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85
3부 200화 백년의 고독
“역사의 분기점은, 임오년이었소. 군란을 진압하지 못한 조선 조정은, 은밀히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지. 청군이 들어와 대원군을 납치하고, 민왕후를 복귀시켜 친청 정권을 세웠소. 일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청군과 일본군이라는 외세가 도성에 주둔하며 정치에 개입했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에 김옥균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선은 진지했다.
“노골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는 청나라의 행태에 젊은 관리와 지식인들이 분개했지. 그들은 기존의 조선을 혁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소. 바로 김옥균을 지도자로 하는 개화당이지. 이들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정권을 장악하고, 청나라를 몰아내 급진개혁을 실시해야겠다고 결심했소. 대내외적으로 협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던 끝에, 갑신년에 일본의 지원을 받아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켰소. 그리고 정권을 장악했지.”
“폐, 폐하! 그게 대체 무슨…….”
김옥균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믿기 어렵더라도 끝까지 들어 주시오. 새 조정은 야심 차게 개혁정강을 발표하며 새로운 세상을 천명했지만, 임금의 은밀한 요청을 받은 청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불과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소. 정변을 주도한 이들 중 홍영식과 박영교는 피살당했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기약 없는 망명생활에 들어섰소.”
“정변을 실패한 대가는 컸지. 조선에서 개화는 곧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정변 주모자의 가족은 역적의 일가라 하여 연좌제에 걸려 비참하게 죽거나 노비로 떨어졌소. 청나라의 간섭은 더욱 강해졌고, 일본은 언젠가 전쟁으로 청나라를 무찌르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10년,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10년을 지배계급은 허송세월로 보냈소.”
이선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김옥균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랜 동지였던 황제는 헛소리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지어낸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갑오년, 오랜 수탈과 전횡에 분노한 농민들이 고부에서 봉기하여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했소. 농민군 지도자의 이름은 전봉준이었지. 왕조의 본향인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임금과 조정은 경악했고,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군을 불러들여 진압을 요청했소.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명분이 주어진 일본은, 병력을 파병해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도발했소. 김홍집을 수반으로 한 새로운 개화파 조정이 들어서 대대적인 경장에 나섰지만, 일본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소.”
“10년 전 망명했던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은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지. 하지만 김옥균은 없었소. 이미 몇 달 전에 죽었거든. 일본의 노골적인 홀대에도 불구하고 조선 개혁의 꿈을 잃지 않았던 김옥균은, 청나라로 건너가 이홍장을 만나 개혁방안을 논의하길 희망했소. 하지만 함정이었지. 조선 조정의 명을 받은 자객 홍종우는 상해에서 김옥균을 암살했소.”
“…….”
“김옥균의 비참한 운명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소. 임금과 왕비는 측근과 일족들을 살해한 김옥균을 죽었을지라도 용서할 수 없었거든. 끔찍한 일이 벌어졌소. 죽은 김옥균의 시신은 머리와 사지가 잘려,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는 팻말과 함께 효수되었소. 그리고 전국에 조리돌림을 당했지. 이는 근대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심지어 조선의 형률에도 어긋난 일이었소. 일본은 조선이 얼마나 미개하고 야만적인 나라인지 여론을 선동했소. 망명시절에 홀대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망명자 김옥균의 비참한 죽음을 전쟁명분의 하나로 사용했지.”
김옥균은 착잡한 표정으로 술잔에 입을 댔다. 병세가 악화된 이후로는 담배를 끊고 술을 자제했지만, 술에라도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김옥균은 그때 죽어서 다행일지도 모르겠소. 그가 사랑하던 조국의 비참한 역사를 보지 못했고, 옛 동지들처럼 친일파로 전락할 일도 없었으니까.”
이선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갑오개혁의 진전. 농민군의 재봉기. 일본과 손을 잡은 조정의 가혹한 탄압과 궤멸. 일본의 승리로 끝난 청일전쟁. 일본의 영향력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민왕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한 고종. 민중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김홍집. 왕후 시해에 연루되었다가 회한에 찬 죽음을 맞이한 대원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 광무개혁에 나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일본은 러시아를 기습공격. 모두의 예상을 깨고 러일전쟁에서 승리.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얻은 일본은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주권을 박탈. 의병으로 대표되는 조선인들의 저항은 일본군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 마침내 경술년에 일본에 국권을 병탄.
이선은 일부러 1910년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미 김옥균으로선 상상할 수 없었던 역사의 전개고, 이후에 저지를 일제의 잔혹한 만행과 조선인들의 고통은 이선도 입에 담고 심지 않았다.
대신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간략히 요약하여 미래상을 그렸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그게 내가 아는 실제 역사였소.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원래의 나는 20세기 후반에 태어나 21세기 초반을 살았던 역사학도 이선우였소.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140년 전, 1880년이었소. 나는 완화군 이선이 되었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21세기의 이선우가 19세기로 시간여행을 한 걸까, 19세기의 이선이 21세기를 보고 온 걸까?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
이선은 술을 거듭 들이켰다.
“어찌 되었건, 나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소. 원래 완화군은 그해에 죽을 운명이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조선을 떠났지. 내 목숨만 살리는 게 아니라, 이 나라 조선도 살리기로 결의했소. 내 나라, 내 동포들이 남의 노예가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거든. 힘을 축적해 2년 뒤에 돌아왔고, 고균을 바로 이곳 제물포에서 만났소. 벌써 42년 전 일이군. 그 이후의 이야기는 경도 잘 알고 있을 터이니 더 말하지 않겠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김옥균은 착잡함과 감격이 교차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김옥균은 이선의 말을 믿었다.
「성상께선 현재를 살고 있지만, 과거를 두루 알고 계시고, 미래를 내다보고 있지. 어쩌면 다른 세상에서 오신 분이 아닌가 싶어.」
오래전에 별세한 스승 유대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김옥균은 자신이 오랫동안 가졌던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독실한 불자였던 유대치는 윤회와 환생을 믿었지만, 불교의 평등사상에 심취하였으나 본질적으로 유학을 익힌 김옥균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믿지 않았다.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근대적 합리성으로 전향한 입장에서 봐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었다.
‘정녕 멸망의 위기에 놓인 조선을 구하려고, 다른 세상에서 오신 분이었구나. 이게 바로 천명인가? 부처님의 가피인가?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분이 조선에 오셨다는 거다.’
김옥균은 감격에 겨웠다. 이선은 문자 그대로 구원자였다. 조선과, 자신을 비롯한 수천만 조선인의 운명을 구원한 구원자였다.
“경도 알다시피, 나는 괴력난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걸 싫어하오. 그런데 우습게도, 내 존재야말로 괴력난신이오! 과학이나 합리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해서는 안 될 기이한 존재지.”
이선은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신을 거부하고 무신론자로 남으려 했는지도 모르겠소. 내가 누군가의 뜻대로 왔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미쳐 버릴 것 같더군. 그걸 받아들이면 내 존재가, 존재 여부도 불확실한 천명이나 신의 섭리에 종속되는 기분이거든……. 왜 이 시대에 눈을 떴는지는 몰라도, 설령 정말로 천명이나 신의 인도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 이후의 나는 자유의지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싶소. 천명이나 신이 예비한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도저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이선이 취하는 자기합리화는 이 시대에 멀쩡히 살아가기 위한 방어적 태도였다.
“지난 44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생각해 왔소.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 원래 내가 살았던 세상은 어찌 되었는가? 물론 해답은 없소.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며,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수밖에. 난 이미 이 시대의 인간, 이선이오.”
이선은 고개를 들어 항구와 바다의 전망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들 무렵의 항구와 바다는 아름다웠다.
4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발전이었으되, 100년 뒤와 비교하면 작은 변화였다.
“가끔 눈을 감으면 옛 풍경, 아니지, 미래의 풍경이 떠오르오. 경은, 아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풍경이오. 21세기의 서울에는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마천루가 즐비하오. 사람들은 손안의 작은 기계를 통해 세상만사와 소통하지. 문명의 발전과 편리라는 건 이루 말도 못하오. 내가 왜 그토록 문명개화, 역사의 진보를 외쳤는지 이제 알 거요. 난 개화와 진보의 미래를 보았거든.”
1851년, 전근대 조선에 태어난 김옥균은, 이미 지난 40년간의 변화는 상상할 수 없었던 거대한 역사의 변화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비교할 수 없는 변화가 예고되어 있다는 말에, 죽음을 앞둔 김옥균조차도 전율을 느꼈다.
“이 시대에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그 세상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경도 이해할 수 있을 거요. 프랑스 공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서양인들 사이에 오직 고균만 동양인일 때 기분이 어땠소?”
“고독함과 소외감을 느꼈지요. 그토록 열망하던 파리에서의 삶이었지만, 조선이 그리워졌습니다.”
“나 또한 그렇소. 나는 열망하던 조선의 생존과 변혁을 이끌어 냈고, 한 인간으로서는 더 높아질 수 없는 존숭한 자리에 올랐소. 내 곁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믿음직한 동지들이 있지. 현재에 더 없이 만족하고 있소……. 하지만 때로는 고독하고, 소외감을 느끼고, 내가 살던 세상이 그립소.”
문득 이선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늙은 김옥균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랐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홀로 다른 세상에 떨어져, 고독함과 소외감을 그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은 채, 역사를 바꾸어 나갔다.
위대한 황제가 느꼈던 기나긴 수십 년의 고독을, 아니 앞으로도 느껴야 할 백년의 고독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 나라에서, 그 누구보다도 황제의 고굉(股肱)이자 복심(腹心)으로 불리며, 이선의 심중을 유일하게 헤아리는 인물로 자타공인을 받았던 김옥균조차도, 이선의 운명과 고독함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비로소 이를 깨달은 후에는, 주군이자 동지이며 오랜 벗이 느꼈을 기나긴 고독을 생각하며, 김옥균은 눈물을 흘렸다.
“원, 무안하게 어찌 그토록 눈물을 흘리시오.”
“송구하옵니다. 늙으면 쓸데없이 감정이 많아지는 법인지라, 성상 앞에서 추한 꼴을 보였습니다.”
김옥균은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닦고 표정을 다잡았다.
김옥균을 달래고자 이선은 화제를 돌렸다.
“그러니 이제 내가 왜 일본을 그토록 경계했는지 알 것이오.”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하오나 이미 폐하께서는 역사를 바꾸셨습니다.”
“그렇기에 나도 지나친 경계는 피하려고 하오.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다만 나도 사람인지라, 선입견이라는 걸 아주 저버릴 수는 없더구려. 이토 히로부미나 이완용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섬뜩함은 잊어질 수가 없더군. 고균과 달리 금릉위(박영효)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것도 그렇고…….”
이선으로부터 동시대를 산 중요인물들의 역사적 행보를 들은 김옥균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역사의 행보라는 건 이만큼 유동적이오. 처음부터 충신과 매국노는 없지. 사세(事勢)에 따라 바뀔 뿐. 어떤 사회적 기반을 만드냐에 따라, 사악한 매국노도 유능한 관리로 길들일 수 있소.”
결국 인간은 주어진 사회적 기반 안에서 움직인다.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인 이완용은 언제나 강자의 논리를 따를 뿐이다. 그렇기에 이완용의 선택지도 달라졌다. 변화한 역사에서는 대한제국이 약소국이 아니라 강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매국노 이완용이 변화한 역사에서는 대한제국의 유능한 외교관으로 역사에 남았듯이, 인간의 운명은 바뀔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에서, 김옥균의 평가는 엇갈렸소. 선구자, 애국적 개혁사상가, 부르주아 혁명가에서 섣불리 정변을 일으켜 조선의 운명을 위기에 몰아넣은 얼치기 친일파까지. 물론, 김옥균은 갑오년에 죽지 않고 계속 살았더라도 매국노가 되는 일은 없었을 거요. 그에게는 언제나 조선의 자주와 변혁이 중요했지, 일본이든 청나라든 서양이든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그래도 조국의 멸망은 막지 못했을 거고, 김옥균의 묘비명을 쓴 유길준처럼 회한에 차 죽었겠지.”
김옥균은 분명 왕조의 충신은 아니었으나, 근대적 애국자가 되었다.
일신의 안위가 보장된 명문 벌열의 고관이 자신과 일가의 모든 것을 걸고 혁명에 나섰다. 비록 참담하게 실패하기는 했으나,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만민평등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했다.
그렇기에 이선은 변화한 역사에서 김옥균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고, 김옥균은 새로운 조선에서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다하고 명예롭게 이름을 남겼다.
“우리의 대한에서는, 김옥균의 평이 엇갈릴 일은 없을 거요. 근대화의 선구자이자 위대한 정치가로서 길이 기억되겠지.”
김옥균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고 이선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발코니의 찬 바닥에 절을 하는 갑작스러운 노신의 행동에, 이선도 자리에서 일어나 일으켜 세웠다.
“몸도 편치 않은 사람이 무얼 하는 거요! 경에게 절 받자고 한 말이 아니오.”
“제가 올리는 이 절은, 신하가 군주에게 올리는 절이 아닙니다. 3천만 대한인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 노예의 운명에서 해방시켜 준 분에게 드리는 감사의 인사입니다.”
김옥균의 진정 어린 말에, 이선도 선 채로 답례했다.
“그게 어찌 나 한 사람의 공로일 수 있겠소? 나는 단지 배에 올라 방향성을 제시했을 뿐이오. 합심하여 배를 이끈 모든 이의 공이지.”
김옥균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悚然)합니다. 두 역사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폐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는 망하고 타국의 노예가 되었을 터입니다. 신이 타지에서 객사하여 사지가 잘려 효수되었다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오나 나라의 멸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나라가 자유롭게 번영할 수 있다면,제 비천한 육신이 어찌 되든 뭐가 아쉽겠습니까.”
“고균…….”
“폐하께서는 제 운명을, 이 나라의 운명을, 이 민족의 운명을 바꾸셨습니다!”
김옥균은 거듭 확신을 갖고, 눈가에서 흘러넘치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조아렸다.
“늙은 신이 수명이 다하여, 폐하께서 앞으로 만드실 더욱 좋은 세상은 보지 못하고 가옵니다. 하오나 혼령이란 게 존재한다면, 신은 귀신이 되어서라도 대한의 앞날을 지켜보겠습니다. 대한에는 언제나 성지(聖旨)가 필요하오니, 부디 폐하께서는 보중하시어 성수무강하시옵소서!”
이선은 죽음을 앞둔 오랜 벗의 고별사를 보면서, 비통함과 동시에 해방감을 느꼈다.
오랫동안 홀로 안고 있던 짐을, 비로소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고인이 된 고종에게 털어놓은 적은 있었지만, 김옥균에게 말하는 것과는 의미가 확연히 달랐다.
그동안 뜻을 같이하고 새로운 나라를 함께 건설한 동지요 오랜 벗에게 보내는 마지막 헌사이자, 백년의 고독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