를 계승하여 동아 제(諸)민족을 이끄는 동양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구조선의 연장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황제 폐하 만세! 신대한 만세!”
변혁과 팽창을 외치면서도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를 자처하는 신대한당은 개화당을 지지하는 우익의 표심을 갉아먹었다.
특히 변혁을 원하지만, 공산주의나 사회민주주의보다 민족주의와 팽창주의를 원하는 청년층에게서 열광적인 지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이는 개화당의 40년 집권을 무너트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광무 28년(1924) 3월 15일.
제6회 민의원 총선거, 두 번째 보통선거의 날이 밝았다.
꽃샘추위가 있는 계절임에도, 쌀쌀한 새벽부터 일찌감치 나와 투표소로 향하는 행렬로 분주했다.
“자네 누구 찍을 건가?”
“선거의 원칙도 모르나? 비밀이네.”
“이야, 줄 보게나. 꼭두새벽부터 나와서 선거하겠다는 사람들이 이리 많나.”
“대단한 열성들이로군.”
선거 열기는 지난 총선보다 더 화끈했다. 첫 번째 보통선거는 처음 투표권을 가진 이들이 상당수라 부적응과 혼란이 있었지만, 국민이 차츰 선거에 익숙해지면서 선거문화가 자연적으로 정착되어갔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는 역대 가장 이념색이 뚜렷한 다섯 정당이 경쟁했고, 각 정당의 목표와 합종연횡이 분명하게 드러났기에 관심도 높아졌다.
“그래도 아직은 개화당이지. 다른 당이 집권하기엔 한참은 일러.”
“개화당이 40년이나 했으면 충분해. 이제 정치에도 신선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이 나라가 이렇게 성장한 건 개화당 덕인데, 배은망덕하기는!”
“뭐, 배은망덕? 말하는 거 보소. 개화당한테 고무신이라도 받아먹었냐?”
“그럼 너는 야당한테 뭐 막걸리라도 얻어 마셨냐?”
아직 후진적 정치문화가 남아 있어서, 선거운동원이 잔치를 열어 술을 대접한다든지, 고무신을 돌린다든지 하는 매표(買票) 행위도 있었지만, 정당 차원의 부정선거라기보다는 후보 개인의 일탈에 가까운 행위였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대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선거는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진행되어 개표까지 이루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개표를 담당하는 이들은 주로 공무원과 학교 교사들로, 정당 참관인들이 배석한 가운데 차분히 개표가 이뤄졌다.
선거 이튿날, 3월 16일.
헌정사상 최초로, 신문 호외 외에도 라디오로 선거 결과가 발표되었다.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이 라디오 앞에 모여들어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누가 이길까?”
“개화당이겠지. 과반이 되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제6회 민의원 총선거 결과를 발표합니다.”
“쉿, 조용!”
일순간 전국에 정적이 흘렀다.
「민의원 의석 250석 중 입헌개화당 104석, 진보당 54석, 신민당 51석, 신대한당 17석, 사회당 15석, 무소속 9석.」
선거 결과를 발표하자, 각 정당의 당사에서는 희비가 엇갈렸다.
“단독과반을 목표로 했는데, 오히려 지난 선거보다 의석수가 줄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신당이 이렇게까지 선전할 줄 누가 알았나?”
“박용만, 신채호 이놈들!”
개화당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지난 선거에 비하면 의석수가 겨우 1석 줄어든 데 불과했지만, 차이는 분명했다.
지난 선거는 개화당계 무소속까지 합치면 단독 과반에 근접했지만, 이번에는 신민당 우파를 영입하며 단독 과반을 노렸던 목표에 비하면 한참 미달한 결과였다.
신민당 우파와의 합당을 통해 얻어온 의석보다 신대한당이 가져간 의석이 더 많은 게 치명적이었다.
특히 ‘개화당은 기호파’라는 뿌리가 무색하게도, 수도 황성에서 잃은 의석이 많았다.
“허, 이거 외통수구만. 황제 폐하의 승인을 받아 소수정부를 구성하는 길밖에 없겠어.”
제1당은 유지했다지만, 문제는 4당 모두 개화당과 연정에 응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었다.
개화당과 연정이 없다고 선언한 3당은 물론이고, 이승만과 철저한 정적이 되어 버린 박용만과 신채호가 연정에 응할 가능성도 적었다.
“동지들, 진보당이 최초로 제2당이 됐소!”
“사회당과의 노농연합을 합치면 70석에 달하니, 분명한 약진이오!”
“이제 국민정당으로 가는 발돋움이 된 겁니다.”
진보당은 의석수를 불과 4석 늘리는 데 그쳤지만, 노농연합과 반(反)개화당연대가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건 분명해졌다.
개화당의 절반에 미치는 의석이지만, 최초로 제2당이 되었다는 점도 고무적인 결과였다.
진보당은 지역기반인 삼남 농촌과 북방 신영토를 벗어나, 후보단일화를 통해 최초로 황성에서도 당선자를 냈다.
농민과 천도교도 중심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국민정당으로 나아가는 증표였다.
“당이 분열되었음에도 50석을 넘겼다면 충분히 선방한 거요.”
“무엇보다 개화당의 단독 과반은 저지했으니.”
“서울에서 의석수를 늘렸다는 게 바람직합니다.”
8석을 잃고 제3당으로 추락한 신민당은 그래도 결과에 만족했다. 우익블록의 탈당 여파가 황해도에서는 영향을 미쳤지만,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여전히 굳건히 신민당에게 지지를 보냈다.
최대 지지기반인 평양을 넘어 황성에서도 적잖은 당선자를 냈다는 게 고무적이었다. 개화당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는 자유주의 성향의 도시 지식인과 사무직들이 신민당에 표를 던져 준 덕이었다.
대한제국의 정치가 인물기반, 지역기반에서 계급기반, 이념기반으로 옮겨 간다는 표식이었다.
“지난 선거에 비하면 의석수가 5할이나 증가했습니다. 실로 고무적인 결과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동지들!”
“독일 사회민주당은 첫 원내 진출부터 집권까지 40년이 걸렸으며, 영국 노동당도 24년이 걸렸습니다. 노동계급의 집권을 이룰 그날까지 단결합시다!”
사회당의 의석수는 5석 증가했으나, 기존에 10석이었으니 50%가 늘어난 셈이었다.
개화당과 우익 언론의 반공·반소 프로파간다가 사회당에 집중되면서, 사회당의 ‘급진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인해 기대한 만큼의 약진은 아니었다.
그래도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노동계층의 표심이 사회당으로 향한다는 건 분명해졌다. 공업노동자의 상당수는 사회당에 지지를 보냈다.
산업화의 여파로 공업 노동자의 수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노농연합이 통합으로 이어지고, 노동자와 농민의 표심이 확고히 단결될 수 있다면, 다가올 미래는 밝았다.
“창당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의 첫 선거에서 이만하면 대약진이라고 할 수 있소!”
“신대한 건설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우리의 대업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첫 선거에서 17석을 확보해 원내 4당이 된 신대한당도 만족했다. 박영효 계파와 제국당의 몰락 이후 갈피를 잃었던 민족주의 우익의 표심이 개화당 못지않게 신대한당으로 갔다는 증거였다.
선명성과 급진성을 내세운 탓에 개화당과 주류의 공격을 받았지만, 청년층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는 점도 고무적이었다.
20대 청년층은 기존 정당인 개화당·신민당·진보당보다는, 변혁을 내세운 사회당이나 신대한당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사회당과 신대한당 모두 현재는 20석 이하의 군소정당이지만,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한 선거였다.
* * *
“절묘하군. 범여권 121석, 범야권 120석이라.”
선거 결과를 보고 받은 이선은 절묘한 결과에 흥미로움을 느꼈다.
개화당과 개화당에서 갈라져 나온 신대한당의 의석수를 합치면 121석, 개화당 반대를 천명한 신민-진보-사회당의 의석수를 합치면 120석이었다.
여기에 무소속이 9석. 본래 소속과 성향을 분석하면 개화당계가 4인, 진보당계와 신민당계가 각 2인, 신대한당계가 1인이었다.
물론 무소속이 원 정당으로 복귀하리라는 보장은 없었으므로, 절묘하게 그 누구도 과반을 얻지 못한 헝의회(Hung Parliament)가 형성되었다.
이제 남은 건 정치협상의 영역이었다.
3월 17일. 이선은 5대 정당 대표를 경운궁으로 불러들였다.
“민의가 분명히 밝혀졌으니, 짐은 민의에 따라 총리를 임명할 것이오.”
아무도 과반을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건 헌법상 총리 임명권자인 황제였다.
어찌 됐건 제1당을 확보한 이승만은, 개화당이 황제의 추인을 받아 소수정부(Minority Government)를 구성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선은 분명한 조건을 내걸었다.
“짐은 소수정부가 들어서기보다, 다수를 대표하는 정부를 원하오. 반드시 과반을 넘겨야 하는 건 아니지만, 과반 126석에 최대 근접한 결과를 내는 정당연합에 총리를 임명하겠소. 그래야 정부 법안에 의회가 번번이 표결에서 갈등을 겪는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겠소? 짐의 뜻은 그러하니, 제공(諸公)은 빠른 시일 내로 다수의 민의를 대표할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하길 바라오.”
황제의 말에 희비가 분명히 엇갈렸다.
소수정부는 없으며, 정당 간의 협상과 연합을 통해 최대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라.
비록 1당은 아니지만, 이미 3당 연대를 확보한 신민-진보-사회당에 유리한 방식이었다.
민의에 충실한 정당중심 내각제 선출 방식이라, 이승만은 뭐라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황제가 어떻게든 내 집권을 막으려고 하는구나. 내가 도대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영국과의 갈등 건으로? 아냐, 꼭 그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전 총리 중에 문제없었던 인물이 몇이나 되나? 5년 전에 박영효 일파를 숙청해 개화당의 단독집권을 끝장냈듯, 개화당 집권을 끝내려는 목적이다. 황제는 결코 2인자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거야.’
권력욕에 충실한 이승만은, 이선이 자신을 권좌에 앉히지 않으려는 이유로 황제의 권력욕을 생각했다.
이승만은 황제가 박영효 일파를 숙청한 이유가 2인자를 두지 않으려는 독점욕의 토사구팽이라 생각했고, 이번에는 그 차례가 자신과 개화당 전체에게 왔다고 생각했다.
정작 이선이 경계하는 건 이승만의 권력욕과 편협한 독선적 태도였지만, 이승만은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흥, 황제 마음대로 총리를 결정하면 그게 무슨 입헌군주제냐? 황제가 어쨌든 나는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제1당의 총재다. 내가 민의를 대표해 총리가 되는 게 당연하지. 어떻게든 야당 떨거지 놈들 어르고 달래서 과반을 만들어야겠다.’
이승만은 결코 권좌를 눈앞에 두고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1당이라는 건 분명하잖나? 어떻게든 각 정당과 협상을 해서 과반을 확보해야 하오. 내가 먼저 도산과 우성을 만나 볼 터이니, 의원 동지 여러분도 각자 야당 의원들을 만나 설득해 보시오.”
“예, 총재!”
이승만은 가장 먼저 안창호와 접촉했다.
개화당 입장에서는 이미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신민당과 손을 잡는 게 가장 무난했고, 두 당을 합치면 155석에 달했으니 과반을 훌쩍 넘기는 수치였다.
“도산, 개화당과 신민당은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해 4년을 이끌어오지 않았나. 얼마나 국가를 잘 이끌었는가? 수권할 수 있는 당은 우리 둘밖에 없어. 진보당과 사회당은 붉은 이념에 물든 자들이고, 신당은 무책임하고 치기 어린 자들이야. 이성과 중심을 잡고 대한을 이끌 수 있는 건 오직 개화당과 신민당뿐일세.”
“우리 당의 분열을 조장한 건 우남 형님 아닙니까? 단독 과반을 목적으로 신민당을 흔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손을 잡자고요? 우리가 받아들이리라 생각했습니까?”
안창호가 차가운 표정으로 거절 의사를 밝히자, 이승만이 매달렸다.
“원하는 각료 자리 절반을 내주겠네. 함께 정부를 구성하세나.”
“이미 늦었습니다. 신민당은 개화당과 손을 잡지 않고, 노농연합과 연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래도 설득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자, 이승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개화당은 민의의 다수가 선출한 제1당이야! 3당은 합쳐도 과반에 도달하지 않는데, 대체 어쩌자는 건가?”
“그래도 개화당 단독보단 의석수도, 대표하는 민의도 훨씬 많습니다. 이제 협상에 달렸지요.”
“이건 3당 야합이야! 이따위 야합에 정권을 내줄 수는 없네!”
“야합이라니, 황제 폐하의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다수의 민의를 대표할 수 있는 정부를 원하신다고. 먼저 다수를 확보하는 당이 정권을 맡게 되는 겁니다. 그럼 노력해 보시지요.”
안창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승만은 이를 뿌득 갈며 박용만을 찾았다.
“우성, 우리는 한배를 탔던 동지가 아닌가. 개화당과 다시 손을 잡고, 우리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세.”
“우남 형님, 여전하시군요. 1인자가 못 되면 참을 수 없는 그 버릇. 이제는 현실을 인정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박용만의 빈정거림에 이승만은 화가 났지만, 꾹 참고 웃는 낯을 이어 나갔다.
“소수 야당 생활 힘들 터인데, 외무와 탁지 제외하고 신대한당이 원하는 각료 3자리를 보장해주겠네. 104석 대 17석인데, 이 정도면 굉장히 좋은 조건 아닌가?”
17석 소수 야당에게 매력적인 제안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흐음, 하루만 생각해 볼 시간을 주시지요. 당원들과 논의해 봐야 하니.”
“그래, 잘 생각해 보게.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지.”
이승만은 박용만의 설득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개화당-신대한당 연립정부, 제10대 총리 이승만 내각의 출범이 눈앞에 있다고 확신했다.
“우성 동지. 동지가 개화당을 박차고 떠나고, 내가 신민당을 나온 건, 대고구려와 대발해를 계승하는 새로운 대한을 건설하겠다는 각오로 만주의 광야에 나선 겁니다. 개화당, 특히 이승만의 개가 되는 조건으로 정부에 들어간다면, 나는 동지가 이상을 배신했다고 간주하고 신대한당을 떠날 겁니다.”
신채호의 강력한 경고에 박용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대한당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는 신채호가 나간 채로 입각한다면, 도로 개화당이 되는 꼴이었다.
‘성상께서도 이승만 총리는 원치 않으시는 게 분명해. 이대로 집권에 실패하면 개화당은 흔들리겠지. 여기서는 한발 물러나고 때를 기다리는 게 낫다.’
정치적 계산을 마친 박용만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단재 동지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는 신대한을 건설하기 위해 엄혹한 광야로 나왔지요. 우리의 이상을 실천하는 그날까지, 개화당과 손잡고 권력을 탐하는 길은 없을 겁니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동지!”
신민당과 신대한당이 잇달아 연정을 거부하면서, 개화당이 과반을 이룩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40년 개화당 집권의 종식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