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82
3부 197화 고균의 마지막 구상
시간을 잠시 앞으로 돌려, 2월 23일.
이날은 김옥균의 74세 생일이었다.
50년 공직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이후 정치인들과 교류를 뜸하게 하던 김옥균이었으나, 이날만큼은 저택에서 생일축연을 열었다.
총선이 얼마 안 남은 시기였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초대장을 받은 주요 인사들은 원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김옥균은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섰다.
“모두 이 늙은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와줘서 고맙소이다. 다 늙어서 생일축연이라니 민망하고 무안한 일이오마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대감은 국가의 원훈이자 개화당의 큰 어른이 아니십니까. 하하.”
“그럼요. 대감의 탄일이라면 당연히 기념해야지요.”
“고맙소. 아무튼 내가 여러분을 초대한 건, 아무래도 오늘이 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생일일 듯싶소.”
죽음을 암시하는 말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대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리 좋은 날에 어찌 그런 흉한 말씀을.”
“팔순까지 거뜬하실 겁니다.”
김옥균은 손을 내저었다.
“내 몸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아오. 기실 진작 죽어도 이상치 않으나, 지극한 성은으로 지금껏 버틸 수 있었소. 사람은 태어나 나이 들면 죽는 게 당연한 일, 슬퍼할 일도 아니오.”
이선이 보낸 태의원의 어의들이 최상의 치료를 하고 있기에, 김옥균은 자신의 수명이 연장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내가 죽기 전에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바가 있소.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개화당의 모체가 될 조직을 결성했소. 환재(박규수) 대감, 역매(오경석) 선생, 대치(유홍기) 선생께서 나와 젊은이들에게 새로이 나아갈 길을 보여 주셨지. 우리는 결심했소. 반드시 낡은 조선을 변혁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늙으면 남는 건 추억뿐이라든가, 김옥균은 새삼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당시 내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었지. 일본이 동양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마땅히 조선은 동양의 법국(프랑스)이 되어야 한다.”
“이제 모르는 이가 없는 말이지요, 하하.”
청년 김옥균이 뜨거운 열정을 갖고 청년들을 모아 하던 말은 이제 역사로 남아, 후속 세대가 기억하는 말이 되었다.
“정녕 조선이 동양의 법국이 될 수 있을까? 의기는 넘쳐흘렀으나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우리는, 마침내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 뜻을 이룰 수 있었소. 막연하게 생각했던 바를 현실로 이루어 냈소. 불과 40년 만에, 무기력하고 빈곤하던 조선이 오늘의 부강한 대한이 되었소. 오직 성상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일이오.”
김옥균은 마치 젊은 날의 열정이 되살아난 듯, 쇠약한 몸과 달리 형형한 눈빛과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성상께서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단 하루도 멈추어 있지 않고 계시외다. 대한은 언제나 전진하고, 도약할 것이오. 그대들은 성상의 깊은 뜻을 헤아려,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오!”
김옥균의 말은 후속세대에게 하는 정치적 유언이었다.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는 영명하고 위대한 지도자이시니, 충성스럽게 보좌하여 성지(聖旨)가 하늘과 땅에 울려 퍼지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정당과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가로서, 사사로운 권력욕보다는 오직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길 바라오. 위로는 성상을 받들고 아래로는 국민을 헤아려 만세의 대업을 이루어야 하오. 여러분은 내 말을 꼭 기억하고 명심해 주시오. 앞으로도 대한의 부강이 영원하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소이다.”
원로의 마지막 당부에, 좌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히 대감의 깊은 뜻을 헤아려, 성상을 높이 받들고 국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대한은 만대에 걸쳐 번영하리니, 부디 대감께서는 보중(保重)하시어 나라의 앞날을 지켜봐 주십시오.”
후배들의 다짐에 김옥균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 늙은이의 말이 쓸데없이 길었소이다. 간소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었으니 사양하지 말고 즐겨 주기를 바라오.”
“예, 대감.”
김옥균은 이 자리에 모인 후속세대들을 바라보며, 새삼 옛 동지들을 떠올렸다.
‘아, 우리 모두 젊고 열정에 가득 차 있었지. 그 시절이 그립구나.’
초기 개화당의 ‘5두’ 중, 이 자리에 있는 건 김옥균 그 자신뿐이었다.
홍영식과 서광범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박영효와 서재필도 미국에 있었다. 서재필은 주미대사 사임 후 처가가 있는 미국에 남은 거지만, 박영효는 사실상 국외추방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처지였다.
나중에 개화당에 합류하여 함께 개혁을 이끌었던 이들도 대부분 죽고 없었다. 그나마 아직 살아 있는 유길준은 병석에 누워 있었고, 공직 활동을 이어 가고 있는 윤치호는 김옥균의 후임 주청고등판무관이 되어 만주에 나가 있었다.
개화당 1세대는 대부분 죽거나 사라졌다.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김옥균은 새삼 서글픔을 느꼈다.
‘아, 늙으면 사라지는 게 당연한 순리라고는 하나, 이제 다들 사라지고 없구나.’
김옥균은 이제 자신이 떠날 차례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다.
생일 축연을 마친 후, 김옥균은 죽음을 예상하고 신변정리에 나섰다. 삶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 * *
죽음을 앞둔 김옥균은 제물포의 별장에 칩거했다.
저 멀리 제물포항과 서해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별장에서, 김옥균은 안락의자에 앉아 추억에 잠겨 있었다.
‘저 항구에서 배를 타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지.’
42년 전, 생애 처음으로 해외에 나간 김옥균이 간 곳은 일본이었다. 유신 이후 불과 10년 사이에 빠르게 진보한 일본을 보고, 김옥균은 조선도 서둘러 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조바심을 느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일본에서 미국행을 생각하던 김옥균은, 고국에서 발생한 군란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했다. 조정의 허가 없이 나간 국외여행이었기에 처벌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만큼 정세가 시급했다. 만약 대원군이 집권해서 개화정책을 전면 취소한다면, 김옥균과 개화당의 처지는 나락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완화군 이선이 나타났다.
어느 순간 사라진 왕의 서장자로만 알고 있었던 완화군이, 조선의 새로운 희망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건, 바로 42년 전 이곳 제물포에서였다.
‘그때만 해도 여긴 초가집과 작은 포구뿐이었는데. 말로만 듣던 서양의 기선을 처음 봤을 때는 놀랐지. 저런 거대한 철선이 빠르게 움직이며 세상을 누빈다니. 제물포는 기선이 접안조차 할 수 없어서 상륙하려면 나룻배로 갈아탔어야 했지.’
저 멀리 번영하는 인천 시가지와 제물포항에 늘어선 기선과 군함을 보면서, 김옥균은 새삼 감격했다.
‘정말이지 천지가 개벽했군. 서울로 이어진 철로, 대로에 우뚝 선 양옥과 기와집, 항구에 들어서는 거대한 선박들. 40년 전엔 상상도 못 했던 풍경이지.’
1880년대 조선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을 부설하고, 광무 초기에 제물포항에 갑문식(閘門式) 선거(船渠, dock)를 건설하면서 대형선박이 접안할 수 있게 되자, 수도와 가까운 항구인 인천은 빠르게 발전했다.
수심이 얕은 서해의 특성으로 인해 최대 8천 톤급으로 제약되었지만, 군함으로 치면 구축함과 경순양함까지는 접안할 수 있었다.
‘서양의 기선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던가. 우린 대체 언제 기선을 가져 보나 싶었는데, 이제는 우리 손으로 군함까지 만들지 않는가?’
전통적으로 조선업이나 해운업과 거리가 먼 조선이었지만, 근대화 이후에 착실하게 경험을 쌓아 나갔다. 서양에서 기선을 수입해 원양항해와 무역에 나섰고, 군함을 수입해 해군을 육성했다.
조선업 자체가 중공업의 상징이고, 바로 이웃에 일본이라는 신흥 조선강국이 있어 한국의 조선업 육성은 조심스럽게 추진되었다.
1910년대의 중공업 육성, 대전쟁과 전시호황을 거치며 비로소 조선업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대전쟁과 전후 경제위기로 유럽의 해운업과 조선업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일본마저 군축 여파로 ‘조선 합리화 정책’에 나섰지만, 한국은 정반대로 중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대형 조선소 건설에 나섰다.
함남 원산의 중공업단지, 경남 울산의 신중공업단지에 대형조선소가 들어서 건함에 나섰다.
초기에는 상선 위주였지만, 1920년대부터는 건함 기술을 획득해 본격적으로 군함 건조에 나섰다.
광무 23년부터 건함 10개년 계획이 설립되어,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에 포함되지 않은 대한제국은 서서히 해군력 확장에 나섰다.
해군은 신임 해군국장 신순성 부장의 주도하에, 1920년대에는 구축함, 잠수함, 1만 톤 이하의 경순양함을 건조한다.
경험을 축적하여 1930년대에는 1만 톤 이상의 중순양함, 더 나아가 1930년대 후반까지 순양전함과 전함을 건조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광무 28년 현재는 국산 구축함 6척이 진수하고 취역하였고, 광무 30년 진수를 목표로 경순양함 3척의 건조가 시작되었다.
“해군의 제안은 국가파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일본도 건함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군축에 나섰는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계획입니까?”
“군함 수주하면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봅니까?”
“당연히 조선회사지. 미쓰비시와 일본해군이 그리 유착되어 있다던데, 대한중공업에서 해군에 열심히 로비라도 한 모양이지요.”
건함은 당연히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국가예산 3할을 들여 건함에 몰두하던 일본조차도 군축에 나선 시점에서 대대적인 건함이 말이 되냐는 비판이 정부와 의회에서 쏟아져 나왔다.
“대전쟁의 결론은, 군의 기계화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특히 광활한 만주와 연해주를 방어하려면, 육군에 배속될 차량과 전차의 증산이 시급합니다.”
“전함이라! 전함 건조할 돈이면 전차와 항공기가 대체 몇 대요?”
“대한의 주적은 소련입니다. 소련에 해군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있어 봤자 발트해에 있는 함정 몇 척이 전부란 말입니다. 봉쇄를 뚫고 태평양으로 올 수나 있답니까?”
“일본해군의 건함병(病)이 대한으로 전염이라도 되었는지?”
대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군 현대화 계획에 군비를 전용하길 원했던 육군에서도 반발했다.
“일본은 더 이상 대한의 동맹이 아닙니다. 동양의 패권을 놓고 경쟁할 가상적국 1호입니다.”
“설령 일본이 적국이 되지 않더라도, 바로 이웃나라에 압도적인 해군력이 있는 이상, 대한도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춰 놔야 합니다.”
“제해권의 보호는 열강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권리입니다!”
해군은 거듭 건함의 필요성을 설파했지만, 정부-의회-육군 모두 해군의 건함계획에 반대했다.
군비 증강에 앞장섰지만 육군 중심으로 군대를 양성한 개화당 정부는 해군의 계획을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였다.
“전함을 건조하겠다고 막대한 예산을 전용하고, 국민이 먹을 밥까지 빼앗아 간 일본의 실수를 답습하잔 말이오?”
“전시에는 그렇다 쳐도, 평시인 지금도 군비가 1년 예산의 2할을 넘어갑니다. 순차적으로 감축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정해 놓고 예산을 배분합시다.”
새로 출범하게 된 진보당-신민당 연립정부의 입장은 더욱 단호했다. 진보당은 예전부터 군축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북방이주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상 육군에 훨씬 친화적이었다.
그나마 신민당이 주요 정당 중 해군과 조선업계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들어 주는 편이었지만, 건함계획에는 난색을 표했다.
새 정부와 의회는 기왕 전 정부가 추진하고 황제의 승인을 받은 경순양함 건조까지는 허용하겠지만, 그 이상은 절대로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늙은 원훈은 과거의 추억에만 잠겨있지 않았다. 은퇴했어도 김옥균은 정치가였다. 그 시선은 현재와,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의 미래에까지 닿았다.
‘일본이 앞으로도 우리의 동지인가, 혹은 적이 될 것인가…….’
생애 마지막 순간, 김옥균의 마지막 고심은 일본이었다.
그 자신이 한때 일본식 급진적 근대화를 모범으로 삼았고, 주일공사로 재임하며 일본 정계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으며, 20년간 지속될 한영일동맹을 체결한 장본인이었다.
말년에도 일본 정치가들과 서신을 교류, 의견을 교환하며 앞날을 논의했다.
‘아시아 문명개화의 동지’ 일본에 우호적인 1세대 개화당 인사를 대표하는 김옥균이지만, 어디까지나 대한제국의 국익을 위해서 일본을 바라볼 뿐이었다.
김옥균은 한영일동맹을 체결했지만, 일본을 따돌리고 만주 이권을 차지할 김옥균-태프트 밀약의 장본인이자, 중국 혁명을 배후에서 논의한 김옥균-송교인 밀약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성상의 치세에는 일본과 적대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 하지만 동양의 패권을 두고 일본과 격돌할 순간이 오지 않을까? 일본이 태평양의 패권과 중국 진출을 놓고 팽창정책으로 나아간다면, 대한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생애 마지막 순간, 김옥균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물론 ‘온 세상을 내다보는’ 위대한 지도자인 황제 이선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두고 있겠지만, 김옥균은 자신의 마지막 구상을 정리해서 황제에게 전하고자 했다.
주군이자 오랜 동지, 심중을 털어놓는 벗이기도 한 이선에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모두 바치고 싶었다.
‘만약 소련과 영구히 대립한다면, 대한은 일본의 북수남진과 대양진출 정책을 이어 나가길 유도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대한은 북진하여 만주와 연해주를 지키기 위해 지금처럼 육군력 확장에 치중해야 한다.’
‘만약 일본이 공격적으로 중국 대륙의 패권을 추구한다면, 소련과 일본을 동시에 적으로 둘 수는 없다. 소련과 화해하고 일본과 대립하는 경우를 상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은 지금부터라도 해군력 확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중국의 운명도 변수가 되겠군. 과연 국민당이 북벌에 성공할 것인가. 국민당과 공산당의 동행은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가. 그러면 동아시아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대, 대감. 황제 폐하께서 친림하셨사옵니다!”
“뭐라고? 알겠다. 속히 나갈 차비를 하겠다.”
고민을 거듭하던 김옥균은, 뜻밖에도 황제가 별장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