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796
3부 211화 잃어버린 세계
광무 28년 7월.
우르가에서 봉천까지는 근 2천 킬로미터, 몽골의 비포장도로를 긴 행군 끝에 만주에 도착한 이태준은 마침내 기차를 타고 봉천으로 향했다. 주청 고등판무관 이승만은 이미 성명서를 작성해 둔 터였다.
“어차피 의학적 소인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터이니, 독살이라는 사인만 명확히 밝히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대몽골국 대칸을 마지막까지 모셨던 어의이자 신하이자 벗으로서, 나 이태준은 몽골의 형제들에게 진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러시아인임에도 칸의 존중을 받아 호쇼이 친왕의 작위를 받아 몽골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운게른은 은혜도 모르고, 광기에 찌들어 몽골을 러시아 침공의 수단으로 삼아 온갖 악독한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칸에게 충성하는 왕공들의 목을 잘라 어전에 던지는 참담한 협박을 한 것도 모자라, 칸을 궁궐에 가두어 온갖 핍박을 하더니, 끝내 시역(弑逆)이라는 극악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칸은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으며, 이는 운게른 일당이 바친 수태차를 마신 후의 일입니다.
……나 역시 생명의 위협을 수차례 받았으며, 진실을 알리기 위해 가까스로 몸을 빼내어 만주로 피신했습니다.
몽골의 형제들이여! 결코 이 잔악한 침략자, 찬탈자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칸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침략자로부터 몽골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태준의 성명은, 통신이 열악한 몽골이라 할지라도, 입에서 입을 타고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리라.
살아 있는 부처, 젬춘담바 후툭투이자 재건된 몽골의 칸이 독살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분노한 몽골인들은 운게른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복드 칸의 독살을 알리는 성명은, 역설적이게도 운게른보다 인민혁명당이 먼저 확인했다.
세계와 빠르게 소통할 수 있는 전신(電信)은 몽골의 수도 우르가까지만 연결되어 있기에, 그 이후부터는 칭기즈칸 시절처럼 기마 전령에 기대야 했다.
몽골 북부를 가로질러 캬흐타로 행군 중인 운게른보다, 시베리아 전신선을 통해 극동 공화국이 먼저 정보를 확인했다. 몽골 인민혁명당은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걸 확인했다.
“한국이 파 놓겠다고 한 덫이 이거였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군.”
소식을 전해 들은 수흐바타르와 인민혁명군 간부들은 놀라면서 감탄했다.
“우리를 돕겠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었는데, 이런 방법일 줄이야. 오직 말, 말뿐인데 판세를 뒤흔들다니.”
중세전사 운게른이나 유목민들이 말[馬]에 의존해서 싸운다면, 한국은 말[語]의 위력을 체감하게 했다.
한국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외교적으로 능수능란한 뿐만 아니라, 음험한 책략에도 능했다.
“한국에 신세를 졌군. 하여튼 절대로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어.”
수흐바타르는 한국에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한국을 적으로 삼으면 안 되겠다고 확신했다.
“지금쯤 우르가는 혼란이 발생했을 터. 패배로 위장해 운게른의 군대를 국경 너머 캬흐타로 유인하고, 주력은 우회하여 신속히 우르가를 접수한다.”
“예!”
“동지들! 미치광이 침략자를 몰아낼 날이 머지않았다. 우리 몽골인의 몽골을 위하여, 승리를 위해 분투하자!”
“예, 사령관 동지!”
몽골 인민혁명군은 우르가를 향해 보무당당하게 진격을 개시했다.
몽골 수도 우르가.
수흐바타르의 예상대로, 가장 먼저 소식을 확인한 우르가는 혼란으로 들끓어 있었다.
“운게른이 칸을 시해했다!”
“미치광이 남작이 칸을 독살했다!”
살아 있는 부처이자 몽골의 대칸인 복드 칸에 대한 충성심은 몽골인이 공유하는 정신이었다. 몽골인들은 분노와 증오로 들끓어 올랐다.
이미 수년간 이어진 폭정으로 쌓일 만큼 쌓인 분노였다. 독살 의혹은 장작더미 위에 불을 붙이고 기름을 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호쇼이 친왕이 미치지 않고서야 칸을 독살할 리가 있겠소?”
“여러분도 잘 알지 않소? 칸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소! 독살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음해야!”
“이태준 이자가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저지른 짓임에 틀림없소!”
운게른파 왕공들은 당황하며 소문을 부정했다.
아무리 운게른이 상식과 거리가 멀리 떨어진 기인이라고는 하지만, 칸을 독살한다는 건 제 무덤을 파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의혹은 그 자체로 설득력을 주었다. 운게른은 친위쿠데타를 계획하던 왕공들의 목을 잘라 어전에 바치는 잔혹한 광기를 저질렀다.
만약, 자신을 제거하려고 했던 칸에게 앙심을 품고 앞뒤 가리지 않고 또 미친 짓을 한 거라면?
운게른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수 있다는 의혹이, 심지어 운게른파 왕공들 사이에서도 떠돌아다녔다.
“미치지 않았냐고? 친왕, 아니 운게른은 처음부터 미친 게 틀림없소!”
“이대로 그자에게 계속 협력했다가는, 인민혁명당 무리에게 우리 목이 모두 날아가고 말 거요.”
“차라리 인민혁명당이 들어오는 게 나을걸? 그전에 분노한 백성들에게 먼저 죽겠구만.”
“선수를 칩시다. 운게른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을 배제하고 섭정위원회의 새 정권을 세워서 인민혁명당과 협상해야 합니다.”
“근데 그러다가 운게른 부대에 있는 우리 아들들은 어떡하고?”
운게른은 자신을 따르는 왕공귀족들의 충성심도 확신하지 못했으므로, 칭기즈칸의 숙위(宿衛)를 부활시킨다는 명목으로 최소 1인 이상은 징집해서 막하에 배속시켰다. 사실상 인질이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지금 그놈들 처지 신경 쓰다가 우리 목이 다 같이 날아갈 판이오!”
“운게른 군대가 와해된다는 데 내 목을 걸겠소. 그럼 각자 살아남을 수 있겠지.”
왕공들은 쿠데타를 결의했다. 인민혁명군이 당도하기 전에 새 정권을 세워, 어떻게든 협상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운게른은 왕공들의 충성심을 믿지 않았기에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소수의 병력을 우르가 방위를 위해 배치하고, 전 백군 중장 디테히리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몽골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외부인 디테히리스도 눈치챘다. 북방의 운게른에게 속히 회군하라는 전령을 보냈지만, 소식이나 닿았는지 의문이었다.
“빌어먹을! 애초에 이런 미치광이를 믿고 몽골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디테히리스도 차르 복위와 전제군주제 부활을 주장하는 극우 반동파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운게른처럼 중세로 돌아갈 정도로 시대착오적이진 않았다.
차르 복위를 부르짖는 운게른의 초빙을 받아 몽골에 와서 알렉세이 2세를 추대했지만, 갈수록 이 모든 게 한 편의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이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의 조연을 섰다는 게 수치스러울 따름이었다.
“장군, 제 장인어른의 동료였던 옛정을 생각해서 말씀드립니다. 지금이라도 병력을 해산하고 만주로 돌아가십시오. 명심하십시오. 진정으로 로마노프 황실의 안전을 원하신다면, 복위를 부르짖는 건 오히려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우르가에 잔류해 있던 이위종이 디테히리스에게 충고했다.
연해주에서 음모를 꾸며 자신을 밀어낸 배후에 한국이 있다고 확신하는 디테히리스는 밉살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여, 우리가 타지인 몽골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다. 부대를 해산하고, 제군의 행동에 자유를 부여한다. 나와 함께 만주로 가고 싶은 자는 그래도 좋다. 우리가 살아야 로마노프 왕조를 복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운게른을 따르는 러시아 병사들도 대부분 돈과 모험을 쫓아서 온 자들이고, 소수의 반소·반공 이념으로 불타고 있는 이들도 운게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는 아니었다. 반공 왕당파의 상징과도 같은 디테히리스의 설득에 이념적 왕당파들도 수긍했다.
방위군이 자체해산하고 동쪽으로 도주하자, 이제 우르가는 빈집이나 다름없었다.
“섭정위원회는 칸을 시역한 러시아인 운게른의 친왕 작위를 박탈하고, 반역자로 선포한다! 반역자 운게른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천금을 하사하겠다!”
“대몽골국 만세!”
섭정위원회는 재빨리 편을 갈아타 우르가에 신정부를 선언하고 운게른을 반역자로 규정했다.
* * *
몽골 고원에 한바탕 변화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운게른의 아시아 기마군단은 북쪽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몽골 북부에는 전신이 없는 데다가, 우르가에서 보낸 전령이 본대에 도달하기 전에 사살되거나 도주했기 때문이었다.
“공격! 공격하라! 빨갱이들은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아시아 기마군단은 몽골 인민혁명군을 수차례 격파하고, 몽골과 극동 공화국의 경계인 캬흐타에 도달했다.
“이놈들, 겨우 이 정도로 몽골을 지배하겠다고 덤벼든 거였나? 하여튼 빨갱이 놈들은 입만 살았군.”
운게른은 거듭된 승리에 도취되어, 피로 물든 사브르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사령관이라는 직위가 무색하게도, 운게른은 선봉에 서서 직접 칼을 빼들고 적의 목을 날렸다. 그 광신적인 용맹만큼은, 아군뿐만 아니라 적도 인정하는 바였다.
“캬흐타를 정복한다! 소비에트 괴뢰 몽골 반군이 아니라, 소비에트 적군을 격파하자! 정복자인 그대들에게 마음껏 권리를 부여하겠다!”
“오오!”
아시아 기마군단은 셀렝가강을 넘어 극동 공화국 영내로 침입했다.
운게른은 몽골 인민혁명군의 배후기지인 캬흐타를 점령하면, 몽골에 전개된 유격부대의 숨통을 끊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병사들은 ‘반공 성전’이 아니라, 예전에 그러했듯이 약탈과 강간을 기대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단숨에 적을 격퇴하라!”
“돌격!”
신속히 적군을 격퇴하고 캬흐타를 정복하겠다는 운게른의 계획은, 착각에 불과했다는 게 머지않아 드러났다.
“포격 개시!”
“발포!”
아시아 기마군단의 거듭된 승리는 보급선의 한계까지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다.
사실상 소련 붉은 군대나 다름없는,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포위망에 걸려든 아시아 기마군단을 향해 화력을 쏟아 냈다.
극동 인민혁명군은 야포뿐만 아니라 장갑열차와 전투기까지 동원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패배를 통해 전훈을 얻은 붉은 군대는, 초보적이나마 기계화에 들어갔다. 일종의 시험적 전투로서 기마군단을 상대로 삼은 것이었다.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대체 이게 무슨 추태냐!”
“화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기마군단은 기동성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변변찮은 야포조차 없었다. 붉은 군대처럼 마차에 기관총을 설치해서 기동력에 화력을 보강한 타찬카(Tachanka)조차도 없었다.
“20세기에 기병만으로 전투를 치르겠다니, 미친놈들 아냐?”
“시대착오적인 반동들에게 포탄 맛을 보여 줘라!”
당연하게도, 기마군단은 압도적인 우위의 극동 인민혁명군에게 대패했다.
패퇴하여 다시 몽골 영내로 되돌아간 운게른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섭정위원회가 운게른을 칸의 시해자이자 반역자로 규정했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칸을 독살했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이 반역자 놈들, 배신을 정당화하려고 이따위 개소리를!”
이태준의 성명이 근원이 됐다는 보고에, 운게른은 한국에 대한 배신감으로 분기탱천했다.
“그 의사 놈이 이유 없이 이따위 헛소리를 할 리가 없다. 한국 놈들! 이 배신자 한국 놈들! 볼셰비키가 아니고서야 이따위 모략을 할 수 있나? 그래, 놈들도 빨갱이였어! 코민테른이 한국까지 집어삼켰구나!”
운게른은 마침내 진실을 깨달았다는 듯 버럭 외쳤다. 이 모든 게 유대-공산주의자들의 음모였다. 코민테른이 러시아와 유럽도 모자라, 중국으로 침투하더니 이제 한국까지 집어삼킨 모양이었다.
“각하, 이렇게 되면 정말 위태롭습니다. 일단 우르가로 회군하심이…….”
부하의 지적에 운게른은 현실로 돌아왔다.
“으음, 알겠다. 부대에는 비밀로 하고 최대한 빨리 우르가로 회군한다.”
부랴부랴 우르가로 회군하던 중,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적군이 우르가에 입성했습니다!”
“뭐, 뭐라고?”
“그, 그럼 어떡하지?”
“우르가로 진격해서 일전을 벌입시다!”
“이미 패전으로 사기가 땅에 떨어졌는데, 우르가까지 함락되었다면 병사들이 따르겠소?”
“그럼 어쩌잔 말이오?”
우르가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기마군단 지휘부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다민족 군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용병들이, 패배와 퇴로가 끊겼음에도 충성을 다해 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현재로선 운게른이 살길은 자신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소수만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만주에 귀순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아니다. 우리는 북으로 간다!”
“예에?”
자살이나 다름없는 운게른의 광기에 휘하 장교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적은 우리가 북쪽으로 진격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할 거다. 적의 의표를 찔러 북쪽으로 진격, 시베리아 철도를 점거하고 열차를 징발해서 극동으로 간다.”
“그, 그게 가능할 리가…….”
“내게 불가능이란 없다!”
칭기즈칸에 이어 나폴레옹이라도 자처하려는지, 운게른은 자살적인 북진 명령을 내렸다.
“극동의 백군과 한국군이 연해주와 만주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우리는 그 공세에 부응하기 위해 북진한다. 극동 전역을 볼셰비키로부터 되찾는 싸움이다! 그대들은 정복자가 되어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다!”
자살이나 다름없는 진격계획에 병사들이 따를 리가 없으니, 장교들은 극동 백군과 한국군이 전면전을 개시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런 궁색한 거짓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남작이 칸을 시해했다더라.”
“이미 우르가도 함락되었다던데?”
“적군의 병력과 화력은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북진하라고?”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길 나가야겠어!”
적의 한복판으로 침입해서 진격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군의 대공세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자, 탈영병이 속출했다. 숙위로 온 몽골인들이 제일 먼저 도주하기 시작했고, 돈을 보고 온 용병들도 도망쳤다.
“사령관의 명령이다! 탈영병은 총살이다!”
장교들은 탈영병을 총살하며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이미 무너진 질서는 되찾을 수가 없었다. 부대는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충성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천한 것들! 진정한 차르가 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어! 이게 다 빨갱이들이 세상을 지배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다. 내 그놈들을 모조리 죽여 세상을 정화하려고 했건만…….”
운게른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세상을 원망했다.
하지만 이 중세전사는 좌절하지 않았다. 부대를 해산하고 만주나 연해주로 도주하자는 부하들의 요청에, 운게른은 전혀 다른 마음을 먹었다.
“만주도 이미 볼셰비키가 조종하고 있다! 그래, 티베트! 성스러운 종교지도자가 다스리는 티베트만큼은 아직도 세상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을 터! 하지만 그들은 종교적 생활만 해 왔으니 전투를 할 줄은 모르지. 달라이 라마는 우리와 같은 숙련된 군인을 원할 거다. 투바와 신강을 넘어 티베트로 가자!”
광인의 끝나지 않는 광기에, 운게른을 마지막까지 따르던 이들의 인내심도 폭발했다.
“티베트라니, 무슨 개소리야! 만주나 연해주로 퇴각해야지!”
“사령관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죽으려면 미치광이 남작이나 죽어라! 왜 다 같이 죽자는 거냐?”
불복종은 마침내 반란으로 확산되었다. 운게른의 충복인 2사단장 보리스 레주힌이 살해당하고, 마지막 남은 장교들도 모조리 도주했다.
원흉인 운게른을 암살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미친 남작의 용력만큼은 여전했다.
운게른은 사브르를 들고 반란자들과 혈투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활로를 뚫고 도주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곁에 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상관을 죽이려 하다니, 빨갱이에 물들지 않은 놈들이 없구나! 미친 세상 같으니!”
부상을 입은 채 광야를 홀로 도주하던 운게른은 세상을 원망했다.
주군과 기사의 신성한 맹세가 있던 세계, 칸과 황제의 군단이 누비던 세계, 신의 대리인 차르가 통치하고 백성들은 복종하던 세계는 대체 어디로 사라지고, 배신과 반역과 하극상이 난무하는 세계가 되었는가.
이런 건 역사의 진보가 아니었다. 세계의 붕괴였다.
잃어버린 세계를 반추하며, 이 최후의 중세전사는 마지막 남은 이상향을 찾아 티베트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