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94
3부 209화 교육의 시대
“저는 어머니처럼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라의 고백에 이선은 놀랐다. 전례가 없어서가 아니라, 딸이 지금까지 그런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놀랐다.
“어찌하여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느냐?”
이라는 유럽에서 겪었던 경험과 느꼈던 생각을 간략히 요약해서 말했다.
“……의사가 되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요.”
황제의 딸로서 태생적으로 부와 지위의 결핍 없이 살아왔기에, 역설적으로 부와 지위에 대한 갈망은 없었다. 다만 자유로이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살고 싶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인 어머니의 직업인 의사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끌렸다.
“공주가 의사, 아니 전문직이 된다는 건 전례 없는 일이다. 이건 동양뿐만 아니라 진보적이라는 서양도 마찬가지야. 서양의 공주 중에 의사가 있다더냐?”
“없습니다. 하지만,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분들은 있지요. 전례가 없다면, 소녀가 동양에서 최초로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이라가 ‘붉은 황녀’로 유명한 엘리자베트 마리아 폰 합스부르크 여대공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게 짐작이 됐다.
‘피는 못 속인다고, 제 어미처럼 삶을 개척하고 싶은가. 그나마 정치에는 관심 없어서 다행이군.’
이선은 마르가리타의 젊은 시절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네 뜻이 갸륵하구나. 알겠다. 먼저 의학 공부를 시작해 보고 판단해 보자. 막상 공부해 보면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아바마마……!”
부황이 흔쾌히 허락하자 이라는 감격했다.
왕실을 떠나서, 근대화되어도 여전히 보수적인 가부장사회인 대한제국에서 딸에게 고등교육을 허락하는 부모는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의무교육인 초등교육이 한계였고, 딸을 교육시키는 진보적인 가정에서도 ‘신여성’의 한계는 대부분 중등학교까지였다. 스물 전후에 좋은 신랑감 만나서 결혼하는 게 부모의 바람이었다.
“다만 국내에서는 네가 원하는 교육을 받기 어려울 거다. 대안을 생각해 보자.”
여의사 양성이 필요하여 황성의과대학과 세브란스의과대학에서 여성 의학도를 선발하기는 하였으나, 워낙 소수정예인 데다 과정도 엄격했다.
대학 입장에서도 황제의 자녀가 지원한다면 크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특별대우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데, 그건 이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황실 직계는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유학을 떠났다. 이강은 미국에서, 이영과 이안은 영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이은도 해군무관학교 교육을 마치면 영국 왕립해군사관학교에서 추가로 교육받을 예정이었다.
“소녀는 공부할 곳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여성이 해외유학을 가는 건 당대에 흔치 않은 일이었으나, 이선은 국책으로 지원해 왔다.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한국 여성 최초의 미국 유학 후 이화여전 교수가 된 김란사(金蘭史)가 있고, 이후에도 꾸준히 배출되었다. 최근에는 최초의 스웨덴 유학생이 된 최영숙의 사례도 있었다.
“의외로 서양도 여성의 대학 역사가 짧다. 그중에서도 일찌감치 여성에게 대학을 개방한 곳은 스위스가 있지. 근래에는 유럽 어디든 남녀 구분 않고 선발하지만, 환경이 좋은 곳으로 가는 게 좋겠구나.”
1860년대 파리 소르본 대학을 시작으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대학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스위스는 1870년대에 모두 문호를 개방해 전유럽에서 여성 유학생이 몰려들었다. 비교적 개방적이었던 미국도 여성 전문 칼리지들이 많이 생겨났다.
20세기 초, 대전쟁을 거치며 유럽 대부분에서 제약은 사라졌고, 여학생 비율이 30%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전 군무대신 윤웅렬의 자제가 영국에서 의학 유학 중이지. 마침 산부인과 전공이라 여성학도들이 많다고 알고 있다. 네 오라비도 영국에 있으니 그쪽으로 알아보자.”
“예, 아바마마!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어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라는 이미 장성하여 막둥이 이금처럼 품에 안기지는 않았지만, 부황에게 절을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허허, 네가 다 컸구나. 스스로 진로를 찾기를 원하다니. 나는 황실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황족으로서 군림하는 삶을 살기만을 원치 않는다. 네가 황실의 모범이 되어 주면 좋겠구나.”
이선은 진심으로 딸의 선택을 응원했다. 앞으로는 황족이라기 무위도식하기보다는, 직업을 갖는 게 더 바람직했다. 황제의 딸인 이라의 선택은 황실뿐만 아니라, 딸을 둔 모든 집안의 모범이 될 수 있었다.
공주가 의사가 된다면, 시대의 변화, 놀라운 진보를 상징하는 것이다.
* * *
대영제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닥터 윤, 전보 왔어요.”
“아, 예.”
글래스고 의과대학의 유일한 동양인 대학원생은 본국에서 보내온 전보를 받았다.
전 군무대신 윤웅렬(尹雄烈)의 서자인 윤치왕(尹致旺)은 올해 서른으로, 참정대신과 주청 고등판무관을 역임한 윤치호의 이복동생이다.
광무 18년(1914) 일찌감치 영국 유학을 떠나 글래스고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고, 졸업하여 의사 자격증을 받았다.
대전쟁기에는 아직 의학도였지만 자원하였고, 동부전선 파병군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종전 후에 대학으로 복귀하여 산부인과 전공을 택하자, 본가에서는 ‘사내가 체면 떨어지게 하필이면 애나 받는 산부인과가 뭐냐’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윤치왕은 출산 중 산부의 사망이 높은 당대에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복형 윤치호가 지지해 준 덕에 윤치왕은 무난히 학업을 마쳤다.
왕립아동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후, 산부인과 분야의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대학원 과정에 진학했다.
“음, 형님이신가. 또 대한에 돌아오라는 독촉은 아니겠지…….”
윤치왕은 부친 윤웅렬이 환갑을 넘겨 얻은 서자고, 동복동생으로는 현재 미국 시카고대학에 유학 중인 4살 아래의 윤치창(尹致昌)이 있었다.
무려 31살이나 나이가 많은 이복형 윤치호는 가장이자 부친이나 다름없었다. 윤치호의 지지와 후원 덕에 윤치왕은 힘든 유학 생활을 부족함 없이 다닐 수 있었다.
이복동생에 대한 윤치호의 일관된 요구사항은 하나였다.
「네 능력을 영국에서 낭비하지 말고, 대한으로 돌아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여라. 월급이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강사 자리를 준비해 두겠다.」
얼마 전 주청 고등판무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한 윤치호는 세브란스의과대학 후원회장을 맡고 있었고, 동생이 돌아와 산부인과 교수를 맡기를 바랐다. 황성이나 도시라면 모를까, 아직도 시골에서는 출산 중 산부 사망과 영아사망률이 높았다. 대대적인 의료 개선이 필요한 시기였다.
물론 윤치왕도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박사과정을 마치는 게 급선무였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 의학발전에 기여할 날을 기다리며 영국인들의 인종차별적 멸시와 고초를 견뎌 냈다.
본국에서 명문가 출신이자 영국에서도 엘리트 의사인 윤치왕도 동양인이라고 인종차별을 당하기 일쑤였다.
“오, 세상에! 저 눈 째진 노란 동양인에게 어떻게 내 아내와 아이를 맡길 수가 있단 말이오?”
“닥터 윤은 실력 있는 의사입니다.”
“실력 있는 영국인 의사는 다 어디로 갔소? 전쟁으로 다 죽기라도 했단 말이오?”
“저는 대전쟁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아니, 독일 놈이라도 상관없으니 유럽인 의사를 불러 주시오!”
의학부 졸업학년이 되어 산원에 실습을 나갔지만,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기피대상이 되었다. 실습경력이 있어야 졸업할 수 있는 만큼 실습을 못 하면 치명적이었다.
전쟁 직후라 참전용사를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가 있었음에도, 동양인 의사는 적국인 ‘독일 놈’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한번은 참다못한 윤치왕이 화를 냈다.
“내 부친께서는 대한제국의 육군장관이셨고, 내 형님은 주영대사와 외무장관을 역임했습니다! 나 역시 군의관으로 대전쟁에 참전했고요!”
“그래서 어쩌라고?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대장이었으니까 유럽에서도 대장 대접받으시겠다고? 여긴 대영제국이니, 아니꼬우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든지.”
황족이 아니고서야, 대한제국의 명문가 출신이라는 건 유럽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나마 인지도가 더 높은 일본이라고 해도 예외가 없었다. 일본인 유학생들도 인종차별 당하는 건 동병상련이었다.
계속되는 모욕과 인종차별에 지친 윤치왕은 영국에서 실습하는 걸 포기했다. 치열한 독립전쟁 끝에 영국에서 갓 독립을 쟁취한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가서 실습을 했다. 명목상 대영제국의 자치령이었으므로 영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영국인에게 차별받아 온 데다, 독립전쟁과 내전을 거치며 의사가 부족했던 아일랜드는 동양인 의사도 환영했다. 윤치왕은 아일랜드에서 환대를 받으며 신생아 50여 명을 받고 영국으로 귀국했다.
30년 전 이복형 윤치호가 미국 버지니아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토록 동경하던 미국에서 숱한 인종차별을 겪으며 서양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품게 되었듯이, 윤치왕도 영국과 서양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갖게 되었다.
지도교수와 동료 학생들은 차별 없이 자신을 동료로 대했지만, 일상에서는 무수한 인종차별을 겪었다.
왕립아동병원에 인턴으로 재직할 때, 아이들은 처음 보는 동양인 의사를 신기해하고 두려워할지언정 편견을 갖진 않았다. 오히려 배웠다는 어른들이 차별하고 무시했다.
의료사정이 열악한 빈민가에서는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동양인 의사의 존재를 환영했다.
그나마 동양인이 연대할 수 있는 건 영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아일랜드인, 노동빈민, 사회주의자 정도였다.
‘왜 기껏 유럽 유학까지 가서 사회주의자가 돼서 돌아오나 했더니만,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심취해서가 아니라 차별이 엿같아서 빨갱이 될 것 같다, 제기랄.’
윤치왕은 한국의 신흥 엘리트 명문가 출신이자 기독교 신자였으니 당연히 사회주의를 반대했다.
그런데 비로소 본국에서 엘리트 출신이 대다수인 유학생 중에 왜 사회주의로 ‘개종’하는 이들이 많은지 이해가 됐다. 일상적 차별 속에 ‘유색인’을 동등한 사람대접 해 주는 건 평등을 부르짖는 사회주의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윤치호형제 같은 기독교 신자는 교회 커뮤니티 안에서 평등과 안식을 찾을 수 있지만, 대부분 비기독교 신자인 동양인은 그럴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성취를 이뤄 낸 서양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과 흠모, 일상적 인종차별에 대한 반감과 분노의 양가적 감정은 이 시대 모든 유학생이 겪는 통과의례였다.
「대한제국 황자 전하,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 유학!」
그나마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건, 정친왕 이안이 영국에 유학 오면서였다.
오리엔탈 스캔들이 터지면서 한국 황실이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영국에서는 이안에 대해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고귀한 신분에다가, 백인 혼혈이라 외양적으로도 거부감이 없고, 무엇보다 한국 황실은 어마어마한 부자라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닥터 윤, 형님이 한국에서 고위관료라고 했지요?”
“예, 부총리까지 역임하셨습니다.”
“그럼 혹시 프린스 안과도 안면이 있으신가?”
“예에, 뵐 기회가 있었죠.”
“오, 역시! 그럼 혹시 프린스 안에게 소개시켜 드릴 수 없겠소?”
“아, 예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닥터 윤, 정말이오? 그럼 나도!”
“나도 소개 부탁드리오!”
병원장부터 학장, 아니 일개 의사에 이르기까지 소개시켜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정작 윤치왕 자신도 이안하고 만난 적은 딱 한 번뿐이었으니, 소개시켜 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나마 주영대사관에서 재영 유학생을 모아 주연을 열었을 때, 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정친왕 전하, 전 군무대신 윤웅렬 공의 차남이자 주청 고등판무관 윤치호 공의 아우인 윤치왕군입니다. 현재 글래스고에서 의학 공부 중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오, 반갑습니다. 부디 학업에 성취를 이루길 바랍니다.”
윤치왕은 차별을 받기는커녕 인기와 존중을 받는 이안을 보면서,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을 느꼈다.
그래도 이안의 존재 덕에 자신의 가치도 함께 올라간 느낌이었으니, 친왕이 유학을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숙,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본국에서 당장 귀국이라도 하라던가요?”
에든버러 대학에 유학 중인 5촌 조카 윤보선(尹潽善)이 물었다.
윤웅렬의 아우 윤영렬(尹英烈) 역시 경무관료로 승승장구하여 내무협판까지 역임했고, 그 아들들 역시 모두 성공했다.
장남 윤치오(尹致旿)는 관료가 되어 학무협판에 이르렀다.
차남 윤치소(尹致昭)는 기업인이 되어 대한광업주식회사 부사장까지 올랐고, 이재에 밝아 방직산업과 중공업에 투자하여 엄청난 부호가 되었다.
삼남 윤치성(尹致晟)은 백부 윤영렬의 양자로 입적되어 군인이 되었고, 장성까지 올라 육군 부장으로 전역하였다.
사남 윤치병(尹致昞), 오남 윤치명(尹致明), 육남 윤치영(尹致暎) 모두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윤치소의 장남이자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있는 28세의 윤보선은 가문에서도 가장 총명하여, 해평 윤씨 가문의 기대주였다.
그 면면에서 알 수 있듯이, 윤웅렬은 본래 서자 출신이었지만 시대의 변화로 입신출세한 이래, 자식들을 모두 최고의 교육을 시켜 해평 윤씨 가문은 신흥 엘리트 가문의 정점에 이르렀다.
“친왕도 아니고 공주가 영국 유학이라니…….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군.”
윤치호가 보낸 편지를 본 윤치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친왕 이안의 동복동생, 예성공주 이라가 영국으로 의대 유학을 가기를 희망하니, 현지 교육과정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라는 전보였다.
“허어, 과연. 황상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진보적이십니다.”
“우리 가문이 딸들까지 고등교육 시킨 게 매우 드문 일 아니냐. 다른 명문가들은 딸 공부시켜 봤자 건방져져서 시부모 제대로 모실 수 있냐고 비웃었지.”
자녀의 신교육을 중시하는 건, 해평 윤씨가 신흥 엘리트 중에서도 최고봉이라 할 수 있었다.
딸들까지도 여전(女專)을 보내 공부시킬 정도였다.
그런데 황실은 이보다도 한술 더 뜨고 있으니,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황실 최초의 여성 의사를 볼 수 있겠구나.”
윤치왕은 감탄하며 보고서를 쓸 준비를 했다.
여전히 의사는 ‘피고름이나 째는 더러운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양반들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주가 의사가 된다면 두 번 다시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할 터였다.
‘계집 주제에 무슨 공부냐’라고 상급학교 진학을 막던 부모들도, ‘황제 폐하도 공주님을 대학에 보내셨다’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어질 터였다.
과연 교육입국을 강조하던, 교육이 나라를 바꾼다고 외쳤던 황제의 나라다웠다.
실로 교육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