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8
– 78화에 계속 –
78화 국서 봉정식
보빙 사절단은 경유지인 시카고를 떠나 8월 16일 오전, 목적지인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조선을 떠난 지 어느새 달포, 태평양과 미 대륙을 횡단한 장기간의 일정 끝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미합중국의 수도, 워싱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국무부 차관보 데이비스(John Davis)와 해군부에서 파견된 두 명의 해군 장교가 영접을 나와 의전을 담당했다.
이들은 시어도어 메이슨 중위(Theodore B. Mason)와 조지 클래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 소위였다. 특히 포크 소위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직후 조선을 방문하여 부산과 원산항에 왔던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미국인 포크라고 합니다.”
어설픈 발음과 억양이었지만, 미국인의 조선어 구사에 사절단은 모두 반가워했다.
“오, 귀관은 조선어를 할 줄 아십니까?”
“아주 조금 합니다.”
1877년 임관 이후 아시아 함대에서 복무한 포크는 언어적 감각이 뛰어났는지, 현지에서 일본어와 중국어를 습득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매우 드문 인재라, 귀국 후에도 해군부에서 아시아 담당 자료조사를 맡았다.
보빙사의 방미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정부는 통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포크에게 조선어 습득을 명했다. 미국에 조선 사람이라곤 전혀 없고, 제대로 된 조선어 교재도 없는 상황에서도,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포크는 최선을 다해 조선어를 익혔다.
“이로써 조선어를 할 줄 아는 미국인이 두 배로 늘어났군요. 로웰 씨와 포크 소위. 하하하.”
“앞으로 조선어 열심히 공부하고 싶습니다.”
동양 언어에 유창하고, 조선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포크의 태도는 사절단에게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26세로 나이도 젊고 개방적인 성격이라, 동년배인 사절단들과 급속히 친밀해졌다.
“국서 전달은 언제 하면 되겠습니까?”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대통령께서는 지금 워싱턴에 안 계십니다.”
이선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래 계속 미국 신문을 읽었으므로, 대통령의 부재를 알고 있었다.
1883년, 아서는 엽관(躐官)제로 이뤄지는 미국 공무원 선발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정치적 명운을 걸고 있었다. 여름 휴가를 미국 서부의 옐로스톤 공원에서 보내며 정국을 구상한 아서는, 서부에서 동부를 향해 순회하며 개혁안을 알렸다.
보빙사가 미대륙을 동쪽으로 횡단하는 동안, 아서도 동부에 도착하여 뉴욕에 이르렀다.
“대통령께서 미안함을 표하시며, 조선 사절단을 뉴욕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어떠신지요?”
미국을 대표하는 제1의 도시는 뉴욕이었으므로, 이선은 굳이 사양할 생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뉴욕으로 가지요.”
18일 저녁, 뉴욕에 도착한 사절단은 피프스 애비뉴 호텔의 3층 스위트룸에 여장을 풀었다. 이선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잠시 머물렀던 호텔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
“사신들이 머무는 영빈관이라 그런가, 엄청나게 화려하군요.”
“여긴 외교관 전용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머물 수 있는 여관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절단은 깜짝 놀랐다.
“서양에서는 궁전도 아닌, 여관도 이렇게 화려하게 짓는단 말입니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곳도 있죠.”
사절단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했지만, 이선이 미리 알려준 덕에 예전의 안영흠처럼 기겁하진 않았다. 그래도 편히 서서 3층으로 올라간다는 편리함에 놀라워했다.
이선의 교육 덕인지, 조선 사절단은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문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조선과는 확연히 다른 서양 문화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양식도 이선만큼 입에 맞지는 않아도, 다들 곧잘 먹고는 했다.
호텔 같은 층에는 국서를 받을 미국 대통령 아서가 머무르고 있었다.
이튿날로 예정된 대통령과의 만남 역시 이 호텔 1층 접견실에서 이루어질 터였다. 접견 전날 밤, 대통령에 대한 국서 전달 전 첫인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짧은 논쟁이 이루어졌다.
서양 예법에 밝은 이선으로선 굳이 대통령에게 절을 할 필요가 없이 목례 후 악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처음으로 부사인 박정양의 의견이 갈렸다.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 : President, 대통령) 또한 그 나라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인데, 마땅히 성상을 알현하는 예로써 대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저 역시 박 공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예법으로 백리새천덕을 대우해야지요.”
홍영식도 박정양에게 동의를 표했지만, 이선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두 분의 말씀이 옳기는 하나, 서양인들의 예법에는 절을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고개 숙여 깊게 예를 표하시고 손을 맞잡는 거로 충분할 겁니다.”
“군 대감께서 서양 사정에 밝은 건 저희도 익히 아는 바이나, 조선은 예의의 나라입니다. 처음으로 서양의 국가원수를 만나는 것이니만큼, 최선의 경의를 표하는 게 옳지 않을지요.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식 외교관의 일원인 민영익과 서광범도 박정양의 뜻에 동의를 표했다.
“미국이 왕국이라면 모를까, 국민이 선출해서 뽑는 공화국입니다. 동양에는 동양의 예법이 있고, 서양에는 서양의 예법이 있습니다. 서양식 예법을 따라도 충분히 예를 다하는 것입니다.”
정사인 이선이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서양식으로 눈인사하고 악수하는 거로 의전을 하기로 했다.
이선도 양보를 했다. 미국에 도착한 이래 조선식 그대로 갓을 쓰고 한복 차림인 다른 사절들과 달리 편하게 양복을 입고 싶었으나, 국서 봉정까지는 사모관대를 해야 한다는 사절단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복을 입었다. 이날은 특히 흑단령을 입고 정1품 관리의 체모를 갖추었다.
8월 19일 11시, 국서 봉정을 위해 사절단이 1층으로 내려왔다.
생전 처음 보는 조선 사람들을 보기 위해 뉴욕의 수많은 인사들이 호텔에 몰려와 있었다.
물론 대통령이 있는 1층 접견실에는 외부인의 접근이 차단되어, 체스터 아서 대통령과 국무부장관 프릴링하이젠(Frederick T. Frelinghuysen), 차관보 데이비스, 메이슨 중위와 포크 소위 이하 백악관에서 나온 사람들만이 대기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한 줄로 늘어선 사절단은 접견실로 들어서기 전 일제히 머리를 깊이 숙여 경의를 표했다.
이선을 선두로 접견실에 들어온 사절단은 다시 일렬종대로 늘어서서 다시 목례를 하니, 대통령 또한 엄숙하게 고개를 깊이 숙여 답례를 표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사절단은 국무부 장관의 인도하에 이선부터 차례대로 대통령과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인사가 끝나자, 이선은 조선에서 가져온 공식 서한을 낭독하였다.
“사신 이선, 박정양 등은 대아미리가 합중국 대백리새천덕께 아뢰옵나이다. 사신들이 대조선국 대군주 흠명을 받자와 대신으로 대백리새천덕과 미합중국 모든 인민이 한가지로 안녕함을 누리시기를 청하오며, 또한 두 나라 인민이 서로 사귀고 좋아하는 우의를 돈독히 하기를 바라나이다. …… 삼가 바침을 아뢰옵나이다.”
이어서 국서를 조선어에서 영어로 이선이 직접 번역하였다. 정확성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전날 번역 과정에 오례당과 미야오카, 로웰과 포크도 참여하였다.
영어 번역을 마친 후, 이선은 임금이 보낸 국서와 신임장을 대통령에게 바치니 대통령 또한 두 손으로 정중하게 받았다. 신임장 제정이 끝나자 이번에는 대통령의 답사가 이루어졌다.
“Mr. minster and Mr. vice president. It gives me such pleasure to receive you as the representatives of the king and government of Dah-Chosun. I bid you cordial welcome.”
대통령의 말을 이선이 직접 통역했다.
“전권공사와 부공사 귀하. 대조선의 국왕과 정부를 대표한 여러분을 받아들이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조선 국왕과 경의를 표한 후, 조선의 국토와 백성들에게도 찬사를 보냈다. 조선과의 수교 통상 조약을 환영하며, 우호를 이어나가길 바란다는 말을 마친 후 미국의 의도를 설명했다.
“United States, as our history show, no dominions or control over other nationalities and no acquisition of their territory, but does seek to give and receive the benefits of friendly relations and of a reciprocal and honest commerce.”
“미합중국은, 우리 역사가 보여주듯이, 다른 나라에 대한 지배나 통제, 영토 획득이 없습니다. 상호 우호적인 관계와 정직한 통상의 혜택을 주고받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미국이 내걸고 있는 아시아 외교의 상징이었고, 많은 동양인들이 여기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 It will be the purpose of our government and people so to receive you that you shall carry home with you pleasant recollections of the American Republic.”
“미합중국에서의 유쾌한 추억을 귀하의 고국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정부와 사람들의 목적이 될 것입니다.”
통역을 마친 이선은 다시금 외국어 전문가 양성의 필요성을 느꼈다.
자신이 영어를 제법 한다지만, 대통령의 굉장히 품격 높은 외교적 언어를 실시간으로 통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자이자 전권공사가 통역까지 한다는 건 의전상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오례당과 미야오카는 영어가 유창했으나, 이들이 조선어를 못 한다는 게 문제였다.
서광범이나 유길준, 변수는 일본어가 유창했으나,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김학우와 고영철이 그나마 영어 습득이 빨랐지만, 대통령의 말을 통역을 맡길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통역까지 이선이 떠맡게 되었다.
답사가 끝나자 사절단은 다시 한 사람씩 악수를 한 후, 깊게 목례하며 접견실에서 물러났다.
최상의 예우를 표하는 보빙사절단에게 대통령 이하 미국인들도 매우 정중하게 이들을 반겼다.
조선과 미국의 국서 봉정식은 기자들에 의해 그림과 글로 널리 알려졌다.
전권공사인 이선은 조선의 왕자였으므로, 미국인들은 ‘프린스 리’라고 호칭하면서 특별히 존중을 받았다.
이선은 통역에 굉장한 피곤함을 느꼈지만, 왕자이자 전권공사인 그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건 미국인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주었다.
– 머나먼 미지의 나라 조선에서 온 사절단은 어제 미합중국과 대통령에게 국서를 봉정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들은 자신의 국왕에게 보내듯 최상의 경의를 대통령께 표해, 미국인들을 기쁘게 했다.
– 사절단의 대표인 프린스 리, 그는 고귀한 왕자의 신분에도 직접 영어 통역을 맡아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를 놀라게 했다. 이는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조선의 기대와 호감을 확연히 드러낸 것이다.
– 영어가 유창하고 서양의 관습에 정통한 프린스 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 은둔의 나라였던 조선의 개방과 근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조선에, 아니 동양에 관해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은, 이 젊은 왕자의 행보를 지켜봐야 한다.
– 뉴욕 시민 여러분, 미국과 서양에 대해 더없이 우호적인 왕자가 뉴욕에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달라. 대통령의 말처럼, 조선 왕자가 미국에서 경험한 바가 소중한 추억이 되게 해야 한다.
‘이게 이렇게 해석이 되나?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긴 한데…….’
다음날 신문을 읽으며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국 언론은 호들갑을 떨어대며 이선의 능력과 ‘선의’에 찬사를 보냈다.
‘그렇다면 굳이 착각을 깰 필요야 없겠지. 미국에 대한 조선의 기대와 호감을 마음껏 드러내서, 미국도 조선에 기대와 호감을 느끼게 해야지.’
국서 봉정식이라는 보빙사의 가장 중요한 일은 마쳤으나, 사절단의 미국 행보는 이제 시작이었다.
서구 문명의 발전상을 직접 체험해보고, 조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받는 일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