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81
3부 196화 개화 40년
광무 28년 3월 26일, 경운궁.
민의원에서 대한제국 제10대 총리대신에 선출된 전봉준은, 임명권자인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입궐했다.
‘실로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의원이자 야당 대표로 입궐한 일은 종종 있었지만, 정부의 대신 자격으로 입궐하는 건 2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전봉준은 광무 초기, 박정양 내각의 농림대신으로서 입궐하여 국정을 논의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전봉준은 개화당 정부 내의 유일한 소수파였다. 애초에 황제가 대신으로 지명하지 않았더라면, 전봉준이 토지개혁을 이끌 일도 없었을 터였다.
아니, 애초에 완화군 이선이 전주를 방문했다가, 전라북도 향회에서 가난한 농민을 대변하던 소수파였던 전봉준을 발탁해서 중앙으로 진출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역사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관찰자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실로 이 모든 게 성상의 지극한 은혜로다.’
총리로서 황제를 알현하게 된 전봉준은 새삼 성은(聖恩)에 감격했다.
물론 전봉준을 총리로 선출하게 한 건 민의의 결과였지만, 자신을 이 자신을 설 수 있었던 건 황제의 발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농민운동가에 천도교에 입교하기는 했으나, 전봉준의 사상적 뿌리는 유학이었다. 군주에 대한 충성은 신하된 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그 군주가 그릇된 통치를 하고 있다면, 분연히 일어나 임금에게 직소하고 간적(奸賊)을 처단하는 건 백성으로서의 의무였다.
원역사의 전봉준은 조선 역사상 최대의 농민혁명을 이끈 끝에 체포되어 왕조의 ‘역적’으로 처단되었지만, 농민군을 가혹하게 진압하고 자신을 처형하라고 명령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은 끝내 저버리지 않았다. 그건 고종 개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나라에 대한 충성이었다.
하물며, 변화한 역사의 수혜를 누구보다 많이 받게 된 전봉준은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동학을 넘어 서양 좌익 인민주의의 영향을 받아 농민정당을 창당하여 변혁을 외쳤기에, 개화당 우파에서는 전봉준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비난이었다. 전봉준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군주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했다.
현시점에서 전봉준의 동료 혹은 경쟁자들, 즉 서구식 교육을 받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박용만, 여운형 등보다 더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가치에 충실했다.
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황제란 곧 국가의 상징이자 위대한 지도자이지만, 전봉준과 같은 구세대에게는 오랜 주군이자 절대적인 충성의 대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선을 대하는 전봉준의 태도는 오히려 김옥균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정오, 경운궁 중화전.
총리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황제의 대례복을 입은 이선이 역시 총리대신 대례복을 갖춰 입은 전봉준에게 총리 임명장을 전달했다.
서양식 대례복이 잘 어울리는 이선과 달리 늙고 왜소한 전봉준은 어딘가 어색한 면이 있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젊은 시절과 다를 바 없이 형형했다.
“……이에 민의원 전봉준을 대한국 국무총리대신으로 임명한다. 광무 28년 3월 26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전봉준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받들며 황제의 임명장을 받았다.
마음만 같아선 옛 예법으로 큰절을 올리고 싶으나, 이선은 국민을 대표하는 총리가 황제에게 절을 올리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길 터였다.
이선은 신임 총리에게 악수를 청했고, 전봉준은 황송해하며 황제와 악수했다.
“총리의 대임(大任)을 맡아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성심껏 일해 주길 바라오.”
“신은 위로 군주를 존숭하고, 아래로는 국민을 대표하여 대임을 수행하겠습니다. 촌음을 아끼지 않고 분골쇄신하여 봉공(奉公)하겠습니다.”
전봉준의 엄숙한 말에 이선이 손사래를 쳤다.
“분골쇄신이라니, 경은 어느덧 고희(古稀)요. 건강을 지켜서 국정을 이끌기를 바라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은 지극한 성은 덕에 건강하옵니다.”
전봉준의 나이 일흔. 환갑만 넘어도 장수했다고 여겨지는 시대에 이미 한참 많은 나이였다.
아흔 가까이 장수한 김윤식도 있다지만 예외적인 삶이었고, 일흔이면 관료든 정치인이든 은퇴할 시기가 지났다고 여겨질 나이였다.
총선 기간 동안 개화당을 비롯한 전봉준의 반대파들은 그의 나이를 가지고 건강 문제를 제기했기에, 전봉준은 자신이 건강하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5척 단구의 왜소한 체격이긴 해도, 정치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텃밭을 가꾸고 전국을 순회하며 노동과 체력운동을 병행해 온 전봉준의 기력은 아직 왕성했다.
“짐이 경의 건강을 믿지 않아서 하는 말이 아니오. 총리란 자리가 주는 무게감과 업무의 강도가 그만큼 강하긴 때문이오. 경의 전임자인 보재(이상설)만 해도 50대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건강을 크게 해쳐서 총리직에서 물러나지 않았소? 보재가 총리에서 물러난 다음에 건강이 회복된 걸 보면, 과연 그 자리가 문제였던 거요. 경은 건강 문제로 사임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오.”
과거 총리대신이 황제의 가장 가까운 대리인에 가까웠다면, 광무 23년의 개혁 이후에는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막중한 책무를 갖고 있었다.
여전히 국방과 외교는 황제가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명령했지만, 내정의 다양한 영역은 총리와 각료들이 결정하고 대리청정 중인 황태자가 검토한 후 황제가 최종 추인하여 정부가 집행하는 형태였다.
입헌군주 교육의 일환으로 이진은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각종 문서의 결재를 맡았지만, 내각이 결정한 사안에 의문을 제기할지언정 이의를 제기하고 기각하는 일은 드물었다.
더욱이 황제만 바라보며 국정만 집중해도 됐던 과거와 달리, 정당과 의회에도 막대한 신경을 써야 하는 정당중심 입헌군주제의 총리에게는 자연히 과로와 압박감이 일상사가 되었다.
“이미 오래 산 늙은이가, 국가를 위하여 일하다 이 한 몸 쇠한다 한들 무엇이 아깝겠사옵니까? 하오나 지극한 황명을 받들어 건강에 유의하겠사옵니다.”
“좋소. 그럼 앉읍시다. 연장자 앞에서 이런 말 하자니 민망하오만, 나도 늙어 가다 보니 오래 서 있기가 힘들다오.”
전봉준이 덕담을 받아들이자, 이선은 웃으면서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자신이 앉으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로 앉지 않을 노인을 배려하기 위한 말이었다.
“신하가 정전(正殿)에서 성상을 알현할 때에는 서 있는 게 마땅한 도리이자 예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 예법은 이제 바꿉시다. 시대가 바뀌었기에 경이 민의에 의해 총리로 선출되었던 게 아니겠소? 그런데 예법은 옛 방식을 고수할 필요가 있겠소?”
이선은 예전부터, 자신만 앉고 늙은 신하들은 서 있는 예법이 보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황공하옵게도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선의 뜻을 이해한 전봉준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역사적인 순간이오. 대한 헌정사상 최초로 비(非)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었소. 아니, 조선 역사상 최초의 농민 출신 총리로군.”
“황공하옵니다. 실로 지극한 성은 덕입니다.”
전봉준의 총리 취임은 여러 가지로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대한제국 헌정사상 최초의 비 개화당 정부이자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동시에 전봉준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초의 평민-농민 출신 정부 수반이었다.
갑신경장과 헌정 도입 이후에도, 초대 김홍집부터 9대 박은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양반 출신이었다.
기호 명문 벌열 출신인 개화당 총리들부터 기득권과 거리가 먼 황해도 향반 출신인 박은식 같은 이도 있었다지만, 모두 양반-지식인 계급이라는 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전봉준은 달랐다. 그는 전라북도 고부의 가난한 농가 출신이고, 부친이 한문을 익힌 향교 장의였다지만 양반은 아니었다.
족보상으로는 천안 전씨 양반이라지만, 이미 몰락한지 너무나 오래되어 빈궁하기 짝이 없었던 농민의 삶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빈농 출신이지만 서당을 다니며 학문을 익힌 전봉준은 문제의식을 키울 수 있었고, 그 어떤 엘리트도 알지 못했던 농민의 삶을 알 수 있었다.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케이스의 사람들은 출세하면 자신의 출신을 부정하고 엘리트 계급의 일원으로 변신하고 싶은 이들이 허다했지만, 전봉준은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전봉준은 농민이었고, 농촌운동가였으며, 북방개척운동을 이끈 농민부대의 지휘관이었고, 농민을 대표하는 정당의 지도자였다.
총리대신의 대례복을 입은 지금도, 초심은 바뀌지 않았다.
단지 이제는 농민만이 아닌 모든 국민을 대표할 총리였다.
“어련히 잘하겠지만, 짐이 경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개화당 40년 집권의 명암을 분명히 살펴, 밝음은 계승하고 어두움은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오.”
비록 40년 만에 정권을 내주기는 했으나, 개화당 40년의 성과는 뚜렷했다.
“신 또한 지난 40년을 살아오면서 보았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개화당은 성상의 영도를 받들어, 찢어지게 가난하고 허약했던 나라에서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이룩해 오늘날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열강의 일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참으로 그 공이 큽니다.”
전봉준도 선선히 오랜 정적이었던 개화당의 공로를 인정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공로였다.
근대화 40년 동안 조선-대한제국은 ‘코리안 미러클’이라고 불리는 역사적인 변화를 이끌어 냈고, 이는 개화당 집권기에 이뤄낸 일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국민이 그들의 손에서 권력을 내려놓게 한 건, 40년간 권력을 독점하며 오만과 병폐를 쌓아 왔기 때문입니다. 정관유착과 정경유착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특히 머나먼 지방에서는 관료와 지역유지들이 개화당으로 결탁해 이권을 독점하며 토호로 군림합니다. 성상의 어진 마음과 준엄한 꾸짖음을 헤아리지 못한 결과, 정권을 내놓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합니다.”
인구가 급증하고 교통과 통신이 원활한 황성과 대도시와 달리, 도시와 멀리 떨어진 향촌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작은 사회’가 계속 유지되었다.
물론 벽촌에도 양반, 지주, 서원, 관아가 결탁했던 과거와 달리 근대적 체제가 이식되었지만, 혁명이나 전쟁 같은 극단적인 계급변동이 없었던 사회에서 향촌의 기득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개화에 반발했던 향촌 양반들은 개화당 정부가 나눠 주는 지방군과 경찰 지위에 만족하여, 시대의 변화를 따라 재빨리 단발하여 양복으로 갈아입고 군도를 찼다. 이는 근대화가 일본처럼 폭압적인 수단을 쓰지 않고도 저항 없이 지방까지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광무 초기 대대적인 행정개혁과 군제개혁 이후에 이들은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개화의 시대를 타고 권력과 정보를 얻은 이들은 그 자식들을 황성으로 유학시켜 관료로 입신출세하거나 부를 축적하는 길을 찾았다.
정부는 이들이 눈에 띄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세금 수취와 징병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이상 토호들의 신 기득권을 묵인해 왔다.
황성에서 온 관료들은, 개화의 과정에서 부를 취득한 지방 유지들과 결탁하여, 개화의 기치 아래 암묵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형태의 향촌지배에 야당은 물론이고 이선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개혁파 이상설이 총리를 맡고 안창호가 내무대신으로 입각하여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이상설-안창호-김구의 뚝심 있는 개혁은 일대 혁신을 이뤄 냈지만, 갑신경장 이래 40년 가까이 구축된 전국의 개화당-관료-토호 삼위일체를 단숨에 무너트릴 순 없었다. 애초에 개화당 지방 지역구 의원의 상당수가 이들 관료나 토호 출신이었다.
이선은 이해관계가 너무나 유착되어 있는 개화당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정권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극단적으로 말해, 한국보다 훨씬 심각한 향촌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러시아의 사례처럼, 소련식 공산주의 혁명이라면 기존의 기득권이 단숨에 폭력적으로 갈려 나갔겠지만, 입헌군주국인 대한제국에서는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가능한 선택지는 오직 체제 내의 사회개혁이고, 문제의식과 수권능력을 갖고 있는 야당이 집권하여 일대혁신을 이뤄 내는 것이었다.
“경의 지적은 타당하오. 현재 대한이 대내외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라고는 하나, 개화와 진보의 발걸음은 하루도 멈춰서는 안 되는 법. 새 정부가 임기동안 진정한 진보를 이뤄 내길 바라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전봉준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새하얗게 물든 노신의 머리카락에 이선은 새삼 세월을 느꼈다.
‘그 녹두장군 전봉준이 대한의 총리가 될 줄이야.’
개화당과 우익, 관료와 토호들은 전봉준 총리에 망연자실했지만, 이선은 내심 감개무량했다.
32년 전, 전라북도 시찰 중에서 우연히 전봉준을 만난이래, 그를 발탁하여 북방이주와 토지개혁의 중책을 맡겼던 건 이선 자신이었다.
하지만 전봉준이 야당을 대표하면서 의회정치의 발전을 이끌어 내고, 마침내 국민의 선거를 통해 연립정부를 구축해 총리가 되리라는 건, 그를 발탁했던 이선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 또한, 역사의 변화가 만들어 낸 중요한 진일보이리라.
‘진보연립정부를 시험하려면 이번이 절호의 시기이기는 하다. 대공황의 위험이 닥치려면 아직 시간이 충분히 있으니.’
대공황이 원역사처럼 1929년 10월에 터질지 현시점에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대공황이 발생해서 그 여파가 동아시아까지 미친다면 새로운 정치경제적 환경이 구축될 터였다.
그 이전인 1920년대 중반에 새로운 정치풍토를 마련하고 실천한다는 건 유의미한 시도였다.
이선은 진심으로 신진정부의 성공을 기원했다.
‘현대사회에서는 주기적으로 정권이 바뀌어야 고인 물이 썩지 않는 법. 개화당은 지난 40년간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의 시대정신을 충실히 이행했다. 이제 권력을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어. 때로는 패배가 혁신을 이끄는 법이다.’
비록 현시점에서 개화당의 실권(失權)을 원했지만, 이선은 개화당에 분명히 애착을 갖고 있었다.
애초에 개화당의 초기 지도자가 이선 자신이었고, 이선은 개화당을 ‘오당(吾黨, 우리당)’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선과 함께 젊은 시절을 보내며, 험난한 역사의 파도 속에서 합심하여 국가를 이끈 동지들의 당이니 어찌 애착이 없겠는가?
하지만 이선은 이제 개화당만의 주군이 아니었고, 대한제국의 황제이자 3천만 국민의 지도자였다.
이선의 오랜 동지인 개화당 원로들도 이를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폐하, 김옥균 대감의 병세가 위중하옵니다.”
“병세가 그리 심각한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어의의 표정을 보건대, 차마 잇지 못한 뒷말에는 ‘회복이 불가능하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뜻이었다.
어의의 이어진 말은 과연 그러했다.
“알겠네. 마지막 가는 날까지 고통 없이 편안하도록 최선을 다해 주게.”
“삼가 명을 받듭니다.”
이선은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개화당 40년 집권의 종식과 함께, 공교롭게도 개화당의 상징이자 이선의 오랜 동지였던 김옥균의 수명이 다하고 있었다.
일흔넷이니 당대 기준에서 장수하였다지만, 오랜 동지의 죽음을 직면하게 된 이선의 마음은 비통했다.
“이번 주말에 고균의 별장으로 행차하겠네. 준비하도록.”
“예, 폐하.”
오랜 동지의 임종 전에, 못다 한 이야기들은 모두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