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80
3부 195화 신진정부
개화당의 연정 시도가 번번이 무산됨에 따라, 제2당인 진보당에게 기회가 왔다.
“이제 마침내 때가 되었구려.”
진보당은 즉시 신민당, 사회당과 연립정부를 논의했다. 전봉준은 안창호, 여운형과 잇달아 회견했다.
“노농연합이 신민당보다 더 많은 의석을 확보했으니, 진보당에서 총리를 배출하는 게 합당합니다.”
“인정합니다. 전봉준 의원이 총리 후보가 되어야 합니다.”
안창호도 총리직에 대해서는 순순히 양보했다.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개화당과 신민당의 연립정부는 개화당의 우위가 전제되었으나, 이는 개화당이 의석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다릅니다. 동등한 정당 간의 연정입니다. 총리는 진보당에서 배출하더라도, 신민당도 내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인정합니다. 동등한 정당 간의 연정이지요. 내각에서 의정대신과 희망하는 각료 자리를 드리지요.”
전봉준도 선선히 인정했다. 진보당과 신민당의 절대적인 협조 없이는 정부가 굴러갈 수가 없었다.
“의정대신 직은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닙니다. 다만 내무와 탁지는 신민당에서 맡기를 희망하고, 외무는 전문 외교관 출신이 맡는 게 합당합니다.”
내각의 이인자이나 명예직인 의정대신을 제외하면, 중요한 직책은 외무(외교)·내무(행정)·탁지(재정)·군무 4인이었다.
외무는 전문 외교관, 군무는 군부에서 맡는 게 관례였다. 외교와 국방만큼은 황제가 전담하고 있는 만큼, 전 내각에서도 이를 반영했다.
그리되면 핵심은 내무와 탁지인데, 총리를 내주는 대신 요직을 모두 신민당이 맡겠다는 의미였다.
“허허, 내무와 탁지 둘 중 하나는 진보당에서 맡는 게 도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아시다시피 저는 지위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4년 전에도 대신 직은 맡지 않으려고 했었지요. 제가 고려하는 건 정부의 효율성입니다. 관료조직은 개화당과 동일시하고, 야당을 불신합니다. 신민당이 처음 연립정부에 합류하여 부처를 맡았을 때 저항이 상당했지요.”
안창호가 처음 내무대신을 맡았을 때, 개화당만을 정부로 여겼던 관료조직은 복지부동하며 소극적 저항을 했다.
황제의 단호한 명령, 개화당의 협조, 안창호의 지도력, 안창호를 보좌한 김구의 뚝심이 어우러져 비로소 관료조직은 선출된 권력에 복종했다.
“신민당은 4년간 정부에 참여하며 관료조직과 신뢰를 쌓았고, 장악력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송구한 말입니다만, 관료들이 진보당에 느끼는 거부감은 여전히 상당합니다. 여러 부처 중에서도 특히 엘리트주의가 강한 탁지부가 가장 심하지요. 재무관료 경험이 있는 정치인이 탁지부를 맡아야 합니다.”
전봉준도 농림대신을 지낼 당시 관료들의 저항을 경험해 봤기에, 안창호의 말을 이해했다.
진보당에 재무관료 출신 정치인은 없었으나, 신민당은 여럿 있었다.
“도산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당내에서 반발이 있겠지만, 내가 설득해 보지요.”
“이해 감사드립니다.”
“내무와 탁지를 신민당이 맡는 대신, 각료 4자리는 진보당에 배분합니다. 신민당 몫은 3자리입니다.”
외무와 군무를 제외하고, 내무와 탁지도 넘겨주는 대신, 법무·학무·농림·상공·교통 다섯 부처 중 넷을 진보당에서 맡겠다는 말이었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사회당에는 각료직을 배분하지 않을 겁니까?”
“안 그래도 몽양에게 입각을 권했소만,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고 외곽에서 지원하겠다는군요.”
전봉준은 노농연합의 일원인 사회당을 배려하여, 대표 여운형과 부대표 조소앙에게 입각을 권했다.
그런데 여운형은 정중히 거절했다.
“저는 아직 어리고 능력이 부족하여 입각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무슨 말이오? 몽양에게 무슨 능력이 부족하단 말이오. 겸양도 좋소만 사양하지 마시오.”
예의상 하는 소리라고 생각한 전봉준이 거듭 권하자, 여운형이 쓴웃음을 지었다.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당내 의견이 통일되고 있지 않습니다. 정부 참여를 거부하는 당원들이 많습니다. 특히 제게 대신 직이 탐이 나서 노농연합을 지지했냐는 비난이 적잖습니다.”
이념적 순수성을 지향하는 사회당 좌파블록은 애초에 노농연합에 부정적이었고, ‘부르주아 신민당’과 ‘쁘띠 부르주아 진보당’의 ‘부르주아지 정부’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당내 우파블록을 이끄는 조소앙은 코웃음을 쳤다.
“정당의 목적은 수권이요, 정치가의 목적은 인민을 대표해 정부를 맡아 뜻을 펼치는 거외다. 그런데 동지들은 영원히 외곽에서 이념적 순수성이나 따질 거요? 유럽 각국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정부를 맡아 개혁을 이끌고 있는데, 대한에서는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소?”
조소앙은 사회당을 대표해 국제사회당대회(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 LSI)에 참석했고, LSI 집행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LSI 8개국 대표 시찰단의 일원으로 3개월간 소비에트 러시아 각지를 시찰하면서 소련 공산당의 통치를 관찰한 조소앙은, 만주로 귀국 후에 공산당을 통렬히 비판하는 ≪만주리선언(滿洲里宣言)≫을 발표했다.
「세계의 구악을 청산하기 위해 분연히 봉기한 러시아 인민의 위대한 혁명은 …… 편협하고 잔혹한 독재로 변질되었다. 과거 인터내셔널의 뛰어난 혁명가였던 공산당 지도부는, 정적을 탄압하고 반대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과두 독재자가 되었다.
…… 물론 처음부터 잔혹한 독재가 이들의 목표는 아니었을 터이다. 하지만 엄혹한 내전이 만들어 낸 특수성을 인정하더라도, 현재 소련의 체제는 세계 인민의 모범이 되기 어렵다.」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소련 공산당 노선을 비판한 조소앙의 선언문은 당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여운형이 조소앙을 확고히 지지하면서 사회당의 공식노선이 되었다.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처럼 체제 내 개혁과 ‘반공(反共) 사회주의’를 표방한 사회당의 노선은 진보적인 유권자들을 안심시켰고, 우익의 마타도어가 제한적으로만 먹혀들게 했다.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우리의 이상을 펼쳐야 합니다.”
애초에 사회민주주의의 한국적 변형인 삼균주의를 지향하는 조소앙은 입각에 거리낌이 없었다.
“현실적으로 15석인 사회당이 가질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적습니다. 기껏해야 대신이나 협판 한두 자리 주어질 터인데, 권한은 적으면서 연립정부로서 모든 책임은 같이 져야 할 겁니다. 정부 외곽에서 머물면서, 우리가 원하는 개혁을 얻어 내야 합니다.”
여운형이 속한 사회당 중도파도 현실을 내세워 입각을 거부했다. 현실적으로 연립정부의 들러리 설 가능성이 큰데, 연립정부가 실책하면 모든 책임을 함께 져야 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케렌스키 연립정부에 참여했던 사회혁명당 우파가 도매금으로 비난받고 신뢰를 잃었던 걸 생각하면, 근거 없는 지적은 아니었다.
“사회당은 연립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신임공급으로 정부를 지지하고 견제할 것입니다.”
여운형은 당내 여러 계파를 설득하고 조정해, 사회당은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신임공급(Confidence and supply)에 나서기로 했다.
연립정부보다 단계가 낮은 연대로, 조건부로 집권당과 정책 연대를 하고 집권당의 정권 유지를 돕지만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는 방식이다.
“노동자 권익 보호와 공공부조 확립, 선거법 개정을 조건으로 연립정부에 적극 협력하겠습니다.”
사회당이 주장하는 개혁은 대부분 진보당과 신민당에서도 동의했으나, 선거법 개정이 오히려 민감한 소재였다.
여성을 포함하는 완전한 보통선거권 부여는 다른 정당에서도 난색을 표했고, 사회당이 주장하는 비례대표제 도입은 개화-신민-진보 기존 3당 모두 미온적이었다.
대한제국은 소선거구제였다. 1901년 대한제국에 첫 선거가 도입될 당시, ‘선진헌정국가’는 모두 소선거구제를 택하고 있었다. 독일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영국·프랑스 모두 소선거구제였다.
대전쟁 이후에야 소수정당을 배려하는 비례대표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1920년대에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나라는 벨기에·스위스·아일랜드와 혼합식을 택한 독일과 프랑스 정도였다.
확고한 지역 기반을 갖고 있는 기존 3당은 소선거구제 유지를 원했고,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지역 기반이 없어 후보 단일화라는 절차를 거친 끝에 겨우 당선자를 낸 사회당은 비례대표 도입을 원했다.
이는 지역 기반이 없기론 마찬가지인 신대한당도 마찬가지였다.
“연립정부가 안정적인 과반을 확보하려면 우리의 지지가 필요할 겁니다. 총리 선출과 법안 통과에서 사안별로 협력할 수 있으니, 정치경제적 개혁을 서두르길 바랍니다.”
신민-진보-사회 3당을 다 합쳐도 120석, 친야권계 무소속을 합쳐도 124석으로 과반에 미치지 못했다.
황제가 과반에 못 미쳐도 근접만 하면 총리 지명은 가능하다고 했지만, 안정적 과반을 얻지 못하면 의회가 공전(空轉)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신대한당의 양대 지도자인 신채호는 사회당 못지않게 정책이 급진적이었고, 마지막 퍼즐에 해당되는 신대한당이 사회당이 주창하는 개혁 대부분에 동조하고 나섰다. 신대한당은 조건부로 연립정부 출범 지지를 밝혔다.
며칠간 밤을 지새우는 협의가 지속된 끝에, 마침내 정당들은 합의에 도달했다.
“좋습니다. 연립정부는 임기 내에 노동자 권익 보호와 공공부조 확립, 북방 이주 확대와 이주민 권익 보호, 선거법 개정을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제(諸)정당의 협조 바랍니다.”
“찬성합니다.”
“동의합니다.”
“지지합니다.”
신정부에는 진보당-신민당 양당만이 참여한다.
사회당은 연립정부와 연대하며 보조를 맞추는 신임공급을 한다.
신대한당은 공식적인 연대와 신임공급은 없지만, 연립정부 출범을 용인하고 사안별로 협조를 한다.
광무 28년 3월 24일. 연립정부에 합의하는 4당 코뮈니케(Communiqu)가 발표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 정당정치 역사를 다시 쓸, 역사적인 합의가 도출되었다.
“군소정당 주제에 이런 파격적인 조건의 연정을 거부하다니, 어리석은 놈들! 박용만, 신채호 이놈들은 나를 물 먹이려고 정치하나?”
신대한당에게서 뜻밖의 연정 거부를 당한 이승만은 당황했다.
최후의 시도로 이념적 상극과도 같은 진보당에게도 손을 내밀었으나, 개화당을 제외한 4당이 연립정부 합의에 도달했다는 코뮈니케가 발표되자 거품을 물었다.
“기반도 지향성도 다른 놈들이 그저 개화당을 끌어내리자고 저따위 야합을 해! 이게 무슨 민의야! 야합이지! 나는 결단코 이따위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소! 개화당은 제1당으로서 야합에 의한 정부 출범을 거부하는 투쟁에 나섭시다!”
이승만과 개화당 내 이승만 계파는 분노하며 정부 출범을 거부하기로 나섰지만, 다른 계파는 냉소를 흘렸다.
“남 탓할 것 없네. 신민당 인사들도 영입하는 데 성공했고, 특별히 악재도 없는 선거였는데, 이 박사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서 황제 폐하의 노여움을 샀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쉿! 이 박사 표정이 좋지 않아. 어쨌건 총재인데 지금은 입 다물자고.”
“솔직히 이 박사가 개화당 입당한 지 몇 년이나 됐나? 그전에는 직업 외교관이었잖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세대교체 명목으로 당권 장악하고 지도부를 대부분 자기 사람들로만 채웠는데. 선거도 못 이겼으면 책임져야지?”
이승만은 애초에 개화당 주류가 아니었고, 개화당의 개혁 과정에서 외부에서 영입한 인사인데 이상설의 사임 이후 당권을 장악한 케이스였다.
이승만과의 당내 경쟁에서 패배한 이시영이야말로 김홍집의 사위이자 이상설과 뜻을 같이한 개화당 정통에 가까웠다. 이승만에 반대하는 계파들이 이시영을 중심으로 뭉쳤다.
개화당이 공들여서 영입한 옛 신민당 우파그룹, 이동녕과 김구 등도 이승만과 노선을 달리했다.
“황제 폐하께서 다수를 형성하는 당에 총리를 지명한다 하셨는데, 저들이 과반을 확보한 이상 대체 무슨 명분으로 반대한다는 겁니까? 현실을 인정합시다. 영원히 정권을 잃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야당으로서 정부를 견제하고, 와신상담하며 다음 총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읍시다.”
야당 생활에 익숙한 옛 신민당 우파그룹이 하는 말에, 개화당 지도부는 옳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내심 충격을 받았다.
40년 수권정당, 헌정 이후로도 25년 수권정당이었던 개화당이 야당이 된다는 건 그동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개화당은 창당 이래 처음으로, 정부라는 집을 떠나 들판에 나선 야당(野堂) 신세가 되었다.
* * *
광무 28년 3월 25일.
신정부의 내각이 발표되었다.
국무총리대신 전봉준 (70세, 진보당)
내각의정대신 겸 내무대신 안창호 (47세, 신민당)
외무대신 김규식 (44세, 무소속)
탁지대신 양기탁 (54세, 신민당)
군무대신 이동휘 (52세, 군부)
법무대신 허 헌 (40세, 진보당)
학무대신 이종일 (67세, 진보당)
농림대신 공성학 (46세, 진보당)
상공대신 조만식 (42세, 신민당)
교통대신 최 린 (47세, 진보당)
원수부 참모총장 노백린 (50세, 군부)
본래 의정대신으로 추천되었던 손병희가 종교지도자가 입각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고사하면서, 안창호가 이인자인 의정대신과 내무대신을 겸임했다.
외무대신에는 주청판무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김규식이 선임되었다. 소속 정당은 없지만 유능하고 합리적인 외교관으로 평이 자자했으므로, 황제 이선의 신임을 받아 외무대신이 되었다.
탁지대신에는 신민당 원로이자 탁지부 관료 경험이 있는 양기탁이 임명되었다.
군무대신과 참모총장에는 군부를 대표하는 이동휘와 노백린이 그대로 유임되었다.
법무대신에는 당대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이자, 노동자·농민운동을 변호하며 원외에서 노농연합을 지원했던 허헌(許憲)이 진보당에 입당해 최연소 법무대신으로 입각했다.
학무대신 이종일(李鍾一)은 개화파 출신으로 전봉준과 손병희에 감화되어 진보당에 입당, 농민운동과 계몽운동을 이끌었던 원로였다.
농림대신 공성학(孔聖學)은 송상의 후예로, 삼업(蔘業)으로 시작해 전기산업까지 뛰어든 진보당에서 드문 대자본가였다. 광무 초기에 부친과 함께 북방개척운동을 이끌며 전봉준과 가까워졌고, ‘만인대’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이였다.
상공대신 조만식(曺晩植)은 협동조합운동과 민족자본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로, 안창호와 함께 평안도에서 최고의 명망을 자랑하는 정치가였다.
교통대신 최린(崔麟)은 진보당의 현대화를 이끄는 신파(新派)를 대표하는 인물로, 손병희의 지지를 받아 진보당의 차기 주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진보당-신민당, 혹은 신민당-진보당을 대표하는 정부는 흔히 신진정부(新進政府)라고 불리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신진세력’을 대표하는 정부였다.
“나, 전봉준은 위로는 황제 폐하의 성총(聖聰)을 받들고, 아래로는 국민의 민의를 대표해 정부를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의회에서 국무총리대신으로 선출된 전봉준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외쳤다.
대업을 마음에 품은 지 수십 년, 나이 일흔에 마침내 다시없을 기회를 잡게 된 전봉준은 각오를 다졌다.
총리가 되어 정부를 이끈다는 건, 단순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류 정치가에게는 권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지만, 일류 정치가에게는 권력은 수단일 뿐이었다.
‘군주를 보좌해 국가의 대계를 정하고, 국민을 대표해 사회를 평안히 한다.’
본래 뿌리는 유학의 도를 익혔으나, 농민을 대표해 농림대신으로 입각하여 토지개혁을 이끌었고, 동양 농본주의와 서양 인민주의를 받아들여 야당의 지도자가 된 전환기의 인물, 녹두장군 전봉준.
마침내 그에게 국가를 이끌 기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